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웠던 날이 지나고, 일상은 평소와 같이 돌아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집에 손님이 자주 온다는 것과 더는 함께 식사하지 않게 됐다는 것일까. 규혁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 몇 달이 지나고 있는 나날. 도윤은 생각에 빠진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2층 중앙에 놓인 소파에 무기력하게 누운 그는 찬 바람을 맞으며 여유로움에 절여져 갔다. 

 정작 평화로움을 제외하고 달리 정작 해결된 일은 없었다. 나아졌다뿐이지 나아가지 못한 관계는 꿈같은 밤에 머물러있었다. 안이한 마음이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괜찮다. 규혁이 안아준, 따뜻함이 가슴께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자그마한 불씨는 소중하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다시는 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형! 형의 귀염둥이 왔는데, 설마 자는 거?"

 "아니. 어서 와."

 "삭신이 쑤신다. 아이고야."

 겨울의 추운 날씨에도 도윤이 창문을 전부 열어둔 이유. 그건 바로 집에 자주 찾아오는 손님인 혜성 때문이었다. 저를 죽이려 하고, 사과한 그 날을 기점으로 그는 도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혜성은 규혁에게 일에 대해 보고를 하기 위해 집에 들르며 항상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받아주지 않아도, 받아도 인사는 매번 이어졌다.

 애초에 도윤은 혜성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할 게 아니었기에 화라는 감정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좀비를 증오하는 이유가 있고, 누군가의 속사정을 알지 못한 채 눈앞에 닥친 상황이라면 감정적인 반응을 한다는 건 자신이었어도 그랬을 터였다. 

 "또 열어놓고 있네. 환기 안 해도 괜찮다니까 그러네."

 "시원하고 좋은걸."

 "이거 진짜 안 되겠네. 이건 시원한 게 아니라 추운 거야."

 "벌써 겨울이구나." 

 그리고 그 이해가 둘의 사이를 변화시켰다. 간단한 인사에 답하면서 서서히 이야기의 주제를 늘려가자 관계는 계절처럼 무던히 발전했다.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는 태도엔 친근함이 깃들어있었다. 그래. 누군가와의 관계는 이다지도 쉽게 변하는데. 어째서 가장 달라지고 싶은 남자와는 되지를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겨울이라 그런가? 요즘 바빠 미치겠어. 자랑스러운 이사님은 출근도 안 하고!" 

 "내가 일러바치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해?"

 "호오? 형이?"

 하면 내 적금 깨서 다 형 준다. 이죽거리는 혜성의 말엔 알기 쉬운 감정이 깔린 채였다. 숨기지 않는 동정심. 한도윤이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보인 솔직함이었다. 

 "오늘은 바로 안 돌아가네."

 "거래처랑 회식 있거든. 좀 미적대다가 규혁이 형이랑 같이 나가야 해."

 혜성이 규혁의 것으로 보이는 차키를 흔들어 보였다. 돈은 짜게 주면서 수행비서급이라던가, 무언가 불만을 잔뜩 토로한 그는 폭신한 양탄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덩달아 몸을 일으켜 바른 자세로 소파에 앉게 된 도윤은 문득 혜성의 불만 어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곤함에 쩐 눈과 실내가 추운지 조금은 벌게진 코. 원래라면 카랑카랑했을 목소리는 조금 비음이 섞여 있었다. 한바탕 환절기가 지나고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감기 기운이 있는 게 분명했다. 도윤의 시선을 알아차린 것일까, 혜성은 퍼뜩 시선을 맞춰왔다.

 "어우, 뜨거운 시선. 뭐 궁금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좋아! 인심 써서 특별히 시간도 떼울겸 재밌는 얘기 해줄게."

 "어? 어."

 씩 웃어 보인 얼굴로 그는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간을 때우기엔 긴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에, 좀비를 피해 도망치던 아이가 있었어. 이름이 뭐냐고? 듣다 보면 알아. 사실 좀비에게서 도망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아이는 좀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부모의 손을 놓쳤고 홀로 거리를 전전했지. 그러다가 뭐, 싸우는 법도 배우고 좀비도 많이 죽이고. 머리가 크기 시작하니까 안정된 생활에 대한 동경도 조금은 생겼어.

