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미호뎐 비슷할 수 있음 주의






구(九:아홉 구) 미(尾:꼬리 미) 호(狐:여우 호), 꼬리가 아홉개 달린 여우. 현중기(玄中記)에 따르면 여우가 천년을 묵으면 구미호로 변하며 그 능력은 신에 가까운 수준에 다다른 여우라고 알려져 있다. 허나 본디 예부터 여우가 잔꾀가 많은 동물로 영악하고 야비하게 그려졌다면 구미호 역시 표독하고 인간의 간이나 심장을 빼먹는 사악한 존재로 그려졌다. 여우의 습성상 일부일처제인 일편단심인 것은 물론이요,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는 착한 심성은 가려진 채로.



"하-, 배고파. 초코바···."



굴 파는 것을 좋아하는 여우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아니, 천년까지 가는지 탕비실 안 텅 빈 캐비닛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준호는 여전히 굴 파듯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이봐, 여기 내가 항상 꽉꽉 채워 넣으라는 거 잊었나? 지나가던 직원 하나를 붙잡고 짜증 나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준호는 안타깝게도 이 회사 대표이사로 직원들에게 까라면 까야 하는 그런 존재였다.



"이사님-!"



준호의 가라앉은 기운을 느끼고는 저 멀리서부터 헐레벌떡 달려오는 김 팀장은 붙잡혀 있던 직원에게 가보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에이 제가 채워 넣는다는 게 그만, 깜-빡! 했지 뭡니까. 지금 당장 사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셔요. 아 참, 그보다 어제 말씀드렸던 이제부터 이사님을 전담해 주실 분,



"안녕하십니까, 황찬성 입니다."



준호는 이게 뭐냐는 듯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김 팀장에게는 가까이 오라며 커다란 손을 까딱여 보였다.


- 내가 언제 저런 인간을 데려오랬어?

- 어제 분명 싱싱한 인간으로 하나 데려 오시랬잖아요..! 


찬성에게 들릴까 소곤소곤 얘기하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 답답한 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벽에다 말하는 것 마냥 대화가 통하지 않음에 각자 혀를 내둘렀다.



"그건···! 후- 나가봐."



준호는 민준에게 말을 하려다 말고 결국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까만 하늘을 가득 채우는 달이 보름을 향해 갈수록 준호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일고는 했다. 그래서 어젯밤 김 팀장과 함께 술을 마시다 알딸딸한 취기에 싱싱한 인간 하나 맛보고 나면 이 갈증이 해소될까, 얘기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김민준 팀장은 반은 인간, 반은 여우인 몸으로 300년 전에 준호를 만나 죽을 뻔한 목숨을 겨우 거두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지금까지 열심히 준호의 충신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 요괴가 인간으로서, 그것도 일개 회사원으로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하루 종일 업무에 치이고 이사님까지 케어하랴 회사에서 민준은  하루라도 정신이 있는 날이 없었다. 그래서 이사님 전담 비서가 한명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던 찰나에 준호가 마침 원하는 채용기준(?)을 내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민준은 오늘 누가 봐도 듬직하고 싱싱-, 아니 건강해 보이는 청년을 데려온 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동안에 이 모든 것이 자기 얘긴줄도 모르는 신입사원 찬성은 그저 어색한 미소만 유지하고 있었다. 커다란 눈알을 굴려가며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럼 찬성씨는 앞으로 여기서 이사님이 필요하실 때마다 전화받아 주시면 되고-."



방금 사온 초코바는 그때그때 얼마나 남았는지 수량 보고 미리 채워놔요. 안 그럼 또 오늘 같은 일이 생겨.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버리는 김 팀장 뒤로 찬성은 초코바 두 개를 들고 대표이사실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그토록 찾던 초코바를 책상에 내려놓자마자 준호는 바로 하나 까서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그런 남자를 보고 있자니 오늘 찬성이 첫 출근한 이 큰 회사의 대표가 아닌 초콜릿에 한창 빠져있는 자신의 조카와 겹쳐 보였다. 찬성은 오물거리며 야무지게도 먹는 모습을 저도 모르게 귀여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왜? 뭐-, 나가봐."



휙- 휙 휘젓는 나가라는 제스처와 까칠한 목소리에 금방 정신을 차린 찬성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이사님 스케줄부터 확인했다. 오후에는 따로 잡힌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잠시 창고에 다녀오겠다 메모를 남기고 자리를 비웠다.


준호의 할 말 다 하고 예민한 성격을 맞춰줄 비서가 없어 한동안 비서 자리가 공석이었기에 제대로 된 업무 인수인계도 받지 못한 터. 그래도 출근 첫날부터 알뜰살뜰 챙겨주던 김 팀장님이 창고에 남아 있는 예전 업무일지를 한 번 보라고 언질 해주어 업무 파악 겸 창고 정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기계실 옆 모퉁이 돌아가면 창고가 하나 있는데 거기 왼쪽 선반은 이사님 개인적인 자료들 모아놓았으니까 오른쪽 것만 확인하면 돼요, 알겠죠?"



