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영혼의 반려.
몸에 새겨진 그 징표.

소중한 [<그대>]의, 사랑스런 이름아.



01.
리그 오브 어쌔신 수장, 라스 알 굴의 친딸인 탈리아에게는 신념이 하나 있었다.
그 누구도 감히 의심할 여지없는 절대적이고 강력한 제왕을 제 손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그녀가 오랜 세월 간직해온 굳쎈 신념이자 목표였다.

그녀는 그 신념을 현실화 하기 위한 첫 단계로 자신이 반할 정도로 굳건한 의지력과 신념, 그리고 강인함을 지닌 남자의 핏줄을 잉태하였다. 그 결과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아이에게 그녀는 강력한 자(Damianos) 에서 따온 이름을 붙였다.

데미안은 어려서부터 학문, 예술, 스포츠, 군사학 등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직접 지식을 전수받았다. 오로지 군주가 되는데 필요한 것들과 사고방식만 접하며 자란 그는 어린아이지만 어린아이가 될 수 없었다.

군주로써의 완전무결함만을 강요받으며 성장한 그는 리그 내의 몇 안되는 또래 아이들이 저마다의 몸을 확인하며 울고 웃는 것을 목격할 때면 그들을 향해 코웃음 쳤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흔적에 웃는 아이들을 비웃었고, 그 어떤 흔적도 없는 제 몸을  울상지으며 바라보는 아이들을 경멸했다.

그는 어떠한 「흠집」도 없는 제 몸을 사랑했다.
남들은 흔적이라 부르고 저 자신은 흠집이라 부르는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는 그런 태도를 고집했다. 아니,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강경한 태도를 더욱더 고집했다. 그럼에도 여섯 살 생일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데미안에게 「그것」이 나타나고야 말았다. 「그것」은 영혼의 반려가 태어나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흔적이자 징표였다.

그는 제왕이었다. 그것도 다정히 모두를 포용해주는 자비로운 제왕이 아니었다. 그가 배워온 것은 무력과 공포로 모두를 압도하는 법이며 평화보다는 전란의 시대에 더 어울리는 제왕이었다.
그런 데미안에게 그것은 유일한 약점이 될지도 모르는, 유일하게 패배를 안겨 줄지도 모르는 어떠한 「것」의 흔적일 뿐이었다. 패배를 모르는 패도적인 제왕에겐 어울리지 않는 「흡집」 일 뿐이다. 그것은 데미안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아랫것들에게 제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만큼 꼴볼견도 없다는 배움 하에 언제나 한꺼풀 가려진 감정만을 드러내왔던 어린 군주의 선연한 분노였다. 난생 처음 본 불같은 폭바라에 리그의 모든 이들은 당황했으며, 리그 내의 모든 거울을 없애버리라는 분노어린 명령에 모두들 이유를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가 리그 오브 어쌔신을 떠나 친부인 브루스 웨인을 따라가 데미안 웨인이 된 그 날. 데미안은 익숙하지 않은 방안의 구조에 그만 거울을 마주하고 말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거칠게 고개를 돌리던 찰나, 문득 눈에 들어온 「그것」에 멈칫한 그는 거울을 향해 다시 시선을 맞췄다. 다섯 살, 그때 처음으로 마주했으며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본 적 없었던 자신의 「흠집」. 처음 본 순간, 그것은 강한 분노 속에서도 어딘가 마음 한 켠에선 아름답다 감탄할 정도로 찬란한 붉은 색채를 자랑하고 있었다. 흡사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 같이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으면서도 혈관을 내달리는 선혈같은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검붉게 굳어버린 한방울의 핏방울 마냥 그것에서는 더이상 그 어떠한 매력도, 생명력도 느낄 수 없었다. 죽음의 기운만을 물씬 풍기는 그것은 너무나도 가녀려 도대체 어떤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한 글씨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 누구도 이것이 저의 이름이라 주장하지 못하겠지. 무슨 글씬지 알아 볼 수도 없는 걸 뭔 수로 지 이름이라 주장해?

데미안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 만족감 너머에 숨겨진 마음 한 켠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마음은 어릴 적부터 제왕으로 자라왔기에 세상물정 모르는 꼬마가 아닐 지언정 연륜있는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애송이에 불과한 그가 알아차리기에는 너무나도 깊은 곳에서 빼꼼히 고개내민 감정이었다.



