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엔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지 멍한 얼굴로 제 위에 올라탄 릴리를 올려다보았다. 책상 위에 놓아둔 촛대 위에 켜진 불빛이 릴리의 모습을 환하게 밝혔다. 어두운 동굴 속을 헤매는 모험가가 든 횃불 빛이 비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보물처럼 릴리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조금 짓궂은 정도였지만 눈은 조금 위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릴리가 저한테…… 나쁜 짓을 할 리는 없으니까요……?"

필리엔의 목소리는 그들을 비추는 촛불보다 더 일렁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슬슬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하는 듯했다. 릴리가 오른손 검지로 필리엔의 턱을 들어 올리며 엄지로 입술을 쓸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나쁜 짓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필리엔이 헤 벌리고 있던 입술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겨우 다물었다. 침을 꿀꺽 삼키는지 필리엔의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 크기로 울려 퍼진 것도 그때였다.

"악! 못 볼 꼴 봤네!"

말했던가? 릴리는 필리엔의 깝죽대는 옛날 부관인가 뭔가가 좀 싫어졌노라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니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슬슬 뒷걸음질 치는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보였다. 롱겟이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하긴 했어도 소리만 요란했지 실제론 눈을 제대로 가리고 있지도 않았다. 

릴리에게 얌전히 깔려있던 필리엔은 롱겟이 나타난 걸 알아차리자 잽싸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뒤로 기우뚱하는 릴리를 재빨리 붙잡아 형편없는 꼴로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막고는 무슨 짚단 인형 들듯이 릴리를 들어다 바닥에 잘 내려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본인도 책상에서 내려가 옷을 추스르며 아무 일도 없었던 척을 하기 시작했다.

"상황 정리 됐습니까?"

"어……. 응. 이제 눈 떠도 괜찮아."

릴리는 방해받은 게 불쾌했지만 필리엔은 부끄러워하며 쭈뼛거리고 있었다. 아직 뭘 하지도 않았는데 중간에 끝난 탓에 좀 머쓱하긴 했어도 릴리 입장에서는 그다지 부끄러움을 느낄 것도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맞춰주기로 했다. 불청객의 등장에도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고 참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릴리의 긍휼한 마음을 모르는 불청객이 릴리를 흘깃 보고는 필리엔을 향해 말했다.

"할 얘기가 있는데요."

"아, 그러면……."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그게 무엇이든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필리엔이 무어라 얘기를 꺼내기 전에 릴리가 재빨리 말했다. 맞춰준다고 했지 비켜준다곤 하지 않았다. 뭐가 됐든 볼일 보고 얼른 나가길 바랄 뿐이니 군사적으로 민감한 정보든 뭐든 릴리는 정말로 모르쇠를 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필리엔은 릴리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말할 때를 놓쳤고 롱겟은 노골적으로 찝찝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을 보는 롱겟의 표정을 본 릴리가 또 선수를 쳤다.

"이런 일로 허언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릴리는 자신의 말투와 태도가 그야말로 믿음과 신뢰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롱겟은 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그냥 다음에 얘기하죠."

당장 알려야 하는 급한 일이 아니거나 정말로 릴리 앞에서는 말하기 힘든 내용인 것 같았다. 롱겟의 속내를 짐작해보며 릴리는 그러든가 말든가 저 남자가 그냥 빨리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롱겟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레이디는 제가 에스코트 하겠습니다. 지금 밖에 나가기 곤란하잖습니까."

롱겟이 필리엔 쪽을 대충 턱짓하며 말했다. 필리엔이 지금 나가기 좀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에는 릴리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말이 있다고는 해도, 롱겟이 가는데 릴리까지 나갈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대현자도 릴리를 그냥 뒀는데 왜 본인이 난리란 말인가? 릴리가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롱겟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에스코트는 필요 없소. 안 나갈 거니까."

"공작 각하께서 오가는 바람에 이목이 많습니다."

"모르나 본데 방금 나가셨소."

