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이용가.


사람의 나이로는 올해 17살을 맞는 제임스 커크를 굳이 구분선상에 넣자면 여우 수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수인이란 가끔 선인이나 영물 따위와도 비교되고는 했는데, 수인들이 매우 오래살고 인간과 동물의 특징을 전부 가지고 있다는 점에선 현대 세계에 사는 인간들 입장에서야 오래된 구문에서처럼 그들과 동일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 커크의 가장 큰 관심사라고 한다면 동면에 빠져있는 제 짝이자 보호자인 레너드 맥코이가 잠에서 언제 깨어날까 하는 것이다.

매우 오래되고 현명한 수인에 속하는 레너드 맥코이는 많은 나이만큼이나 긴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한창 성장기인 제임스의 입장에서는 그 긴 겨울잠이 따분하기 그지없다. 바위틈으로 빼꼼 여우꼬리를 내밀고 때 이른 싹 같은 게 올라오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일과일 뿐이다. 가끔 뒤늦은 눈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아름다운 금색 털 위로 쏟아지는 눈에게 화내듯이 컹컹 짖기도 했다. 그러고 있으면 잠이 덜 깬 레너드가 쩍 하니 하품을 하면서 굴에서 나와서는 제임스의 꼬리를 물고 질질 끌면서 제 옆에 앉히고는 한소리 하고 잠드는 것이다.

[꼬맹아 봄이 오려면 멀었어, 좋은 수인은 충분히 겨울잠을 자는 법이지.]

물론 제임스는 그런 레너드의 잔소리에 안 그래도 비죽 나운 주둥이를 포근한 토끼털 모포 위로 부비다가 생각하는 것이다.

[레니는 바보 멍청이야 지난가을에도 잔뜩 빨아주고서는 '아직 성인이 아니니까 안돼'같은 소리나 했지. 그러고는 결국 다음날 내가 깔아뭉개니까 안에 잔뜩 싸 버렸잖아. 잔뜩 노팅 하는 바람에 내가 삼일이나 누워있어야 했다고.]

그러니까 제 짝이 얕고 긴 잠에 빠져있는 동안 제임스는 심심했다. 음식을 저장하는 기술이 발달되어있는 현대에 이르러서 수인에게 겨울잠이란 큰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어린 제임스는 겨울잠이란 석 달 열흘을 게으르게 빈둥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어느 날 문득 굴을 빠져나가서 산 아래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방의 작은 소도시에서도 조금 외각으로 빠져나가야 있는 이 작은 마을에는 외부인이 방문하는 일이 드문 편이다. 그렇지만 금발에 파란 눈을 한 그 젊은이는 가끔씩 의료봉사를 위해 들리곤 하는 닥터 맥코이의 조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맥코이는 겨울에는 저 멀리 따듯한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렇다면. 저 젊은 총각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마을의 유일한 24시간 마트의 사장이자. 존경받는 마을 대표인 말리우드 여사는 지푸라기같이 흐트러진 금발에 파란 눈을 깜박이는 제임스 커크를 보며 생각했다. 벌써 맥코이씨가 돌아온 것일까. 알려진 나이에 비해 젊고 잘 생긴 레너드에 대한 은근한 관심을 감추지 않았던 말리우드 여사는 캔디에 칩이며 소다를 잔뜩 들고 온 제임스에게 은근히 묻기 시작했다.

닥터는 잘 계시니? 여기 같이 온 거야? 닥터랑 넌 언제부터 같이 살았어?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은 뭐야? 역시 좀 섹시한 스타일이 먹힐까?

잠자코 듣던 제임스는 점점 심기가 불편해져서 카드를 냉큼 내밀고 말리우드 여사를 노려봤다. 레니는 [어린] 여자 안 좋아해.

말리우드 여사는 얼굴을 붉히며 역시 나 같은 농익은 나이가 좋겠지? 내가 이래봬도 왕년에는…….

"계산."

결국 못참은 제임스가 카드를 코밑으로 들이댄 이후에야 말리우드 여사는 살짝 기대감에 상기한 빰으로 활짝 웃으며 닥터 맥코이와 친밀한 이 젊은 청년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 노력하며 계산을 해 주었다. 제임스는 킁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마트의 문을 열고 홱하니 나가게를 나왔다. 말리우드 여사는 돌아보지도 않는 그 청년의 뒤통수를 향해 평소 잘 쓰지않는 근육까지 전부 사용한 미소를 지어주며 한마디 덧붙였다. 잘 가렴. 그리고 내 얘기도 잘 해주고. 손을 흔들던 말리우드 여사는 순간 확 몰아치는 추운 겨울바람에 흠칫 정신이 팔렸다.

"에취"

뿅.

어라?

말리우드 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임스의 머리 위로 나타난 노란빛의 귀에 주목했다. 청년이 킁킁거리고 제 코를 문지르더니 가게 유리창 너머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말리우드 여사는 노랗고 복슬복슬한 귀가 둥둥 떠서 유리창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깜박깜박.

