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해 수정했습니다.


"그래서 천성이를 도우러 간다고?"

"그래."

제운사로 떠나기 전 소요는 사방신들을 모아놓곤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평소와 같았다면 흑선에게 전달을 모두 맡겨두고 홀랑 떠나버렸겠지만 대화의 중요성을 필히 실감을 한 직후였던 터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청단은 만천성이 자신이 아닌 소요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흐느적거리는 것이 마치 소금물에 젖은 쭈꾸미와 같아 보인달까. 풍강은 몹시 침울해 보이는 청단의 부은 뺨에 차가운 얼음주머니를 문질러주고 있었는데, 청단은 이런 풍강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러 보이곤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뭐,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았으니 조용히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지. 하마터면 여의주가 부서질 뻔했거든. 당분간은 너와 함께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야겠구나 풍강아." 

청단의 상냥한 말에 풍강은 돌연 딸꾹질을 해 보였다. 이걸로 청단이 따라와서 만천성과 충돌할 가능성은 없어졌다. 백호는 원래 남에 일에 관심이 없었고 홍연은 소요에게 모든 일을 넘기는 것이 미안한 듯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으음... 내가 천계에서 나갈 수 있는 몸이라면 내가 대신 갔을 텐데 말이다..."

"괜찮습니다. 부탁은 제가 받은 것이니."

"그래도... 항상 어딘가를 가야 하는 일은 현무 네게 맡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다."

홍연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듯 고심하며 말을 했지만 소요는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물론, 처음엔 힘들었지만 늘상 박혀있던 궁을 벗어나 여러 경험을 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람과 어울리기 힘든 성격이었지만 이를 조금 극복하여 많은 인연도 맺었고, 특히나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 무언가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 또한 기뻤다. 그 뿐인가, 늘상 옆에서 도와주는 이들이 있었으니 큰 고생이라 할 것도 없었다. 특히나 연홍서는 마치 갓 태어난 강아지 처럼 제 뒤를 졸졸 따라다녔으니 이 또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짧은 이야기를 끝마치고 소요는 주작궁을 나섰다. 사방신 회의는 기본적으로 궁을 돌아가면서 사용하는 것이라 소요는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나름 먼 길을 걸어와야 했다. 이른 오전의 시간이라 그런 것인지 주작궁 주변의 햇빛은 몹시 강렬했고, 현무궁 주변에서 볼 수 없는 따스함이 여기저기 내리쬐고 있었다. 풍성하게 피어오른 여름꽃들이 마치 햇살에 찬사를 보내는 것 처럼 일렁였다. 소요는 주변을 둘러봤다. 회의를 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린다던 연홍서가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 왼쪽, 다시 오른쪽. 어딜 간거지? 소요는 고개를 두런거리던 것을 멈추곤 중얼거렸다.

"연홍서?"

"네?"

분명 방금 쳐다봤을 땐 없었는데, 연홍서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 소요가 그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순식간에 왼편에 나타나 모습을 보였다. 소요가 주작궁에 들어가있는 동안 연홍서는 꽃밭을 이리저리 쏘다닌 듯 붉은 도포에 푸른 나뭇잎이 몇 개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 뿐인가, 품 안에는 현무궁 주변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여름철의 꽃들까지 풍성하게 쥐어들고 있었다.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연홍서를 꼭 닮은 붉은 장미, 솜털 같은 수레국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금잔화까지. 하나같이 각양각색의 색과 모습을 뽐내고 있었지만 연홍서는 그것을 한데 모아 어우러지도록 꽃다발을 만든듯 품 안에 들고있는 꽃들은 몹시도 잘 어우러지는 것들이었다. 화려한 꽃과 미인은 언제나 보기 좋은 것이지. 소요는 꽃을 잔뜩 들고 나타난 연홍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마디를 했다.

"...주작궁 주변의 꽃을 그리 꺾어도 되는 건가?"

