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큐 _ 스가와라 코우시 생일합작>원고 입니다.

* 전연령가입니다.(부끄)






Title. Secret(몰래, 조용히, 조금 나쁜 것도 괜찮아.)



오랜만에 찾은 학교는 여전했다. 먼지를 일으키는 모래 운동장, 책걸상의 나무 냄새와 칠판과 분필 냄새가 섞인 교실, 땀 냄새가 어렴풋하게 밴 체육관까지. 졸업하기 전 그대로였다. 3학년 4반. 교탁 앞줄 뒤에서 두 번째 자리.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 자리의 책상은 낙서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는 휴일이라 책상에는 주말 동안 쌓인 먼지가 살포시 쌓여 있었다. 손으로 책상을 가볍게 훑고 안으로 바짝 들어가 있는 의자를 뺐다. 매끈한 바닥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마저 정겨웠다. 예전엔 적당한 높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책상이 낮아 몸을 어떻게 가눠야 할지 몰라 어색하기만 했다. 아니면 다른 책상으로 바뀐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앞을 봤다. 바로 앞의 자리를 건너뛰어 그 앞자리. 2년 전 졸업식 날, 노을이 져서 교실도 붉게 만들던 이 시간에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이 없는 걸 틈타 몰래 저질렀던 게 생각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스가는 한 칸, 또 한 칸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 전 자리 못지않게 바짝 들어간 의자를 빼내 앉은 뒤 먼지를 쓸었다. 책상 크기야 거기서 거기겠지만 이상하게 이 책상은 조금 전 책상보다 넓어 보였다. 이 책상도 낮았지만 스가는 천천히 책상 위에 엎드렸다. 빙글빙글, 책상 위를 천천히 맴돌던 손가락이 귀퉁이로 향했고, 거기엔 예전에 새겨놓았는지 때가 탄 낙서가 있었다. 이 책상은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있네-”


졸업식이 끝나고, 마지막을 기념해 몰래 교실로 들어온 고등학생 시절의 자신이 새겼던 낙서였다. 아직도 그대로고, 변함없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고, 즐거웠다. 옷은 사복이었지만 교실에 있어서, 또 이렇게 추억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엉덩이를 좀 더 뒤로 빼니 이 낮은 책상에 엎드려 있는 것도 편하게 느껴졌다. 낮엔 따가운 햇볕에 습한 바람이 섞여 싫었는데 노을이 지니 내리쬐는 태양도 사라지고, 습하긴 했지만 선선한 바람 덕분에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게 싫지 않았다. 학생들이 미처 닫지 못한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은 스가의 등을 식혀 주었고, 스가는 그 시원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HBD_SUGA♡





그해 생일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인터하이까지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기간이라 하루하루 훈련에, 친선 경기도 모자라 시험까지 겹치다 보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일에 평소보다 화려한 아침상에 오늘 무슨 날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어머, 코우시. 오늘 네 생일이잖니. 까먹을 게 따로 있지.”


그제야 스가와라는 오늘이 6월 13일 본인 생일이고, 부엌에 걸린 달력에 어머니가 빨간색 펜으로 커다랗게 동그라미 친 아래 ‘코우시 생일’이라고 적어두신 게 눈에 들어왔다.


“오늘 일찍 들어 올 거지? 케이크, 생크림이랑 초콜릿 중에서 어느 쪽이 좋니?”

“음- 오늘도 조금 늦을 것 같아요. 그리고 케이크는 아무거나 좋으니까 어머니가 골라주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정말 어느 것이든 상관없었다. 단 것에 호불호를 가릴 만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 스가. 좋은 아침.”

“스가, 좋은 아침.”

“응, 좋은 아침.”


여느 때처럼 갈림길에서 마주한 다이치, 스가, 아사히는 늘 그렇듯이 이야기 대부분이 부 활동, 아니면 잠깐 시험 걱정이 전부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 오늘 생일이야.”라고 말할 성격이 못 되는 스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요즘 정신없지.”라는 말로 대신했다. 아침 연습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나타난 여자애가 스가 옆을 지나가면서,


“야, 스가와라. 생일 축하해!”