02.
아이는 뒷골목의 흔한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많은 수가 끼리끼리 모여 형성된 수많은 무리 중 어느 하나도 아이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대다수가 고아인 그들 사이에서 보호자가 있는 제이슨은 이질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아이의 아비가 폭력을 일삼는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도, 어미는 그런 아비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긴 커녕 오히려 그 폭력이 자신을 향할 때마다 아이를 방패막이로 삼을 뿐인 마약중독자라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보호자가 없는 무리의 아이들에게 제이슨은 질투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아이는 의지할 이 하나 없이 홀로 그 모든 짐을 짊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제이슨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기죽는 모습을 본 이는 누구 하나 없었다. 아이들은 그것이 부모가 있기 때문이라 여기고는 더 시기심과 더 강한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제이슨은 그런 그들을 비웃으며 그 모든 폭력 앞에서도 당당히 서 있었다. 집과 거리, 그 양 쪽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의지할 수 있는 존재. 어디를 가던 존재하는 적대적인 시선들과 폭력. 그럼에도 당당히 버티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오른쪽 쇄골에 자리잡은 반려의 「흔적」덕분이었다.

…아니,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너 같은 것 따위에게 반려란 것이 가당키냐 하냐며 담배로 그 위를 지지던 아비.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 널 처음 봤을 때, 네 네임을 보고 정말 놀랐단다. 검은 색인 듯 하다가도 빛에 닿으면 찬란한 녹색을 띄는 것이 참으로 신비로웠거든. 마치, 짙디짙게 우거진 나무 사이로 찬란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어.

어미의 품에 안긴 채 조곤조곤 듣곤했던 그 말. 아이는 단 한번도 그 찬란하고 신비로웠다는 그 암녹색을 본 적이 없었다. 아이의 반려는 언제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칠흑과도 같은 어둠을 내비칠 뿐이었다. 아비의 폭력을 피해, 뒷골목 무리의 텃세를 피해 아이는 언제나 더이상 관리되지 않는, 버림받은 공원으로 달려가 거친 고목 에 기대어 앉곤 했다. 어미가 말했던 그 아름다운 색은 바로 저런 것이었을까. 아이는 백 수년은 족히 살았다는 고목의 짙디짙은 암녹색 물결을 보며 궁금해하곤 했다.

허나 시간이 더 지나고 더이상 어미가 아비의 폭력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주기를 포기했을 때. 더이상 어미가 아이를 품에 안고 그 찬란한 암녹빛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없어졌을 때. 열심히 건너건너 익힌 글자로 이름을 읽고자 했으나 실패했을 때. 그 징표의 빛과 형태가 어떠한 의미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래. 쌓이고 쌓인 순간들이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크나큰 상처가 되버렸음을 깨달은 날, 아이는 모든 기대를 버렸다. 더이상 누군지 모를 영혼의 반려의 얼굴을 상상하지 않았고, 힘들고 지쳐도 더이상 그 짙디짙은 칠흑과도 같은 청록을 나부끼는 고목을 찾아가지도 않았다.
아이는 모든 기대를 버린 채 그 누구에게도 의지않고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아이는 자신의 "적" 들 앞에선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그렇기에 더이상 아이의 눈물을 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03.
사랑스런 이름의, 소중한 그대여.

[그대]의 눈부시도록 생명력 넘치던 활기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대>는 어이하여 [나]를 외면하고 그 무엇도 보여주려 하지 않는가.

<[나]> 는 더이상, [<그대>] 이름 알 수가 없어.



04.
데미안 웨인은 친부 밑에서 그를 도와 밤거리를 누비었다. 리그의 냉정한 군주가 도시의 밤하늘을 누비는 망토두른 십자군의 종자가 된 것이다. 그의 아비이자 고담의 수호자인 배트맨은 리그에서 다양한 암살법을 익히며 자라온 데미안이 과연 시민을 수호하는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러나 그건 전혀 불필요한 일이었다. 어쌔신 소굴에서 누군가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을 위주로 했을지언정 어쨌거나 그는 절대적인 제왕이 되기 위해 자라온 자였다. 제왕의 역할 중 하나는 충성을 다하는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 따라서 데미안은 약자나 다름없는 고담의 거주민들을 어둠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딱히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짜증난다 여긴 것은 그의 거리를 더럽히며 돌아다니는 하찮은 벌레들을 죽이지 않는 것고 제압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일하게 자신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남자의 가치관이었기에 최대한 따르고자 노력을 했다.그렇게 데미안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잡종을 죽이는 대신 제압하는 일에 익숙해져갔다.

