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팬픽홈 '페이퍼타운'의 오픈 축하 소설이었습니다.











수많은 연인들이 ‘성격차이’로 헤어진다. 연예인, 스포츠스타 등 유명인사들의 표면적인 이혼 사유는 대부분이 성격차이다. 몇 십 년을 각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오던 두 사람이 다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거지만. 


우리는 때론 성격이 신기할 정도로 비슷해도 이별을 하고, 하나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아도 의외로 잘 먹고 잘 산다.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배려하고 맞춰나가는 게 사랑이 아닌가 하다가도 나와 딱 맞는 사람이기에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고. 어쨌든 수많은 연인들, 부부들이 말하는 그 성격차이란 게 결국은 핑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대에게 마음이 떠나서겠지 결국은. 내가 더 이상 너에게 맞춰줄 생각이 없고, 너에게 맞추라 강요할 수 없기에.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렇게 다른 너와 나는, 결국에는― 언젠간 헤어지게 되어 있는 걸까?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서로를 참아줄 수 있을까? 버텨줄 수 있을까?






그냥, 너에게






혜성과 민우가 서로를 의식하게 된 건 정확한 시기를 따지자면 대학교 OT때 부터였고, 제대로 서로를 알게 된 건 같은 교양을 들으면서였다. 단과대별로 가도 워낙 많은 과가 모여 있으니 자기과 신입생들을 파악하기에도 빠듯한 게 바로 대학교 OT였다. 


미니 운동회처럼 게임을 하고 등수별로 상품(물론 대부분이 술이다)을 타가기 위해 다 같이 대형홀에 모였을 때였다. 앞에서 진행 때문에 학생회가 얘기를 하는 동안 아직 딱히 친해졌다고 할 만한 동기가 없던 민우는 멍하니 앞을 보고 있다가 옆줄에 있던 혜성을 보았다. 민우보다 네 번째 정도 앞에 앉아있던 혜성의 뒤통수는 참 가지런하다 싶을 정도로 동그랬다. 드라이를 했나 생각이 들 정도로. 옆의 동기와 이야기를 하느라 간혹 고개를 돌리는 혜성의 옆얼굴도 참 자기 머리만큼이나 선이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다 혜성이 아예 몸을 돌려 뒤에 앉은 동기들과 본격적으로 떠들기 시작했을 때, 민우는 혜성의 웃는 얼굴에 잠시 넋을 놓았다.


반했다―같은 감정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가 있는 건 확실했다. 그래, 이건 필시 홀린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시선을 홀라당 다 빼앗아갈 수가 없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민우의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혜성의 눈이 뒤를 향하자 민우는 잽싸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살짝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다시 슬쩍 살폈을 때 혜성은 별 생각 없이 동기들과 떠들고 있었다. 


그때는 민우도 몰랐었다. 왜 제 시선이 자꾸 혜성에게 머무는지. 그리고 그 뒤로 혜성의 시선이 간혹 자길 향하고 있단 사실도.





“야야, 내가 고막 터진다 그랬지!”

“뭐야, 언제 들어왔어?”


민우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며 혜성은 쯔쯔 혀를 찼다. 아예 이어폰을 빼내더니 책상 위로 훅 던져버린 혜성은 겉옷도 훌러덩 벗어버리더니 대충 바닥에 던져뒀다. 바로 옆에 행거가 있는데 도대체가 왜 옷은 만날 아무데나 벗어두는 걸까. 민우는 혜성을 흘기며 침대에 엎어져있던 몸을 일으켜 옷을 주웠다. 민우가 옷걸이에 옷을 거는 사이 혜성은 민우가 누워있던 침대를 차지하곤 엎드려서 핸드폰 게임을 실행시켰다.


“아 왜 여기 와서 하냐고.”

“공강에 있을 데가 여기밖에 없어.”

“기숙사생 외에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몇 번을 말하냐.”

“내가 무슨 외부인이냐? 나도 이 학교 학생인데.”

“그 말이 아니잖아.”


민우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혜성은 곧 바쁘게 손가락과 눈을 움직이며 게임을 하기 바빴다. 기숙사에 들어오려면 카드키가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언제 민우 키를 빼돌렸던 건지 툭하면 멋대로 민우방에 들어와 이런 식으로 공강을 때우거나 놀다가곤 했다. 덕분에 민우는 쌩돈을 날려가며 다시 카드키를 만들어야했지만. 다행히도 아직 룸메이트랑 혜성이 부딪친 적은 없지만 만약에 룸메가 외부인이 들락날락거린다는 걸 눈치라도 채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민우뿐이었다.


한숨을 푹 쉬곤 혜성이 던져버렸던 이어폰을 도로 가져와 노래를 들으려는 민우의 손에서 또 이어폰을 뺏은 혜성은 미간을 좁히며 쓸데없이 인상을 썼다. 하나도 안 위협적이거든. 예전엔 혜성이 냉랭한 얼굴을 하면 괜히 긴장해서 눈치를 봤었다. 이젠 진짜로 화를 내도 쫄지 않지만.


“너는 귀 안 아프냐. 만날 이런 음악만 들어.”

“취존 좀.”


민우는 혜성의 손에서 이어폰을 휙 낚아채며 입을 비죽거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취향도 성격도 생김새만큼이나 다르다. 서로 얘랑 어떻게 사귀게 된 거지 의문을 가질 정도로 뭐하나 잘 맞는 게 없는 두 사람이 만나 하는 연애이니 알콩달콩 깨가 쏟아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반대가 끌리는 이유라는 노래도 있듯, 자신과는 다른 그 부분에 매력을 느낀 적도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게 유효기간이 고작 1년일 줄은 몰랐다. 5월. 혜성과 민우가 연애를 시작한지 1년. 한창 이런 저런 행사에 축제로 들썩한 캠퍼스만큼 요즘 둘의 사이는 꽤 시끄러웠다. 툭하면 부딪치고 때론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다. 


사소한 것부터 다른 걸 예로 들자면 이런 거다. 민우는 주로 힙합이나 팝을 들었고 그게 아니면 가볍게 춤추기 좋은 댄스곡들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혜성은 잔잔한 인디나 아이리쉬락 등 밴드 음악을 좋아했다. 룸메도 있고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노래를 크게 듣는 게 남에게 피해가 될까봐 무조건 이어폰으로 듣는 민우와 달리 혜성은 제 자취방에서 크게 노래를 틀어놓고 감상했다. 이어폰은 귀가 아프다며 구시렁거리면서 집에선 그렇게 울리도록 노래를 틀어놓으니 민우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빌라가 방음이 잘되니 다행이지 아니었음 신고가 들어와도 몇 번은 들어왔을 거다. 혜성이 힙합이나 댄스, EDM을 즐겨듣지 않는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공강 내내 있을라고?”

“안 돼?”

“룸메 언제 올지 몰라. 30분만 있다 나가.”

“네 방이기도 한데 왜 그렇게 룸메 눈치를 봐?”

“공동체 생활이란 게 그런 거다.”


게임을 하느라 눈을 바쁘게 움직이던 혜성은 이래서 기숙사는 불편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불편하다는 놈이 툭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남의 방에 찾아 오냐고. 가족들 말고는 누군가랑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혜성은 남과 한 방을 쓰는 건 불편하다며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자취 중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랑 부대껴 살며 하고 싶은 대로 하지도 못하고 신경 써야 하는 것들만 많은 걸 견딜 수 없다 했다. 그와 달리 민우는 오히려 혹시 불편한 게 있더라도 혼자 사는 건 외로워서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가뜩이나 타지에 나와 살아서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살아야했다면 서울에 정을 붙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사소하지만 다른 것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었다. 혜성도 민우도 그 다른 부분들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고 나름 타협하고 맞춰나가며 여기까지 왔다. 고작 1년이긴 해도 어떻게 보면 그렇게 다르다, 다르다 하면서 용케 1년이나 만났다. 동성끼리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쉬운 연애도 아니니 1년이면 ‘좀’ 만난 축엔 들지 않을까.


“이제 고만 하고 가지?”

“이 판만 하고.”

“게임 좀 작작해라.”

“뭘 얼마나 한다구.”


아무래도 혜성을 내보내려면 자기도 나가는 것만이 방법일 것 같아서 옷을 갈아입은 민우가 엎드려있는 혜성의 등을 툭 내려치며 말했다. 같이 나가자는 뜻임을 알지만 혜성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그 곧고 긴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해대며 대꾸했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민우는 여전히 단정한 혜성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OT때와 외모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살이 좀 빠져서 가뜩이나 작은 얼굴이 더 날렵해지긴 했지만 머리 스타일이며 옷 입는 스타일이며 여전했다. 흔한 염색 한 번 하지 않고 혜성의 머리는 늘 흑발에 목을 아주 살짝만 덮고 있었다. 저 길이에서 머리가 더 길어지기라도 하면 미용실을 가 칼같이 잘라내곤 했다. 기분 따라 가르마도 바꿔보고 셀프 염색을 즐겨하는 민우와는 이런 것도 달랐다.


외모는 말할 것도 없다. 딱 봐도 혜성은 길쭉하고 얇지만 단단한 느낌이고 민우는 혜성의 말을 빌리자면 알찼다. 뭔가 모르는 사이에 들었으면 다소 성희롱 같은 발언이었을 수도 있으나, 혜성은 너무나 진지하게 민우의 그 ‘알찬 몸’에 대해 설명했다. 넌 작아도 뭐랄까, 알차다고 할까. 골격도 좋고 근육도 잘 잡혀 있어서 되게 알차 보여. 처음엔 뚱뚱하단 소리냐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 육감적이란다. 머리털 나고 남자한테, 아니 남녀불문하고 누군가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본 게 처음이라 민우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육감적이라니. 섹시하단 소리보다 더 묘하게 들렸다.


“뭐해, 멍하니.”

“…끝났으면 나가자.”

“놀아주려고?”

“놀아주긴 뭘 놀아줘. 광합성이나 하자. 넌 햇빛 좀 쐐야 돼.”


귀찮다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리는 혜성을 보채며 민우는 행거에 걸어뒀던 옷을 챙겼다. 그리곤 혜성의 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나오다시피 방을 나왔다. 꾸물꾸물대던 혜성도 어느새 민우의 옆에 달라붙어 자연스레 어깨를 감싼다. 엘리베이터로 기다리며 민우는 놓으라는 듯 괜히 어깨를 돌리고 말았다.




