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다.

정말로 돈이 없다. 


케이아 라겐펜더는 전투를 앞둔 사람처럼 비장한 눈으로 책상 위를 노려다보았다. 그런다고 한들, 아무리 세어보아도 책상 위에 올려진 금화의 숫자가 늘어나진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고, 분노하고, 마침내 어렵사리 납득한 케이아는, 결국 고개를 푹 떨구며 하아―하고 무서운 한숨을 내쉬었다. 출근하는 그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무거웠다.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케이아 라겐펜더의 경제관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당연하게도 그의 부모였다. 그리고 케이아에게는 지금까지 돈에 관한 것을 가르칠 아버지가 두 명이 있었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이름은 애초부터 모르는 그의 아버지 알베리히는, 절대로, 절대로 아이에게 돈을 가르쳐주기에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케이아가 기억하기로 그들은 늘 떠돌아다녔고, 어린 나이에도 알고 있던 것은 사실 그들이 언제나 도망쳐다니는 신세였다는 것이다.


품에 가진 금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적은 액수였을 뿐더러 보통은 쓸 곳은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누추한 몰골로는 웬만한 도시에 발 들이기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타적인 시골 마을일 경우에는 특히나 더했다. 보통 그들이 들리는 곳은 암시장이었다. 아이가 배를 곯는 동안 아버지는 이상한 책들이며 유물들을 산더미처럼 사댔다. 그마저도 아주 오랜 고함과 폭력과 흥정 끝에 얻어낸 것들. 오래지 않아 도망치는 와중에 버려지고 잃을 것들……. 케이아는 입 밖에 내진 않았으나 그런 것보단 진열대 바닥에 대충 굴러다니는 썩은 사과 몇 알이 더 탐났다. 


그리고 그는 헌책처럼, 싸구려 골동품처럼, 사정 없이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같은 날 라겐펜더 가문의 어르신이 그를 줍지 않았다면 분명 그 날 죽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 만큼 궂은 날씨에. 


입양된 뒤의 인생은 나날이 충격이었다. 돈이라곤 부족할 일이 없었다. 그의 형은 무언가를 갖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 단지 말 붙이는 것만으로도 걷어차이던 신세에서 먼저 갖고 싶은 것이 없냐고 물어보는 상냥한 사람들에게 둘러쌓이자, 아이는 어둡고 더럽고 냄새나는 길목에 혼자 남겨졌을 때보다 더한 공포심을 느꼈다. 


먹기만 해도 혀가 썩어버릴 것처럼 달디단 음식들이 식사 후면 매번 후식으로 내어졌다. 묽게 끓인 미음죽과 이별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설탕과 크림과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후식을 입에 넣었을 때, 케이아는 죽을 것처럼 놀랐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음식들을 먹고 살아왔던 거지?' 


차라리 다른 평범한 집안에 주워지는 쪽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완전히 극과 극의 환경에서 자라난 케이아 라겐펜더는 '중간'을 가늠하기 애매해했다. 그나마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머릿속에서 타협점을 계산하기란 가능했으나,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실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대검이 없으면 돈주머니를 들고 싸울 형을 두고서 대체 무슨 경제관념을 습득하길 바란단 말인가. 


계속 부유하고 안전한 라겐펜더 가문에 의탁한 채 지냈다면 그 문제도 사소한 골칫덩이로 치부하고 지나갈 수 있었겠지만, 상황은 늘 그렇게 너그럽게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형인 다이루크 라겐펜더는 부친을 살해하고 삐뚤어져 외국으로 튀었고, 케이아 라겐펜더는 졸지에 남은 사용인들과 함께 라겐펜더 가문을 떠맡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야 형은 너 같은 건 동생도 아니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의절한 집안이라며 손 떼고 방관해야 겠는가……. 먹여주고 키워준 은혜가 뚜렷한데, 그 정도 염치는 있었다. 