 담담한 어투에 묻어나오는 아까와 다른 쓸쓸한 느낌. 도윤은 직감적으로 이 이야기가 혜성의 과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즐거움을 위장한 얼굴엔 이미 웃음이 사라진 채였다.

 열여덟쯤인가. 아이가 이르게 어른이 될 때에 처음으로 자기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사람을 만났어. 안정된 도시와 달리 지방쪽은 여전히 좀비들이 난리였거든. 보호받기 위해 시내로 가던 나한테 같이 행동하겠냐며 선뜻 제의해줬고, 난 승낙했지. 그만큼 강한 여자였거든.

 그때를 추억하는 듯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입꼬리가 절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갈 정도로 좋은 기억인 것 같았다. 

 간단한 이야기지 않아? 시내로 향하면서 함께 좀비를 죽이고, 도움을 받으면서 좋아하게 된 거야. 알고 보니 HVF의 높은 분이라고 하면서 그쪽도 내가 마음에 들었대. 좋아한다는 마음을 전하고 사귀기로 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 나도 드디어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좋아하는 사람이랑 지낼 수 있는 거구나!

 "혜성아."

 "아, 미안."

 이어지던 말과 함께 혜성이 눈앞의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내리친 손에 붉게 부어오르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감기에 훌쩍이는 건지 모를 물기 섞인 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더라. 뉴로트립틸린이 개발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나는 안정된 생활에 딱히 좀비를 죽이지 않았어. 그러니까 점점 사이가 멀어지더라고. 솔직히, 살기 위해 했던 일인데 말이야. 그리고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았지. 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정말 좋아했는데. 차인 후에 고속 승진을 하던 난 그대로 말단으로 툭 떨어져 시시한 업무 수발이나 들면서 지냈고.

 그러다가, 그 사람의 곁에 이규혁이라는 사람이 홀연히 나타났어. 수없이 많은 좀비를 죽이고 다니면서 제 동료를 만든 남자. 어쩌다 현장 업무를 같이 가게 됐을 때 좀비를 죽여봤는데, 내가 했던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잔혹하게 좀비를 죽였어. 그러니 그 사람이 곁에 둔 거겠지. 

 "그리고 일이 터졌어."

 벅벅 눈가를 문지른 그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HVF 인원 반이 참여할 정도로 대규모의 좀비 토벌 사건이 있었어. 물론 높은 분이었던 그 사람도 참여했고, 규혁이 형도 나도 참여했지. 우르르 몰려가서 죽이는 일이 오랜만이라 그런가 나도 처음엔 꽤 열심히 했다? 아니, 형 그런 표정은 좀. 미안하다니까! 흠흠. 

 오랜만에 현장에 나가니까 처음은 괜찮았는데 좀 지치더라고. 다들 쓸어버리고 지나간 구역은 안전해서 난 잠시 쉬기로 했어. 무전을 남기고 대충 건물 잔해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는데 이게 웬걸. 한쪽 골목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길래 가봤지.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과 규혁이 형이 뭔가 흥분해서 소리치고 있어서 끼어들진 못했어.

 "그 다음은 어떻게 됐게?"

 "말하기 힘든 거면 안 해도 돼."

 "에헤이. 신뢰를 얻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줘. 어차피 내 주위 사람은 다 알아."

 다음은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지. 다 잡은 줄 알았던 좀비가 남아있었고, 큰 소리가 나자 둘을 습격한 거야. 솔직히 인간 의용군 중에 최고로 치는 사람들이니까 그깟 좀비의 습격 정도는 쉽게 쳐낼줄 알았는데……. 순간의 방심 때문일까, 그 사람의 뒤로 달려든 좀비를 규혁이 형은 쳐내지 못했어. 물어뜯기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그 사람의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참 비현실적이었네. 