지금껏 살아온 방식까지도 모두 뜯어고칠 정도로 배트맨의 의지를 존중해온 그가 끝내 용납하지 못한 것은 티모시 드레이크 라는 천한 잡것의 핏줄을 자신의 아우랍시고 호적에 올린 아비의 독단이었다. 혼자 힘으로 배트멘과 로빈의 정체를 파악한 그 실력과 머리는 인정할 수 있다. 허나 그러한 인정이 허용해 줄 수 있는 행동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데미안은 머리만 좋을 뿐 혈통도 자질도 한참 모자란 것이 자신의 합법적인 가족이, 동생이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자연스레 데미안과 티모시가 조용히 마주칠 날은 극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브루스 웨인은 그런 그들을 아버지로써, 배트맨으로써 몇 번 혼내곤 했다. 그러나 그 후 앞에선 얌전했을 지언정 서로를 뒤를 향해 은밀히 암수를 뻗어대는 그 모습에 끝내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집사 알프레드는 오랫동안 배트맨을 모셔온 이 답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아무 일 없다는 양 저 할일을 해치웠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났다.

그렇게 치고박고 하는 통에 티모시는 한가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얕잡아보는 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도련님 자식은 종종 놀라울 정도로 너그러운 날이 있었다. 도대체 뭐가 저 오만한 놈이 자기를 봐도 뒷통수에 배트랭을 투척하는 대신 천한 것, 한마디만 하고 넘어가게 만드는 걸까. 고민하고 고민했으나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 불시에 나타나는,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데미안의 너그러움은 팀에게 일상이 되어갔다. 그리고 완전히 일상이 되어버린 날, 팀은 더 이상 그 의문에 대해 고민하기를 그만뒀다.



05.
제이슨 토드는 뒷골목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살기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은 아무리 벌고 벌어도 늘 부족했다. 소매치기, 뒷거리 심부름 등으로 벌은 돈은 다른 무리의 아이들의 집단런치에 빼앗기기 일수였고 그나마 지켜낸 돈은 아비의 술과 어미의 마약 값으로 신기루 마냥 한순간에 사라지기 일수였다. 밥을 하루에 한끼만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인 나날이었으나 제이슨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오래 전부터 반복되어져 왔던 일상이었고, 더이상 아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줄 것을 꿈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기대도 없거늘 실망하고 상처받을 일이 있을 리 없는 노릇이었다. 종종 푸르른 초목에 시선을 빼앗겨 한참을 멍하니 서 있을 때도 있었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추운 겨울밤, 아비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전에도 다른 알코올 중독자들과 함께 며칠 씩 술을 퍼붓고 나서야 돈 내놓으라며 귀가한 적이 있었기에 제이슨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며칠 후 돌아왔을 때 돈을 주지 않으면 날아올 폭력에 대비하여 벌어들인 돈 중 일부를 야금야금 숨겨놓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비가 돌아왔다. 돈 내놓으라는 윽박지름도, 폭력도 없었다. 술에 취한 채 길거리에 자빠져 잠을 쳐자던 그는 뒷골목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그대로 얼어죽은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머리를 쓰다듬는 경찰의 손길. 그러나 제이슨은 전혀 슬프지 않았고, 경찰 역시 제이슨이 슬퍼할 것을 기대하지도 않은 듯 잠깐의 쓰다듬 후에 그대로 뒤돌아 걸어나갔다.

아비의 죽음으로부터 반년이 지난 어느 무더운 여름날. 집에 돌아온 제이슨은 보이지 않는 어미에 잠시 의문을 느꼈다. 어미는 마약을 살 때를 제외하곤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는 전혀 없는 여자였고, 지금은 마약이 거의 떨어져 가는 중이긴 하지만 정작 살 돈이 없었다. 그러니 별 수 없이 어미는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가 돈 내놓으라고 윽박질려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집은 고요했고, 제이슨은 무언가를 예감했다. 그리고 그 막연했던 예감은 평소처럼 잡심부름을 위해 들린 뒷골목 야매의사의 집에서 모든 장기가 털려 텅 빈 배를 너저분히 벌리고 있는 여인의 시체를 통하여 현실이 되었다.

