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흑인여성이 19세기 미국 남부로 강제 타임워프가 되었을 때 시작되는 sf스릴러

전에 독서클럽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메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의 서문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디지털 시대에도 어린 시절 책에 깊게 몰입했던 감각을, 어느 시대와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즐거움을 다시 느껴보자는 취지로 인용한 말이었다.

“한때 좋아했던 책에 몰입해보려고 해도 미묘한 뭔가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든 적이 있을 겁니다. 마치 환각지를 겪는 것처럼, 과거에 책을 읽던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면서도,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을 바깥세계 어디론가 데려가는 듯한 즐거움을 주던 *‘시종유령’을 불러오지는 못하지요.” (메리언 울프.'다시 책으로'. 23p.)

이 ‘시종유령’은 저자가 앞부분에서 인용한 빌리 콜린스의 글에 등장하는 개념인데 독자가 책을 덮지 못하도록 말들의 입구에 서서 나를 이야기 속으로 시중드는 유령으로 책을 읽을 때의 시공간을 잊는 깊은 몰입감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다. 나는 그간 시종유령이 완전히 나를 떠나지는 않았지만 스마트폰이 현대인의 신체의 일부가 된 시대에 돌입해 나를 찾아오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고 느꼈다. 가장 마지막에 이 시종유령을 만난 기억은 작년 8월로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어느 여름 밤 북라이트를 켜고 밤새 읽었을 때였고 그 다음은 20년 5월. 지금이다.

내가 서론에서 구구절절하게 시종유령의 개념을 설명한 이유는, 바로 520쪽에 달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단숨에 읽어버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내내 시종유령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으나 이 유령의 시중은 너무나 은밀하여 원래 읽는 도중에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버스와 친구를 기다리는 잠깐의 순간에도 못 참고 책에 코 박았던 것이 시중유령이 함께했다는 증거이며 이런 강렬한 독서경험은 매번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다나는 1976년 현재 글쓰기를 업으로 살아가는 여성이다. 남편 케빈과 함께 막 거주지를 옮겨 책장을 정리하던 차에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1816년, 자신의 먼 조상 루퍼스가 물에 빠진 현장으로 소환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몇 번 자신의 의사와 무관한 시간여행을 반복하면서 흑인 여성인 다나는 이 빨간머리 백인아이가 자신의 먼 조상이며 루퍼스의 목숨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 시대에 끌려온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자신의 조상 중 백인이 있다는 것도 충격인데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먼 조모인 여자는 루퍼스가 노예로 만든 흑인여성(앨리스)으로 고조할머니인 헤이거가 폭력과 착취의 결과로 태어난다는 사실 등 흑인이 재산으로 거래되는 시대의 끔찍한 순간들을 경험하며 생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다나는 이 지긋지긋한 시간여행에 끌려 다니는 게 불안하고 무서우면서도, 자신을 노예로 다루는 와일린가에 돌아갈 때마다 그곳을 ‘집’이라 느끼고 폭력에 순응하여 노예화 되는 스스로에게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다나가 느끼는 애착과 증오의 혼란스러움은 억압자이자 돌보아야 할 대상이었던 ‘루퍼스’에게도 확장되는데 이 과정의 묘사가 정말 탁월하므로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복도를 따라 천천히 계단으로 향하면서 왜 내가 자기변호에 나서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적어도 시도는 해 보았어야 하지 않나. 나도 순종하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는 걸까?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내가 나의 주인으로 있고 싶었다. 그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잊어버리기 전에.” (429p.)

“그들(노예)은 루퍼스를 좋아하는 거 같았고 업신여기면 서도 무서워했다. 그런 모습은 혼란스러웠다. 나도 루퍼스에 대해 그들과 똑같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와 나의 관계가 워낙 이상하기 때문에 내 감정도 복잡한 줄 알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떤 종류의 예속이든 이상한 관계를 형성하기 마련이었다. 잠시 나타난 것만으로 모순 없이 미움과 두려움만 불러 일으킨 사람은 감독관뿐이었다. 하지만 원래 주인이 손을 더럽히지 않는 동안 두려움을 사는 것이 감독관의 일이기도 했다.”(446p.)