진실을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룻밤만에 느닷없이 사라진 다이루크를 두고서 온갖 말을 얹었다. 방앗간에 드나드는 참새들보다 그네들이 더 시끄럽다는 걸 알기는 할까. 누군가는 그가 제 발로 나갔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그가 사실 퇴출당한 것이라 했으며, 누군가는 그가 평민 아가씨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고 했고, 누군가는 배교나, 변절이나, 부정을 이야기했다……. 그런 사람들의 입을 닥치게 하기 위해서라도 라겐펜더 가문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꿋꿋이 서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케이아였다. 


명목상으로 책임자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가문의 인감을 죄 맡아 관리하고, 서류를 보고, 재산을 굴린 것은 케이아였다. 저택 안 분위기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케이아는 어떻게든 집사와 머리를 맞대고 몰려드는 온갖 일감들을 처리했다. 현상 유지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좋았겠지만, 계속해서 바뀌는 업계 시장에 대처하기 위해 사업을 (강제로) 확장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머리를 쓰는 것은 굉장히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그 붉은 머리의 귀공자는 어디 가고 네가 나왔느냐 물으면 더욱더.  


게다가 그는 와이너리 사업일과 더불어 기사단 업무까지 병행해야 했다. 이미 자리잡은 서무장직을 걷어차고 공석이 된 기병대장 자리를 차지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고된 노력이 필요했을지에 대해서는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병대장이 된 후에도 꾸준히 서류에 파묻혀 사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말이다.


정말로, 정말로 그는 열심히 일했다.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한 격무를 매일매일 처리했다! 그렇게 4년을 휴일 없이 굴렀다. 그로서 4년 후, 다이루크 라겐펜더가 몬드로 돌아온 그날부로, 케이아 라겐펜더는 저택에 대한 사적인 방문의 발길을 일체 끊고 환호를 내질렀다. 






다이루크 라겐펜더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나서보았다. 화목한 가족, 뛰어난 재능, 모든 것이 부족함 없는 아늑하고 안락한 환경 속에서 승승장구하며 자랐던 다이루크는 생전 처음으로 '그런 것들'을 마주했다. 가난. 수치. 불결. 불명예. 불신. 발에 채일 것처럼 드글거리는 고아들.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굳이 깃털에 진흙까지 묻혀가며 어두운 밀림 속으로, 빛 없는 동굴 속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다이루크는 그렇게 했고, 평생 몰라도 되었을 것들을 보았다. 하루도 쉴 틈 없이 전투를 벌였다. 처음으로 바닥을 기며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고, 굴욕에 몸을 떨었다. 더러운 박쥐들 틈에서 신분과 명예를 버리는 법을 배웠다. 스스로를 억누르고 꺾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그는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해냈다. 


4년 후 다이루크는 헤지고 더러운 옷차림을 한 채 다운 와이너리로 돌아왔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온마음을 다해 환영했다. 최대한 의연하게 행동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이루크는 그를 앞서 맞이하는 아델린의 눈에 맺힌 글썽이는 눈물을 똑똑히 보았다.(못본척 넘어갔다.)


시종들의 안내에 따라 우선 욕실로 직행한 다이루크는, 그의 취향에 맞춰 남들에겐 펄펄 끓는 수준으로 덥혀진 욕조물에 몸을 담궜다. 해묵은 먼지들이 전부 씻겨내려가고, 탄내와 비린내만 맡아오던 그의 코엔 너무 독하게 느껴지는 꽃향기며 비누향기가 욕실 안을 가득 채웠다. 어쩐지 그 순간이 현실감이 없다고 느꼈다. 


오랫동안 비워져있던 제 방 안으로 돌아온 다이루크는 옷장을 뒤지고 적당한 옷을 꺼내입었다. 예전엔 너무 커서 자주 입지 않던 옷들이 지금은 단추를 전부 채우지 않았는데도 갑갑하게 느껴졌다. 목깃을 이리저리 잡아당겨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보다 가장 불편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냥 감촉이다. 피부 위를 스치는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천의 감촉. 셔츠가 손목에 닿는 부분이 영 간지럽고 껄끄러워 이리저리 손목을 비틀고 있자니―남들 보기엔 퍽 우스운 꼴이었을 것이다―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곧바로 그쪽을 바라본 다이루크의 눈에 담긴 것은 케이아였다. 품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투둑투둑 떨어뜨리고 있는, 한쪽 뿐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케이아. ……저 꼴은 뭐야?