OT이후 민우는 제 시선을 빼앗아갔던 혜성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학교를 다니다보면 언젠가 마주칠 날이 있겠지만 마주치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학과도 다른데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몇 개 없었다. 같은 수업을 듣거나 같은 동아리를 가입하지 않는 이상. 우리 학교 학생만 몇인데. 그런 우연은 웬만하면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혜성과 두 번째로 만난 교양 수업에서 민우는 이거야 말로 신이 자신을 대놓고 밀어주는 거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의실에 앉아있던 민우의 눈에 앞문으로 들어오는 혜성의 움직임은 마치 운명이라도 만난 것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담겼다. 배경 음악으론 ‘유 아 마이 데스티니-’ 란 가사밖에 모르는 Paul Anka의 ‘You are my destiny’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혜성이 대각선으로 앞에 앉았고 민우는 수업 시작 전까지, 아니 수업이 끝날 때까지 툭하면 혜성 쪽을 쳐다보곤 했다. 그날의 수확은 출석을 부를 때 귀 기울여 들었던 혜성의 이름뿐이었다.


“봄이다, 봄.”

“봄이 온지가 언젠데.”

“쟤네들 보니까 우리 새내기 때 생각난다.”


기숙사 앞에 있는 넓은 잔디밭에선 총학이 새내기들을 대상으로 축제 전에 여는 이벤트 같은 게 한창 진행 중이었다. 혜성이 떠드는 말에 민우도 모든 게 어색하고 뻣뻣했던 자신의 새내기 시절을 떠올렸다. 고작 1년 전인데 지금은 캠퍼스 라이프에 너무나 익숙해진 느낌이다. 새내기만이 가지고 있던 풋풋함도 사라진지 오래다. 마찬가지로 혜성에게 설렜던 감정도 자신과 다른 걸 발견해가며 신기해했던 때와 달리 이젠 잘 다듬어져 새로울 것이 없다. 혜성 역시 민우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였다. 요즘 툭하면 서로의 취향에 대해 태클을 거는 걸 보면 그랬다.


“해 뜨겁다. 카페 갈까?”

“나와서 걷기 시작한지 5분밖에 안됐습니다.”


뭘 얼마나 있었다구. 해가 뜨겁다며 벌써부터 어디론가 들어갈 궁리부터 하는 혜성은 밖에서 하는 활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까처럼 실내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실내 운동을 해도 땀을 흘리는 것보단 당구나 볼링 같은 걸 좋아했다. 민우는 그게 무슨 운동이냐고 했지만 혜성을 따라 몇 번 볼링을 쳐보곤 이것도 운동이 된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이었다. 밖에서 땀 흘리는 운동을 좋아하는 민우에게 실내에만 처박혀있는 건 지루함 그 자체였다. 거기다 잘 치지도 못하니 혜성과 볼링장이나 당구장을 가면 구경만 하다 오는 시간이 더 많았다. 처음엔 혜성이 치는 걸 보며 신기해하고 감탄했었지만 것도 초반 몇 번 뿐이었다. 혜성이 가르쳐주는 것도 점점 재미없어졌다.


‘아니, 아니. 자세가 그게 아니라니까. 팔을 이렇게 하라고.’

‘알았다고. 근데 왜 짜증을 내?’


요즘 들어 더 그런 것들이 재미없어진 건 어느 순간부터 혜성이 가르쳐준다고 하는 말들이 잔소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혜성도 실력이 늘지 않는 민우와 게임을 치려니 재미없는지 가르쳐주면서도 은근 짜증을 내기도 했다. 혜성이 짜증을 내면 그건 그거대로 민우도 화가 나서 말다툼으로 이어진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서 아예 같이 가는 일 자체가 줄어들었다. 데이트 장소로 제일 먼저 제외된 건 당구장, 그리고 볼링장 순이었다.




민우는 사람은 자고로 하루에 15분 정도는 햇빛을 쐐야 한다며 안으로 들어가려는 혜성에게 팔짱을 끼며 붙들었다. 혜성도 이번엔 순순히 민우의 옆에 붙어 나란히 걸었다. 민우는 혜성과 달리 밖에서 하는 활동을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건 축구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즐겨했던 축구는 나름 자신도 있었고, 따로 축구 모임을 만들어 시간만 맞으면 공을 차러가기도 했다. 축구는 집에서 게임으로만 하는 혜성으로선 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 것 같은 민우가 당연히 신기했다. 축구 경기를 보는 거야 혜성도 좋아했지만 저렇게 본격적으로 유니폼과 신발까지 갖추고 자기가 축구를 하러 다니는 사람이 혜성의 주변에는 없었다.


“맞다. 주말에 안 까먹었지?”

“뭐? 아― 아아, 안 까먹었어.”

“방금 생각난 것 같은데.”

“아냐. 생각하고 있었어. 영화 보는 거.”

“저번엔 네가 보고 싶은 거 봤으니까 이번엔 너도 무조건 보는 거다.”


이번엔 내가 보고 싶은 걸 보고 말겠다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는 혜성에게 민우는 심드렁하게 고갤 끄덕였다. 영화 취향도 극과 극인 두 사람이기에 영화도 번갈아가며 서로 상대방이 보고 싶은 걸 같이 봐주기로 했다. 가끔 도저히 2시간이 넘는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을 땐 그냥 내내 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같이 영화관에 오나 싶었지만 데이트라고 할 만한 게 이런 것뿐이었다. 영화 보고, 밥 먹고, 차 마시고. 거기다 술도 마시고, 그러다 섹스도 하고. 같이 할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게 혜성과 민우에게는 꽤나 까다로운 일이었다. 어딜 가려고 해도, 뭘 먹으러 가려고 해도, 겹치는 법이 없는 취향 덕에 둘은 항상 적절한 타협점을 찾거나 누구 하나가 양보해야지 결론이 나곤 했다.


연애가 순탄하기만한 사람은 없겠지만 혜성도 민우도 서로 자신들의 연애만 이렇게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덜컹거리는 건지 궁금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랑 코드가 잘 맞고 취향도 비슷한 사람과 연애를 하는 건 아닐 테고. 그럼 부딪치고 덜컹거릴 때마다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나가는 걸까. 그럴 때마다 매번 싸우고, 이해하고, 그래서 둘 중 누군가 양보하거나 타협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걸까. 애초에 부딪치지 않도록 잘 맞으면 좋겠지만.


민우는 옆에서 눈이 부시다며 손으로 그늘을 만든 채 얼굴을 찡그리고 구시렁거리는 혜성을 돌아봤다. 어쩌면 혜성과 자신이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려운 길로 가려고 작정한 거였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권태기도 아니고, 심각하게 다툰 것도 아니고, 그냥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도 문득 문득 진지해져버린다.


우리는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을까?





*





“너 돌았냐?”


뱉어 놓고도 목소리가 너무 크게 나갔구나 싶었다. 혜성은 주변의 이목이 제게 다 집중된 걸 깨닫곤 화를 억누르려 노력했다. 영화관에 가려고 이미 전철 역사 안으로 들어온 뒤에 민우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어이가 없다 못해 자신의 화를 순간적으로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 같았다.


“뭐라 그랬냐, 지금.”

-못갈 것 같다구.

“그 이유가 축구라고?”

-갑자기 연락이 왔어. 내가 빠지면 안 된단 말이야.

“야, 그래도 나랑 먼저 약속해놓고…. 갑자기 당일 날 파토내는 건 어느 나라 매너세요?”

-나도 미리 알았으면 너한테 못 본다고 했지. 내가 이렇게 갑자기 경기가 잡힐 줄 알았나…. 미안해, 진짜로. 영화 아직 취소 가능하잖아. 응?


지금 영화 취소해서 돈 받는 게 중요하냐. 약속한 시간 1시간 전에 오늘 못 만난다는 말을 너무나 당당하게 한다. 것도 이유가 고작 축구다. 갑자기 잡힌 경기가 일주일도 더 전에 잡은 혜성과의 약속보다 우선인 모양이다. 지난번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땐 그래도 혜성과 약속을 잡기 전에 경기가 있다며 아예 안 된다고 못을 박았었다. 축구가 그렇게 좋냐. 좀 꽁하긴 했지만 어쨌든 먼저 잡힌 스케줄이 있으니 혜성도 뭐라고 하진 않았었다. 근데 이건 아니지. 어쨌든 오늘은 내가 우선인데!


-미안, 미안. 영화 내일 보자. 내가 예매할게. 엉? 알았지?

“야, 이민우….”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통화를 끊어버리는 민우에 혜성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났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화를 내고 싶어도 어디 풀 곳도 없다. 혜성은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짧게 한숨을 폭- 쉬곤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아무리 화나도 핸드폰은 던지지 말아야지. 할부금도 아직 남았는데.

그냥 혼자 화도 삭힐 겸 영화를 보러갈까 싶다가도 갑자기 세상만사 모든 게 다 귀찮아진다. 사실 혼자 영화 보는 걸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취향도 안 맞는데 같이 영화를 보러 다니는 건 어쨌든 ‘같이’ 있고 싶어서였다. 뭐 서로 지루해하는 얼굴 볼 바에야 혼자가 낫다 싶을 때도 있지만 이젠 왠지 혼자는 쓸쓸한 기분이었다. 같이 있는 게 좋았다. 사람과 같이 있는 게 좋은 게 아니라, 이민우와 같이 있는 게.


어디가 그렇게 좋냐, 뭐에 매력을 느껴서 사귀게 됐냐 물어보면 사실 혜성도 그 이율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었다. OT때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 같은 시선을 느껴 좇아가보니 민우가 있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같은 수업을 들으며 다시 만났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계속 제게 꽂히는 눈길을 혜성은 모르는 척 할래야 할 수 없었다. 뭔가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로 대놓고 표현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민우의 눈은 참 솔직했다. 아주 솔직하게 혜성만 담고 있었다. 수업에서 팀플로까지 엮이는 바람에 서로 의도치 않게 가까워졌지만 그 이상 다가오거나 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같은 수업을 듣는 다른과 친구 정도였다.


고백도 누가 먼저였다고 딱 말하기 어려웠다. 처음 즐겨보는 대학생의 유흥에 흠뻑 빠져있던 축제 시즌이었다. 과 주점에서 이미 1차로 마시고 무리에서 빠져나와 알딸딸한 상태로 캠퍼스를 걷던 혜성은 학교 호수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시끌시끌한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옆에 누가 서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돌아보자 마찬가지로 술 때문에 볼이 붉게 달아오른 민우가 있었다.


‘뭐해, 여기서.’

‘…그냥.’

‘나랑 술이나 한 잔 할래?’