 "그게 끝이야. 나는 그렇게 좀비를 증오하게 됐어."

 "혜성아."

 "뭐야? 불쌍하게 보는 건 사양입니다요. 그것보단, 신뢰를 얻는 과정이라고 했잖아. 내가 굳이 이 얘기를 한 이유를 모르겠어?"

 긴 이야기의 끝에 혜성은 후련하게 기지개를 켰다. 이어 약속 시각이 되었을까 핸드폰을 슬쩍 본 그는 느긋하게 제 머리를 툭툭 치는 시늉을 했다. 명백히 생각해보라는 뜻을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것저것 모순이 있는 얘기잖아. 우리 이사님이 왜 끔찍이 아끼는 형까지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좀비를 싫어하면서 그 높은 자리에 버티고 있는 건지 궁금해지는 그런 거. 물론 이 정도로 다 알 수는 없을 테지만."

 더는 얘기하지 않겠다는 듯 과장된 기합과 자리에서 일어난 혜성이 손을 흔들었다. 시간이 다 되어 가야 한다는 표시였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도윤은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며 이내 남자를 배웅했다. 모순이 있는 얘기. 마치 수수께끼를 던진 것 같은 혜성의 의도는 정말로 신뢰를 위한 것이었을까. 

 잠시 고민에 빠져 다시 소파에 널브러진 도윤은 약을 가지고 올라온 주영에게 고민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고민을 나누면 남의 일을 말해야 한다. 혜성은 자신의 주위 사람은 다 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건 자기의 일이니 말했다는 뜻일 거다. 도윤은 그의 이야기를 아는 남이었을 뿐, 자랑스레 떠들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주사를 맞으며 주영이 내려갈 때까지 도윤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홀로 남은 고요한 방의 천장을 보는 눈에는 지난 몇 달간 지겹도록 본 천장이 있었다. 이규혁이 준비한 2층. 그가 끔찍하게 아끼는 한도윤. 주영이 말하는 애정. 혜성의 과거에 존재하는 모순. 이 모든 것이 도윤에게는 난제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그 사람과 손을 잡고 직접 좀비를 죽이러 다녔다."

 여기까진 아무런 모순도 찾을 수 없었다. 도윤이 좀비가 된 후, 홀로 전전하며 좀비를 죽이던 경험으로 금세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타입이니 말이다. 많은 제 편을 끌고 좀비를 죽이는 단체에 찾아온 손님은 중심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혜성이 지적한 모순점이란 건 뒷내용일 터였다. 대규모 좀비 토벌 사건. 혜성의 그 사람과 언쟁을 하던 규혁의 상황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 짧은 내용을 곱씹으며 자리에서 뒤척인 도윤은 머릿속 흩어진 정보를 맞추며 이상한 점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그리 빠르지 않은 기습에 반응하지 못한 형."

 모순점이었다. 못했다는 단어는 분명 어폐가 있었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좀비를 쳐낼 능력은 있는 사람이다. 따로 괴성을 질렀단 표현을 하지 않아도, 도윤은 좀비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습격당했을 때와 떠오른 좀비일 때의 기억을 종합하면 확실한 일이었다.

 혜성이 말하고자 한 말에 가까워지자 도윤은 속이 울렁거렸다. 이규혁은, 그 사람이 죽는 것을 방관했다. 전부 추측일 뿐인 결론은 지금 그의 상황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이사라는 자리에 쉽게 오를 수는 없다. 그것도 젊은 외부인이 단시간에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혜성의 그 사람이 전 이사였다면? 일부러 고성이 오가는 상황을 만들어 좀비를 끌어 들인 거라면? 그리고 그 사람을 계획적으로 죽인 다음…….

 "정신 차려, 한도윤."

 멋대로 의심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다. 급히 제 뺨을 내려친 도윤은 애써 추측을 지우려 애썼다. 믿고 싶지 않다는 감정과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이성이 부딪혔다. 그런데도 모든 의심을 지우지 못한 건 그저 이 이야기의 진상을 알게 된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침대 한 쪽에 굴러다니던 핸드폰으로 향했다.