"진짜 돌아왔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케이아가 이윽고 중얼거렸다. 뿔 달린 말이라도 보는 것처럼 해괴한 눈이었다. 그 시선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케이아는 전혀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가 터벅터벅 자신에게로 걸어왔다. 


몬드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는 것은 곧 케이아를 대응할 각오조차 했다는 뜻이었기에, 다이루크는 다가오는 케이아를 공격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를 관찰할 뿐이었다, 상대가 그러하듯. 4년 만에 다시 보는 동생은 낮아진 목소리와 부쩍 큰 키와 괴상한 옷차림을 제외하고도, 분위기도 상당히 많이 달라져있었다. 투명하게 굴러가는 은회색 눈동자에선 예전 같은 순수함, 서투름, 반짝거림 따위를 찾아낼 수 없었고, 나아가 어떤 생각인지 읽는 것조차 힘들었다. 


코 앞까지 다가온 케이아는 다이루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슬슬 다이루크가 이 대치를 귀찮다 못해 불편하게 여길 무렵 고개를 훽 돌려버렸다. 


"큰어르신의 인감은 집무실 첫번째 서랍 안에 있어. 네가 알아야 할 정보, 그 동안 새로 생긴 인맥, 사업장 구조 변화 같은 건 엘저 씨한테 물어봐. 내일까진 정리해서 전달하라고 말해놓을게. 사용인들은 교체하지 않았어. 몇 명 인원이 줄긴 했지만……. 네가 돌아왔으니 다시 고용해야겠네. 한동안은 손님 맞이로 바쁠 테니까, 그렇지? 그쪽은 나보단 아델린이 더 잘 알테니 그녀에게 물어보도록 해."


다이루크는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케이아는 아주 태연하고 평범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다이루크는 그런 케이아를 보며, 자신이 잠시 어딘가, 외국이 아니라 몬드 앞바다 별장에라도 휴가라도 나갔다 온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케이아는 '고작' 4년 사이에 다이루크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것일까?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었던 과거를 부끄럽게 만들려는 거라면 절반 정도는 성공했다. 그래, 절반 정도는…….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의 감정은 무엇일까. 죄책감? 반성? 후회? 우선 다이루크는 대충 자타성찰이라고 이름 붙여놓고 있었다. 


물론 케이아도 예전과는 같지 않으리라―아니, 같지 못하리라 예상하고는 있었다. 다이루크 자신이 그렇다듯.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다이루크가 생각하기에, 겉으론 고작 조금 무뚝뚝해지고 말수가 적어진 게 전부인 자신의 변화에 비하면, 케이아의 변화는, 이해할 수 있거나 납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저보다 몇 살 어린, 그러니까 이제 겨우 스물 넘긴 갓 성인 놈이, 하는 꼬라지만 보면 몬드의 누구보다도 잘 숙성된…… 폐품이 따로 없다. 


케이아는 단호한 눈으로 다이루크를 바라보다가 낮고 엄근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답답하게 굴지 마. 다이루크."

"너야말로. 안 통한다는 걸 알았으면 그만 돌아가."


케이아가 되도 않는 원망 어린 표정을 지우고 필사적으로 강아지 같이 처량한 눈을 꾸며냈지만 상대가 목석 같은 다이루크여서야 씨알도 안 먹힐 수작이었다. 


모처럼 와이너리에서 신제품 와인이 개발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면 뭐할까. 단골 손님에게 술병 하나 외상으로 내어주지도 않는 사장놈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데! 다음 월급날까진 아직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고, 오랜 경영 경험으로 남에게 한 푼이라도 돈 꾸는 것은 꺼리는 버릇이 생긴 케이아였기에 구걸 말곤 다른 방도가 없었다. 