뭔 술? 하는데 민우가 들고 있던 봉지를 내밀었다. 봉지엔 캔맥주 두 개와 과자 한 봉지가 들어있었다. 혜성이 앉아있는 걸 보고서 맥주를 사온 건지, 아님 그냥 혼자 마실 생각으로 사온 건진 모르겠지만 혜성은 엉덩이를 들어 벤치 중앙에 있던 몸을 옆으로 옮기며 민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스물이 되고나서 처음 술을 마셔본 건 아니었지만 제대로 술이란 걸 접한 지 둘 다 이제 고작 5달째였다. 아직 술이 익숙할 리가 없었다. 각자 학과 주점에서 이것저것 섞어 마시고 온 터라 이깟 캔맥주에도 취기는 훅 올라왔다.


‘이민우.’

‘응.’

‘나 너한테 관심 있다?’

‘…난 아닌데.’

‘진짜?’

‘난 관심보다 좀 더 나간 것 같아.’


취해서 하는 소린지 모르겠지만 민우는 살짝 풀린 눈으로 혜성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관심보다 더한 것. 좋아한단 소린가. 항상 자신을 보고 있는 민우를 의식하다보니 혜성의 눈도 자연스레 늘 민우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그런 건 아직 깊게 생각해본 적 없지만 희한할 정도로 민우가 편했다. 민우의 눈길을 받는 것도 불편하다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도 생각해보니까 그냥 관심은 아닌 것 같아. 혜성의 말에 무표정하게 있던 민우의 얼굴에 순간 웃음이 떠올랐다. 사르르 얼굴 전체로 번지는 미소에 길게 접혀 사라지는 눈. 혜성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사람의 웃는 얼굴이 예쁘단 생각이든 건 민우가 처음이었다.





그냥 표를 취소해버리고 역 밖으로 나가며 민우에게 카톡이 와있는 걸 봤지만 확인하진 않았다. 경기 지라고 저주해야지. 속으로 민우를 잘근잘근 씹으며 혜성은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이민우를 안주 삼아 혼술을 할 예정이었다. 저번에 다운 받아놓고 못 봤던 영화도 한 편 때려야겠다. 혜성은 핸드폰을 아예 무음으로 바꿔버렸다. 눈엔 민우에게서 연락이 와도 오늘은 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옷을 싹 갈아입고 조촐한 술상 세팅까지 마친 혜성은 모니터 겸 텔레비전에 영화를 재생시키고 침대 위로 올라가 벽에 기대앉았다. 혜성이 좋아하는 영화는 주로 액션이었다. 화면 가득 눈 돌아가는 CG들이 가득하고 깊게 생각 안 하고 볼 수 있는 영화들이 좋았다. 악인이 확실하고 결말을 곱씹으며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해석할 필요 없는 그런 거. 귓전을 때리는 음향으로 가득한 전투씬도 좋아했다. 이런 건 영화관에서 봐야 제 맛이지. 자신과는 영화 취향이 극과 극을 달리는 민우는 멜로나 감수성 짙은 영화들을 좋아했다. 노래는 무슨 힙합, EDM, 팝만 들으면서 영화 취향은 왜 이렇게 조용하고 잔잔한 타입이야. 둘의 중간을 찾기 힘들어 영화를 볼 때 누구 하나가 양보하지 않는 한 따로 보는 것만이 답이었다. 


언제부터 사귀자! 라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축제 이후 자연스레 서로를 그렇게 인식했다. 궁금하고,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이게 뭔지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알아챌 수 있는 그런 감정. 그렇게 1년 동안 나름 차곡차곡 쌓아왔다고 생각했다. 관심에서 더 나간 그 감정도 넘어설 만큼. 물론 그 1년 동안 둘이 참 다른 게 많다는 것도 깨달았다. 여전히 깨닫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맞는 게 이렇게 없나 싶을 정도로 다르다.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것부터가 달랐다. 걸치고 다니는 옷 중에 그나마 겹치는 아이템이라면 후드티와 청바지 정도랄까. 그리고 트레이닝복.


“와- 연락 한 통 없냐.”


무음으로 해놓을 땐 언제고, 영화를 보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던 혜성은 입을 비죽이며 베개 근처로 핸드폰을 휙 던졌다. 통화 이후 왔던 카톡 말곤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카톡을 확인하지 않는 혜성을 알고는 있는지. 어쩌면 축구에 정신이 팔려서 민우야 말로 그 뒤로 핸드폰 따위 신경도 안 쓰고 있을 게 뻔했다.

그동안 경기 보러 오라며 민우가 몇 번 혜성에게 미끼를 던졌던 적도 있었지만 차라리 같이 운동장에서 가볍게 공차기를 했으면 했지, 구경하러 가고 싶진 않았다. 거기에 있는 사람 모두 혜성과는 어떠한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또 혼자 멍청하게 앉아서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고? 그러다 뒤풀이를 따라가 고기나 몇 점 집어먹으며 대화에 끼겠지만, 어떠한 공통분모도 없는 사람들 사이의 서먹함이 혜성의 눈에 선했다.


가끔 민우가 자긴 치지도 못하는 볼링이랑 당구까지 배워가며 너랑 놀아주지 않았냐 따질 때도 있지만 배워놔서 나쁠 건 없었다. 사람 여럿이 모여 할 게 없을 때 볼링이나 당구가 얼마나 유용한데. 특히나 남자들 사이에선 피씨방 다음으로 많이 갈만한 장소들이었다. 친해지자고 운동장을 찾아 ‘축구나 한 판 할까요?’ 할 순 없잖아.


보려고 벼르고 있던 영환데 어째 오늘은 날이 영 아닌지 내용이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혜성은 어느새 다 비워버린 캔을 흔들다 한 손으로 구겨 대충 침대 밑으로 던졌다. 언제 다 마셨지. 무슨 화면인지도 모르고 보면서 그 사이 술만 야금야금 마셨나보다. 혼자 있는 것도, 혼자 뭘 하는 것도 싫어하거나 어려워하는 편이 아닌데 이상하게 요즘 따라 그렇다. 혼자인 게 외롭단 생각이 자꾸만 든다. 연애가 이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민우가 이렇게 만든 건지. 쓸데없는 잡생각만 많아지는 오후였다.


그리고 결국 날이 다 저물고 시계가 자정을 가리킬 때까지도 민우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




민우는 다리를 조금씩 절뚝거리면서도 열심히 걸었다. 새삼스레 혜성의 집이 이렇게 오르막에 있었나 싶었다. 어제 연락도 않고 그대로 그냥 뻗어서 자버린 것도 그렇고, 오늘도 보자 해놓고 해가 중천이 돼서야 눈을 떠서 결국 영화는 물 건너갔다. 혜성은 카톡은 볼 생각이 없는지 어제 보낸 것도 여전히 1이 사라지질 않는다. 전화를 해도 안 받는 게 충분히 이해가 갔다. 화 많이 났겠지. 민우도 나름 핑계를 대자면 어제 태클이 제대로 걸리는 바람에 다리를 좀 다쳤었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통증이 꽤 오래가고 상처도 난지라 치료하고 기숙사에 들어가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내리 잠만 잤다. 다쳤다고 얘기해도 혜성은 그러게 무슨 네가 프로도 아니고 그렇게 열심히 하다가 다치기까지 하냐며 오히려 짜증을 낼 것 같았다.


연락 안 받는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혜성의 자취방이야 밥 먹듯이는 아니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 이상은 드나들었고, 도어락 비밀번호야 공용이나 마찬가지였다. 밖에 나가는 걸 귀찮아하는 혜성이 이 시간에 약속도 없는데 집에 없을 리 없었다. 혜성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자취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집돌이가 되어버린 듯했다. 언제부턴가 모든 걸 집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먹는 것도 차라리 집에서 해먹자며 자신의 요리 솜씨를 자랑하곤 했는데, 백종원 아저씨와 인터넷만 있다면 못할 게 없다며 해서 내놓는 것들이 나름 먹을만 하긴 했다.


사람이 북적거려서 거의 사람에 치이다시피 걸어야 하는(예를 들면 강남 혹은 홍대) 곳은 좋아하지 않는 혜성 덕에 학교가 아닌 밖에서의 데이트는 장소를 정하는 것도 힘들었다. 당연하게도(또는 예상했듯이) 민우는 여기저기 찾아가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사람 많고 시끌벅적한 거리나 가게도 오케이였다. 어차피 돈 없는 대딩들이니 데이트라고 해봤자 거창하고 특별한 데를 가는 것도 아니지만.


“신혜성- 나 왔다.”


자기 집처럼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민우는 현관에 있는 혜성의 운동화를 확인하곤 곧장 혜성의 방으로 향했다. 방 문을 열자 무슨 암흑 속에 들어온 것처럼 어두운 방 안의 풍경에 민우는 흠칫하며 멈춰 섰다. 암막까지 쳐놔서 문을 닫으면 정말 보이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이제 곧 여름이 예고도 없이 찾아올 텐데 겨울잠이라도 잘 건지 혜성은 침대에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신혜성. 다시 한 번 부르는데도 미동도 않는다. 잠귀가 밝은 혜성이 민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야― 혜성아.”

“…….”

“화났어?”

“…….”

“좀 일어나봐. 나 다쳤단 말이야.”

“…….”

“다리 부러졌어.”


그 소리에 이불이 휙 걷히더니 어둠 속에서 혜성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민우가 서있는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불을 킨 혜성은 영 자다 일어난 사람 같지 않았다. 머리도 감았고, 눈도 붓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어난 지는 꽤 된 모양이었다. 민우의 다리를 살피던 혜성은 제가 너무 멍청하게 낚였다는 걸 깨닫곤 숙였던 허리를 곧추세우며 민우를 한껏 내려다봤다.


“진짜 다리 부러지고 싶냐?”

“헐, 부러뜨리려고?”

“모르지.”


그러면서 민우의 정강이를 발로 휙 까더니 다시 침대로 가버리는 혜성의 뒤통수에 대고 민우는 꽥 소리를 질렀다. 


“악! 야, 야! 진짜 아프다고! 다치긴 진짜 다쳤단 말이야!”


순간적으로 아파서 정말 욕이 나올뻔했다. 눈물도 찔끔 나온 것 같고. 혜성은 침대로 기어들어가 아파하는 민우를 흘기다 등을 보이고 누워버렸다. 단단히 삐치긴 삐친 것 같은데. 어떻게 풀어주나 싶어 고민하던 민우는 슬금슬금 혜성의 뒤로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 아파. 진짜로 제대로 까였단 말이야. 다친 다리를 침대 위로 올려 바지를 걷으며 보라고 꿍얼대는 민우에도 아랑곳 않고 감은 눈을 뜰 줄 모르는 혜성이었다.