 굳이 사용하지 않았던 연락처에 들어가 지금쯤 회식을 하고 있을 규혁의 번호를 눌렀다. 처음으로 거는 전화에 연결음이 무심하게 이어졌다. 바쁘다면서 전화를 거절해도 그러려니 핸드폰을 내려놓을 수 있는데. 규혁이 받을 거란 도윤의 작은 기대에 부응하듯, 곧 연결음이 사라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형. 바쁜 거 아는데 미안.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

 [괜찮아. 내가 조용한 곳으로 나갈게.]

 부스럭대는 마찰음이 들린 후 주변의 소란스러움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잠시 밖으로 나온 것처럼 조용해진 주변이 느껴졌다. 한숨에 가까운 숨소리가 이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도윤은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전화를 건 이유를 입 밖에 내뱉었다.

 "내일 밥 같이 먹을까 해서."

 […….]

 무슨 생각이냐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긍정에 가까운 침묵이 이어지는 시간 동안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어둔 창문에 다가가 조명이 켜진 정원을 내려다보자니 얼마 가지 않아 규혁의 답이 들려왔다. 

 [그래. 아침에 보자.]

 "응. 내일 봐."

 회식이라고 했던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는 작은 걱정조차 쉽사리 할 수 없어 도윤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고작 이 몇 마디를 위해 바깥으로 자리를 옮겨준 남자의 행동이 추위보다 더욱 사무쳤다. 끊긴 전화를 내리고 창에 몸을 기댄 시선은 한동안 밝고 텅 빈 정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조명 대신 밝은 햇살이 새어 들어올 때,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도윤은 아침을 맞이했다. 밤새 손에 쥐어져 있던 핸드폰이 뜨거웠다. 구겨진 이불을 고이 접어 정리하고 방을 한 번 둘러보자 원래도 말끔했던 방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침대와 마찬가지로 가지런히 정리된 책상에 다가갔다. 한 곳에 일렬로 서있는 화장품을 들어 익숙하게 짜내고, 얼굴과 목에 펴 바르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울을 보며 꼼꼼히 마무리하자 시간은 예상했던 대로 식사 시간에 가까워졌다. 마지막으로 귀에 달린 피어스를 점검하고 1층으로 내려가는 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편이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자 오히려 겁이 없어진 걸지도 몰랐다. 

 "좋은 아침. 형."

 "아, 좋은 아침."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는 식사 자리에 주영은 없었다. 규혁에게 전화를 하고 주영에게도 말을 전해둔 터라, 그녀는 흔쾌히 방에서 아침을 먹겠다고 한 참이었다. 

 도윤이 규혁을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는 규혁의 몫만이 차려져 있었기에, 도윤은 편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큰일이 있고 나서야 규혁이 인정한 걸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밥을 먹지 않는 동거인을 인정했다. 밥은 인간을 위한 것이다. 다른 이를 위한 몫은 없었다. 이럴 거면 화장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나. 어렴풋이 규혁의 변화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니 새삼 씁쓸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할 말이 있어."

 "응."

 "형은 나를 뭐로 보고 싶은 거야?"

 첫 질문은 원래 물어보고 싶은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둘 사이엔 달라진 태도를 받쳐줄 대화가 필요했다. 회피하고 무시하면 영원히 지속될 모래성 같은 관계. 도윤은 규혁을 대신해 토대를 쌓고 싶었다. 

 "한도윤으로."

 "그렇게 볼 수 있어?"

 "나는 이미 너를 도윤아, 라고 부르는걸."

 썩 만족스럽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래. 규혁은 이런 태도가 문제였다. 교묘히 확실한 대답을 피하고 상대에게 건넨 답으로 스스로 저의를 추측하게 만든다. 한도윤으로 보고 싶다면서, 이미 도윤이라 부르고 있으니 그렇다는 것일까. 짐짓 태연한 손길로 구워진 식빵을 든 규혁의 표정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럼 나는 한도윤이니까 알 권리가 있겠네."

