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을 스치고 2

W. 스킨




청소시간엔 그 애를 보러 안 간다고 했다. 스스로 뱉은 말이니 지켰다. 근데 만났다. 박지훈이 간 거 아니고, 그 애가 와서. 근처에서 알짱거린 것도 아니었다. 박지훈은 제 할 일 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 애가 왔다.


청소시간에도 올 거냐 묻는 박우진에게 당당하게 엑스를 외칠 수 있던 이유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할 확률이 컸기 때문이었다. 말했다시피 박지훈은 단골 지각생이었고 청소시간엔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 미술실 가서 대충 한번 쓸고 다른 지각생들과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다보면 효길 쌤이 나타났다. 늘 수업종이 치기 직전에 나타나 오케이 사인을 내리는 쌤을 알기에 오늘도 시간이 나지 않겠거니, 그렇게 결론을 내린 거였다. 역시나 오지 않는 쌤을 기다리는 동안 함께 있던 동지 두 명이 먼저 떠나갔다. 체육이라 옷을 갈아입어야 한단다. 같이 튀어버릴까 하다가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줬다. 수업까지 오분 좀 넘게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미술실 책상 위로 엎어졌다. 졸려... 그렇게 졸린 눈을 꿈뻑일 때, 그때 그 애가 들어온 거다.


“......?”


졸려서 멍한 상태긴 했지만 그렇다고 헛것을 볼 정도는 아니었다. 엎드린 그대로 눈만 깜빡였다. 마주친 시선은 강다니엘이 먼저 뗐다. 그러고는 미술실을 훑어보며, 지각 너 혼자밖에 없어? 하고 물었다. 목소리를 듣고서야 상체를 발딱 세웠다. 체육이라 먼저 갔어. 이 간단한 것을 횡설수설 정신없이 늘어놨다. 그래도 친절한 강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효길 쌤이 지각생 청소 검사 좀 하고 가래서.”
“아...”
“열쇠 너한테 있지? 그냥 지금 가면 될 것 같은데.”
“아, 그, 잠깐만 앉아 있다 갈래?”


특기 하나가 생길 것 같다. 뱉자마자 후회하기. 여기가 집도 아니고 이 라면 먹고 갈래? 스러운 멘트는 뭐람. 설사 집이었어도 차마 하지 못했을 그 말을, 지각 벌로 청소한 미술실에서. 강다니엘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시간은 사분 남짓 남아 있다. 이제라도 그냥 해본 말이었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궁둥이를 일으킬까 싶었지만 그건 또 그닥 내키지 않았다. 친해지는 첫 단계는 무조건 대화라는 걸 알고 있다. 먼저 다가가본 적은 없어도 이 정도는 안다. 박지훈은 약간 초조한 기분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강다니엘의 검지손가락이 하얀 뺨을 두어번 긁고 내려갔다. 살짝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쨌거나 대답은 예스였다.


강다니엘은 문틈에 걸쳐 있던 발을 움직여 안으로 들어섰다. 문까지 닫히니 밀폐된 미술실에 정말 딱 둘만 남는다. 이런 것까지 바란 건 아니었는데 막상 닥치니 되게 어색하고 뻘쭘하고... 박지훈은 심장이 뛰었다. 원래 친구 사귈 때 다 이런 거냐고. 큰 눈을 들어 그 애를 살피면 다 그런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겠고 그런 거야? 원래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그런 법인가? 음... 그렇게 생각하니 수긍이 간다.


“......”
“......”


침묵의 미술실은 생각보다 더 숨막혔다. 친해지고는 싶지만 아직 그렇지 않다는 사실 때문인지 더 그랬다. 강다니엘은 대충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세 명씩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큼직한 책상, 그 대각선 너머엔 박지훈이 앉아 있다. 충분히 눈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는 거리임에도 쉽사리 시작되진 않았다. 심드렁한 얼굴과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는 길고 하얀 손가락. 그걸 몰래 훔쳐보는 동안 강다니엘은 핸드폰을 꺼냈다. 몇 번 만지작대는가 싶더니 무표정하던 얼굴에 별안간 미소가 번졌다.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떼어지고 두 손은 모두 핸드폰에게로. 액정 위에서 바삐 움직이는 엄지손가락으로 보아 무언가를 쓰는 중인 듯했다. 대각선에 앉아 있어 얼굴이 전부 보이진 않았다. 대신에 올라간 입꼬리는 잘 보였다. 웃을 때 입꼬리가 저렇게 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박지훈은 그 입꼬리를 멍하니 쳐다봤다.