중간 중간 다나는 케빈과 다나가 서로가 평등한 시대에 살다가 함께 타임워프를 하면서 백인 남성인 케빈이 흑인 여성인 다나의 주인인 척 하지 않으면 다나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경험을 한다. 그녀가 느끼는 이 시대의 위협과 불안감, 동족이 처참하게 팔려가거나 살해당하는 현장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 분노와 공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백인/남자 케빈을 보면서 우리는 젠더와 인종에 따른 경험의 차이가 타자에 대한 이해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된다. 설령 그 관계가 끈끈한 유대와 더 없는 사랑에 기반을 두었어도 차이를 좁히기 힘들다는 것 또한 말이다. 케빈이 다나 없이 그 시대에서 5년을 산 후 둘이 재회했을 때, 독자들은 모두 똑같은 공포를 느끼게 된다. 케빈이 저 야만의 시대에서, 흑인여자를 존중하는 것보다 강간하는 것이 보편상식인 시대에서 어떻게 변했을지 두려워 지고 이런 공포가-사회가 어느 부류의 사람들을 피부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착취와 폭력을 법으로 용인하며 오히려 권장한다는- 몇 번이나 찾아온 후에는 그 시대가 생각보다 너무 먼 과거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서늘하게 다가와 아연해진다.

모든 인물의 감정선을 알기 쉽게 서술했다는 것이 이 책의 여러 장점 중 하나인데 얼마나 잘 묘사했는지 다나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앨리스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책의 최고 씝쌔끼이자 매순간 콱 죽길 바라게 되는 루퍼스의 심리마저 전부 이해가 되는 것이 … 처음에는 꺼려질 수가 있다. 여러분은 억압자의 심리적 갈등이나 감정선 따위 알고 싶지 않겠지만 이를 이해해야 다나의 루퍼스를 향한 애증이 이해가 된다. 노예가 주인에게 가지는 감정은 단 한가지, 증오만이 아니며 함께 오랜 세월을 보내며 성장하는 것을 지켜 본 이상 그 밖의 여러 감정이 뒤섞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잠재독자들이 억압자가 피억압자에게 가지는 감정을 잘 서술했다고 해서 폭력적인 인물의 행동을, 노예제도를 합리화 하는 일은 당연히 조금도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는 개미 눈꼽 만큼도 없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오히려 잘 묘사되어 읽을수록 루퍼스가 그 시대의 특별히 지독한 악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그런 악인들을 표준인간으로 양성해내는 사회의 끔찍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노예제가 폐지된지 100년이 흐른 20세기는 과연 19세기의 흑인 선조들이 꿈꾸었던 미래, 즉 인종 간 차별이 완전히 사라지고 동등한 개인으로 취급 받는 시대였는가? 체제에 의해 권력을 부여 받고 학습한 루퍼스의 인종주의적 가부장제는 어떤 형태로 현대 미국사회에 계승되고 있는가? 책을 덮고 나면 여러 질문들이 찾아온다. 시간여행에서 돌아온 다나의 손상된 신체와 케빈에게 말할 수 않는 루퍼스와의 관계는 결국 침묵으로 남아 찜찜한 결말을 선사한다. ‘인종과 젠더가 다른 두 개인이 과연 현대 사회에서 동등한 결합을 이루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답변은 어떠한 가능성의 형태로 제시되는데, 마지막 케빈과 다나가 그 시대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증거를 찾기 위해 메릴랜드에 방문했을 때의 대사를 인용할 수 있다. “이해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견고한 증거를 얻기 위해서”. 본질은 ‘존재했다는 것을 잊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하며 말을 줄인다.

여성작가들의 시간여행물은 내게 언제나 큰 즐거움을 주는데 <킨>또한 무척 재밌었다. 올해의 나의 독서목표는 1. 비문학을 읽는 비중이 문학의30퍼센트라도 되게 하는 것이고 2. 코니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를 읽는 것이다. 야호! <블러드 차일드>와 <와일드 시드>를 읽고 또 기록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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