상대가 다이루크가 아니었다면 물론 이런 짓도 안 했을 것이다. 케이아는 진심으로, 다이루크에게 자신이 와인 한 잔 정도는 얻어마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왜냐하면 케이아는 최소한의 개인 여비를 제외한 모든 월급을 죄다 와이너리 사업에 보태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손대는 것은 그만뒀지만, 뒤로는 꾸준히 '지인 간의 정'을 들먹이며 사업에 좋은 기회 될 것 같으면 한 탕, 마물에게 손해본 만회비로 한몫, 낡은 비품을 교체하지 않는 하녀에게 선물……. 저축? 목돈 마련? 그딴 거 없다. 할 줄 모른다. 


그런데 저렇게 완고한 태도라니! 괜히 불퉁해졌다. 저번에 실수 많은 하인이 옆집 귀족 나으리한테 실례한 거 대신 갚아주지만 않았어도 술병 하나 쯤은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아가 뒤늦게 후회해봤자, 빈털터리 신세인 현실이 바뀌는 법은 없었다. 


'아, 아니면.' 좋은 생각이 났다. 실랑이를 관두고, 고개를 반듯히 든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제안했다.


"다이루크, 내가 매출 늘려주면 그 신제품 시음 기회, 나한테 줄래? 오후의 죽음 열 병 값으로 대신 낼게."

"뭐?"

"흐흥. 잘 보고 있어봐."


케이아는 눈썹 한쪽만 삐죽이 치켜뜬 다이루크를 무시하고, 바에서 벌떡 일어나, 한참 술집 한구석에서 시끄럽게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던 취객 무리에게 다가갔다. 케이아는 익숙하게 그들 틈에 끼어들어가―그의 발 넓음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무어라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워낙 많은 소리가 한꺼번에 섞여 다이루크로서도 내용을 잘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대로 케이아는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 모가지를 잡고 그대로 입에 가져다댔다. 다이루크가 입을 살짝 벌리며 경악하는 순간이었다. 꿀꺽, 꿀꺽, 꿀꺽. 케이아의 얇은 목울대가 쉬지 않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술병 안에 들어있던 찰랑이는 액체가 쭉쭉 줄어들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높아졌고, 이내 케이아가 술병을 입에서 뗀 채 머리 위에서 탈탈 흔들었을 때, 환호 소리는 숫제 폭발적인 함성이 되었다. 와하핳!


그리고 케이아가 돌아왔다. 


"오후의 죽음 열 병 주문이요, 사장님."

"……뭐 한 거야, 너?"

"한 병 원샷할 수 있냐 없냐로 내기했지~. 끄읍." 


케이아가 술냄새 폴폴 풍기는 트름을 하고 실례, 하며 입을 막았다. 갑작스러운 음주에 그의 얼굴은 눈 이마부터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후―하고 더운 몸에 걸친 옷을 벗으며, 케이아가 고개를 까닥였다. 빨리 신제품 한 병 줘. 안 줘? 그가 아이처럼 보챘다. 다이루크는 어이가 없어졌다. 어린애처럼 군다고 해서 그 요구 내용까지 어린애다운 것은 아니었다. 다이루크는 아직도 자신이 방금 본 광경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분명 몬드에서만 얌전히 살아왔을 그가 왜 이딴, 바깥에서나 보아왔던 행동을 자연스레 해내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곳이 없었다…….


"정말로 안 주는 거야? 으으응? 다이루크으으."


꼬인 혀로 제 이름을 부르는 꼬라지를 보던 다이루크는 착잡함에 입맛이 써졌다. 


"……그냥 돈을 내면 됐잖아. 정말로 없어?"

"말했잖아. 요즘 좀 살림이 빠듯해서……."

"매일 밤마다 술집에 드나들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완전히 나사가 빠졌군. 집에나 돌아가. 주정뱅이."

"……."


제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유쾌한 표정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뻔뻔한 놈이 슬그머니 눈을 피하겠는가.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잠시 멍 때리고 있던 케이아가 비틀비틀 일어나며 말했다. 방금 제 말은 듣지도 않은 듯 했다. 케이아가 비운 자리를 바라보던 다이루크는 한숨을 쉬고 그가 벗어던진 외투를 챙긴 채 케이아를 따라나섰다. 

 

"우웩."


