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 (1) http://langamang.postype.com/post/153133/

* 작업곡 충사(蟲師) OST - 녹색의 연회(緑の座) (On air.)



영웅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비켜섰다. 영웅의 몸을 얼핏,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병사들이 다시 시야를 가렸다. 거슨은 이리저리 시선을 옮겨 착각을 확신으로 만들고 싶었다. 겨우 영웅이 있는 쪽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영웅의 황금색 망토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한 병사가 달려와 거슨의 망토를 찢었다. 거슨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검붉은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들이 흘린 피로 물든 흙바닥이었다. 먼지는 바닥을 물들일 수 없었다. 인간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남기고, 피를 흘렸다. 거슨은 왜 괴물들이 피를 흘릴 수 없고 몸을 남길 수 없는지 원망했다. 잠깐이지만 인간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영웅의 죽음은 순식간에 괴물 군대에 알려졌다. 그 탓일까. 인간 군대의 공격을 버텨내던 괴물 군대는 힘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무너졌다. 아스고어는 더 이상의 괴물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인간 군대를 향해 항복 선언을 했다.


인간 군대의 현자와 괴물 군대의 현자가 나와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간 현자는 괴물들을 모두 지하에 가두었다. 그리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길을 결계로 막아버렸다. 그것이 괴물들의 패배였다. 괴물들은 빛 하나 들지 않는 지하에 갇혔다.


*


바다에 살고 있던 어린 언다인은 순식간에 습기가 가득하고 물이 흐르는 동굴에 갇혔다. 언다인은 같이 놀고 있던 친구들을 불렀다. 동굴 안에 언다인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언다인은 앉은 자리에서 동굴을 둘러보았다. 동굴 천장에 박힌 보석들은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덕분에 어둡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동굴 벽은 물을 머금은 듯 축축했다.


언다인은 친구들을 찾기 위해 일어나 동굴을 돌아다녔다. 탐험을 좋아해 바다에 살 때도 심해를 자주 방문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동굴 탐험은 떨리는 일이기도 했다. 동굴이 무서울 때면, 언다인은 친구들과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가 동굴 안을 울려퍼지는 게 어쩐지 자신의 노래를 널리 퍼뜨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비가 내렸다. 지하에서 비가 올리 없는데. 언다인은 고개를 들었다. 동굴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언다인은 머리를 가리고 뛰어갔다. 비가 올 때 그랬던 것처럼.


한참을 달려갔을 것이었다. 새로운 동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누군가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언다인은 천천히 그 소리로 다가갔다.


동굴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곳은 지상과 통하는 곳인지, 빛이 내리고 있었다. 그 빛 아래에 영웅이 있었다. 황금빛 망토를 잃어버린, 두개의 큰 뿔을 가진 괴물. 그 괴물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부서진 배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언다인은 그를 알고 있었다. 그가 영웅이라고 불리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언다인은 그의 별명을 부러워했고, 그의 기상을 동경했으며,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왔다. 그렇게 동경하던 영웅이 눈 앞에 있음에도 언다인은 다가갈 수 없었다. 그가 끝을 앞두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언다인은 숨을 죽였다.


영웅은 한 손에 오르골을 쥐고 있었다. 오르골을 열자, 아름다운 소리가 퍼졌다. 영웅은 천천히 오르골의 태엽을 감았다. 감고, 감고, 또 감았다. 영웅은 발부터 천천히 굳어갔다. 영웅은 굳은 자신의 배에 오르골을 집어넣었다. 영웅은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숙였다. 영웅은 석상이 되었다.


언다인은 그가 굳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웅에게 다가갔다. 오르골소리는 영웅의 배에 들어간 뒤로 울리지 않았다. 빗방울 때문인 것 같았다. 언다인은 영웅을 마주했다. 주먹을 꽉 쥐었다. 괴물을 툭 쳤다. 괴물에게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언다인은 영웅의 머리 위를 가려 빗방울을 막았다. 오르골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언다인은 아랫 입술을 꽉 물고 눈물을 흘렸다.


**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언다인이 찾아왔다. 언다인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다. 언다인은 영웅 앞에 쪼그려앉아 그의 배에 들어 있는 오르골을 꺼냈다. 태엽을 감았다. 영웅이 죽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감고, 감고, 감고, 또 감았다. 오르골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맑게 울렸다. 언다인은 그의 배에 오르골을 집어넣었다. 우산을 펄쳐 그에게 씌워주었다.


언다인은 영웅의 앞에 쪼그려앉았다. 눈을 감았다. 기도하는 듯이 한참 머무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다인은 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나게 다리를 붙이고, 손날을 세워 이마에 붙였다.

진정한 영웅은, 떠났다.

twitter @lan_ga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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