 "넌 뭐든 물어봐도 돼."

 뭐든. 잠시 말을 곱씹은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HVF 이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해줘."

 도윤이 바라는 긴 설명이 아니어도 됐다. 밤새 고른 질문은 혜성이 들려주었던 이야기와 비슷한 것이었다. 어머니와 도윤을 잃은 탓에 좀비가 너무 미워서 높은 곳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고, 그 희생 덕에 그가 이사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는 말을 해준다면.

 진심 어린 말을 해준다면 도윤은 기꺼이 규혁을 믿을 셈이었다. 달라지는 태도, 그리고 솔직함이 언제나처럼 도윤을 옭아맬 수 있을 터였다. 전과 다른 점을 꼽으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이 들었으니까.

 "노력했어. 나는 그냥 천애 고아였고, 연줄이라고는 없는 일반인이었으니."

 "그것뿐이야?"

 "그럼."

 "신승연. 전 HVF 이사."

 "……!"

 미소를 띤 규혁의 얼굴에 금이 갔다.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냐는 눈빛이 쏟아졌다. 올곧지 않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도윤을 빤히 응시했다. 지금 이 상황에 도윤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중요지 않을 텐데. 규혁의 동요는 오로지 도윤을 향한 것이었다. 

 "끝까지 내게 솔직히 말하지 않는구나. 정말로."

 "나, 나는. 도윤아."

 잠들지 못한 밤에 도윤은 HVF에 대해 찾아보았다. 혜성이 말한 현장의 일은 워낙 유명한 일이었기에 굳이 자세히 파지 않아도 기사가 나오는 수준이었다. 일부러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겠지만, 도윤은 어렵지 않게 '그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높은 분이자 혜성의 연인이었던 이의 이름은 신승연. 확실한 건 기사의 제목으로도 알 수 있었다.

 신승연과 함께하는 신예 이규혁의 대규모 토벌……. 살아 돌아오지 못한 신승연의 뒤를 이어 이사 자리에 오른 이규혁. 도윤의 추측에 힘을 주는 기사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개중엔 규혁의 수상함을 어필하려 한 것들도 존재했지만, 규혁을 환영하는 기사에 묻혀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형한테 한도윤은 대체 뭐야. 가족도, 친구도 그 무엇도 되지 못하는데."

 추측이 확신이 되고 한도윤이라는 껍데기가 떨렸다. 이런 걸 직접 말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남보다 못한 사이인 게 드러나고 만 상황이 괴로웠다. 하나 남은 믿음이 깨지는 소리가 나고, 애써 움켜잡고 있던 불씨가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래도 형이 좋아. 그래서 비참해." 

 "도윤아, 내 말 들어봐. 나는 널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이제 와서 변명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규혁은 그저 살기 위한 목적, 수단으로 도윤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마음과 달리 냉정히 흘러나온 말을 마지막으로 도윤은 망설임 없이 의자를 박차고 부엌을 벗어났다. 거짓말을 하는 얼굴에 욕이라도 해주면 속이 시원할 텐데, 그는 그럴 수 없었다. 해야 할 일이 확실해졌음에도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감정은 여전히 자신을 안아주던 규혁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도윤아!"

 "이거 놔!"

 급히 부엌에서 따라 나온 규혁의 손이 도윤의 팔을 잡았지만, 내쳐졌다. 언젠가 있었던 일처럼. 거칠게 내쳐진 규혁의 손은 다시 도윤을 잡지 못했다. 너무 힘을 준 탓에 손을 내치고 놀란 건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내치는 게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 정신이 없던 때를 떠올리며 도윤이 현관 앞에 멈춰 섰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변하지 않고 형의 곁에 돌아왔는데, 거기서부터 문제였던 거야?" 

 "변했어. 너도, 나도."

 "그 전의 나도 한도윤이고 지금의 나도 한도윤이야. 난 변한 게 없어. 변한 건 형 혼자인 거지."