“안 보여? 나 어제 멍도 엄청 들었어. 봐봐.”


그러면서 훌러덩 티셔츠를 벗어 혜성의 얼굴로 던져버린 민우였다. 혜성은 제 얼굴을 가린 민우의 티셔츠를 치우며 한껏 짜증난 얼굴로 결국 몸을 일으켰지만 웃통을 까고 허리에 있는 조그만 멍을 가리키고 있는 민우를 보자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런 혜성을 보는 민우의 입가에도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참 이런 건 맘이 잘 맞는 것 같다. 속궁합도.




*




관계 중에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길게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 사람들의 평균 섹스 시간은 애무에서 삽입, 사정까지 합쳐도 10분에서 12분 사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당연히 상대방에게만 집중해야겠지만 오롯이 관계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정말 끝내주게 좋아서 다른 생각은 할 틈도 안 주는 경험을 살면서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까? 


혜성과 민우 둘 다 서로의 첫 경험이라 비교할 대상조차 없긴 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속궁합이란 게 이런 거란 걸 한 세 번쯤 됐을 때 느꼈다. 처음엔 어색하고 뻣뻣해서(그리고 아팠다) 느낄 틈도 없었고, 두 번째엔 처음보단 수월했지만 사정은 결국 서로의 손을 빌려서했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여유란 것이 생겼고 서로를 애무하며 느끼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뒤부턴 성감대도 찾아가고 체위도 바꿔가며 정말로 관계를 즐길 수 있었다. 섹스가 이렇게 좋은 거였다니! 한창 성욕도 의욕도 넘쳐나는 스무 살의 두 남자에겐 섹스는 신세계였다. 이 행위 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흥분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서로이기에 더 좋은 것도 있었다.


“아, 거기 너무 세게 잡지 마. 멍들어서 아파.”

“이거 보다 여기가 더 아플 텐데?”


일부러 더 아프라고 하는 짓인지 거의 다 빠져나왔던 것을 갑자기 뿌리까지 깊게 박아 넣는 혜성에 민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충분히 풀어준 뒤긴 했지만 내내 부드럽게 움직이다 갑작스레 각도를 틀어 세게 움직여대니 몸이 다시 긴장하며 뒤 역시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좁아진 곳이 혜성의 것을 조이니 혜성의 미간 사이에도 주름이 생겼다 사라졌다.



딱히 이러려고 혜성을 찾아왔던 건 아니지만 혜성의 집에 오면 대부분은 섹스를 하게 됐다. 밖에선 모텔을 대실 하자니 가끔 남들 눈이 신경 쓰이고, 무엇보다 돈이 아깝기도 했다. 대학생에겐 2만원도 쌓이면 큰돈이었다. 민우가 웃통을 벗고 제 멍든 곳을 가리킬 때부터 혜성의 얼굴은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묘하게 변해갔다. 일어나 제게 다가오는 혜성을 민우도 피할 마음은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혜성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자 민우의 목은 자연히 뒤로 바짝 꺾였다. 말없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혜성과 기 싸움이라도 하듯 눈을 마주치고 있던 민우가 결국 먼저 눈을 감자 혜성의 입술이 찾아들었다.


그 뒤론 거의 같은 패턴이었다. 서로 잡아먹을 듯 달려들어 키스를 하다 배가 붙고, 아래가 붙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침대 위였다. 아무리 급해도 안전한 섹스를 하자, 서로를 배려하자 나름 다짐 비슷한 것을 했기에 공을 들인 애무와 콘돔은 필수였다. 가끔 둘 다 술에 진탕 취해 삘(?)이 왔을 때는 앞뒤 잴 것 없이 서로 물고 빠는 일이 있기도 했지만 이럴 경우 끝에 힘든 건 대부분 민우였다. 혜성도 민우도 섹스는 상대와의 교감이라고 생각했기에 일방적인 욕구 해소를 위해서 관계를 하거나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1년 동안 그 교감은 나름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로를 만족시켰고 그 시간만큼은 다투거나 서로 안 맞는다며 빽빽 거릴 일도 없었다. 서로를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데에 집중하느라 딴 생각은 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민우에겐 요즘 들어 전 같지 않았다. 물론 섹스는 여전히 만족스러웠지만 가끔 도중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곤 했다. 끝나고 씻은 뒤에 뭘 하지, 뭘 먹지, 과제는 언제까지였지― 같은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그만큼 집중하지 못한다는 뜻이기에 찝찝하기도 했다. 온전히 혜성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던 예전과는 무언가 달라져있었다. 어쩌면 이제 이 관계가 주는 쾌감이나 만족에 길들여져 자꾸 다른 생각을 하려는 건지도 모른다. 삐거덕거리는 사이, 그 흔들림의 여파가 여기까지 영향을 미친 거라면 왠지 심각하게 이 연애에 대해 생각을 좀 해볼 필요가 있었다.


“앗….”

“너 딴 생각했지, 지금.”


민우는 대답대신 튀어나오려는 숨을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발끝을 오므렸다. 민우의 생각이 다른 데 머무르는 걸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혜성이 민우가 자지러지는 부분을 쿡, 찔렀다. 이 포인트를 알고서 딱 건드린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그걸 터득했을 만큼 많이 했나 싶어 신기하기도 했다. 혜성이 움직일 때마다 숨소리보다는 야릇하고 거친 소리가 터지려는 것을 삼키며 민우는 실눈을 뜨고 혜성을 흘겼다. 그러다가도 제 흐트러지는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혜성의 시선에 못 이겨 고개를 틀었다.


혜성은 관계를 할 때 눈을 감고 느끼는 법이 없었다. 민우에게서 눈을 떼는 법도 없었다. 민우가 자신을 애무할 때도 늘 민우를 보고 있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이 처음엔 부끄러웠고 그 다음엔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보지 마. 민우가 나름 부끄러워하는 티를 내며 그렇게 말하면 혜성은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어왔다. ‘다 벗고 살 맞대고 있는데 뭐가 부끄러워서?’ 혜성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홀딱 벗고 섹스를 하고 있으면서 자신을 향한 시선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어찌 보면 별 일이긴 했다.


“흣, 하, 아….”


짧고 빠르게 툭, 툭 치고 빠지는 혜성 덕에 민우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졌다. 혜성은 끙끙거리다 저도 모르게 눈을 찡긋거리며 인상을 쓰는 민우를 보고 있었다. 민우가 머리를 비틀 때마다 이불에 이리저리 흩어지는 머리칼들과 민우의 표정은 시각적으로 묘하게 사람을 흥분시키는 뭔가가 있었다. 가끔 멍 때리고 있을 땐 좀 귀엽고, 또 진지하게 생각을 할 땐 날카로워 보이기도 하는 얼굴. 그러다 이렇게 관계를 할 땐 야한 얼굴.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혜성에겐 야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아직까지 민우에게 대놓고 말해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나와 제 입술을 핥아 올리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하아….”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민우가 입술을 깨물고 콧소리를 내는 사이, 혜성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지다 흡,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혜성은 절정에 다다를 때에 다른 때보다 더 혜성의 움직임이 천천히 줄어들고,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던 민우의 가슴도 점점 제 속도를 찾아갔다. 혜성이 몸을 일으키며 빠져나가자 허한 기분에 민우가 다리를 붙이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콘돔을 휴지에 싸서 버린 혜성은 다시 침대로 돌아와 민우의 등을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혜성이 숨을 쉴 때마다 목 언저리가 간지러웠지만 지금은 것보다 아직 완전히 수그러들지 않은 혜성의 것이 엉덩이에 닿는 게 더 신경 쓰였다. 민우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앞으로 빼다 말고 제 어깨를 감싸 안은 혜성의 팔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신혜성.”

“응.”

“나 사랑해?”


곧바로 대답이 들려오질 않는다. 민우도 이런 걸 제 입으로 직접 묻는 일은 거의 없었다. 표현하는 데에 있어선 돌려 말하기 보단 직구로 나가는 타입이긴 하지만 민우도 제정신에 사랑한다 말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느냐고 혜성에게 확인하듯 물을 일은 더 없었다. 말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혜성에 민우는 고개를 틀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혜성은 뭔가 곤란한 듯한 얼굴로 민우를 보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며 똑바로 누웠다. 어쭈, 정말 대답 못하네. 민우가 보채듯 몸을 돌려 혜성의 팔에 머리를 얹자 혜성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틀었다.


“뭘 그런 걸 물어.”

“뭐야. 왜 대답을 못해?”


그런 걸 묻냐고 하는 목소리에 쑥스러움이 묻어나는 걸 보니 대답을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을 때도 있었다. 눈빛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 말고도. 왜 갑자기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게 어쩌면 최근 들어 전 같지 않다고 생각한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민우가 관계를 할 때 끈질기게 따라붙는 혜성의 시선이 부끄럽듯, 혜성도 마음을 말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괜히 쑥스러울 수도 있었다. 둘 다 그런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홀딱 벗고 살갗을 맞대고 있는 건 괜찮고 이런 건 쑥스럽다니?


민우가 얼른 대답해보라는 듯 혜성 턱 밑으로 얼굴을 더 바짝 갖다 대자 혜성은 민우의 머리를 살짝 밀어내며 아예 몸을 일으켰다. 나 먼저 씻을게. 그러곤 바닥에 널브러져있던 옷을 들고 방을 나가버리는 혜성에, 민우는 작게 한숨을 폭-쉬며 똑바로 몸을 뉘였다. 혜성이 마음도 없으면서 1년이나 저를 만났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다른 걸. 그 다른 걸 다 버티고 이렇게 함께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도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혜성은 욕실 문을 닫고 수건걸이에 대충 옷을 걸었다. 샤워기를 틀고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들이밀며 눈을 감았다.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위로 싹 밀어 올리며 눈을 뜬 혜성은 문 쪽으로 쳐다보다 피곤한 듯 두 눈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민우의 질문이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까짓 거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하는 게 뭐 그리 어렵나 싶다가도 막상 아무렇지 않게 내뱉기엔 제 몸속 어딘가에서 부터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민우도 설마 제 마음을 몰라서 저러나 싶기도 하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는 건 아니잖아. 물론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던 거겠지만. 연애란 다 이런 걸까.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그리고 연애 기간에 상관없이. 상대의 마음을 괜히 말로 확인해지고 싶어지는 그런 거. 제가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 걸까, 그리 생각하니 기운이 쫙 빠져버린다. 역시 연애는 어렵다. 연애가 어려운 건지, 남자와 남자의 연애가 어려운 건지, 것도 아님 민우와의 연애가 어려운 건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




오랜만에 학교가 아닌 밖에서 데이트 좀 하자며 만난 참이었지만 둘 다 생각은 뻔한 패턴을 벗어나서 같이 움직이다 보면 분위기 전환이 좀 될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젊은이들에게 핫 하다는 거리에 놀러왔지만 문제는 점심 메뉴를 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됐다. 찾아보고 왔을 리 만무한 두 사람은 면이냐, 밥이냐로 길에 서서 5분을 허비했다. 대낮부터 속 부대끼게 무슨 면이냐고 하는 혜성과 그럼 밤에 먹는 면은 뭐 속이 괜찮은 거냐며 투덜대던 민우의 대립은 결국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각자 다른 메뉴는 시키는 걸로 끝났다. 거기서 끝난 줄 알았다. 정말로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다가 메뉴판 가격을 보고 기겁하며 나가자 하는 민우에게 혜성은 자리까지 다 세팅해놨는데 뭘 나가냐며 미간을 좁혔다. 미간 사이의 주름에 짜증이 묻어나는 걸 모를 리 없는 민우였지만 용돈 타 쓰는 대딩 주제에 한 끼 식사로는 너무 사치였다. 나가자니까. 싫어. 메뉴 시킨 것도 아닌데 뭐가 어때서. 싫다니까, 그냥 먹어. 