"세상에."

내가 뭘 본거지? 요즘 일이 고된 모양이지. 그녀는 오늘은 야간 직원인 클라우드를 조금 빨리 불러내야겠단 생각을 하고는 그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기분 나쁘게 제 것에 탐을 내던 염치없는 여자를 뒤로 하고. 마트를 나와 거리로 나선 제임스는 입안에 사과 맛 사탕을 두 알 집어넣었다. 당분이 혀끝을 아릿하게 자극해서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작게 콧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흐흥."

에취!

킁. 제임스는 다시금 코를 들이마셨다. 감기인가. 에취. 이걸 알면 레너드가 방방 뛸 것이다. 제임스는 레너드에게 혼이 날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일탈은 그만두고 아무래도 빨리 돌아가야겠단 생각을 하며 그는 손에든 과자를 동굴 근처의 어디에 숨겨 두는 것이 좋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너구리 영감이 아직도 거기에 둥지를 꾸려 놓았을까? 거기가 제일……. 윽!"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있었던 제임스도 문제였지만. 거기에 와서 들이받은 상대도 정신이 어지간히 팔려있었던 모양이다. 화를 내려던 제임스는 작게 욕을 할 뻔 했다. 쿵 하고 경쾌하고 큰 소리와 함께 제임스와 부딪힌 사내는 혼이 쏙 나간 표정으로 제임스에게 삿대질을 했다.

"꼬, 꼬리."

"응? 아아, 내 꼬리 예쁘지?"

살랑살랑 움직이는 꼬리가 탐스럽기 그지없다. 제임스는 제 자랑 중 하나인 밝고 부드러운 꼬리를 한껏 흔들어 보았다.

"여, 여우 귀"

"응?"

까딱까딱. 제임스가 반사적으로 귀를 까딱 거리자 사내는 더 넋이 나갔다.

어라.

제임스는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다. 이 작고 한적한 마을에 왜인지 사람이 많은 느낌이다. 그리고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제임스 커크 너 사고 쳤다.



한편, 얕은 겨울잠을 자던 레너드 맥코이는 습관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다. 제 품에 안기는 작은 털 뭉치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다. 검은 털의 짐승인 채로도 한껏 인상을 찌푸린 레너드는 한쪽 눈을 살짝 떴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딱 제몸만한 베개를 둥글게 말아놓고 제임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요놈의 앙큼한 꼬맹이가 어디로 사라졌을까. 본즈는 몸을 쭈욱 펴 기지개를 켜고는 검은 주둥이를 벌러 쩌억 하품을 했다. 지금 같은 시기의 어린 수인들은 밖을 나다니는 것이 여러모로 위험하다. 사람 모습으로는 성인일지 몰라도 여우 모습으로는 아직 한창 꼬마인 것이다. 그래도 멀리 가지 않고 요 근방에서 또 들쥐들 따위나 놀리고 있을게 뻔하다고 생각했던 레너드는 검은 짐승의 모습으로 동굴을 나서려다 아래를 보곤 놀랐다.

눈 위로 나 있는 캔버스 자국.

맙소사. 레너드는 재빨리 굴로 들어가. 주섬주섬 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하니 욕만 나왔다. 댐 잇. 짐 커크.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울렸다. 제발 사고나 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레너드는 두꺼운 패딩을 주워 입으며 제임스의 패딩도 같이 챙겼다. 없어진 옷가지들을 보면 분명 얄팍하게 입고 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감기라도 걸렸다면 큰일인데.”

포근한 눈 위로 나있는 제임스의 발자국을 따르며 레너드는 중얼거렸다.



당연히 제임스는 감기에 걸렸다. 코를 훌쩍거리며 귀와 꼬리를 다시 집어넣기 위해 애를 쓰는 그의 모습은 엇뜻 처량해 보였다. 이 작은 동네에서 그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마침 그곳에 있었던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 청년은 크게 곤란했을 터였다. 스타플릿의 대령 크리스토퍼 파이크 대령은. 눈앞의 수인 제임스 커크에 대한 자료를 기억해 냈다. 아버지가 조지커크라면 분명 수년 전에 스타플릿에서 순직한 그 여우수인이 맞을 것이다. 늠름하고 멋진 사내였음을 크리스는 기억했다. 요 앞의 꼬맹이는 코를 질질 흘리는 것이 그리 멋진 사내가 되기에는 멀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였지만 말이다.

"제임스?. 나는 네 아버지의 친구인 크리스라고 하네."

"아? 아버지를 알아?"

결국 꼬리를 집어넣는 것을 포기한 제임스는 제 풍성한 꼬리를 몸 앞으로 돌려 끌어안았다. 마치 커다란 인형을 안은 듯한 모양새에 어찌보면 귀엽기도 하다. 그렇지만 크리스가 제임스에게 바라는 것은 귀여움이 아니다.

"혹시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나?"

"아, 숨겨진 달이. 17번을 지났고. 다음 달이면 18번째가 돌아오게 되지!"