" 꼬맹이, 이 약 좀 늘 가던 푸른 대문에 전달하고 와라. 조금이라도 빼돌렸다간 재미없을 거란 것 쯤은 말 안해도 잘 알겠― 음? 뭘 그렇게 뻔히 보는게냐? 아아, 그거? 돈도 없는 주제에 마약 내놓으라고 데스히토 패거리에게 충 겨누다 죽은 여자 시체로군. 마약에 쩔어서 돈이 되기나 할지 의문인 걸 왜 손질해 달라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 준다니 해야겠지. 왜, 아는 사람이냐? "

제이슨은 대답없이 손을 뻗어 약을 챙겨들고 그곳을 벗어났다. 제이슨은 이제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모든 기대를 버렸거늘, 아무렇지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걸어가는 아이의 손이 오른쪽 쇄골로 향했다. 저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 '그것'을 만지작 거리며 아이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아이의 곁에는 진정 아무도 없었다.



06.
" 이것 놔!!! "

달빛이 구름에 자취를 감춘 날 밤. 비명과도 같은 고함소리가 어두운 골목길에 울려퍼졌다. 배트맨은 자신의 손아귀에 부여잡힌 채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사내아이를 조용히 내려다봤으며 래드로빈은 옆에서 낄낄 거리며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씨발, 자경단? 웃기고 자빠졌네. 어린 꼬맹이한테 적선 한 번 못해주는 자경단은 뭔놈의 자경단이야?! "

잔뜩 금가고 악취가 가득한 뒷골목에 주차된 차, 그 옆의 땅바닥 위에 나뒹구는 쇠지랫대. 상황은 단순했다.


제이슨은 언제나 그랬듯 잡다한 잡심부름이 끝나자마자 팔 수 있는 고물을 찾아 골목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것은, 더러운 뒷골목에 주차된 비싸보이는 차 한 대였다.

제이슨에게 중요한 것은 저 차가 심미안이라곤 벼룩 간 만큼도 없는 그의 눈에도 무척이나 비싸보이는 차 종이라는 것과 주변을 지키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저 차가 소문의 그 배트카라는 사실을 알고 잠시 망설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배트맨을 향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손익계산 때문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배트카는 온갖 첨단장비로 중무장 되어 있다니 차 부속품을 훔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괜히 손댔다가 잘못 건드려서 터지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인가. 밥 한끼 먹자고 목숨을 날려먹을 짓을 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타이어는? 타이어 훔치는 것 쯤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 제이슨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타이어 분리 작업에 착수했고, 때마침 마약상을 두들겨 팬 후 배트카로 복귀하던 배트맨과 래드로빈이 그러한 모습을 목격한 것이었다.
한참을 웃던 래드로빈이 너무 웃은 나머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 너, 이게 배트카인건 알고 있지?"
" 씨발, 그럼 니들은 여기가 크라임 앨리인건 알고 있던거 아냐? 이런 데다 주차해놓은건 훔쳐가도 된다는 거잖아! 니들이 암묵적으로 허락 해놓고는 왜 날 잡아가는 건데!!! "
" 그야 우리가 여기다 배트카를 주차한 건 훔쳐가도 허락의 의미가 아니었으니까! 일단 이거로 접근하면 엔진 소리때문에 마약상이 다 훔쳐갈 테니 잠깐 여기에 둔 거였어. 그리고 설마 배트카를 보고 도망가긴 커녕 털려고 하는 간 큰 좀도둑이 있는 줄은 몰랐지! "

도미노 아래서 유쾌하게 키득거리던 래드로빈은 입매가 설풋 경직됨과 동시에 잽싸게 몸을 숙였다. 그 다음 순간,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래드로빈의 머리가 있던 곳을 작은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흑색임에도 날카로운 예기가 선명히 빛나는 배트랭은 마치 래드로빈 뒤에 있는 것이 흑갈색의 벽돌담이 아니라 두부인 것 마냥 간단하게 박혔다.

" 이 성질 더러운 호문- "
" 로빈, 래드로빈. "
" …왜 이런 곳에 가만히 있는― "

낮게 울리는 배트맨의 목소리에 두 사이드킥의 투닥거림을 가장한 혈투는 시작하기도 전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래드로빈을 응시하던 로빈은 딱히 주변에 빌런이 나타난 것도 아니건만 왜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지. 불쾌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더러운 뒷골목을 가볍게 훑으며 질문하려 했다. 배트맨의 손에 붙잡혀 있는 이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부자연스럽게 끊어진 로빈의 말, 그리고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빳빳하게 굳은 아이의 어깨. 배트맨의 눈썹이 살풋이 찌푸려졌다.