"예. 직전에 그쪽이 들어갔고요. 그리고 여긴 방음이 되는 구석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 주위에는 지금 당나귀처럼 귀를 세운 놈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뜻이죠. 작은 소리야 안 들리겠지만 소리가 조금만 커져도 안에서 뭘 하는지 다들 알고도 남을 테고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필리엔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웅얼거리며 알았노라 말했다. 물론 릴리도 훔쳐 듣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상황이 썩 기껍지는 않았다. 욕망이 불타는 것과 별개로 릴리도 필리엔을 소중하게 생각했으니까. 첫경험을 충동적으로 하고 싶지 않다는 수줍은 마음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슨 도둑도 아니고 그걸 굳이 엿듣고 있는 쪽이 이상한 것 아닌가? 릴리는 떳떳했으므로 별로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여기 계속 있겠다는 건 뜻이 너무 명백하기는 했다. 롱겟이 말한 대로, 릴리가 더 버티면 필리엔의 평판에 좋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물러남이 옳겠지.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맥 없이 끌려 나가는 게 기꺼운 건 아니었다. 릴리가 코웃음을 쳤다.

"그쪽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닌지?"

물론 좀 치졸한 공격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필리엔을 돕는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옳은 게 마음에 든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필리엔을 막대했던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릴리의 마음속에서 그깟 평판이 뭐가 중요하냐는 진실의 언어가 튀어나오려고 부글거렸다. 

"제가 썩 모범적인 인간은 아니긴 해도, 적어도 생명의 은인에 관해 나쁜 말 퍼트리지는 않는 사람이긴 합니다."

롱겟은 릴리가 시비조로 말하는 것에도 날파리가 날아가는 정도로 여기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말은 바르게 했다. 롱겟의 말을 들은 릴리는 순수하게 놀라 필리엔을 보았다.

"이 사람 목숨을 구해줬어요?"

"네? 아, 네. 뭐 그땐…….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그때는 제 부관이었으니까요."

아니라고 안 하는 걸 보면 진짜로 구해주긴 했나 보다. 릴리는 마음속으로 롱겟에 대한 평가를 조정했다. 굳이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 정도는 하는 듯하니 적어도 필리엔에게 나쁜 짓은 안 하겠다는 쪽으로 말이다. 성별을 떠나서 은원을 아는 태도를 지닌 건 좋은 일이다.

이렇게 하해와 같은 이해심을 알지 못할 롱겟이 여전히 건방진 태도로 릴리에게 말했다.

"제 인생 별로 안 궁금하실 텐데 시간 끌지 말고 나가시죠. 피차 바쁜 사람들이."

"난 별로 안 바쁜데……."

릴리가 꿍얼거렸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는 듯 롱겟이 릴리의 앞에 척하니 팔을 내밀었다. 릴리는 식사 중에 모래라도 씹은 얼굴로 롱겟의 팔에 손을 올렸다. 릴리도 필리엔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니까. 이 생각을 지금 몇 번째 하는 건가 싶기는 했지만 깨진 판을 어쩌겠는가.

릴리가 촉촉한 시선으로 필리엔을 돌아보았다.

"이따가 또 올게요."

필리엔이 미소 지으며 뭐라고 말하려는데 롱겟이 가차 없이 끊었다.

"꿈 깨십쇼."

롱겟의 말을 들은 필리엔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그냥 얌전히 서서 릴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제가 찾아갈게요."

오늘은 쫑났다는 뜻이다. 릴리가 울상이 됐다. 필리엔이 릴리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 롱겟이 멋대로 필리엔의 의사를 왜곡한 거나 다름 없었다. 이거 하극상 아닌가? 지금은 아니라지만 부관이었다며. 대충 하극상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릴리는 불만을 느꼈지만 롱겟은 느적거리는 릴리를 반쯤 끌듯이 하면서 건장한 말처럼 씩씩하게 필리엔의 막사에서 나갔다. 다리도 긴 사람이 성큼 걸으니 막사에서 순식간에 나가게 되었다. 릴리가 미련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필리엔이 남아 있을 곳을 돌아보았다. 롱겟의 말을 듣고 봐서 그런지 주위에 쓸데없이 사람들이 많이 오가며 기웃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쯧. 어디서 이런 망아지 같은 여자를 만나선……."