"괜찮아요. 나중에 제가 꽃밭을 좀 손봐주죠. 그러면 주작신도 아주 좋아할 겁니다."

"그렇구나."

소요가 무미건조하게 답하자 연홍서는 소요의 품에 화려한 꽃다발을 한가득 안겨주곤 웃어 보였다. 

"받으세요."

소요는 꽃 속에 파묻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꽃을 꺾어 주려고 일부러 주작궁에 들어가지 않겠다 한 건가. 순수한 어린 아이나 할 것 같은 발상에 소요가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희귀한 꽃은 뒤뜰에 다 몰려있더라고요, 더 예쁜 게 없나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현무신께서 저를 부르시는 바람에 빨리 올 수 밖에 없었어요. 아쉽네요."

"뒤뜰에 있었다고?"

소요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요전에도 그렇고, 생각해보니 연홍서는 자신이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순식간에 제 옆에 나타나보였다. 이름을 작게 부르던 크게 부르던 장소에 구애받지 않았고 그저 곁에서 소리를 듣고 빠르게 달려오는 것이 아닌, 뭔가 소환당하는 것에 더 가까운 행동이었다. 이참에 확실히 해두어야겠다. 소요는 연홍서가 준 꽃다발을 품 안에 한가득 끌어안고 차분하게 물었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거지?"

"네?"

연홍서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내가 부르면 순식간에 나타나는 것 말이야." 

연홍서는 아~ 소리를 내며 짧게 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그게 바로 신연진의 능력이에요."

"뭐라고?"

"모르고 계셨군요. 물어봤다면 알려드렸을텐데..."

소요는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깔끔하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벽린사에서 한 번 언급을 한 뒤로는 바쁜 일이 줄줄이 터졌다. 신연진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볼 시간조차 없었다. 너무나도 바빴기에 이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고, 불같이 화를 내며 이게 대체 무엇인지 따지겠다는 마음은 연홍서에게 말려들어 속절없이 두근거리게 되었다. 분명 나쁜 주술일 거라 생각했던 의심은 바람 빠진 부레처럼 줄어들어 작은 호기심만을 자아낼 뿐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연홍서가 수를 쓴 거라면 제게 해를 입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요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먼저 알려 줄 때까지 기다렸어."

소요는 대충 얼버무렸다. 연홍서는 의외의 답에 감동을 한 것인지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고 감동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살짝 쳐진 눈썹, 반짝거리는 시야. 큰 키와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면모.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연홍서가 미소를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자면... 그건 제가 현무신께 드린 선물과도 같은 거예요. 꽤 오래 전 일이지만... 그게 있으면 제가 언제든 당신이 있는 곳으로 옮겨갈 수 있거든요. "

"...과거에도 쭉 이랬나?"

"네... 전 언제나 당신 곁을 맴돌았어요. 다만 신연진은 제가 한 번도 가본 적 없거나 발을 들일 수 없는 장소에선 통하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을 찾아오는데 시간이 더 걸렸고요."

대답을 하는 연홍서의 모습은 몹시 조심스러워 보였다. 소요는 어째서 그가 1000년이나 지나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과연 그렇구나, 과거의 자신이 연홍서와 어떤 사이였는지는 몰라도 이런 것을 몸에 남길 수 있게 해준 걸 보면 옛날의 자신은 눈앞에 있는 이 귀신을 무척이나 아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소요는 한쪽 손을 조심스레 들어 연홍서의 뺨을 쓰다듬고는 말했다. 

"많이 고생했겠구나."

더 묻고 싶지는 않았다. 소요는 연홍서를 믿었다.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곁으로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은 조금 부끄러웠지만, 이것을 응용한다면 전투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주 한순간에 스쳐 지나간 생각. 만약 연홍서와 반려의 연을 맺는다면 어떨까. 이러한 능력이 있으니 함께하며 싸우거나 법력을 빌러야 할 때엔 아주 큰 도움이 될텐데, 만약 그가 귀신이 아닌 신이었다면 소요는 큰 거부감 없이 그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 되겠지.'