정말 한마디 말도 없이, 올라간 입꼬리만 쳐다보던 중 강다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피할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당황한 얼굴 그대로 눈을 마주했다. 강다니엘이 아차 싶었는지 핸드폰 액정을 죽였다.


“내 이름 때문에 미국에서 온 줄 안 거야?”


핸드폰만 만진 게 미안했는지 어쨌는지.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박지훈은 멋쩍게 웃으며 끄덕였다.


“어... 그리고 미국에서 왔냐니까 네가 어어, 이러길래. 진짠 줄 알았어.”
“설마 믿을까 했는데 진짜 믿었네.”
“...내 주변에서 그런 이름은 처음 봐가지구.”
“넌 나 진짜 몰랐구나.”
“너는 나 알았어?”
“응.”
“뭐라고?”


학교를 다니다보면 가끔 얼굴 본 기억도 없는 애들이 박지훈에게 다가와 ‘나 너 아는데... 너랑 친해지고 싶어.’ 같은 류의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있다. 비슷한 상황까지 전부 포함하면 꽤 된다. 그럴 때면 조금 당황했을 뿐, 본인을 어떻게 아는 건지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다. 그냥 같은 학교 다니니까 오며가며 봤겠거니.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강다니엘이 박지훈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박지훈은 저도 모르게 강다니엘 바로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를 알았다고? 어떻게? 물음과 함께 벌어진 저돌적인 움직임에 당황한대도 상관없었다. 같은 학교이기 때문에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태평하게 생각해온 지난 날들과 달리 상기된 콧김이 뿜어나왔다. 반짝거리는 눈이 순식간에 맞은편으로 다가오자 강다니엘은 상체를 살짝 물렀다. 물론 티 안 나게 적당히 했고, 박지훈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입학하자마자 애들이 니 얘기 엄청 하던데.”
“그래서 너는 나를 입학하자마자 알았어?”
“이름만 대충 알고 있다가... 아 일학년 체육대회 때. 그때 얼굴 처음 알았어.”


일학년 체육대회는 5월에 했었다. 이 년 전. 무려 이 년 전부터 박지훈을 알고 있었다는 거다. 박지훈은 갑자기 지난 이 년 간의 시간이 매우 헛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쟤는 나를 이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데 나는 그동안 뭐한 거야. 강다니엘도 모르고 이 년 동안 뭘 한 거냐고! 이상한 후회까지 피어나기 시작. 이 년 전에 쟤를 알았더라면 지금쯤 쟤와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짝 불알 절친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데. 나 뭐했어 진짜 뭐했어. 지훈은 발까지 동동 굴렀다. 귀찮은 게 아무리 싫었어도 하루에 한 번 1반부터 11반까지 순회 돌 걸 그랬다.


책상 위에 올려둔 강다니엘의 핸드폰에 붕붕 뭐가 왔다. 언뜻 보니 카톡이다. 곧장 확인하려던 다니엘은 맞은편의 초롱거리는 눈빛 때문인지 일단 손을 거뒀다. 곧이어 두어 개가, 아니 한 세네 개가 더 왔다. 미리보기로만 확인을 하는데 또 입꼬리가 얇아졌다. 뭔진 몰라도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는 뜻.


“누구한테 왔길래... 되게 웃네.”
“어?”
“아냐, 아냐.”


진짜 못 들은 것 같길래 그냥 관뒀다. 이토록 애매한 사이에 사생활까지 간섭하는 건 너무 간 것 같아서. 강다니엘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 얘기 나눈 것 같지도 않은데 곧 수업종이 칠 시간이었다. 지훈은 그래도 짧지만 알찬 대화였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친해지고 싶은 상대가 나를 이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대형 정보를 얻었으니까. 강다니엘은 제자리에 의자를 넣고 핸드폰을 만지며 먼저 나갔다. 박지훈도 똑같이 의자를 넣고 쫄래쫄래 뒤를 따랐다. 먼저 갈 줄 알았던 그 애는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핸드폰을 보다가, 손을 내민다. 손을? 박지훈은 당황했다. 손...손을 왜?


“열쇠.”
“......”