혜성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그게 피해가 아닌데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필 때도 있었다. 미움을 받기 싫어하는 건지 아님 귀찮아서 그러는 건진 몰라도 처음엔 그런 혜성이 착하고 배려심 깊다 생각하던 민우였다. 지금은? 지금은 그런 혜성이 때때로(사실 자주) 짜증났다. 화를 내거나 따지는 자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괜한 걸로 트집 잡는 것도 아니고 음식에서 이물질이 나와 따지는데도 ‘그냥 빼고 먹으면 되잖아. 뭐 바퀴벌레가 나온 것도 아니고. 날파리 하나에 그렇게 화를 내.’ 이러니 속이 안 터지는 게 이상한 거였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취소하고 나간 것도 아니고 이 식당에 들어온 지 고작 5분이었다. 그냥 나중에 올게요- 하고 나가고 되는 걸 싫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결국 민우도 억지로 엉덩이를 붙여야 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23,000원 짜리 파스타를 먹고 있냐.”

“네가 먹고 싶다며.”

“내가 파스타를 먹고 싶댔지, 이렇게 비싼 파스타를 먹고 싶댔냐?”

“그냥 쫌. 먹어라. 어차피 시킨 거 그냥 맛있게 먹으면 되잖아?”

“야, 이 돈이면….”

“아, 내가 산다고. 내가 살 테니까 그만.”


누가 사달랬냐고. 혜성도 집에서 돈을 타 쓰는 형편이면서 왜 쓸데없는 데서 저렇게 오기를 부리는지 모르겠다. 물론 혜성의 자취방 전세를 따져봤을 때 혜성의 집이 ‘좀’ 사는 축에 드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봤자 쓰는 돈 모두가 제 돈이 아닌 부모님 돈인 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더 구시렁대봤자 혜성의 짜증만 살 듯 싶어 민우는 꾸역꾸역 면을 집어넣어 제 입을 막았다. 비싼 만큼 맛은 있다. 맛은 있지만 그 맛이 그냥 제가 아는 맛이다. 딱히 특별할 것도 더할 것도 없이. 23,000원이나 주고 먹었더니 배가 아프다. 그래도 남기는 게 아까워 싹싹 다 긁어먹었다. 


결국 계산은 각자 했다. 사주고 얻어먹고, 번갈아 가면서 그랬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바득바득 우기며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내미는 민우와 더 실랑이를 하기 싫었던 혜성이 물러나며 이 사소한 다툼도 끝나는 듯했다. 


“저기 가서 옷 구경 하자.”


서로 약간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 걷다가 편집샵을 발견한 민우가 가게를 가리키더니 혜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휙 가게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혜성은 자꾸 한숨이 새어나오려는 걸 참으며 민우를 따라 들어갔다. 오늘 더 이상 이 데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 하나가 더 많이 참는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민우는 오늘 본 것 중 가장 활기찬 모습으로 매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민우의 스타일이 가득한 곳이다. 그렇다는 건 혜성의 스타일은 아니란 소리였다.


오늘도 민우의 스타일은 혜성에게는 자긴 절대 안 입을 만한 컬러의 향연이었다. 둘 다 패션에 신경 쓰는 편이긴 하지만 스타일이 워낙 달라 같이 쇼핑을 하는 건 힘들었다. 민우가 원하는 아이템들이 가득한 곳엔 혜성이 살만한 게 별로 없었다. 혜성도 후드나 청바지처럼 편한 옷을 자주 입긴 했지만 주로 무채색 계열의 댄디하고 깔끔한 스타일을 선호했다. 실험적인 것엔 도전도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민우가 입는 옷들은 남자가 소화하기 힘들 법한, 아니 잘 입지 않을 법한 컬러였다. 오늘 같이 인디 핑크라든가, 혹은 쨍한 주황색이라든가 어렸을 때 나무를 색칠하라고 하면 고르던 초록색 크레파스 같은 색이라든가. 그런 원색마저도 잘 받으니 입는 거지만. 레이어드 해서 입는 것도 좋아하고, 무난한 것보단 유니크한 것들을 좋아했다. 그런 걸 찾으러 편집샵을 뒤지기도 했고, 디자이너나 브랜드를 따지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다. 물론 비싸서 그냥 내려놓고 나오는 일이 많기도 했지만 맘에 드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돈을 모아서 사는 게 민우였다.


이런 상황이니 둘이 쇼핑을 하는 건 무리였고, 옷이나 액세서리를 선물하는 건 더 힘들었다. 같이 쇼핑을 하러 가도 따로 옷을 사고 만났고, 같이 들어가더라도 상대가 사는 옷엔 이래라저래라 참견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도 한 번 싸우고 난 후에야 합의를 본 거였다. 서로에게 옷을 선물하느니 돈을 주겠노라고 다짐도 했었다.


“혜성아…. 아, 아니다.”


혜성을 부르던 민우는 이미 지루함이 가득한 혜성의 얼굴에 다가오려던 발을 멈추곤 제 손에 든 비니를 잠시 들여다보다 계산대로 향했다. 여름이 다가오는 마당에 덥게 무슨 모자야. 혜성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려다 이런 반응일 줄 알고 그냥 사는 모양이었다. 슬그머니 계산하는 민우 뒤로 다가간 혜성은 찍히는 가격을 보고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을 흘렸다. 밥은 그렇게 비싸다고 난리를 치더니 저깟 골무 같은 걸 저 가격을 주고 사다니! 혜성으로썬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마다 우선순위가 다르다지만 먹는 데 쓰는 건 그렇게 아까워하면서 저런 걸 사는 데에는 망설임 없이 돈을 쓰는 민우가 신기했다. 이런 거 또 말해봤자 감정만 상할 테니 굳이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지만.


“오늘 무리한 거 아니냐.”

“왜, 뭐가.”

“밥값에 모자 값에…. 지금 쓴 돈 일주일치 용돈도 넘은 것 같은데.”

“너한테 돈은 안 꿀 테니까 걱정 마셔.”


제 맘에 드는 아이템을 얻어 좋아하던 것도 잠시, 가게를 나오며 역시나 한마디 던지는 혜성에게 민우는 말이 삐뚤게 나가려는 걸 최대한 참았다. 내 돈 쓰는 데 뭔 상관이냐며 혜성에게 짜증을 내봤자 서로 감정만 더 상할 뿐이었다. 민우는 이미 상해버렸지만.


분위기 전환 겸 나왔던 바깥 데이트의 끝은 결국 또 감정 상할 일만 남긴 것 같아 둘 다 씁쓸해졌다.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서로 상대를 ‘나름’ 배려해서 이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다. 내가 참아서 더 크게 안 싸우는 거라고. 상대도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건 점점 잊혀져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점점 방향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게.




*




“뭐하고 있어”

―그냥 있는데?

“술 마시자.”

―…콜.


종강이었다. 민우는 바로 기숙사에서 나가지 않고 일주일 정도 더 있을 예정이었다. 9월에 입대가 예정되어 있는 두 사람에게는 마지막 방학이었다. 같이 시간을 보낼 시간도 많지 않았다. 필요한 것만 남겨두고 집으로 부칠 짐을 싼 민우는 침대에 누워있다 혜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성도 아마 빈둥대며 게임이나 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자는 소리에 냉큼 나온다는 걸 보니 민우의 예상이 맞는 듯했다. 민우는 기숙사를 나오며 어느새 후끈해진 날씨에 걸치고 있던 남방의 팔뚝을 걷어 올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것 같은 혜성과 민우에게 몇 없는 공통점을 찾자면 술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진다는 것도. 주량도 비슷비슷했다. 소주 2~3병을 왔다 갔다 했고 주량을 넘어가면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려고 해서 대화란 것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내 말 좀 들으라고 투덜대다 목청도 커지고, 싸우기도 했다. 잘 맞는 걸 찾기는 그렇게 힘들면서 쓸데없이 이런 것만 비슷했다. 술 좋아하고, 고집 세고, 승부욕 강하고.


오랜만에 마음이 맞은 혜성과 민우가 고른 장소는 학교 앞 삼겹살집이었다. 아직 술집은 오픈할 시간이 아니라 술을 마실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고, 둘 다 고기는 절대 거부하는 법이 없었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 오후 4시. 시간이 이래선지 아니면 방학을 해선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각 한 병씩 소주를 끼고서 삼겹살이 익기도 전에 스타트를 끊었다.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이래서 CC는 나빴다. 너무 자주 보고, 붙어있으니 뭐 했냐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서로의 생활 패턴은 다 꿰고 있었고 어제도 보고, 그제도 봤다. 1년 전에는 이게 마냥 좋았다.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다는 게.


“성적 어떨 거 같아?”

“아― 밥맛 떨어지게.”


혜성의 질문에 민우는 얼굴을 있는 힘껏 찌푸렸다가 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밥맛은 떨어져도 술맛은 도는지 잔을 얼른 비우곤 다시 또 가득 따라 입으로 가져간다. 군대 가기 전 마지막 학기라고 대충 막 다닐 생각은 없었다. 등록금에 기숙사비까지. 민우에게 들어가는 돈만 해도 한 학기에 몇 백이었다. 나름 노력한다고 하는데도 날이 갈수록 경쟁은 세지기만 한다. 수강 신청을 망친 까닭에 들을 생각도 없던 수업들을 낑겨넣는 바람에 이번 학기 성적은 사실 기대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야야, 천천히 마셔.”