롱겟이 혼잣말을 했는데 참 이상하게 혼잣말이 혼자만 듣는 게 아니라 릴리 귀에도 너무 선명하게 잘 들렸다. 이로써 릴리는 두 번이나 중서부 남자에게 망아지 같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뭐, 망아지가 귀엽긴 하지. 릴리는 아무 생각이나 떠오르는 대로 흘러가게 두며 가기 싫은 걸음을 옮겼다. 물론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었으니 답은 해줬다.

"그대도 말 같소."

"예? 말이요?"

"그래요. 느와 갈기랑 그쪽 머리카락이 아주 똑같거든."

"말을 높이든가 낮추든가 하나만 하든가 왜 이리 왔다 갔다 합니까? 게다가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데 정말 느와 맞습니까? '그' 느와요?"

어째 말하는 감이 묘했다. 롱겟이 느와를 알기라도 한다는 것 같이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리르먼 씨와 아는 사이라도 되나? 하긴 롱겟도 중서부 귀족이랬으니 리르먼과 어떻게 아는 사이라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릴리가 팔려서 끌려가는 가축처럼 슬프게 뒤를 돌아보는 걸 그만두고 롱겟 쪽을 보았다. 어차피 이제 필리엔이 쓰는 막사조차 제대로 눈에 안 보이기도 했다. 

"다른 느와가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 내 말 이름이 느와는 맞소. 정확히는 리르먼 씨가 나에게 빌려준 거지만."

잘 대답을 해줬더니 롱겟은 되려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아까부터 릴리에게 이유 없이 못마땅한 기색이기는 했는데 그걸 더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뜻이다.

"모르시나 본데 그 말 제법 유명합니다. 턱 하니 빌려줄 건 아니거든요. 형제를 나란히 구워삶다니……. 사람을 꾀어내는 재주가 아주 비상하시군요."

필리엔도 리르먼 씨도 릴리를 좋게 보는 건 사실이긴 한데 왜 이리 빈정거리는 것 같지? 쓸데없이 높은 곳에 달린 롱겟의 얼굴을 보니 자기가 무슨 말이라도 했냐는 듯 매우 뻔뻔스러운 낯짝이었으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릴리 일방의 착각은 아닌 듯했다. 대관절 릴리가 뭘 잘못했다고 저렇게 빈정댄단 말인가? 릴리는 롱겟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릴리도 롱겟의 신분을 생각해 어색하게나마 차리던 예의마저 그만두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자네도 비아냥거리는 게 수준급이군."

"말 한 마디 안 지는군요."

"그럼 져야 하나?"

릴리의 질문에는 대답할 말이 없는지 롱겟은 콧김만 흥 뿜었다. 

"동부에서 왔다더니 정말 그렇습니다."

뭐야, 이건? 릴리가 별꼴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롱겟을 보았다가 시선도 두기 싫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마침 도착한 마차 쪽으로 몸을 빼고 팔을 뻗으며 빠르게 말했다.

"그대도 중서부 남자 같네. 로라, 나 왔어."

릴리가 말을 하며 마차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자 릴리가 손을 거두기도 전에 롱겟이 팔을 휙 뺐다. 릴리가 중서부 예절을 잘 모르긴 하지만 이게 예의 없는 짓이라는 건 알겠다. 

릴리가 롱겟을 위아래로 쓱 훑었다. 멋지고 애교 많고 영리한 느와를 닮은 멀쩡하게 생긴 외모가 아까웠다. 혈통과 유복함 덕분에 외양이 말끔하고 몸은 장사가 따로 없는데 남자로는 영 아니었다.

릴리는 제 생각을 감출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으므로 훑는 시선을 마주한 롱겟이 모를 수는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평가하는 릴리의 시선에 롱겟이 진저리를 쳤다. 또 동부 여자가 어쩌고 하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릴리가 알 바는 아니었다. 릴리의 상식에서 이상한 건 롱겟 쪽이었으니까. 

다행히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마차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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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겟... 웃기는 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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