웬만하면 왼쪽 거는 건들지 말고-. 귓가에 김 팀장님의 당부가 들리는 듯해 찬성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동안 사람의 손길이 탄 적 없다는 것을 알려주듯 문 열림 조차 뻑뻑했다. 뽀얀 먼지가 그대로 쌓여있는 창고는 고요하고도 특유의 오래된 냄새가 가득했다.



.

.

.

 


"하··· 이거는 이쯤 하면 됐고··."



두껍게 묶여 보관된 서류들을 하나씩 훑어보던 찬성은 몇 가지 중요 서류만 챙겼다. 창고 밖으로 나가려 문고리를 잡던 순간, 들어올 때 문 진동에 흔들린 것인지 왼쪽 선반 서류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온 듯한 종이 한 장을 주운 찬성은 손에 들린 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무엇인가 잘못 본 듯 의아한 시선은 오래돼 보이는 종이에 머물러 있었다. 낡은 종이였지만 소중하게 다뤘는지 보관상태가 좋은 그림 한 장이었다. 그 속에는 한복을 입은 남자가 말갛게 웃고 있는 얼굴이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이게 대체···."



이상함을 느낀 찬성은 결국 왼쪽 편에 모인 서류에 손을 대고 말았다. 이사님의 개인적인 자료라 건들지 말라던 김 팀장님의 말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린 후였다.


찬성은 본격적으로 뒤지기 시작하며 손에 잡히는 족족 확인과 동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꽤나 고급 져 보이는 실크 한복에 말을 타고 있는 준호, 가마꾼이 끄는 마차 안 양장을 갖춰 입은 준호. 안을 더 살펴보니 각 시대별로 모아만 봐도 족히 몇백 년은 될듯한 많은 사진들이 후드득 빠져나왔다. 그리고 어쩜 하나같이 다 이준호 이사님과 똑같은 얼굴에 나이를 먹지 않은 듯 세월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거 설마, 별에서 온 그대 뭐 그런 건가?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찬성이지만 워낙 폭발적인 인기에 지나가다 본 몇 년 전 인기 드라마를 생각해낸 찬성은 본인이 생각하고도 어이없는지 허-, 실토를 한번 내뱉었다. 그러고는 이제 사진을 제자리에 놔두고자 일어나려고 했다. 방금 전까지 보고있던 시대별 사진의 주인공이 하필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창고를 만들어서 오나, 했더니. 남의 거 훔쳐보는 취미가 있었네- 글쎄."

"······."

"···흐음."

"······이거 전부, 이사님 맞아요?"



아···, 성가셔. 귀찮아졌다는 듯 깊은숨을 한 번 내쉰 준호는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복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창고 안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네놈 따위가 도망칠 곳은 없다는 듯이 문을 꼭 닫고 두 눈을 맞춰오는 준호였다. 그 시선에 왠지 모를 압박감을 느낀 찬성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게 찬성의 어깨를 붙잡고 훅- 다가오는 준호에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마주쳤다. 자신만 바라보는 그 시선을 온전히 받아내느라 친성은 긴장감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여기서 네가 본 것은 모두 잊어라-."



공중에서 얽힌 두 시선은 숨을 쉬기 힘들 만큼 고요했다. 그러다 갑자기 준호의 눈이 황금빛을 띄었다 돌아왔다. 그 동공을 보자마자 영혼이 홀린 듯이 시야가 흐려지며 찬성이 풀-썩 쓰러지고 만다. 힘 없이 넘어가는 몸을 그대로 받은 준호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야, 김민준! 네가 이 인간 창고에 보냈어?!


아우씨, 무거워. 전화 연결 신호음이 끊기자마자 버럭 짜증부터 내는 준호에 민준은 인간, 창고 이 두 단어만 들어도 지금 벌어진 상황이 무엇인지 단숨에 그려졌다. 뒷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민준은 한숨을 포옥 내쉬며 예, 예 갑니다- 하며 뒷처리를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을 큰 키의 남자를 어깨에 가뿐히 메고 걸어가는 준호의 뒷모습에는 마치 눈송이같이 하이얀 아홉 개의 꼬리들이 이리저리 살랑이고 있었다.












"어, 비서님. 깨셨음 이제 나가보시고-."



등을 감싸는 폭신한 감촉에 몸을 뒤척이며 더욱 깊게 잠을 청하려던 찬성은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뭐지, 여긴 어디?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눈에 들어오자 찬성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쌀쌀맞은 말투와 달리 제 몸에는 따뜻한 담요가 둘러져 있어 혹시나, 하고 준호를 쳐다봤으나 당사자는 찬성에게 눈길조차도 주지않았다.



"어·· 제가 왜, 여기에···?