아 나 진짜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강다니엘이랑 있으면 좀 이상해지는 것 같다. 뭐라 뾰족하게 말할 순 없지만 분명 어딘가 허둥대는 면이 생겼다. 강다니엘은 건네받은 열쇠로 미술실 문을 잠그고 그걸 본인 교복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이따 교무실 가야 돼서, 내가 갖다놓을게. 아 그래 고마워... 좀 수줍게 대답했던 것 같다. 미술실에서 교실로 가는 길은 박지훈네 반이 먼저 나왔다. 5반에 가려면 1반을 지나치는 게 당연하다. 지나가는 길에 떨구는 정도밖에 안 되는 걸 알았지만 박지훈은 강다니엘이 저를 데려다 주고 가는 것 같은 이 느낌이 낯설고 이상하다.


“잘 가.”


잘 가라며 짧게 들었다 내리는 손도. 박지훈은 자꾸만 이상함을 느낀다. 친해지고 싶다는 게 정말 원래 이런 느낌이 맞아? 혼자서는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게 뭐면 어때. 지금 느끼는 이 이상한 간지러움이 싫지 않았다. 일단 있어보자. 우선 내 감정부터 느껴보고. 결론은 그 다음에 내려도 늦지 않는다.


“너도 잘 가.”


박지훈은 강다니엘을 따라 짧게 손을 흔들었다.



**



원래 있는지도 몰랐던 것에 관심이 생기면 어딜 가나 그것밖에 안 보이기 마련이다. 박지훈은 그 신기하고도 기이한 현상을 마음껏 경험하는 중이었다. 그럴수록 드는 생각은 딱 하나. 내가 얘를 왜 몰랐지? 강다니엘은 아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나만 빼고 다 친구였나 싶을 만큼. 세상 그 누구보다 강다니엘을 늦게 안 듯한 기분이 별로였다. 애꿎은 박우진에게 화풀이를 했다. 너는 저런 애랑 같은 반 됐으면서 왜 말을 안 해줬어! 대답은 없었고 대신 미친놈 보는 듯한 눈빛을 선물받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쉬는시간마다 5반에 갔다. 뭐 그리 바쁘신지 강다니엘은 교실에 안 붙어 있는 때가 더 많았지만 종이 치면 스쳐 지나가면서라도 마주칠 수 있었다. 초반엔 인사를 했다. 안녕. 이 짧은 말이 그렇게도 어색했다. 그래서 박지훈은 긴장한 살구 광대를 숨기며 몸을 배배 꽈야 했다. 마주치는 날이 늘어가고, 하루에 여러 번 인사하기도 뻘쭘해지자 그때부턴 눈인사를 했다. 주로 박지훈이 빤히 쳐다보면 시선을 느낀 강다니엘이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는 패턴이었다. 인사치레일 뿐인 그 표정도 강다니엘이 하니 되게 근사했다. 비밀인데 혼자 화장실에서 따라해봤다. 하자마자 접었다. 그 근사한 웃음은 강다니엘만 지을 수 있는 거였다.


오며가며 아는 척하는 것도 충분히 좋았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사에 불과했다. 아는 거라곤 이름과 반이 전부. 어디 가서 친하다 말하기도 애매한 그저 그런 사이. 그런 와중 강다니엘은 늘 일찍 등교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지각과 깊은 인연이 있는 박지훈에겐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였으나... 몇 날 며칠 눈인사만 주구장창 하다 보니 욕심이 생기는 거다.


“하......”


주말이 지난 월요일. 그러니까 가장 힘든 날. 박지훈은 알람을 1분에 한 개씩 맞춰놨다. 언젠가 애들한테 들었던 것도 해봤다. 자기 전에 일어나야 할 시간 외치면서 주먹으로 베개 내려치면 제시간에 기상할 수 있다던... 믿거나 말거나인 그거. 이것 덕분인진 몰라도 흔치 않게 첫 알람부터 눈이 떠졌다. 뜨자마자 일생일대의 고민이 강하게 휘몰아쳤다.


다 때려치고 더 잘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지금 시간에 일어나서 학교를 가 그냥 좀만 더 자고 일어날까 강다니엘이고 나발이고...


“쌔앰. 안녕하세요.”
“뭐야. 너 지훈이냐? 오늘 뭔 일 있어?”
“저 이제 지각 좀 덜 하려구요.”
“덜하긴 인마. 안 해야 맞는 거지.”


