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오지니






온몸에 피로를 쌓은 채 집으로 향하는 석진의 발걸음이 무겁다. 억지로 발을 떼어내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석진은 이대로 점프하면 집이었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마법이라도 일어난 것 같이. 그러나 현실은 단호할 뿐, 석진은 입술을 꾹 깨물고 묵묵히 집으로 향했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수명이 다 된 건지 연신 깜빡거리다 꺼진 조명 때문에 거리가 어두워졌다.



겨우겨우 힘을 내서 자신의 집 근처에 도착한 석진은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거리에 신이 나 활짝 웃었다. 내내 일하고, 여기저기 치이고.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항상 이렇게 집에 가까워 질 때였다. 그냥 직장을 다니다 보니 석진은 어느 순간부터 집이 그리워졌다. 집만 보면 없던 힘도 생겨나는 건 이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원래 등교 중에도 집이 그리운 것이고, 출근하는 거리에서도 집을 상상하는 건 거의 누구나 그러는 것이 아닐까. 석진은 어김없이 다리에 바짝 힘을 주어 현관문까지 달려갔다.


"다녀왔습니ㄷ,"

"뭐가 이리 늦어요."


굳게 잠겨있던 문이 소음을 내며 열리고, 석진은 자신도 모르게 다녀왔다는 인사를 했다. 오래전부터 습관처럼 나오는 말은 쉽게 고치기가 어려웠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는 말이었다. 혼자 살고 있어도 말이다. 그래도 나름 외롭게 하지는 않는 것 같아 석진도 먼저 고치려 들진 않았다. 나름 하루의 끝을 마무리해 주는 말 같아 괜찮은 것 같았다. 석진은 보통이면 인사를 하는 대로 신발을 벗고 곧장 침대로 달려가는데, 오늘은 왜인지 석진이 현관문 앞에서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완벽히 갖추어지지 않은 인사말 뒤로 낮은 저음이 들려왔다. 듣는 것만으로도 투정 가득한 목소리가, 석진의 동공을 떨리게 했다.


"네가.. 왜 여깄어? 너 어떻게 들어왔어?"

"전에. 술 먹고. 비밀번호."

"내가?!"

"네."


예정에 없던 손님이다. 아니, 사실 손님이 아닌 도둑이다. 아니.. 아니, 애인인데. 실은 잘 모르겠다. 석진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관계를 정리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하는 윤기가 석진을 더욱 당황스럽게 하기도 했다. 윤기가 간단하게 핵심만 골라 얘기하자, 석진은 빼액 놀라며 현실을 부정했다. 내가 내 입으로 알려 줬다고..? 그리고 생각도 잠시 다시 스쳐 지나가는 술이라는 단어에 석진은 자신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하여튼 이 술이 웬수였다.


"그렇다고 너는!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냐, 연락도 없이?"

"핸드폰 꺼져 있던데. 확인해 봐요."


석진의 말을 들은 윤기는 가까이 위치해 있던 핸드폰을 석진에게 흔들어 보였다. 안 그래도 오늘 집에 가겠다고 문자를 남겼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길래 윤기는 석진에게 전화도 걸었었다. 많이 바쁜가. 여유롭게 생각하며 전화를 거는데,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건 석진의 목소리가 아닌 고객님의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나긋한 누님의 목소리였다. 결국 연락이 닿지 못 한 윤기는 이미 남겼던 자신의 문자를 석진이 확인할까 싶어 집에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대로 집에 왔다 하니 윤기의 입장에서도 황당할 만 했다. 윤기는 무심하게 툭 대답을 하고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하는 석진의 굳은 얼굴을 보고 나서야 다시 고개를 돌려 티비에 집중했다. 옆에서는 머리를 가격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안 봐도 뻔하네. 이번엔 너무 세게 때렸는지 석진이 머리를 감싸고 울먹였다. 아우씨, 멍청아..!


"밥은.."

"먹고 있잖아요."

"그건 과자고."

"배불러요."


티비에 시선을 두고선 석진의 질문에는 꼬박꼬박 대답한 윤기가 다시 제 입속으로 과자 하나를 넣었다. 까드득, 하고 씹히는 과자가 달달하면서도 짭조름하다. 평소 과자를 즐기던 윤기는 아니었지만 석진을 기다린다고 무료함에 씹은 과자가 어느새 반봉지 이상이 줄어 있었다. 입 주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 낸 윤기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오늘 자고 갈 건데."

"왜? 너 학교는?"

"내일 주말인데. 진짜 시간 개념도 없다."

"...."


아무렇지 않게 부엌으로 향하는 윤기를 보던 석진이 이유를 물었다. 자고 간다고 피해가 될 건 없었지만, 내일의 일과를 떠올린 탓이었다. 윤기의 학교를 걱정하며 의아해 한 석진은 뒤로 붙는 대답에 또다시 말을 아꼈다. 내일이 주말인데. 석진은 몰려오는 충격에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몰랐으니까. 내일이 주말이라고는 석진은 정말 까먹고 있었다. 요새 일한다고 하도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 시간 개념을 정말 잊었나 보다. 괜히 코 끝이 찡하다. 얼마나 고생했으면 이럴까, 이번엔 석진이 아는 말 다 해서 자신을 칭찬했다.


"오늘 같이 자요."

"뭐..? 야, 안 돼..!"


윤기의 말에 석진이 순간 기겁하며 윤기를 말렸다. 너무 자연스럽게 흘리는 말을 정말 자연스럽게 넘길 뻔했다. 윤기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 한 석진이 얼굴을 붉히며 윤기에게 소리쳤고, 석진의 말에 단번에 알아들은 윤기는 코웃음을 치며 어이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아 진짜, 누가 늙은이 아니랄까 봐.



"그냥 자는 거요, 그냥. 사람이 왜 이렇게 불순해."


대답하면서도 아까의 석진의 반응을 다시 떠올린 윤기가 또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지금은 창피한지 고개를 숙인 석진이 윤기는 마냥 귀여웠다. 얼굴이 한껏 발갛게 닿아 올랐을 건 뻔하고. 윤기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어쩌면 석진의 이런 반응이 재미있어 의미 가득한 말을 뱉는 건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기지개를 가볍게 펴며 화장실로 들어가던 윤기는 여전히 멀뚱 서 있는 석진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다.


"뭐, 내일 주말이니까 할 수 있을지도요-"

"...!"


다시금 더욱 벌겋게 홍조를 띤 석진 사이로 윤기가 짓궂게 미소 지었다. 마냥 어리지만은 않은 고딩과의 연애는 항상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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