“아, 고마워.”


그 말에 옆에 있던 아사히의 놀람과 충격이 섞인 얼굴에 스가는 고개와 손을 동시에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나도 내 생일인 거 몰랐으니까.”

“미안, 스가.”

“응, 미안해. 우리가 먼저 축하해줘야 했는데…”

“진짜 괜찮다니까?”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다이치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움츠려 있는 아사히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하하, 웃었다.


“뭐 어때. 나도 잊고 있었는데. 그리고 인터하이랑 시험 때문에 정신없었잖아.”

“그래도-”

“정 미안하면 지금이라도 축하해주면 되지.”


자, 얼른 축하한다고 말해.

두 사람 앞에 선 스가는 얼른 하라고 재촉했다. 정말 이걸로 괜찮을까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 다이치와 아사히는 짧게 한숨을 쉬고 스가에게 말했다.


“생일 축하해, 스가.”






생일이라고 다른 건 없었다. 늘 평소처럼 오전 수업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을 하는 일상이었다. 그래도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군가 스가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하면 주위에 있던 친구들까지 연이어 축하한다 말하고, 그중에서 친한 친구들은 쉬는 시간에 매점에서 산 걸 선물 대신이라며 주는 정도였다. 뭘 바란 건 아니지만, 친구들이 준 군것질거리는 꽤 좋았다. 주위에 있는 애들이랑 나눠 먹다 보니 한가득 쌓인 간식들도 금세 없어졌다. 하지만 간식은 뒷전이고, 스가의 시선은 다이치를 계속 쫓았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다녀온다, 교무실에 다녀온다는 말로 사라지더니 수업 시작하기 직전에 들어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어색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교무실에 갔을 때 안 좋은 소리라도 들은 걸까, 아니면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걱정이 되었다. 혹시 무슨 할 말이 있는 건 아닐까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바쁘면서 부 활동 꼭 같이 가자고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오래 기다렸지?”

“괜찮아. 일은 다 끝났어?”

“어. 가자.”


옆에 붙어서 걸을 수 없어 한 걸음 반 물러서 걸었다. 평소라면 뭐라고 말을 걸었을 텐데 오늘은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풀리겠지 했는데 변함없이 눈을 마주치지도, 굳은 표정이 풀리지도 않아 스가는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체육관에 도착했고, 옆으로 비켜서면서 먼저 들어가라는 그의 말에 스가는 쭈뼛거리며 체육관 문을 열었다.


“스가, 생일 축하해!”

“선배, 생일 축하해요!”


문을 열자마자 양쪽에서 뻥뻥 터지는 폭죽과 쏟아지는 색종이 가루에 스가는 눈을 꼭 감았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축하의 말과 흥을 돋우기 위한 환호성들에 스가는 눈을 조심히 떴다. 야치가 생크림 케이크를 들고 걸어오는데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움찔, 촛농이라도 떨어질까 봐 멈칫하는 모습에 스가는 놀란 것도 잊어버리고 풋, 하고 웃었다. 스가의 웃음을 시작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생일 축하 노래가 체육관을 울렸다. 모두 함께 웃고 떠들며 스가의 생일을 축하하는데 이상하게 다이치만이 뒤로 슬쩍 빠져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억지로 웃는 것 같은 그의 얼굴.

스가는 다른 부원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다이치를 계속 살폈다.


“다 같이 준비한 거야. 몰래 준비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다들 고마워.”


아사히의 말을 들어보면 부원들이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동안 다이치는 스가가 최대한 체육관에 늦게 올 수 있게 붙잡는 역할이었다. 다이치가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있었던 건 이 생일 파티 때문이었다는 게 되는데, 여전히 이상했다. 그저 깜짝 생일 파티를 숨기기 위한 연기였다면 스가가 놀란 시점에서 웃고, 같이 축하하며, 떠들었어야 할 다이치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었다.