수인만의 나이 계산법에 파이크는 조금 허둥댔다. 그래서 그게 몇 살인 게지.

"그래서 사람 나이로는 몇 살 인 거지?"

"음. 이백하고도 사 년."

어이쿠야. 크리스는 조금 당황했다. 조지 커크 와 친우였던 기억이 있지만. 사실 그들은 나이를 초월한 친구였던 터라. 그가 묘사하고 하던 꼬마 여우가 자신보다 그렇게 많은 연상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이건 왜 물어봐?"

"아, 아니, 그러니까 스타플릿에……."

쾅!

"짐!"

큰 소리와 함께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 들이닥쳤다. 제 짝이 스타플릿 지부로 붙들려갔단 소식에 있는 기운, 없는 기운 다 써가며 달려온 레너드였다. 그리고 제임스가 귀며, 꼬리를 드러내고 취조실에 앉아있는 - 물론 수인인 그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 꼴을 본 레너드는 안광을 빛내며 목울대를 울리며 이를 들어냈다. 현명하고 오래된 것들 중 하나의 위협을 받은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 들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둘을 멀뚱멀뚱 바라만 봤다. 제임스는 레니! 하고 소리지르곤 껑충거리고 레너드에게 뛰어 들어가 안겼다. 요 사고뭉치 꼬맹아 정말. 레너드가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불어넣었다. 그제야 사라지는 꼬리에 크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기, 자네는 누구인가?"

"이 꼬맹이 보호자인데."

"내 남편인데."

동시에 들리는 대답에 크리스는 또 아연실색했다.

"그, 저기. 다른 뜻은 없었네 그저."

"이봐, 대령님?"

레너드가 크리스의 어깨 견장을 홀끗 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얘는 스타플릿에 가지 않을 거야."

애아버지와의 약속이고, 나 자신의 이기심이지. 내걸 사람 많은데 두고 보다니 어떻게 그런 짓을.

레너드는 뒷말을 마음속으로 삼켰다. 제 품에 안긴 제임스의 머리 위로 가만히 손을 얹어 끌어당겼다. 제임스는 '아직은'크게 혼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그가 하는대로 가만히 레너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어쩌면 다른 곳에 다른 세계에 있는 다른 제임스 커크는 당신을 따라갈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여기 있는 얘는 내 거야."

제임스가 조금은 뿌듯하게 실실 웃었다. 레너드는 실실거리는 제임스의 코를 잡아당겼다.

"아파!"

"그러길래 누가 길거리에서 스트립쇼를 하래?"

수인인 모습은 제 짝에게만 보이는 것이 관례이다. 제임스는 반쯤 벗고 돌아다닌 셈이었다. 제 잘못을 아는 제임스가 조용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저기,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보호자가 보다시피 난리라서."

"남편"

이번에는 레너드가 제임스의 말을 정정했다. 넋이 반쯤 나간 크리스를 두고 두 수인은 스타플릿 본부를 빠르게 빠져나왔다.



Aftertaest

"그러니까 지미. 내가 겨울엔 겨울잠을 자야 한댔잖아. 감기 걸리면 그 꼴이 되기 십상이라고. 게다가 넌 아직도 어린데."

레너드의 손을 잡고 산길을 오르던 제임스는 그의 발에 비죽하게 대답한다.

"그 어린 수인한테 할 짓 못할 짓 다 하는 어디의 나쁜 수인이 누구더라."

"끙……."

"다음 달이면 나도 어른 여우거든?"

18번의 숨겨진 달이 지나면 수인으로 완벽한 개체가 된다. 보호자이자, 어릴 적 부모가 지어준 짝인 레너드가 곧 제 것이 될 터였다. 물론 두 사람은 진작부터 붙어먹었지만 그래도 사람 모습과 수인으로서 성체가 되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그래도 늑대인 나에 비해서는 한참을 작을 거야."

거대한 검은 털의 늑대인 레너드는 성체가 된 제임스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좋아."

"뭐?"

"내가 사자나 표범 이거나 그랬다면, 여우 모습으로 네 품에 못 안겼을 거 아냐. 앗! 맞아 나 등에 태워줘! 어른 여우 되면 이건 못 할 테니까."

제임스가 레너드의 등에 매달렸다.

"끄응……. 지금도 무…….“

"뭐?"

"아, 아냐."

"이씨. 너 지금 무겁다고 하려고 했지?"

"아냐 너 깃털처럼 가벼워"

작은 여우가 된 제임스를 오래된 만큼 더욱더 거대한 제 몸에 올린 레너드는 벗어던진 옷가지들을 입에 물고는 더이상의 대답을 피했다. 괘씸하지만 그래도 금방 달려온 레너드가 고맙고 든든하다. 제임스는 레너드의 목덜미의 향긋한 털내음을 마시며 고롱거리는 기분 좋은 울음 소리를 냈다.

물론 동굴에 돌아간 제임스는 낮이고 밤이고 한참을 더 혼나야만 했지만 말이다.



*숨겨진 달:윤달을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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