 변하지 않을 수 없어, 도윤아. 사람은 무언가를 잃다 보면 달라지는걸. 규혁의 힘없는 대답이 귓가에 울렸다. 새삼 이해하려 애써온 그는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었다. 이해가 아닌 새로운 방식, 혹은 처음부터 시작되었어야 할 어긋난 관계는 마침내 파도에 쓸리고 말았다. 

 흔적도 남지 않고 무너진 모래성이었다. 지금의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이제 막 새롭게 태어나 조금은 쉽게 무뎌진 도윤의 감정과 달리, 오랜 시간 마모되어온 규혁의 감정은 무뎌질 부분조차 남지 않았다. 

 "나를 싫어하지 말아줘."

 "싫어하지 않아."

 "거부하지 말아줘."

 "나를, 거부한 건 형이야."

 둘의 목소리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동안 쓰고 지낸 가면이 전부 바닥으로 떨어지자 남은 건 어린 시절의 규혁이었다. 절대 꺼내지 않을 것 같던 약한 본심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겨우 마주 볼 수 있게 된 이규혁과 한도윤의 시작지점은 너무나 달랐다. 웅크린 소년의 앞에 어른이 되어 서 있는 도윤과의 거리는 아득히 멀었다. 

 "너무 늦어버렸어. 형도, 나도."

 도윤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떨구는 규혁까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규혁도 미소를 띠었을 것이다. 이리 쉽게 인정할 일이었던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무서워서 도망치고 겁이 나서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도윤을 우유부단하게 만들었다. 

 "이건 두고 갈게."

 "어디 가려고. 내가 나갈 테니까 너는 여기 있어."

 "형의 집이잖아. 불편한 사람이 나가는게 맞는걸."

 급해진 규혁의 목소리와 달리 도윤은 퍽 덤덤하게 대답했다. 고작 건네줄 게 이것뿐이지만, 분명 규혁에게는 여러의미의 선물이 될 거라 생각이 됐다.  

 피어스가 아프지 않냐며 묻던 규혁의 얼굴은 어땠더라. 희미하게 바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기억 속에서 도윤 자신의 귓불을 만져주던, 그리운 그 시절의 풍경과 그늘진 얼굴 사이사이로 언뜻 보이는 진심 어린 걱정이 생생했다. 왠지 모르게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뚱한 태도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어쩌면 첫사랑의 징조였기에, 시리도록 선명했다.

 도윤은 새로이 맞춰온 과거의 미련을 풀어 내렸다. 쉽게 귀에서 떨어져 나온 피어스를 규혁의 발치에 내려둔 그는 등을 돌려 현관에 놓인 신발을 신었다. 몇 번 신지 않은 새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고 멀지 않은 문으로 향할 때. 규혁이 겨우 고개를 들어 손을 뻗었다. 

 머뭇거리는 손은 가까워질 듯 말듯 도윤의 뒤를 따랐다. 잡으려면 잡을 수 있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규혁의 발밑에서 뒹구는 피어스를 기점으로 나뉘어버린 그들의 거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억지로 붙잡아 둔, 자신의 세계라 생각했던 사람이 떠났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집을 나간 도윤의 뒷모습을 쫓은 규혁은 천천히 다가온 현실에 무릎을 꿇었다.

 "도윤, 도윤아……."

 그는 이젠 닿지 않을 이름을 부르며 유일한 흔적인 피어스를 잡았다.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금속 덩어리가 손에서 굴러다녔다. 마치 과거에 자신이 준 진짜 선물을 이제야 찾은 것 같아서, 규혁은 한참 동안 몸을 떨며 현관을 벗어나지 않았다.

 기세 좋게 현관을 나선 도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문을 닫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앞에 주저앉아버리고 만 그가 이를 악물었다. 애써 억누른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저 감정이 들끓는 고통에 찬 소리라고 해도, 규혁이 듣지 않기를 바랐다. 

 어느새 흐린 하늘에서 감정을 대변하듯 눈물 대신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올해 첫눈이 내리는 날, 이규혁과 한도윤은 다시 이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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