연달아 또 잔을 채우려하는 민우의 손을 잡으며 혜성은 병을 빼앗아 제 앞에 내려놓았다. 대화 없이 밥을 먹는 게 싫어 꺼낸 얘긴데 아무래도 괜한 얘기를 꺼낸 것 같았다. 나름 사과의 의미로 잘 익은 고기를 민우의 앞접시에 올려놓으니 냉큼 잘 집어먹긴 한다. 어느새 휑해진 불판에 혜성이 고기 1인분을 더 주문하는 사이, 민우는 혜성의 앞에 있던 병을 가져와 잽싸게 가져와 남은 술을 잔에 탈탈 털었다.


“사장님- 여기 소주도 한 병 더요!”

“…야이씨. 너 벌써 3병째야 그럼.”

“아직 멀쩡하잖아.”

“멀쩡하긴. 눈 풀려 가는데.”

“아니거든?”


너 취하면 버리고 간다. 버리고 가지도 못할 거면서 괜히 으름장을 놓는 혜성에 민우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는 혜성은 오늘따라 영 술이 안 받는 건지 스코어가 꼴랑 1병 하고도 1잔이다. 민우가 오늘 왜 이렇게 몸을 사리냐고 자극하니 지금까지 고기 굽느라 못 마신 거라고 입술을 비죽인다. 그러더니 잔을 비우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쓸데없는 승부욕이 발동한 까닭이었다. 혜성이나 민우나 자기가 아무리 해도 안 될 것 같은 거에선 빠르고 쿨하게 포기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제가 노력하면 한 번 해볼법한 것에는 승부욕이 발동하곤 했다. 그게 뭐가 됐든. 


어쩌면 연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애에서도 은근 승부욕이 발동했을지 모른다. 서로 다른 것들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려 하고 익숙해지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싸워도 너무 별 거 아닌 걸로 싸우게 되니 화해하는 것도 흐지부지했다. 화해랄 것도 없었다. 정말 화르르 불타올라 주먹다짐까지 갈 뻔 한 적이 한두 번 있었지만 그마저도 화해는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럴 경우 술에 취해있을 때여서 다음 날 아침, 술이 깨면 아무 일 없었던 양 만나서 해장을 했다. 물론 속에는 서로 꽁한 걸 담아두고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우리.”

“응.”

“다음 달에 어디 놀러갈까?”

“어딜?”

“뭐 산이든 바다든.”

“산 싫어. 올라가는 거 힘들잖아.”

“그럼 바다.”

“야, 여름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누가 사람 많은 거 모르나. 민우는 제 말마다 토를 달며 부정만 하는 혜성을 흘겼다. 말 그대로 입대 전 마지막 방학이었다.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라는 거였다. 뭐라도 추억이 될법한 곳에 가서 술잔을 기울이며 속에 있는 얘기도 좀 털어놓고 싶었다. 이 연애의 끝이 어딜 진 모르겠지만, 군대에 가는 게 헤어짐으로 이어지는 건 왠지 슬펐다. 어쩌면 자연스런 이별이니 좋은 걸 수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마음이 떠나서도 아니고 국가가 갈라놔서 헤어져야 한다는 건 마무리가 영 그랬다.


“그럼 우리 내일로 가볼까? 여기저기 다 돌아다닐 수 있잖아.”

“그 한여름에 기차 바닥에 앉아서 생고생을 왜해.”

“운 좋으면 다 앉아서 다니는 애들도 있던데, 뭐.”

“7월이면 극, 극, 극 성수기라더라. 바닥에 앉을 자리도 없다는데, 무슨.”


그런 민우의 마음은 요만큼도 알지 못하는지 혜성은 여전히 싫은 소리만 쏟아내고 있었다. 이래서 싫다, 저래서 싫다.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계속 좋게 말해보려는 민우도 어느 순간 빈정이 상했다. 혜성은 이제 군대에 가야 되고, 군대에 가면 휴가를 맞춰 나오지 않는 이상 1년에 몇 번 보지도 못할 거란 사실에 대해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할 말도 없으면서 매일같이 통화할 일도 없고, 지겹게 본 얼굴이 그리워도 볼 수 없었다. 그게 길어지다 보면 아마 헤어질 수도 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자연히 식는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뭐 어디가고 싶은 데 없어?”

“…그냥, 뭐.”

“…….”

“그냥…….”

“그놈의 그냥 소리는.”


나왔다, 신혜성 버릇. 민우는 한껏 짜증난 목소리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혜성의 말버릇 중 하나는 ‘그냥’이었다. 평소에 가장 많이 쓰는, 남발해대는 말이었다. 민우는 그 ‘그냥’이란 말을 너무너무 싫어했다. 굉장히 성의 없는 말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는, 이도저도 아닌 두루뭉술한 말. 하지만 혜성은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애매할 때, 혹은 마음을 표현하기 힘들 때 ‘그냥’ 만큼 적절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민우가 그렇게 생각도 제대로 안 하고 ‘그냥’이라고 대답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었지만 혜성은 오히려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그 말 좀 안할 수 없냐, 진짜.”

“뭘 또. 왜.”

“그 말 싫다고.”

“왜 싫은데, 도대체.”

“넌 네가 나랑 왜 사귀냐고 물어봤는데, 내가 ‘그냥’이라고 대답하면 어떻겠어?”

“어떻긴 뭘 어때. 그걸 꼭 말로 해야 돼? 몰라서 묻는 것도 아니잖아. 대답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탁.


탁자에 꽤 큰 소리가 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은 민우가 눈을 치켜뜨고 혜성을 쳐다봤다. 눈빛에도, 온몸에도 화가 났다는 표시가 가득했다. 도대체가 이게 화낼 일인가. 혜성의 미간에도 주름이 새겨졌다. 정말이지 요즘은 피곤하다. 만나기만 하면 뭐가 됐든 감정 상할 일이 생겨버린다. 좋아서 사귀는 거 아닌가, 우리. 분명 좋아서 사귀는 건데 왜 서로 다른 것들이 자꾸 모나게 튀어나와 상대를 찌르는지 모르겠다. 

혜성은 말없이 잔을 비우곤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왜 대화가 여기로 흘렀는지 모르겠다. 시작은 분명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극명하게 드러나는 차이를 좁히기가 어렵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멀어지는 기분이다. 연애란 건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지키긴 힘든 것 같았다.


“알았어.”

“…뭐가.”

“가.”

“어딜 가, 가긴.”

“놀러 가자고. 어디든.”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아.”


흐름을 바꾸고 싶은 건지 대화가 또 이상한 방향으로 튄다. 민우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곤 저도 남은 술을 비웠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안 맞을 수도 있는 건가.


“미안해.”


혜성의 입에서 먼저 미안하단 소리가 튀어나왔다. 진심으로 미안해서 하는 소리 같진 않았다. 그저 이 대화가 지쳐서 튀어나온 말일 뿐이었다. 민우는 차분히 혜성을 보며 물었다. 


“뭐가 미안한데.”


여기서 또 그 소리가 나오면 정말로,


“그냥, 다.”




다시 생각해야 할 때였다.






*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혜성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이유 모를 짜증에 제 발에 걸리는 이불을 저만치 걷어찼다. 에어컨 온도를 낮출 수 있을 만큼 낮췄는데도 이상하게 속에선 열이 난다. 부글부글. 먹은 것도 거의 없는데 얹힌 것처럼 답답하기도 하다. 이 짜증과 답답함을 풀 곳도, 풀 상대도 없다. 혜성의 상태를 이렇게 만든 원인일 한 사람은 일주일 째 연락두절이다. 혜성이 먼저 연락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 대사 같은 말을 내뱉고 사라진 민우에게 연락을 해봤자 이 답답함이 풀릴 것 같진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건지 알 수 없던 그날, 민우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았던 그날. 삼겹살을 먹다 말고 불판 앞에서 벌어진 말싸움은 혜성의 미안하단 말과 함께 꺼진 것이 아니라 아예 전소되어 버렸다. 뭐가 미안한지 이유를 하나하나 다 대며 사과하길 바라기라도 한 건지, 아님 ‘그냥’이라는 그 말 자체에 이미 빡이 친 건지 모르겠지만 민우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혜성도 그동안 민우가 이러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눈치 없이 성적 얘길 꺼냈고, 놀러가자는 말에 태클만 걸었다. ‘그냥’이란 말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화만 더 돋웠다. 그날만 따지자면 그랬다. 민우의 입에선 한참만에야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다른데.’

‘…….’

‘이렇게 안 맞는 거 투성인데. 우린 왜 만날까.’


그러게. 그렇게 대답했다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이별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혜성은 입을 다물었다. 민우가 하는 말은 제게 던지는 질문 같은 게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거였다. 스스로 곱씹으며 푸념같이 늘어놓는 말이었다. 민우도 그 답은 알 리 없었다. 혜성이 알지 못하는 걸, 민우가 알 리 만무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찰떡궁합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서로 적당히 타협할 수 있을 정도로만 다른 거였으면. 좋아하는 감정마저 흔들리지 않도록 좀 적당히 부딪쳤으면 좋으련만.


분명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서로 다른 점들을 발견할 때마다 ‘넌 그렇네, 난 이래.’ 하면서 알아갔다. 알아가는 시간이었기에 터치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러 서로에게 익숙해진 만큼 신경 쓰거나 배려하지 못했다. 조금씩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그게 점점 파고들어 감정이 골이 깊어졌다. 자신의 잘못도 있음을 혜성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게 헤어짐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가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르겠다.


‘당분간 연락하지 말자.’

‘당분간이 얼마난데.’

‘집에 내려가 있는 동안 생각 좀 해볼게, 나도. 너도 생각해봐.’

‘혼자 생각하고 혼자 정리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서로 대화를 해야 할 거 아냐.’

‘지금은 말해봤자 일 것 같은데.’

‘그래서. 혼자 생각해봐도 우리가 왜 만나는지 모르겠으면?’

‘……헤어지는 거지.’