귀신과 신의 힘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음과 양이 두드러지게 대조 될 뿐더러 연홍서와 자신은 불과 물. 다루는 힘에 있어서도 상극이니 궁합이 잘 맞을 리가 없었다. 사방신의 반려라 함은 그 힘의 균형과 마음의 합이 아주 중요했다. 힘이 맞아도 마음과 성격이 맞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고, 마음과 성격이 맞아도 서로의 힘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연을 맺을 수 없다. 게다가 이 모든 합이 맞는다 할지라도 신과 귀신이 반려로써 영원을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기에, 소요는 섣부르게 든 생각을 금세 단념해 보였다.

"자, 돌아가서 채비를 하자꾸나. 아마 지금쯤 만천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아주 긴 외출이 될 수도 있겠어." 

현무궁으로 돌아가니 흑선은 이전보다 걱정이 덜해 보였다. 금령과 인간계로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라며 드물게 미소까지 지어 보였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편안함을 유지하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때마침 수다를 떨기 위해 간식을 들고 찾아온 금령은 본인도 따라오겠다 억지를 부렸지만 흑선은 "더 이상 현무신을 방해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라는 서슬 퍼런 목소리를 내보이곤 금령을 의자에 꽁꽁 묶어놓기까지 했다. 

방해꾼도 처단 되었겠다, 두 사람은 빠르게 제운사로 향했다. 만천성은 모든 준비를 맞춰놓은 것인지 이미 텅 비어버린 제운사 앞에 선 채 소요와 홍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늘상 보이던 제자들은 온데간데없고 만천성의 옆에서 웃음을 짓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하나 있다는 점이었다. 웃는 모습이 얼마나 인상 깊었던지 소요는 멀리서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니가 여긴 왜 왔어."

소요가 인사에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연홍서가 까칠하게 말했다. 만천성의 옆에 이토록 능글맞고 자연스럽게 서 있을 수 있는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소요는 가볍게 눈짓을 하곤 충사의 인사에 답했다. 설마 우리와 함께 만천성을 도우러 온 건가? 소요가 의문서린 표정을 보내자 충사가 말했다. 

"하하,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나는 너희랑 같이 가려고 온 게 아니야. 환영고에 간다면서? 난 거기서 하등 도움이 안될걸."

충사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연홍서가 말했다.

"도움이 안되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짐짝이나 다름없었지."

연홍서는 소요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전에 환영고에 들어갔을 때 이 녀석이랑 같이 들어갔거든요. 저 녀석은 벌레를 주로 사용하는데 환영고는 그 틈이 너무나도 견고해서 개미새끼 한 마리 기어들어 올 틈조차 없었어요. 불러올 벌레가 없으니 결국 능력은 있으나마나한 무용지물에... 육탄전도 백병전도 하지 못하는 놈이라 내내 업고 뛰어다녔다니까요."

용케도 버리지 않았군. 소요는 그것만으로도 기특하다 생각했다. 충사는 연홍서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팔짱을 끼었다.

"뭐, 각자의 분야가 다른 법이니까 어쩔 수 없지.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설구를 데려오려고 했는데 요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더라. 자기가 만든 걸 진비곡이 먹지 않았다고 단단히 삐져있거든. 아마 당분간은 못 볼 거야."

"그런 멍청이는 필요 없어."

연홍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만천성도 이에 동의하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일은 우리 셋 만으로도 충분해. 너는 내가 시킨 일이나 잘 해."

"어휴, 그럼 당연하지. 제대로 안 하면 날 두동강 내버릴 거잖아?"

역시 만천성은 제운사를 완전히 비울 생각이구나, 그렇다면 아직 어린 제자들은 어쩌지. 소요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물 안으로 눈을 굴리자 만천성이 이를 빠르게 눈치채고 말했다.