놀랍게도 박지훈의 본능을 강다니엘이 이겼다.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겨우 준비하고 나왔더니 예상보다 더 이른 시간이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효길 쌤을 보고 반성했다. 내가 지각을 많이 하긴 했구나. 당분간은 착실한 학생이 되어야겠다. 지킬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다짐도 했다.


일부러 5반을 지나칠 수 있게 왼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복도는 물론이거니와 교실 안까지 죄다 한산했다. 너무 오바했나 싶었다. 애들이 말한 ‘일찍’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 수 있는데. 아침 공기를 때려맞으며 맑아진 듯했던 정신이 다시 탁해질 것 같았다. 잠까지 물리쳐가며 일찍 온 이유는 딱 하나인데 그 이유가 없다면 이 모든 건 헛짓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박지훈은 살짝 긴장한 채 6반 뒷문을 지나쳤다. 5반에 과연 그 애가 있을까. 보폭을 줄이며 걸음 속도를 늦췄다. 앞문은 닫혀 있었다. 이번엔 최대한 자연스럽게, 머리를 만지면서 창문 너머를 슬쩍. 두 명 정도가 앉아 있지만 둘 다 강다니엘은 아니었다. 심지어 둘 중 하나는 박지훈 껌딱지 중 한 명이다. 에이씨... 눈 마주쳤어.


“헐. 뭐냐 박지훈. 왜 벌써 왔어? 학교에서 밤샜어?”
“아니거든.”
“무슨 심경의 변화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나 주번인 거 알구 그런 거야? 응?”
“착각 오졌다. 그걸 내가 왜 알어.”


박지훈을 보자마자 우당탕 뛰어나온 임정식이 한껏 반가움을 표출했다. 가지 못하게 박지훈을 꽉 끌어안고는 지 좋을 대루 둥가둥가. 아무리 생각해도 5반엔 이런 놈들이 너무 많았다. 허나 좀 귀찮을 뿐, 나쁜 애는 아니라는 걸 알기에 박지훈은 몇 번 저항하다 힘을 풀었다.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놓으라고 튕겨봤자 이놈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박지훈도 남 손 타는 게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가끔 과하게 터치할 때면 정강이를 까버리는 등 강경대응을 한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례한 놈들의 이야기다. 정식이는...좀 귀찮아서 그렇지 착해. 박지훈은 정식이에게 안기다시피 몸을 기댄 채로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왜 벌써 왔냐는 질문엔 그냥 눈이 일찍 떠졌다고 거짓말했다. 여기서 강다니엘 이름 나오면 웃기니까.


“와 강다 너 진짜 일찍 오는구나.”


대신 진짜 강다니엘이 왔다.


“넌 웬일로 벌써 왔냐.”
“나 주번 시발.”


이제 오는지 가방을 들고 있었다. 박지훈은 급격히 긴장하며 임정식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꼬물딱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꿈틀거리던 거 바로 스탑. 머쓱하게 손을 올렸다. 머쓱한 손인사에 강다니엘은 안녕, 하고 입으로 답했다.


“오 너희 둘이 원래 아는 사이였나?”
“일단 팔부터 좀 풀어볼래 정식아?”
“왜 우리 쥬니. 말랑말랑해서 귀여워.”
“내가 뭘 말랑말랑이야. 존나 딱딱 탄탄이구만.”
“으으! 너는 니가 왜 귀여운지 죽었다 깨나도 몰라.”


죽었다 깼는데 그런 거 알고 싶지 않아. 박지훈은 대꾸를 멈추고 다시금 몸을 꿈틀거렸다. 힘하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데 임정식은 체대를 준비하는 애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으갸갸각! 힘 주는 과정에서 이상한 소리도 났다. 임정식은 그런 박지훈을 더 귀여워했다. 동글동글한 게 벗어나려고 용쓰는 모습이 귀여운 모양이다. 이쯤 되면 박지훈의 승부근성에 불이 붙는다. 맞은편에 선 강다니엘도 잊은 채 본격적으로 힘을 줬다. 그러면 박지훈을 옆에서 끌어안은 정식이는 껄껄 웃으며 적당히 장단을 맞췄다. 약간 귀여운 사촌동생 놀아주는 느낌으로다가. 아! 진짜! 놓으라고! 상남자 박지훈 자존심에 금이 가지 않을 리가 없다.