헤어짐까지 염두 해두고 있는 민우에게 내심 서운하고 화가 났다. 혜성은 싸우더라도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고, 민우는 일단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것마저도 다르다. 잘 맞는 게 이렇게까지 없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민우와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혜성도 그날은 더 이상 민우를 붙잡고 있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민우는 다음날 날짜를 앞당겨 집에 내려갔고, 혜성에게는 집에 내려가니 연락하지 말라는 문자 한통을 보낸 게 전부였다. 그 뒤로 일주일이 흐른 지금까지 정말로 연락이 없었다. 민우가 무슨 생각을 얼마나 길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쯤이면 그놈의 정리가 됐을 법도 한데 연락이 없다. 먼저 하자니 연락하지 말라고 했던 게 자꾸 걸렸다. 괜히 먼저 연락했다가 자기 말 무시하느냐며 화를 낼 것도 같고, 만약 씹히면 그건 또 자기가 기분 나쁠 것 같았다. 민우가 정한 그 당분간이란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어, 도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생각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생각만 하다 머리가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후…….”


길게 흩어진 한숨이 다시 혜성의 위로 내려앉았다. 생각의 끝은 늘 똑같다. 똑같은 질문만 반복한다. 그래서― 민우와 헤어지고 싶냐? 몇 번을 물어도 그건 아니다. 민우와 헤어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연애가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이게 첫 번째 연애도 아닌데 어렵다. 물론 교복을 입던 시절의 연애와는 다르기야 하겠지만 단순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매번 달라질 게 연애였다. 연애에는 정석도 없고 정의란 것도 없어 보였다. 민우와 만나며 나름 깨달은 거였다. 연애가 순탄하기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애에 관련된 온갖 지침서들이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니 적어도 이런 상황에 대처할 만한 팁도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그 팁들이 저와 민우에게는 단 하나도 먹히지 않을 것 같지만.


안 맞는 거 투성이인데도, 가끔은 지치고 피곤할 정도로 부딪쳐도 민우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이유는 몇 번을 생각해도 하나뿐이었다.



그만큼 좋아하니까.





*





“집에 내려와서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거면 왜 왔어?”

“…내가 뭘.”

“좀 나가든지.”

“몇 달 만에 보는 아들한테 진짜 넘하네.”

“너 그러고 있는 꼴 보고 있기 답답해서 그런다 이눔아.”


엄마의 잔소리에 민우는 입을 비죽거리곤 잔뜩 성난 발걸음으로 제 방으로 들어왔다. 문까지 쾅 닫으려다 괜히 엄마 잔소리만 업그레이드 시킬까봐 그만두었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 내려올 수 있지만 학기 중엔 굳이 집에 발걸음 할 일이 없었다. 1학년 때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면서 엄마, 아빠 보고 싶다고 이렇게 자주 오냐며 한 소리 들을 탓도 있었다. 자기처럼 살뜰하게 부모님 챙기는 아들이 어딨다고. 서울로 간다 했을 때 처음엔 물가에 내놓은 것 마냥 걱정하던 부모님이었다. 하지만 민우 없이 지내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해졌는지 어느 순간부턴 민우의 안부를 묻는 전화도 뜸해졌다. 물론 어차피 안부 전화는 민우가 더 자주하는 편이었다.


집에 처박혀 빈둥댄 지 오늘로 딱 일주일째였다. 핸드폰은 여전히 조용했다. 혜성에게 연락하지 말라한 건 자신이었다. 생각해보자 한 것도 자신이었다. 전부 자신이 먼저 얘기한 것들이었다. 혜성은 그것을 묵묵히 지키고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 열이 받는다. 말을 잘 들으니 더 열이 받는다. 연락하지 말란다고 진짜 안 하냐?

그래도 한 3일쯤 지나면 연락이 올 줄 알았다. 자기도 이렇게 좀이 쑤시는데 자기보다 더 참을성 없는 혜성이니 도대체 언제까지 연락하지 말아야 되는 거냐며, 아직도 생각이 안 끝난 거냐며 전화를 하든 카톡을 하든 해서 뭐라 할 줄 알았다. 연락하지 말자, 우리 사이에 대해 생각해보자 한 건 진심이었고 진지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상 혜성에게서 연락이 없으니 문득 이대로 헤어지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혜성도 진지하게 생각해주길 바란 거였지만 정말로 연락이 없자 불안함이 앞선다. 진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면 어쩌지? 아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맞는데. 


도대체 혜성이 어쩌길 바라는지 민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알 수 없는 건 자신의 마음이었다. 혜성이 자신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갔으면 그건 그거대로 또 화를 냈을 거면서 연락 없이 감감무소식이자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쩌나 불안해하는 자신.


네가 원하는 건 도대체 뭔데?


거의 그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뭘 어쩌고 싶은 건지 사실 민우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왜 혜성을 만나나 머리 아프게 고민해봤자 답은 늘 하나였다. 좋아하니까 만나지.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딱히 외모 때문에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좋아한다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겉모습으로 따지면 혜성이나 민우나 서로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로 동성 애인은 처음이지만 어쨌거나 지금껏 이상형이라고 꼽아왔던 걸 연예인에서 찾자면 혜성은 김사랑이었고 민우는 박보영이였다. 여성스럽고 길쭉길쭉 늘씬하고 도회적인 이미지의 김사랑과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의 박보영. 처음엔 이상형을 듣고 서로 꼭 자기 같은 스타일 좋아한다 생각했었다. 나중에서야 이상형마저도 참 극과 극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건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일 뿐이었지 사귀고 싶은 ‘애인’ 스타일은 아니었다고 쳐도 둘은 서로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었다. 이미 성별부터가 서로를 만나기 전엔 고려해본 적 없는, 아니 상상해본 적 없는 범주에 들었다.


어떤 사람에게 반하는 순간, 관심에서 마음이 더 옮겨가는 순간의 계기 같은 건 분명 있을 것이다. 민우도 혜성에게 단순한 관심에서 좋아하는 마음으로 발전한 계기가 있었다. 있었을 것이다. 희한하게 그게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눈이 혜성만 좇고 있었다. 이런 점이 좋고, 이런 게 좋고― 그런 걸 하나하나 꼽는 건 어려웠지만 그냥 혜성이 좋았다. 서로 투닥거려도 같이 있는 게 좋았고 혜성의 손도, 어깨도, 가슴도, 미소도, 찌푸린 미간도 좋았다. 가끔 열 받게 만드는 입술과 하는 키스도, 팔걸이로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긴 해도 어깨를 감싸 안는 것도, 섹스도 좋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도 네가 좋다는 그 마음 하나가 전부 이겨버린다. 




멍청이같이. 지금 뭐 하냐, 이민우.

민우는 침대에 엎어져있던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중간에 통신 장애라던가 그런 게 혜성의 연락을 먹어버린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다. 아니면 제 핸드폰이 알아서 혜성의 연락만 걸러 내거나. 핸드폰을 굳이 뒤져보지 않아도 그럴 리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먼저 연락하려니 괜한 자존심이 가로막고 버틴다. 그래도 이대로 버텨봤자 나아지거나 좋아질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길어져봤자 이별에 더 가까워지는 것뿐이었다. 원치 않아도 얼굴도 보기 힘들 정도로 길게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국가가 연애를 방해하다니.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혜성이 몹시― 매우 보고 싶어진다. 따지고 보면 꼴랑 일주일 못 본 건데 매일 붙어있다 보니 허전하다. 서로 속을 긁는 소릴 해대더라도 얼굴을 보고 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민우는 카드와 보조배터리, 모자만 챙겨들곤 방을 나왔다. 운동화를 신는 민우에게 엄마가 어딜 가느냐 물었고, ‘서울’이란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돌아온다. ‘아주 돈이 남아돌지. 서울 왔다 갔다 하는 차비가 얼만데.’ 기숙사 방도 뺐으면서 어딜 가냐고 잔소리를 더 얹던 엄마는 빳빳한 5만원 지폐를 꺼내 민우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민우는 징그럽다고 소리치는 엄마의 얼굴을 붙잡고 볼에 뽀뽀로 답례를 하곤 집을 나왔다.



터미널에서 표를 끊고 버스를 기다리며 민우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서울까지 3시간. 터미널에서 혜성의 집까지 가면 30분 정도. 더운 날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혜성은 99.9 퍼센트의 확률로 집에 있을 것이다. 도착하면 저녁때긴 하지만 약속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사실 혜성이 집에 있고 없고는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없으면 들어가서 기다리면 언젠간 올 것이고, 중요한 건 그래서 혜성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 것이냐―였다.


넌 생각 다 끝났냐. 나는 생각해봤는데…. 봤는데……. 그 뒤로 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결론이 네가 좋다야? 그런 거야 이민우?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연락하지 말자 분위기란 분위기는 다 잡아놓고 고작 내린 결론이 난 그래도 네가 좋다 라니. 이럴 거면 왜 시간을 갖자 했는지 스스로에게 한숨이 나온다. 신혜성이 좋으니 이대로, 지금껏 그래왔듯 그냥 그렇게 지내면 그만인가? 시원하게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앓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민우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돌리다 터미널에 있는 약국으로 향했다. 혼자서는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그놈의 생각할 시간 두 번만 더 가졌다간 머리가 뻥 터져버릴 것 같았다. 시험 기간에 밤을 샐 때도 없던 두통이 민우를 괴롭히고 있었다. 두통약을 사먹고 버스에 오른 민우는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한잠 푹 자면 머리가 맑아질지도 모른다. 서울에 가는 동안만이라도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었다. 약기운이 빨리 돌아 잠이라도 쏟아졌음 하는 바람이었지만 역시나 마음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눈을 뜬 민우는 온통 차밖에 없는 바깥 풍경을 보며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서로 다른 점들을 바꾸려 했던 적은 없었다. 나와는 이렇게 다르다는 걸 이해하고 넘어갔고, 서로의 취향과 성격이 다른 걸 가지고 누가 맞네, 틀리네 따질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갔던 것들이 어느 샌가 거슬리기 시작했고, 그게 점점 쌓여 부딪치는 일이 잦아졌다. 생각해보면 ‘난 널 바꾸려고 하지 않고 너한테 맞춰주고 있잖아.’ 서로 이러고 있었던 것도 같다. 자연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나만 져주고, 나만 맞춰주고 있다 생각했으니.


그만하자, 그만. 민우는 억지로 잠을 청하려 커튼을 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여전히 혜성을 보면 무슨 얘길 할지 정리된 것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는 것들을 ‘같이’ 이야기해본다면 뭔가 결론이 나올 것이다. 혜성의 말대로 혼자 생각하고 혼자 정리하면 계속 도돌이표였다. 싸우든 풀든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해야 했다. 이번엔 연락하지 말라고 무작정 집으로 내려와버린 제 잘못이 좀 더 컸다. 물론 연락하지 말란다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도 안 하는 혜성도 잘한 건 없지만. 서로 잘한 게 없으니 쌤쌤으로 치고 미안하단 말은 슬쩍 접어둘까도 싶다. 어쨌든 결국 먼저 찾아가는 건 자신이니까. 이러다 또 내가 더 많이 양보했네, 참았네 하면서 따지지나 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잠에 빠져드는 민우였다. 