우물쭈물 거리며 묻는 찬성의 질문에 준호는 여전히 시선은 서류에 고정한 채 대충 답을 주었다. 비우겠다는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자리에 돌아오지 않아 찬성을 찾아나선 김 팀장이 창고에 쓰러져 있던 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고 뉘일 곳이 마땅치않아 이사실로 데려왔다라···. 본인은 지병 없지, 아픈 곳은 더더욱 없어 그 흔한 잔병치레도 겪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온 터라 쓰러졌다는 것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찬성은 기억을 되돌리려 머리를 싸맸다. 창고에서 서류 정리를 하고 무언가를 본 것 까지는 기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술을 먹은 것도 아닌데 머리도 지끈거리고 블랙아웃 된 것 마냥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여전히 몽롱한 정신에 일어서지 못하고 찬성이 그대로 소파에 다시 널부러졌다. 이사실을 전세 낸 듯한 찬성을 보다 못한 준호가 한 소리를 덧붙였다.



"퇴근해야 하니까 이만 일어나지?"



내가 좀 한량 같아 보여도 일은 일대로 열심히 하고, 워라밸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정확하게 칼.퇴. 해야되서 말이지. 준호의 재촉에도 찬성은 그 자리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부스럭- 제 바지 주머니에서 만져지는 감촉에 그것을 꺼내어 보고는 모든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처음에는 피식- 조소를 터뜨리더니 이내 재미있는지 소리까지 내어가며 웃었다. 



"이사님,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한테는 그 능력이 통하지 않나 본데요?"



준호가 소지품과 겉옷을 챙겨 나가기 위해 숙였던 허리를 펴자, 어느샌가 옆으로 찬성이 다가와 있었다. 찬성은 준호에게 몸을 바짝 붙어 섰다. 미소를 띄우며 유유히 눈앞에서 종이 한 장을 펄럭여 보이는데, 그것은 오늘 찬성이 창고에서 가장 먼저 본 오래된 그림이었다.



"그걸 또 언제···!"



준호는 분명 창고에서 찬성이 무얼 하고 있나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이 인간은 용케 몰래 챙겼나 보다. 준호가 밝게 미소 짓고 있는 그것은 500년 전이었나, 우영이 자신에게 선물해 준 그림이었다. 그 시절 우영이 대뜸 그림 하나를 선물해 주겠다며 저기 앉아 보라는 성화에 뻘쭘하게 앉아있다 이내 멋쩍은 웃음을 지은 얼굴을 담아낸 것이었다.



"보관 상태가 좋은 것 보니, 꽤나 중요한 건가 보네요?"

"···이리 내."



잊고 지내려 노력하다가도 이렇게 한 번씩 튀어나오는 우영의 잔상은 준호를 괴롭게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준호는 우영에 관해서라면 평소와 달리 쉽게 평정심을 잃고는 했다. 예를 들면, 바로 지금처럼.


준호는 찬성이 들고 있는 종이를 뺏으려 팔을 뻗어보지만 저보다 큰 키의 남자가 까치발을 들어버리니 길이 차가 턱도 없었다. 손끝까지 펼쳐 버둥거려보지만 결코 닿지 않는 높이가 야속했다. 이내 포기해버리고 만 준호가 찬성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오늘 처음 본 이 인간이 자신에게 뭘 요구하는지 본격적으로 들어나 보자 싶어 준호가 챙겼던 짐을 도로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그러자 슬쩍 눈치를 보던 찬성이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 어디 가서 발설하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도민준... 뭐, 그런 거예요?"



......허? 준호는 찬성이 돈을 요구한다거나, 당신 정체가 뭐야! 뭐 그런 뻔한 소리라도 할 줄 알았더니 이 무슨 황당한 외계인 드립일까. 준호는 어이가 없다 못해 우스울 지경이라 내려뒀던 시선을 올려 찬성을 봤다. 하지만 바로 마주한 찬성의 눈에는 순전히 궁금증인 양 악의 없는 순수한 눈빛에 허탈하기까지 하다.



"저는 이제 이사님 전담 비서니까.. 이사님을 지켜드리려면 당신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를 지켜? ...네가? 준호가 어디 가서 꿀릴 피지컬도 아닐 뿐더러 자신은 그냥 여우도 아닌 무려 구미호였다. 그런 제 능력을 알리가 없는 인간의 당찬 포부에 준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천년을 살아오며 딱 한 번 들어본 지켜준다는 이 황당한 이야기를 오늘에서야 두 번째로 듣게 되었다. 거기다 업무적으로 제법 그럴듯한 변명까지 붙여오는 찬성은 얼이 빠진 상대와 달리 진심으로 한 말 같아 보였다. 올곧은 눈망울이 준호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아, 이 인간을 어쩌면 좋을까···.








자타공인 폭스 이준호에게 구미호썰을 왜 못봤져?

글쟁이가 아니라 자급자족도 힘드네요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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