'다이치한테 제일 축하받고 싶었는데 다 틀렸네… 나쁜 놈.'





♡HBD_SUGA♡





물소리와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문득 잠에서 깼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깊고 긴 잠을 잔 것 같았다.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언뜻 떠오르는 꿈의 파편들은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일들이었다.


“깼어? 물 좀 마실래?”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한창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목이 꽉 잠겨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아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치는 팔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는 스가가 편하게 마실 수 있도록 입가에 컵을 대주었다. 살짝 기울이자 시원한 물이 칼칼해진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게 기분 좋았다. 한 컵 가득 가져와서 꽤 많은 양이었는데도 스가는 전부 다 마시고서야 컵에서 입을 뗐다. 다이치가 침대에 눕자마자 스가는 머리맡에 있던 푹신한 베개를 치우고 다이치의 팔 위에 머리를 올렸다. 그리고 어깨와 팔이 이어지는 부분에서 자신이 베기 편한 곳을 찾아 머리를 이리저리 옮겼다.


“지금은 괜찮아?”

“안 괜찮으면 다이치가 대신 해줄 거야?”

“하하, 미안.”

“미안하면 뽀뽀.”


얼굴만 뒤로 젖혀 올려다보는 스가의 반듯한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했다. 하지만 거기가 아니고 여기라는 의미로 입술을 쭉 내미는 그의 애교에 다이치는 또 한 번 입을 맞췄다.


한 번 더

또 한번 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진짜 마지막으로 한번 더.


'한 번 더'라는 말로 몇 번이나 입맞춤을 받고 나서야 스가는 다이치의 품에 파고들어 찰싹 붙었다.


“스가, 곧 생일인데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음- 종일 이렇게 있어도 좋을 것 같아. 근데 생일도 생일이지만-”


나 이제 힘든데.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숨길 수 없는 반응에 민망해진 다이치는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보고 싶어 다이치의 손을 치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다이치가 버티다 보니 쉽게 치울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곧 내 생일이네.”

“하고 싶은 거 있어?”

“글쎄.”


스가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특별히 원하는 게 있는지 궁금했다. 마파두부를 먹고 싶다면 요즘 알아보고 있는 집이 있어서 거기 데리고 가면 될 것이고, 만약 없다고 한다면 예약한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집에 와 간단한 샴페인에 케이크를 먹으면서 선물을 줄 생각이었다.


“없으면-”

“있어! 카라스노에 가자.”

“카라스노? 갑자기?”

“응. 가자. 생일이 평일이니까 주말에 가자.”


스가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말릴 수 없었고, 또 가고 싶다는데 말릴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 못한 것에 당황스러워 이유를 물었으나 그저 비밀이라고 할 뿐 그 이상의 대답을 해주지 않는 스가의 답변이 답답했다. 그 후에도 몇 번이고 물었지만 스가는 웃으며 가보면 안다고 할 뿐, 그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결국, 미야기에 내려와 지금까지도 다이치는 궁금증을 풀지 못한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금방 돌려드리겠습니다.”


당직 선생님께 인사하고 교무실을 나온 다이치의 손에는 오랜만에 보는 체육관 열쇠가 있었다. 때가 탄 노란색 열쇠고리도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미야기에 내려오기 전에 타케다에게 미리 연락했었다. 여전히 배구부 고문인 그는 두 사람이 내려오는 날 근처 고등학교와 친선 경기가 잡혀 있었고, 그곳에 가봐야 해서 두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아쉬운 대답이 돌아왔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또 찾아뵙겠다는 말로 아쉬움을 토로했고, 타케다도 다음이 된다면 꼭 보자는 말로 두 사람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친선 경기를 가기 전, 타케다가 오늘 당직인 선생에게 미리 부탁해둬서 다이치는 큰 어려움 없이 열쇠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외로이 있을 스가에게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스가, 열쇠-”