“야 애 아프겠다.”


박지훈은 원래 얼굴이 잘 빨개졌다. 이렇게 친구들이랑 장난치며 힘을 쓸 때도 그랬고 저번에 아빠가 준 소주를 홀짝홀짝 마셨을 때도 그랬다. 강다니엘이 아프겠다며 제 팔을 잡아당긴 지금은... 아마 정식이 땜에 힘 주느라 빨개진 것이라고, 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강다니엘이 은근히 정식이를 나무라며 박지훈을 잡아당겼지만 그렇다고 분위기가 이상해지진 않았다. 그 애 얼굴엔 웃음기가 있었고 말투도 적당히 장난스러웠다. 정식이도 웃으며 팔을 풀었다. 지금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오로지 박지훈 혼자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이 이상한 게 아니고, 지금의 자기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중. 왜냐면 지금은 더 이상 힘을 쓰고 있지 않는데... 얼굴 왜 빨개. 왜 더 빨개져? 박지훈의 시선이 그대로 미끄러졌다. 제 팔, 손목 언저리를 잡고 있는 강다니엘의 손. 길고 하얗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대로다.


“강다 네가 보기에도 지훈이 귀엽지.”
“아 뭐래 죽을래?”


그 어떤 대답이 나와도 당사자는 민망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박지훈은 민망해면서도 은근히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괜히 정식이만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건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고, 강다니엘은 그냥 웃었다. 그러고선 교실로 들어갔다. 분명 비웃음은 아니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저 웃음은 뭐냔 말이야. 기대는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처럼 연기하던 박지훈은 남몰래 입술을 조금 삐죽였다. 아니 이게, 참... 내가 생각해도 이유가 존나 별로긴 한데...


나 좀... 그래도 진짜 쪼오끔은 귀엽지 않나?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한 거야. 다행히도 빠른 수긍과 현타를 맞으며 진지하게 반성했다.



박지훈은 다음날도 알람을 무지하게 맞춰놨다. 이번엔 네 번째 알람이 울릴 때 겨우 깼다. 그래봤자 어제보다 3분 늦게 일어났을 뿐인데 고작 그 3분에 사람 마음이 그렇게나 급해졌다. 어제에 이어 일찍 등교한 지각생 박지훈의 반란에 효길 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집에 무슨 일 있냐...? 하고 묻기까지 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집이 아니라... 박지훈은 잠시 고민하다 아무 일도 없다며 웃었다.


“안녕!”



교실에 가방을 놓고 나오니 복도 저 끝에서부터 강다니엘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애는 딱히 이유가 있어 일찍 오는 것 같진 않았다. 그냥 습관인 듯했다. 어제도 봐놓고선 반가움에 우렁차게 인사했다. 핸드폰을 보며 걸어오던 강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놀고 있는 손을 들어 가볍게 안녕. 그래 저 표정. 살짝 웃어주는 저 표정이 볼 때마다 반가웠다. 반갑다로 표현될 마음이 맞는진 모르겠다. 아무튼.


둘째 날은 괜히 5반 앞을 얼쩡거렸다. 주번이라던 정식이는 아마 하루만에 잠을 택한 모양이다. 어제보다 사람이 더 없어서 박지훈은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강다니엘 주변을 맴돌 수 있었다. 빌릴 것도 없으면서 괜히 박우진 사물함을 건들고, 뭔가 찾을 게 있는 것처럼 혼잣말도 하고. 그러다보니 목적을 달성했다. 핸드폰만 보고 있던 강다니엘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다.


“뭐 찾는 거 있어?”
“아 박우진이 내 책 빌려갔는데 아직 못 받아가지구.”
“뭔데. 내 거 빌려줘?”
“아니야, 이따가 받으면 돼.”


그렇게 정적이 찾아올 때쯤 박지훈은 강다니엘 근처로 은근슬쩍 위치를 옮겼다. 창가 옆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차마 바로 옆자리는 앉지 못하고 옆 분단 대각선 자리에 착석했다. 옆으로 돌아앉으니 그 애가 직빵으로 보이는 명당 자리였다.


“너는 핸드폰을 엄청 자주 본다.”
“그래?”
“응, 엄청. ...연락하는 사람이라도 있나 봐?”


