#1.



  살다보면 간혹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이 찾아오기도 한다. 건실한 모 광고대행사에 늦깎이 신입으로 근무한지 만 7개월차 된 사원 하성운은 입사 후 단 한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 재수 없는 날의 시작은 성운의 전에 없던 지각에서부터 유래했다. 


분명 알람벨이 울리자마자 일어난 것 같은데 휴대폰 시계는 기상시간보다 30분은 더 흘러있었고, 혼비백산해서 머리부터 감으려고 화장실에 뛰어갔는데 수도관이 얼어서 살떨리게 차가운 물만 나오질 않나, 급하게 신고 나온 양말은 하필 쪽팔리게 짝짝이였다. 정신없이 뛰어 도착한 버스정류장에는 타야하는 버스가 눈 앞에서 출발해 그 급박한 와중에 십 분이나 더 지각이 지체됐다. 



'아이씽 진짜 오늘 재수 더럽게 없네...' 



떫은 표정으로 2984번 버스 대기 11분이 적힌 전광판을 바라보는 성운의 입술이 오리처럼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기다리는 동안 머리정리나 할까, 덜 말린 상태로 찬 바람을 뚫고 죽어라고 달리느라 꼬라지가 자신이 봐도 말이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가방 앞 주머니에 꼬리빗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성운은 엉덩이를 뒤로 빼고 열심히 가방 이곳 저곳을 뒤적였다.



“저어.”

“.......”

“저기요.”

“.......”



그 때 뒤에서 누군가 성운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네에?”


무심코 뒤를 돈 순간 


“와, 역시 맞구나! 성운이 형.”

“......”

“나에요, 민현이. 뒷태가 성운이형인 것 같아 긴가민가 했는데 진짜로 맞았구나.



그는 얼어있는 성운의 손을 붙잡고 제멋대로 방방거리며 반가움을 표출했다. 성운은 사람이 너무 놀라면 제대로 된 언어구사가 안 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잘 지냈어요? 졸업하고 연락도 잘 안되고, 뭐에요 진짜. 내가 형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소년처럼 수줍은 미소가 그 때의 민현과 꼭 같았다. 무릎 아래까지 닿는 검회색 겨울코트가 맞춤처럼 어울리는 장신의 미남자. 뜻밖의 만남에 멍하게 얼어붙어 있던 성운의 얼굴이 이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콰직 일그러졌다.


“씨발.”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참지 못하고 쌍소리가 튀어 나왔다. 때마침 황민현의 너른 어깨 저 너머로 그토록 기다리던 2984번 시내 버스가 접근해 오는게 보였지만, 성운은 민현을 밀치고 앞만 바라보며 달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민현의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러이 괴롭혔다.


“성운이 형!”

...부르지 마, 제발.


하필 바람이 부는 방향인지 맨 얼굴에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칼바람이 너무나 매서웠다. 하지만 뜀박질을 멈출 수는 없었다. 민현에게서, 애써 잊고 있던 과거에게서 발목 잡히기 싫었으니까. 뒤에서 다급하게 자신을 따라오는 민현의 구두굽 소리를 들으며 성운은 더욱 스퍼트를 냈다.




그의 친절에 멋대로 기대하지 마.

너만 바보가 돼.




#2.


대학 시절의 성운은 광고업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함축된 언어와 기발한 아이디어로 짧은 시간내에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일. 마법같은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직접 기획해보고 싶어서 광고 연합 동아리에 가입했다. 대학생들끼리 으싸으싸 단합해서 광고 공모전에 같이 나가보자는 취지의 동아리였다. 거기에서 성운은 민현을 처음 만났다.



2013.03.11 :: 첫 만남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졸업 후에도 영구이 끊어지지 않는 끈끈한 선후배의 인연을 중요시한다는 원오원애드의 위대함에 대하여 장황하게도 연설하는 오리엔테이션을 반쯤 졸면서 들으며 성운은 넋이 나가있었다. 그러던 중 문이 열리며, 기다란 장신의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점풀린 눈을 하고 의무적으로 앞만 쳐다보고 있는데, 옆자리 의자가 당겨지더니 누군가 착석했다.


“안녕하세요.”


방금 전 들어온 그 사람이었다. ...잘생겼네. 머쓱하게 웃는 민현을 흘깃 바라보다가 성운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2013.03.25 :: 첫 엠티

[야야 나 더 이상 마시면 정신 나가버릴 것 같다구.]

[그럼 내가 흑기사 해줄게요.]

[으...응?]

[대신 뽀뽀.]

[...아 뭐래.]


착각일까. 요즘 들어 성운은 은근히 민현이 자신에게 자주 치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남자에게 막 뽀뽀 하겠다고, 혹은 해달라고 그런 낯간지런 장난을 원래 자주 치나? 그렇진 않은 거 같은데... 

가끔씩 당황스러울만큼 민현이 자신에게 훅 치고 들어올때면 성운은 늘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번에도 흑기사를 자청하며 능청스럽게 입술을 쭈욱 들이대는 민현의 장난에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고는 민현의 입술을 짝 소리나게 손바닥으로 때렸다. 거절당하고 시무룩하게 쳐진 민현의 어깨가 신경 쓰였다. 얼마 안 되어 바람 좀 세고 오겠다며 가게를 나간 민현의 뒷 모습을 보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따라나갔었다. 그리고... 그리고.....




#3.


-내가, 널, 지워내려고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데


“뭐하세요, 지금.  소설이라도 쓰세요?”

“엄마야, 깜짝이야.”

“오늘 무려 43분이나 지각한 성운이 형. 이 팀장님이 부르세요. 호출.”


지훈의 전언에 성운은 한숨을 푹푹 쉬며 감성충 같이 뜬 소리를 적어놓은 키보드 커서를 모두 delete했다. 유난히 다사다난한 오늘 하루, 아직 점심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역대급으로 피곤이 밀려왔다. 심숭생숭한 마음에 심각하게 지각한 주제에 업무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단 건 당연한 사실이다.


“휘야, 나 엄청 깨지겠지.”

“응. 형아 힘내요, 화이팅!”


동글이 안경을 쓴 대휘가 모니터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대충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을 보탰다. 까치집 같은 대휘의 덥수룩한 머리를 쓰담거리고 성운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팀장실로 이동했다.



***


완결내고 시픈데....................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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