07.
제이슨은 웨인 저택에 들어왔다.
래드로빈, 그러니까 팀은 모든 것에 으르렁거리는 제이슨에게 친절히 대해줬다. 모든 것을 못마땅해 하는 것이 데미안을 연상시켰음에도 그 모든 것을 감내한 것은 오로지 브루스를 위한 것이었다. 고담의 수호자와 고담의 플레이보이. 두 역활을 수행하느라 바쁜 브루스가 제이슨에게 보다 신경을 덜 써도 상관없길 바랬을 뿐이다. 그러나 함께 하면서 그는 하나하나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자기 아래로 보기에 자연스레 불만을 제기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데미안과는 달리, 제이슨의 불만은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자 모든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웨인 가에 오게 된 팀 또한 배트맨이 어떤 존재인지 몰랐더라면…, 그랬더라면 브루스를 믿고 의지하는 대신 저렇게 경계했을 것이다. 제이슨에게서 자신을 투영하게 된 팀은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나를 깨닫게 되었음에도 남은 불만은 있었다. 어떻게 저 꼬맹인 브루스가 이렇게 배려해 주는데도 경계하기만 하지? 새롭게 피어난 불만을 잠식시킨 것은 배트맨이 수집한 제이슨의 뒷조사 자료를 발견했을 때였다. 한 쪽은 알코올에, 다른 한 쪽은 마약에 중독된 상태인 무직의 부모와 크리임 앨리. 아동학대 신고이력이 없긴 했으나 그런 것을 믿을 정도로 순진했다면 래드로빈이 될 수 없었으리라. 팀은 깨달았다. 제이슨이 브루스와 알프레드의 배려에도 경계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 아이가 아는 유일한 생존수단은 경계였다. 부모 밑에서 때로는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자란 팀과는 달랐다. 팀은 더이상 제이슨에게 자신을 투영하지 않았다.

팀은 더이상 제이슨에게 노골적인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홀로 생존하는 법만 배워온 이에게 대놓고 베푸는 친절은 경계만 부를 뿐이다. 그 대신 그는 쉽게 알아채기 힘든 소소한 배려만을 건낼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제이슨이 그를 따르기 시작한 탓이었다.
심지어, 제이슨이 가장 먼저 마음을 열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했던 후보인 알프레드는 아직도 경계대상인 것을 생각하면 더 당황스런 결과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브루스의 친자이자 첫 번째 사이드 킥인 로빈인 데미안은 제이슨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했다. 그리고 팀은 제이슨과 같은 수모를 겪은 이임과 동시에 데미안의 경멸로부터 제이슨을 가장 많이 보호해준 이였다.

이제 팀의 배려는 제이슨을 향한 애정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라난 애정은 팀의 눈을 가렸으며, 그 탓에 팀은 평소라면 눈치챘을 이상한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08.
데미안은 배트카의 타이어를 훔치려했다는 간 큰 꼬맹이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봤다.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꼬맹일 왜 또 입양하겠다는 건지. 자신이 존경하고 존중하는 사내이건만 도저히 이런 짓거리만은 어떻게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티모시 드레이크란 고아새낀 홀로 배틑맨을 추적할 머리와 배짱, 이 두가지라도 갖췄지 저 볼품없는 꼬맹인 배짱 하나뿐이지 않나. 그런데 도대체 왜 저딴걸?

데미안은 제이슨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제이슨 역시 팀과 마찬가지로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팀이 제이슨을 감싸고 보호해줄 수록 데미안의 멸시는 더 커져만 갔다. 가진 거라곤 감당못할 배짱 하나 뿐인 주제에 혼자 대항하지도 못하는 하찮은 꼬맹이.

삐뚜름한 조소를 짓는 데미안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팀을 향해 "티모시 드레이크" 혹은 "고아 새끼" 라는 표현을 내뱉으며 넌 결코 웨인가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음을 선연히 내비쳤던 자신이 제이슨에게는 꼬맹이라 칭할 뿐, '토드' 라는 그의 성이나 '고아'라는 멸시로 선을 그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공격하곤 했던 팀과는 달리 제이슨에겐 단 한번도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 적이 없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09.
아파. 너무 아파. 엄마를 지켜야 하는데, 너무 아파서, 움직이질 못하겠어.
도와줘요, 브루스. 당신은 배트맨이잖아요. 히어로잖아요. 제발 와서 구해줘요. 그녀는, 당신이 보호해야 할 민간인이잖아. 제발…

너무나도 강한 통증에 오히려 아무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조커가 아직도 그의 몸을 쇠막대로 내리찍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계속 들려오던 둔탁한 소리와 제발 그만 하라는 한 여성의 울부짖음이었다. 그나마 상황을 인지하게 해 주던 이 소리들도 멀지 않아 사라질 것임을 커다란 이명 속에서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청각마저 사라진다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런 의문 속에서 제이슨은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선연히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폭발의 섬광. 그 너머로 제이슨이 본 것은 아주 오래 전 봤던, 오래된 고목의 검푸른 녹음이었다. 그 녹음 아래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10.
" ――――――――――――――!!!!!!!!!!"