케이아는 천사의 몫 술집 뒷터에서 배를 붙잡고 허리를 숙인 채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속을 게워내면 편하겠지지만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한참을 고생하던 케이아가 몸을 쭉 펴고 스트레칭을 했다. 여름에도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식혀주며 얼얼하게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서야 케이아는 뒤에 서있는 다이루크의 존재를 눈치챘다.


"기왕 따라나왔으면 등이라도 좀 두드려주지 그래."

"그랬다가 진짜 토하면 치우는 사람이 누군 줄 알고?"

"아, 그렇지……. 그럼 부축이라도 해줘."


나무를 잡고 기대서있던 케이아가 부탁했다. 다이루크는 비틀거리는 동생을 단단히 붙잡고 길거리의 노상 테이블 의자까지 끌어와 앉혔다. 두통에 머리를 잡고 끙끙 앓는 케이아를 바라보던 다이루크가, 무심결에 속마음을 입 밖으로 뱉었다. 


"그냥 집에 돌아오지 그래."


케이아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와이너리 술창고 열쇠 주면."

"……."

"안 줄 거지, 쫌생아? 내가 너한테 얼마나, 그으, 아무튼 뭘 많이 해줬는데. 그깟 술 한 병도 안 내어주고……. 하하, 사람들이 떠드는 것도 다 헛소리라니까. 뭐가 너그러운 와이너리 도련님이야. 너 그렇게 속 좁게 살면 길 가다 벼락 맞아……. 으음."


케이아는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쿵 소리를 내며 엎어졌고, 이내 쿨쿨 곯아떨어졌다. 


혼자 깨어있게 된 다이루크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감나히 있다가, 헐벗어 얇은 옷차림인 케이아의 몸 위에 들고나온 그의 외투를 덮어주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다소 이르게 폐점 준비를 시작했다. 






4년 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다이루크 라겐펜더의 안위를 걱정했지만, 유일하게 그런 티를 내지 않은 자는 의동생인 케이아 라겐펜더였다. 사람들은 유들유들하고 능글맞은 케이아가 늘 그렇듯 제 의중 숨기고 있는 것이라, 실제 속마음은 그를 걱정하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진실과는 조금 달랐다. 케이아는 정말로 다이루크를 '조금만' 걱정하고 있었다.


다이루크가 제 얼굴에 집어던진 루비 색의 신의 눈을 4년 동안 보관하고 있던 장본인이 바로 케이아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확히 케이아의 이마를 강타하고 진흙탕에 굴러떨어졌었다. 


비 그친 포도밭의 흙더미를 파헤쳐 주워낸 그것을, 케이아도 정확히 어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주인이 버렸음에도 여전히 제 색을 유지하고 있는 영롱한 보석을 보며, 나중에야 그것이 다이루크의 안전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다이루크가 소문대로 어디 길거리에서 객사했다면 진작 이 보석은 찬란함을 잃고 텅 빈 유리껍데기가 되어 케이아의 손 밖으로 새 주인을 찾는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계절이 여러번 바뀐 후부터였다. 케이아는 다이루크의 신의 눈에 대고 그것이 꼭 다이루크의 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풀이를 해댔다. 가끔은 화롯불에 그것을 던져넣고 따뜻하게 달궈지는 모습을 감상하며 시큼한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저 애물단지를 팔아치워버리고 싶은 나날도 많았다. 아무리 가산 풍족하다 한들 구멍이 생길 때마다 몇백만 모라씩 턱턱 빼내올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어떻게든 머리를 혹사시켜 짬돈을 만드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가끔은 염치도 잊고, 이 모든 일을 내팽겨친 채 혼자 홀홀 떠난 형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 때마다 케이아는 다이루크의 신의 눈을 확 암시장에 팔아치워버리고 싶은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세 달에 한 번 꼴로는 정말로 그랬다……. 


일에 익숙해진 지금은 그런 충동도 가끔씩만 찾아올 뿐이지만. 케이아는 레드 와인처럼 투명한 붉은 색을 띠는 보석을 입에 넣고 신나게 와작와작 씹어댔다. 이래봤자 흠집도 안 날 테니까. 주인이 돌아왔는데도 왜 이 망할 보석은 여전히 제 손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보인단 말인가. 사람 속 터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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