"...아이들은 잠시 하산시켰다. 검연과 몇 아이들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서 좋을게 없고,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휴식을 취하면 환영고의 문지기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우리 대단한 스승님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나한테 제자들의 호위를 맡겼거든. 뒤는 내가 봐줄 테니까 너희는 마음 놓고 다녀와도 돼."

"닥쳐."

충사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만천성은 자신의 부탁이 들켰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인지 일그러진 표정으로 욕을 내뱉고는 차갑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환영고까지는 어떻게 갈 생각이야? 계획은 있어?"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던 사실을 충사가 지적했다. 소요는 제운사에 오기 전 읽었던 환영고에 관한 책을 떠올리곤 말했다. 

"환영고의 입구는 귀계에서도 위치가 무작위로 바뀐다고 들었어. 나타나는 시간도 장소도 불규칙하다고... 이걸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을지가 관건일 것 같은데."

잠깐, 이렇게 된다면 결국 또 귀계에 가야 한다는 말인가? 귀계에서 아무 손도 쓰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곤 소요가 몸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연홍서가 환영고에 침입을 한 적이 있다 했었지. 소요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도 연홍서는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이전에 환영고에 들어갈 땐 그 멍청이... 아니, 설구를 사용했었죠. 그 녀석은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 넓은 사막 안에서도 환영고의 입구가 옮겨다니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었거든요." 

...아까 전엔 설구같은 멍청이는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소요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자 연홍서가 흠칫했다.

"...물론, 이번엔 그 녀석이 없어도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천천히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무슨 방법이지?”

만천성이 조급함을 견디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온갖 침착한 척은 다 하고 있었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검연이 걱정되어 안달이 난 것이 분명했다. 연홍서는 만천성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다간 침착하게 답했다.

“나는 한 번 발을 들인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제약이 없다는 사실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환영고와 같은 곳도 가능한 건가.”

“얼마든지 가능해. 이전에 이미 확인도 해봤지만 문제 없었어.”

“그걸 왜 미리 말하지 않았지?”

소요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고하가 단순히 연옥과 현세를 잇는 출구같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런 것이 가능했다면 진작에 말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소요는 연홍서가 사사로운 이동을 위해 고하를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옆에 나타나는 것은 둘째치고, 천계에 있을 때 연홍서는 늘상 여유롭게 움직이는 소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거나 멀리 갈 일이 있어도 결코 고하를 사용하지 않고 천천히 걸으며 옆을 지켰다. 한 번이라도 그가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봤다면 이런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이런 유용한 힘을 왜 사용하지 않았단 말인가. 당장 제운사에 올 때만 해도 그렇다. 연홍서는 고하를 사용하긴 커녕 소요와 함께 구름아래로 손수 뛰어내렸으니.

“...고하를 사용하면 현무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소요는 이 대답을 듣고 벙찔 수 밖에 없었다.

“뭐라고?”

“그렇잖아요. 고하를 사용하면 당신과 함께 걷고 이동하는 시간이 줄어들 텐데 사용하고 싶을 리가 없죠.”

소요는 제 미간을 짚어 보였다. 천계 어디에서든 항상 붙어있으면서 대체 어디까지 함께해야 만족할 것이란 말인가. 연홍서는 소요가 잠들 때까지 옆을 지켰고 소요가 눈을 뜸과 동시에 조반과 꽃을 한 아름 들고 찾아와 생글거리기 일쑤였다. 적어도 그가 천계에 머무는 동안 두 시진 이상을 떨어져 본 적이 없을 텐데 그 정도로 붙어있고도 모자라다고? 어리광도 정도가 있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환영고로 직접 찾아가며 그 시간을 즐기고 싶었지만 간단하게 들켰으니 어쩔 수 없죠. 아이들의 상태가 어떨지도 모르고.”