몇 년 만에 고등학교를 찾아가는 길이 설레어 출발하기 전부터 뜬 눈을 밤을 지새우고, 미야기를 향하는 기차 안에서도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더니 결국 교실에 와서야 그 긴장이 풀린 것인지 스가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팔을 베개 삼아 곤히 잠들어 있는 스가를 바로 깨우기 아까워 다이치는 스가가 잠들어 있는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 그의 잠든 얼굴을 구경했다. 새근새근 소리를 내는 게 귀엽기도 하고, 엉덩이를 최대한 뒤로 쭉 빼고 자는데 불편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도 됐다. 혹시나 깨있는데 자는 척하는 건 아닌가 싶어 감은 눈앞에서 손을 살짝 흔들어 보기도 하고, 괜히 코 아래 손가락을 가져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도 했다.

참 신기했다. 잠든 얼굴은 수도 없이 봐왔는데. 늘 침대 위 옆자리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교실로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지 느낌이 새로웠다. 게다가 우연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인지 지금 스가가 앉아있는 자리가 예전 자신의 자리라는 것을 알고 나니 가슴 한쪽에서 설레는 감정이 몽글몽글하게 올라왔다. 다이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가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두 번째 뒤, 예전의 스가 자리에 앉았다. 고등학교 때 뒤로 돌아야만 볼 수 있었던 스가는 이제 고개만 들어도 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조금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은 고개를 돌려야 스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자리였으니까. 자리를 바꾸고 싶었다. 아니면 자기 자리가 스가보다 뒤였다면 신경 쓰지 않고 그의 뒷모습, 옆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셀 수 없을만큼 했었다.

해가 벌써 산허리 아래로 내려왔다. 더 늦어지면 안 되겠다 싶어 다이치는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곤히 자는 얼굴을 보니 단호하게 깨우지 못했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책상에 턱을 괴고, 깨운다고 하기엔 너무나 다정하고 조용하게 속삭였다.


“스가, 일어나. 체육관 가고 싶다며. 열쇠 받아왔어.”

“으응…”

“더 늦으면 어두워질 거야. 지금 가야 해.”

“끄으응-”


그 잠깐 사이에 깊이 잠들었는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스가의 눈은 붉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마구 비비는데 얼마나 비볐는지 눈 주위까지 빨갛게 변한 게 안타까워 다이치는 엄지로 눈 주위를 쓸어주었다. 가져온 짐을 챙겨 교실을 나온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적막한 복도를 걸었다. 스니커즈를 신고 온 덕에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타박, 타박- 하는 소리가 마치 고등학교 때 실내화를 신고 걷는 소리 같아 괜히 정겨웠다.


“그래서, 말 안 해줄 거야?”

“뭘?”

“왜 갑자기 카라스노에 오고 싶어졌는지. 몇 번을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줬잖아.”

“그랬던가?”

“모른 척하기는.”

“음- 체육관 가서 말해줄게.”

“얼른 가자, 더 늦으면 배구부 애들이 올 거야.”


추억이 가득한 공간을 걸으면서 웃다 보니 어느새 체육관에 도착했다. 자물쇠을 풀고, 굳게 닫힌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모든 것이 익숙하지만 낯설게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다이치가 먼저 안에 들어가 불을 켜자 확, 하고 시야가 밝아졌다. 오랜만이고 그리웠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스가는 쉽게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입구에 서서 체육관 안을 훑고, 또 훑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노란색 바닥, 네트가 걷힌 배구 코트, 철장으로 보호된 시계, 그리고 2층 난간에 ‘飛べ’현수막까지. 스가는 입구에서, 다이치는 체육관 중앙에서.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위치였지만 '카라스노 배구부'라는 같은 추억을 곱씹었다.


“참- 변한 게 없네.”

“응, 그러게. 조금은 바뀌었을까 궁금했는데 그대로여서 실망스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어느 쪽이야.”

“하하, 다이치는 어때?”