*




중간에 에어컨 바람이 너무 추워서 한 번 깨긴 했지만 다행히 서울에 도착할 때쯤엔 두통이 싹 가셨다. 잠에서 깨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자고 올 거냐는 엄마의 연락과 시간 되는 놈들끼리 한 잔 하자는 동기들 단카방 알림이 전부였다. 뭐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보고 싶다고 그 길로 서울로 달려온 것이 왠지 허무하기도 하고. 서울 간다고 연락하고 온 것도 아닌데 괜히 혜성에게 서운했다. 궁금하지도 않냐구. 그러면서도 발은 혜성의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는 그저 멍하니 창밖만 보았다. 혜성의 자취방을 코앞에 두고 나서야 혹시- 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혹시라도 신혜성은 일주일 만에 다 정리해버렸으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연락 않는 게 헤어지고 싶어서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보자마자 쌩까고 문을 닫아버리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렇게 혼자 상상해봤자 끝도 없고 소용도 없다는 걸 알면서 여기까지 와서 또 이러고 있다. 민우는 또 길게 이어지려는 생각의 꼬리를 잘라버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신혜성―….”


문을 열며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눈치를 보며 안을 살피던 민우는 자기가 움직일 때 내는 소리 말곤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걸 깨닫곤 운동화를 벗어던졌다. 터덜터덜 안으로 들어서는 다리에 힘이 쭉 빠져버린다. 방에도 욕실에도 혜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집에 있겠지 하고 왔던 것이 허탈했지만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게 시간을 주나 싶기도 했다. 불이 켜져 있는 걸 봐선 멀리 나간 것 같진 않았다. 일주일을 참았는데 뭐 이정도야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멀뚱멀뚱 앉아서 기다리기를 15분. 엉덩이가 뜨끈해지기 시작한 민우는 몇 걸음 되지도 않는 작은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스트레칭 하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괜히 냉장고를 열어 확인을 하고 집안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봉투에 아무렇게나 구겨서 처박아놓은 맥주캔들을 발견했다. 냉장고엔 김치 말곤 제대로 된 먹을거리도 없던데. 맥주캔만 잔뜩 쌓여있는 걸 보니 혜성도 혜성 나름대론 맘고생을 했나 싶다. 나만 고민하고 끙끙거린 건 아니었다는 위안이라도 얻은 탓일까. 민우의 얼굴에 왠지 모를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10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집나간 혜성을 기다리기를 30분 여. 편의점에 갔다 쳐도 돌아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불은 홀라당 다 켜놓고 도대체 어딜 간 건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일주일을 집에서 칩거하며 보낸 자신과 달리 사실 잘 먹고, 잘 돌아댕기고, 잘 살고 있었을까. 혜성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특히나 이런 날씨엔.


“아우!”


받아줄 상대도 없는 짜증을 토해내며 민우는 결국 혜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조로운 신호음이 왠지 제 심장소리를 따라 빨라지는 기분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늦게 받는 것 같은 건 저만의 착각일까. 민우는 물어뜯을 손톱도 없는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

“…여보세요?”


분명 신호음은 끊겼는데 저쪽에선 받았단 반응이 없다. 민우는 전화가 끊긴 건가 싶어 화면을 확인하곤 혜성의 이름을 불렀다.


“신혜성.”

-어.

“뭐야, 받았으면 말을 해야지.”


진심으로 화를 내며 목소리를 깔면 무서운 건 혜성이나 민우나 마찬가지였다. 낮은 목소리가 들려주는 ‘어’ 라는 한마디에 민우는 괜히 목덜미가 서늘했다. 에어컨을 쳐다봤지만 분명 꺼져있다.


“어디야.”

-…왜.

“밖이야?”

-응.


말 좀 길게 할 수 없냐. 민우의 미간에도 슬쩍 주름이 생겨났다. 자신도 무작정 화낼 입장은 아니지만 혜성도 잘한 건 없는데, 지금 반응은 꼭 민우가 먼저 ‘내가 죄인이오.’ 하고 지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자긴 뭘 잘했다고 목소리 쫙 깔고 이래? 내가 먼저 전화도 했구만. 혜성은 모르겠지만 심지어 먼저 찾아오기까지 했다.


“약속 있어?”

-그런 건 아니고.

“집에 언제 가는데.”

-그러니까 왜.

“아, 됐어. 말해주기 싫음 말아.


어지간히 말해주기 싫은가 보다. 아니면 그냥 민우와 말하기도 싫은 건지도 모른다. 민우는 순간 치솟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연락 없이 찾아온 것도, 먼저 전화를 한 것도, 그냥 전부. 


신경질적으로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던 민우의 귀에 도어락이 잠금 해제 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보고 싶기도 하고 보기 싫기도 했던 얼굴이 나타난다. 혜성은 현관에 서있는 민우를 보고 눈이 커지더니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와 문을 연채로 민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혜성의 손엔 편의점 봉투가 들려있었다. 캡모자를 눌러쓰고 슬리퍼를 신은걸 보니 씻지도 않고 요 앞에 나갔다 온 게 분명했다. 근데 뭘 하느라 30분이나 걸리냐고.


“언제 왔어.”

“…왜.”

“지금은 또 어딜 가려고.”

“왜 묻냐고.”


혜성이 하던 걸 그대로 돌려주기라도 할 건지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왜’ 라는 말만 반복한다. 혜성은 이 상황이 지친다는 듯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그 한숨에 민우의 참을성도 바닥났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신경 끄셔. 나 간다.”


문을 밀며 혜성을 비켜 나가버리는 민우에 손잡이를 잡고 있던 혜성의 손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혜성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는 민우를 쳐다보다 현관으로 들어섰다. 알아서 닫힌 문이 띠리릭, 소리를 내며 잠겼다. 혜성은 가만히 현관에 서 있다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내팽겨 치듯 내려놓고 급하게 문을 열었다.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내려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저만치 걸어가는 민우를 향해 달렸다. 나 화났다는 티를 팍팍 내며 나간 것과 달리 기운 없이 처진 민우의 어깨를 보니 괜히 가슴이 아리다. 미안하고, 또 미안한데 자꾸 마음과 달리 말도 행동도 엇나가버린다. 꼴랑 일주일 안 본 건데 보고 싶었다. 이대로 헤어질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더 보고 싶었던 것도 같다.


“민우야.”


팔을 잡으며 돌려 세우니 화가 가득하던 민우의 눈에 금세 물기가 스며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가지 마.”

“…….”

“가지 마, 이민우.”




*




혜성이 뛰어내려와 붙잡지 않았다면 아마 진짜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민우는 집에 들어와 내내 아무 말 없이 안줏거리나 만들고 있는 혜성의 뒤통수를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자기가 거절 한 번 하지 않고 뒤따라 들어왔다고 이 냉전이 전부 해결된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가지 말라고 붙잡았으면 뭐라고 더 얘길 해야지 왜 뜬금없이 민우의 앞에 캔맥주 하나를 내려놓곤 소세지 볶음을 하느냐 이 말이다. 혜성이 민우의 앞에 문어 모양까지 낸 소세지를 내려놓았을 땐 민우도 뭘 바라냐며 맥주를 따서 이미 한 캔을 다 비운 뒤였다. 혜성은 예상했다는 듯 편의점 봉투에서 맥주를 하나 더 꺼내 민우에게 내밀곤 저도 하나를 더 꺼내 캔을 땄다.


“맥주만 사왔냐.”

“맥주랑 소세지. 넌 언제 왔어.”

“아까. 너 오기 30분 전쯤. 넌 요앞 편의점 간 거 아니야?”

“편의점 밖에서 한 캔 마시고 왔지.”


사이좋게 묻고 답하며 맥주를 마시는 중이었지만 둘 다 정작 진짜 할 얘기는 좀처럼 먼저 꺼내질 않는다. 서로 눈치 싸움 중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먼저 얘길 꺼내는 사람이 미안하다는 말도 먼저 해야 할 것 같아 눈치를 보는 건지, 아니면 먼저 미안하단 말을 꺼내려 눈치를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맥주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이 어색한 눈치싸움도 끝낼 때였다. 먼저 입을 연건 문어 모양 소세지를 젓가락으로 쿡, 쿡 쑤시던 민우였다.


“연락 하지 말란다고 진짜 안 하냐?”


다른 때였으면 시비 거냐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서운함을 가득 담아 하는 민우의 말에 혜성은 비어버린 캔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민우를 쳐다봤다.


“네가 하지 말라는데 어떡해, 그럼.”


민우도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혜성의 눈을 아는 듯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혜성과 시선을 맞췄다.


“궁금하지도 않냐. 결국 내가 먼저 찾아왔잖아.”

“…….”

“내가 더 좋아해서 지는 느낌이야, 이거.”


확실히 먼저 좋아한 건 민우였을지 몰라도 혜성은 사귀면서 제가 민우보다 마음을 덜 주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민우에게는 자신이 주는 것보다 혜성에게 받는 마음이 부족하다 느껴졌나 보다. 물론 주고받는 마음의 크기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안에 담긴 건 똑같이 진심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데, 왜 만나냐고 물었지.”

“…….”

“좋아하니까. 좋아해서 만나는 거잖아, 당연히. 너는 날 좋아해서 찾아왔고, 나는 널 좋아해서….”

“…….”

“널 기다린 거고.”


혜성은 몸을 움직여 민우의 옆에 앉았다. 민우의 몸을 제 쪽으로 돌리며 얼굴을 마주 한 혜성은 복잡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민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렇게 좋은 걸, 어떻게 안 보고 사냐. 혜성은 민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민우의 손이 혜성의 팔목을 잡아왔다.


“네가 싫어할 거 아는데, 나 한마디만 더 해도 돼?”

“…뭔데.”

“난 그냥 네가 좋아.”

“…….”

“이유 같은 거 찾지 않아도.”


혜성의 말에 민우는 싫어하는 얼굴을 하는 대신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젠 안다. 표현만 다를 뿐, 마음은 같다는 걸. 앞으로도 또 부딪칠 테고, 또 이런 위기가 찾아오지 말란 법은 없었지만 그땐 지금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무슨 한 마디냐?”


완전히 얼굴을 피고 웃는 민우를 혜성은 그대로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저도 몸을 내밀며 눈을 감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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