폭음과 함께 무너져내리는 폐공장.
마치 불붙은 것마냥 화끈거리는, 부러진 것 마냥 욱씬거리는 쇄골.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무너저 내린 데미안의 왼쪽 쇄골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주 오래전 봤던 아름답도록 찬란했던 붉은 글자도, 모든 희망과 의지를 잃은 채 굳어버린 핏방울 같던 검갈색 글자도 없었다. 처음엔 외면해서 그 다음엔 너무도 희미해서 단 한 번도 읽어본 적 없었던. 그럼에도 무어라 적혀있었는지 선연하게 깨닫게 된 그 「흔적」을 울부짖으며, 제왕으로 자라온 이는 처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11.
그 색의 의미는 당신의 마음.
그 선명함의 의미는 당신의 애정.

아주 머나먼 과거.
찬란하고 눈부셨던 [그대]의 마음은 참으로 강인했다.
그 선명함은 나를 향한 [그대]의 호기심과 애정이었다.
가까운 과거.
굳어버린 피같던 [그대]의 마음은 힘겨운 현실에 지쳐버리고야 말았다.
그 가녀림은 나를 향한 [그대]의 체념이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더이상, [그대]의 마음도, 애정도, 무엇 하나 알 수 없게 되었다.

아주 머나먼 과거.
짙디짙게 우거진 나무 같았다던 <그대>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 시절, <그대>는 나에 대해 애정을 품은 적이 있었을까.
가까운 과거.
그림자마냥 검기만 하던 <그대>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을까.
읽을 수 없게 일그러진 <그대>는 나에게 어떤 애정도 품지 않았던 것일 테지.
그리고 현재.
<그대>는 사라진 속박에, 기뻐하고 있을까.



12.
" 어떻게 저딴 걸 살려놓을 수 있어!!! 그 아인 당신의 아들이었고 당신의 사이드킥이었어!!! "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소리높여 웃는 광대를 가리키며 데미안은 분노했다. 팀과 제이슨의 입양 문제에서만 불만을 표했을 뿐, 혈통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배트맨의 모든 선택을 존중해 오던 데미안의 불같은 분노에 브루스는 당황했다. 언제나 꼬맹이라 부르며 경멸하던 이를 위한 분노를 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의문과 혼란이 뒤섞인 두 사람 앞에서 데미안은 선언했다.

" 내 「네임」을 죽인 자를 살리겠다면, 나는 당신의 적이 될 거야. "

배트맨은 침묵했고 로빈은 그들을 떠났다.



13.
사라졌던 리그 오브 어쌔신의 후계자가 돌아왔다. 냉혹하고 잔인한 폭군가 되어 귀환한 데미안 알 굴이 내비치는 선연한 분노에 리그의 모두는 머리를 숙였다. 아는 감정이라곤 분노 하나뿐인 것만 같은 폭군의 명령은 하나였다.

― 이곳을 더럽히는 추악한 잡종들에게, 이 세상 것이 아닌 고통을.



14.
아파…
나는 이렇게나 아픈데, <그대>는 어디 있는가.
나의 이 고통에 기뻐하는가. 아니면 되돌아온 속박에 분노하는가.

…나를 반겨주는 이 하나 없을 이 세상에, 어째서 나는 다시금 되돌아 온 걸까.



15.
[그대]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던 이 통증은 왜 또다시 날 괴롭히는가.
지키지 못한 나를 향한 원망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아.



16.
로빈에서 리그의 주인이 된 이가 고담에 다시금 침입했다.
그 사실을 알려주는 날카로운 경고음에 배트맨과 래드로빈은 황급히 추적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고―

굵디굵은 빗줄기.
어둠을 간간히 밝혀주는 번개의 섬광.

그 아래, 파헤쳐진 무덤의 옆에서 한 청년은 울고 있었다.
고통스런 신음을 되삼키는 「네임」을 품에 안은 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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