“난- 좋아. 변함없는 게.”

“하하, 다이치다워.”

“스가, 이제 진짜 말해줘도 되지 않아? 나 오래 참았다고?”

“아아, 별거 아닌데 괜히 숨겼나.”


스가는 가져온 하얀 상자를 내려놓고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생크림에 과일이 잔뜩 올라간 케이크였다. 손수 초를 꽂고, 성냥으로 불을 붙이기 전 스가는 다이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순순히 스가에게 간 다이치는 그가 내민 케이크를 받아들었고, 스가는 꽂아둔 초에 불을 붙였다. 같이 근처 제과점에 들려 케이크를 사서 카라스노에 올 때부터 이 정도는 예상했었다. 그런데도 스가에게 물었던 이유는 왜,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인 걸까. 그냥 집에서 해도 됐을 텐데, 또 굳이 미야기에, 그것도 카라스노까지 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다 같이 내 생일 축하해 준 적 있었잖아. 야치들이 케이크 사 와서.”

“아아, 그래. 그때 숨기느라 엄청 고생했지.”

“맞아, 생각해보면 다이치 엄청 티 났는데 왜 몰랐을까? 하하하.”

“혹시나 들킬까 봐 난 조마조마했다고. 그때 히나타랑 노야가 엄청 시끄럽게 축하한다면서 소리치고 다녔는데.”

“근데 다이치는 뒤에 빠져서 제대로 안 해줬었지.”

“아- 그땐… 음…”

“지금 해줘.”


초에 불을 다 붙인 뒤 성냥에 있는 불은 후, 하고 껐다. 스가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뜨거운 촛불에 촛농이 녹아 초를 타고 흘러내렸다.


“말은 안 했지만 서운했다고. 다 같이 축하해줘서 좋았지만, 그래도 난 다이치한테 제일 축하받고 싶었어. 축하한다는 거에 누가 덜 축하하고, 더 축하한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이치 혼자 멀찍이 서 있는 게 싫었거든.”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귀는 사이가 되고는 다이치가 계속 축하해줬잖아. 그러다 보니까 고등학교 때가 생각난 거야. 그때처럼 고등학생에 카라스노 배구부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다시 축하받고 싶었어. 그래서 오자고 했는데 막상 오니까 또 괜히 온건 아닐까 싶네, 하하하. 갑자기 오자고 해서 미안.”

“아니야, 잘했어. 나도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었지만 사실 그 날, 나 스가 생일인 거 알고 있었어.”

“어?”

“아침에 만나자마자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렸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헤어지니까, 축하해줄 수 있는 마지막 생일이니까 제일 먼저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아쉬웠어. 마지막이라 생각했더라면 더 축하해줬어야 한다는 걸 집에 와서 알아서 엄청 후회했지.”

“그럼 지금 축하해주면 되겠네. 자, 얼른 해줘!”


얼른 축하해달라고 기다리는 스가의 모습에 다이치는 흠흠,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스가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끝나자 스가는 반쯤 녹아 없어진 초에 붙은 불을 불어 껐다. 초가 꽂힌 부분엔 촛농이 이미 한가득 녹아 먹을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이치는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케이크를 한 손으로 들고, 자유로워진 나머지 한 손으로 생크림을 푹 떠서 스가의 뺨에 묻혔다. 평소라면 잘 하지 않을 장난인데 이곳에 와서인지 괜히 장난치고 싶어져 한 돌발 행동이었다. 다이치의 장난에 스가 또한 질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생크림을 두 손가락으로 푹 떠서 다이치 뺨에 묻혔다. 그걸 시작으로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묻히다 보니 생크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폭신한 빵과 위에 장식된 과일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뺨이고, 입이고, 옷이고 어디 하나 생크림 안 묻은 곳이 없었다. 한바탕 장난이 끝나고 치우는데 스가의 눈에 커다란 박스와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보였다. 예전에 그들이 입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체육복이었다.


“다이치, 온 김에 저것도 입어보자.”