이 말은 들키지 않았다면 천천히 갔을 거라는 뜻인가? 소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상관없잖니, 언제든 내 옆에 붙어 있을 텐데.”

“네?”

“...내 말이 틀린가?”

소요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연홍서가 하는 행동을 보니 적어도 몇 천년 정도는 너끈하게 붙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연홍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뇨. 현무신의 말이 맞아요.”

“잘 됐군, 그럼 어서 열어라.”

만천성은 둘 사이의 훈훈한 분위기는 눈에 뵈지도 않는다는 듯이 단칼에 잘라서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제자들을 데려간 무언가를 도륙 낼 생각뿐이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소요는 만천성의 눈이 흉흉한 냉기를 띄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검연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하하, 의욕이 넘치는 건 좋은데 내 생각엔 너희부터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거든? 아무리 사방신에 용이라고 할지라도 환영고는 완벽하게 마경에 가깝단 말이야. 어떻게 된 일인지 법력은 운용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충사는 뜸을 들이다 씨익 미소를 지었다.

“뭐, 잘해봐.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틈을 주지 마. 나랑 홍서가 들어갔을 땐 환영은 커녕 환술 코빼기도 안 보였지만.”

“그 정도면 환영고 안쪽을 지배하는 주술이 흩어진 게 아닌가?”

“아냐,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환영고 안에 들어갔을 때 나름 그 주술의 근원지를 찾으려고 노력해봤는데, 결국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거든.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내가 들어갈 건 아니니까 남은 건 너희들 몫이지.”

무슨 이런 무책임한 말이 다 있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떠한 위험이 있어도 이건은 사방신으로써 자신이 해야 할 일. 소요는 충사의 충고에 감사를 표하며 짧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연홍서는 준비가 전부 끝난 것을 확인하곤 환영고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그가 사용하는 고하의 특성답게, 환영고의 모습 대신 불길한 기운이 줄줄 흘러나왔지만 그리 불안하진 않았다. 소요는 오히려 이것이 연홍서의 기운과 조금 닮아있어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환영고로 향하기 전, 만천성은 소요를 세워놓곤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받아."

소요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영약이구나. 이전에 도움이 되었다며 감사 인사를 한 것을 기억한 것인지 만천성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요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을 준비해놓은 듯했다. 

"..."

꾸러미를 건네준 만천성은 말없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소요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법력을 빌려주겠다는 것이겠지. 본래 임시로 법력을 빌리는데에도 여러 과정이 필요했지만, 소요와 만천성은 워낙 닮은데다 기운이 일맥상통하는 경향이 있어 복잡한 것을 건너뛸 수 있었다. 손바닥을 맞대고, 소요는 만천성의 법력을 빌리자마자 그와 자신의 기운이 어느 정도 닮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 때 반려로 소개해주겠다던 청단의 안목이 틀림 없었던 것이다. 깨끗하고 맑은 힘. 이것은 만천성이 얼마나 선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증명해주는 표본이 되었다. 첫 만남 땐 그저 화를 낼 줄만 아는 무뢰한과 같아 보였는데, 그것은 그저 만천성이 가지고 있는 진짜 모습을 가려주는 그늘이었을 뿐 진짜 모습을 알려주는 척도가 되진 못했다. 

"어서 가지."

"조심해서 다녀와. 내 말 명심하고."

충사는 마지막으로 충고하며 배웅하듯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인사를 마친 세 사람은 망설임없이 고하로 뛰어들었다. 사실 뛰어든다기 보다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어떠한 문을 지나치는 것에 가까웠다. 고하를 지나는 과정은 그만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소요는 환영고의 내부로 들어오는데에 괜한 힘을 낭비할 필요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편리하게 느껴졌다. 

그저 발을 한걸음 내디딘 것 뿐인데, 세 사람은 그들이 원하는 목적지에 순식간에 도착해 있었다. 

홍소백류만 씁니다. 가뭄에 콩나는 연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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