또, 대답은 안 하고 웃지 또. 박지훈의 도톰한 입술이 삐죽이려 시동을 걸었지만 그 전에 강다니엘이 쳐다봐서 멎었다. 그러고보니까 넌 우리 반 되게 자주 오네.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그래? 하고 좀전의 강다니엘처럼 반응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박우진이 있어서 그렇다는 둥 5반에 친구가 많아서 그렇다는 둥 뒤늦게 변명 아닌 변명들이 떠올랐지만 그때는 이미 타이밍을 놓친 후였다. 애초에 변명 혹은 핑계를 듣기 위해 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면 더 이상해질 거였다.


“우리 반 애들이 너 엄청 귀여워하더라.”
“하하... 이상한 애들이야.”


뭐가 이상해, 라며 웃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어느새 핸드폰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얘기를 할 때면 핸드폰을 놓아주는 친절한 강다니엘. 친절보단 다정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 사실 저 얼굴에 저런 웃음 지으면 뭘 해도 다정하게 느껴질 것 같긴 하다. 박지훈이 하는 이야기에 간간이 끄덕이며 듣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도 그렇게 다정해 보일 수가 없었다. 사실 그리 엄청난 행동은 아님에도.


교실에 온통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일단 확실한 건 우리 반은 이런 향기 안 나. 5반만 오면 나는 것 같다. 좀 더 정확하겐 강다니엘이 있는 곳에. 무슨 향수를 쓰냐고 묻자 강다니엘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면서 기억을 되짚었다. 그 얼굴을 보니 뭐가 막 생각난다. 하얀 강아지... 대뜸 너 강아지 닮았다 말하는 건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우선 속으로만 생각했다. 지금보다 좀 더 친해지면 그때 말해줘야지. 강다니엘은 눈까지 찌푸려가며 열심히 생각했다. 그닥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에 이렇게 열심이니 당연히 고마웠다. 결국 향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고 강다니엘은 오늘 집에 가서 알아오겠다 약속했다. 진짜, 너무 친절하고 다정했다.


“아 잠깐 나 전화 좀.”
“응. 나도 우리 반 가야겠다.”
“가게?”


강다니엘이 잘 가라고 머리를 만져줬다. 손목이 가까워져서 그런가 좋은 향이 확 끼쳤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으며 나가는 강다니엘과 한적한 교실에 남은 분홍빛 박지훈. 어릴 때부터 하도 사람 손을 타며 자라 이 정도 스킨십은 별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다. 온통 분홍색으로 보이는 신기한 현상.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박지훈은 그렇게 일주일을 지각생에서 벗어났다. 효길 쌤이 기특하다며 음료수도 쥐어주셨다. 잠이 줄어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건 수업시간에 충당하면 됐다. 아침엔 무조건 5반에 찾아가 강다니엘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 깊지 않은 대화 속에서도 공통점은 충분히 찾아낼 수 있었다. 강다니엘은 게임을 좋아했다. 박지훈이야 중학교 때부터 게임 관련이라면 늘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이었고. 강다니엘은 학교 생활도 착실히 하고 공부도 잘한다기에 게임 같은 거 관심도 없을 줄 알았다. 아침에 시작한 게임 이야기로 일교시 쉬는시간, 이교시 쉬는시간, 점심시간까지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박지훈이고 강다니엘이고 친구가 많아서 둘이 얘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주위에 여럿 더 붙은 상황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모여 있는 여러 사람 중 그 애의 옆에 서 있는 건 생각보다 더 친밀감이 느껴졌고 드문드문 팔이 스칠 땐 심장이 쿵 떨어지기까지 했으니.


“강다랑 많이 친해진 것 같드만.”
“그래? 우리 좀 친해 보여?”
“우리라고 하는 것만 봐도 알겠다.”
“헤... 그런가.”


둘이 부쩍 친해진 것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친해지고 싶다는 혼자만의 바람으로 시작한 관계가 정말 그렇게 보인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건. 근데 뭐가 좀 모자라지. 분명 친해진 것 같고 가끔 서로 장난도 주고받는데 말이다. 박지훈이 말한 ‘친해지고 싶다’ 가 어디까지였는지. 뒤늦은 사춘기라도 온 듯 박지훈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 제가 녤윙 전공합작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마감 걱정으로 눈앞이 캄캄한 와중에 이걸 써가지구 왔네요...
아무쪼록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 미리보기 공개되었으니 많이 많이 봐주세여

녤윙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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