다이치는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스가는 이미 본인들에게 맞는 사이즈를 가져와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 다이치가 더 말리기도 전에 이미 스가는 입고 온 셔츠를 벗고 티셔츠에 목을 집어넣었다. 얼른 다 입고 한 번만 입어보라는 스가의 꼬임에 넘어간 다이치도 셔츠를 벗고 스가가 가져온 티셔츠에 팔을 집어넣었다. 카라스노 체육관에서, 카라스노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으니 정말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아 느낌이 싱숭생숭했다.


“뭔가 얼른 몸 풀고, 공 가져와서 리시브 연습 해야 할 것 같지 않아?”

“내가 구령 넣고?”

“당연하지. 주장인데!”


등을 때리는 스가의 손은 여전히 매웠다. 아니, 고등학교보다 더 매웠다. 하지만 몇 년을 겪은 익숙한 아픔이었고, 여기에서 맞으니 괜히 정겨운 느낌마저 들어 다이치는 피식, 웃었다.


“다이치.”

“응?”


쪽-

고개를 돌렸는데 입을 맞추는 스가의 행동에 다이치는 놀라 몸을 뒤로 빼고 혹시나 누가 본 건 아닐까 봐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한적한 주말 저녁 학교는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아무도 없잖아. 그리고 원래 이런 게 스릴있고 좋은 거야.”


다시 한번 입을 맞추자 스가의 입가에 있던 생크림이 다이치의 입술로 옮겨왔다. 다이치는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핥아 먹었다. 스가가 이번엔 입술이 아닌 뺨에 입을 맞췄다. 다이치의 뺨에 묻어있던 생크림이 스가의 입술로 옮겨왔다. 스가도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핥아 먹었다.


“달다.”

“응, 달아.”


생크림이 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단맛을 원했다. 생크림을 곁들여 상대의 단맛을 느끼고 싶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몸은 서로에게 기울어지고 있었고, 몸이 점점 가까워져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엔 거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이치의 얼굴이 왼쪽, 스가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꺾이고, 서로의 코끝이 스쳐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을 때-

모래와 마찰하는 타이어 소리, 배기가스를 내뿜는 소리. 친선 경기를 갔던 카라스노 배구부가 돌아온 소리에 당황한 두 사람은 얼른 짐들을 챙겨 바로 옆 물품 창고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차마 닫지 못한 체육관 문, 켜진 불을 발견한 부원들이 무슨 일이냐며 난리를 피웠으나 감독의 단호한 목소리에 얼른 집합해 모였다.


“크, 큰일 날 뻔했어.”

“그래도 재밌지 않아? 스릴있고.”

“스가.”


키득키득 웃는 스가에게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문에 찰싹 붙어 밖의 애들이 뭐라 말하는 걸까 귀를 기울여 듣던 중이었다.


“야, 체육관에 누구 왔다 간 거 아니야? 불도 켜져 있고.”

“누가 왔다고 그래?”

“혹시 모르잖아. 설마- 우리가 갑자기 와서 체육 창고에 숨은 거 아니야?!”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당황한 두 사람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점점 커지는 발소리와 대화 소리에 다이치와 스가는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야, 빨리 나와! 타케다 선생님이랑 감독님이 밥 사신대!”


가까워지던 학생들의 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체육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두 사람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정말 숨 막히는 순간이었고,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다행이다…”

“스릴있는 거 두 번 찾다간 죽겠다.”

“하하, 그래도 재미있지 않았어? 평생 기억에 남을 생일이 될 것 같아.”

“…그래. 나도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아.”

"하하, 좋네. 추억도 생기고."

"스가."

“응?”

“생일 축하해.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내가 제일 먼저 챙겨줄게. 그러고 싶고.”

“나도 다이치 생일 제일 먼저 축하해주는 사람이 될래. 이번 생일, 기대해도 좋아.”

“제발 스릴있는 건 빼주라.”

“하하, 생각해보고!”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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