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맨스 말고 로맨스,
걸크러쉬 말고 크러쉬.

성소수자들은 그 존재가 철저히 지워지고 거부당해 왔다. 오직 '이성애'만이 '정상'으로 간주되는, 그리고 '여성스러움'과 '남자다움'이 '정상'으로 규정된 세상에서 남성과 남성의 친밀하고 다정한 관계는 기존에 이성간의 연애 관계를 지칭하는 '로맨스'의 변형인 '브로맨스'라는 단어로 '특별하게' 명명되었고, 여성스러움의 틀을 벗어난 여성에 대한—아닌 경우에도 사용되는 걸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이런 경우가 많다고 느꼈다—다른 여성의 호감은 '걸크러쉬'라는 단어로 '특별하게' 명명되었다.

언어는 발화자의 인식을 넌지시 드러낸다. 공기와 같은 편견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형성되고 반성 없이 사용되는 말들은 그 자체가 지배적 인식의 반영이다. 따로 특별히 명명되지 않은 것, '로맨스'나 '크러쉬'가 인식의 기본값이라는 말이다. 용례를 보면 드러나듯 '남사친'이나 '여사친'이라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이성애가 아닌 성애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그저 '사랑'의 양상들일 뿐이다. 사랑은 실제적인 현상일 때에만 유의미하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한 유의미하고 보다 정확한 논의나 연구를 위해서도 사랑을 이루는 그 어떤 부분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랑을 제한하고, 사랑을 잘라내는 것이다.

학문적 목적을 떠나서, 가장 근본적으로 성애는 개인의 기초를 이루는 요소 중 하나다. 그걸 부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의 기반에 칼을 꽂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냥 살게 하라. 있는 그대로 살게 하라. 당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니까.

이상향과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현실에서 그들은 분명 비정상으로 간주된다. 운동과 변화는 항상 현재 시점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다. 따라서 첫 단계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들을 비정상으로, 비존재로 내모는 현실을 직시하고 일단 그들의 지금의 삶이 침해되지 않도록 하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 대뜸 만나서 남자/여자에게 각각 여친/남친 여부를 묻는 것도 폭력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젠더를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사회의 현실을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행위다.

요점은 하나다. 배제하지 말라, 언어로든 행위로든. 남사친/여사친이 아니고 '친구'다. 아니면 그냥 친한 남자애나 친한 여자애로 쓰든지. 정 굳이 남친/여친 유무를 알고 싶으면 애인이 있냐 하든지 연애를 하고 있냐고 하든지 해라. 이 경우에도 굳이 캐묻지 말고. 남 사생활에는 뭐가 그리 쓸 데 없이 관심들이 많은지.

현실을 고려하자. 그러면서 이상향을 꾸준히 그려나가자. 모든 사랑이, 모든 사람이 그 자체로 굳건히 존재할 수 있는 날까지.

#퀴어 #페미니즘
#소수자_문제에서의_워딩
#내_생각의_과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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