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씨발, 진짜 존나 멋있다."




상익이 기현을 보며 내뱉은 감탄사였다. 

호면쓰고 도복 입고 있으면 다 똑같아 보인다고 대체 누가 그래. 크고 넓은 체육관,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기현은 홀로 오롯이 빛났다. 정확하고 절도 있는 동작, 듣기 좋은 기합소리, 힘차면서 우아한 발구름, 호면 사이로 강인한 눈동자가 형형했다. 후암고 승. 주심이 청색 깃발을 높이 들었다. 기현이 인사를 하고 자리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호면을 벗었다. 와씨, 얼굴까지 잘생겼어? 저 형 진짜 세상 혼자 사시네.





"찬우야, 나 지금 사랑에 빠진 거 같아."

"아, 진짜? 누구?"

"후암고. 장기현."

"이 새끼 그렇게 안 봤는데 존나 금사빠네."

"저걸 보고 안 반하는 싸나이가 있을 수 있어? 그런 남자는 있을 수가 없어."

"어, 그래. 그 힘든 길을 내가 간다. 누구랑 결혼하든 응원할게. 대신 니 양자로 들여주기로 한 약속은 지켜줘야 돼."

"미친 놈아, 내가 언제 약속했어. 그리고 아빠가 나 재산 절대로 안 물려준다고 했다니까."

"그럼 니네 아부지한테 아들 하나 더 키우실 생각 없냐고 여쭤보고 나 좀 꼭 추천해줘.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효도하며 모시겠다고."

"우리 아빠가 너보다 오래 살걸? 그리고 너 같은 동생 둘 생각 없어."

"상익아."




상익 옆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폰게임을 하며 건성건성 대답하던 찬우가 화면에서 눈을 떼더니 상익의 한쪽 어깨를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너보다 생일이 다섯달이나 빠른데 왜 니가 형이야. 내가 형이지."

"응. 꺼져."




장기현 보기도 아까운 시간을 이딴 놈에게 허비할 수는 없지. 상익이 다시 경기장으로 눈을 돌렸다. 기현이 같은 학교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 진짜 미쳤나봐. 땀에 쩐 저 머리카락까지 멋있잖아. 관중석에서 경기장의 기현을 내려다보며 소녀처럼 손을 모으고 또 다시 감탄을 하고 있었다. 


윤상익, 감독님이 우리 차례라고 지금 내려오래. 어, 어, 갈게. 가만 있어 보자. 장기현 개인전 결승전이 3시고, 우리가 이번에 준결승전 이기면 결승전은 4시니까, 얼른 이기고 와서 결승전 보면 되겠다. 빨리 끝내고 입장부터 봐야지. 오빠, 이기고 와, 화이팅! 상익의 등에 대고 찬우가 소리를 질렀다. 언제는 아빠라 그러고, 또 언제는 지가 형이라더니, 이제는 오빠냐. 응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상익이 장비를 챙겨 날듯이 경기장으로 내려갔다. 






청남고 승.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5인 출전 경기인 단체전에서 네 번째 순서로 출전한 상익은 벌써 이기고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주장전까지 청남고가 가져와 4대 1로 상익의 청남고 승리. 이제 경기도 결승전만 남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반대편 경기장에서 개인전 결승이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상호 간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게 대충하고 개인전 경기장으로 뛰어갔다. 기현이 머릿수건을 점검한 후, 호면을 쓰고 있었다. 개인전 결승이다 보니 경기장에 붙어있는 관객이 꽤 많았다.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 내가 개인전도 나갔으면 결승까지 올라가 장기현하고 붙을 수 있었을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한 개인전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아쉬움이 남았다. 내년엔 고등부 시합에 장기현이 없고, 그렇다고 내후년에 내가 대학에 가서 검도를 계속할 거란 보장이 없고. 검도 1년만 일찍 시작할걸. 그랬으면 작년에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이대로 소년팬으로 남기엔 너무 아쉬웠다. 물론 내년에 대학부든 일반부든 기현의 경기를 보러 가면 되지만, 뭔가 무도인 대 무도인으로 만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상익은 어쩐지 초조해졌다. 시합 끝나고 호완에 사인이라도 받을까. 근데 혹시나 경기에서 지기라도 하면 사인 해 달라고 하기 좀 그런데. 아니야, 장기현이 질 리가 없어. 우승은 무조건 장기현이다. 상익은 마음속으로 다른 학교 선수를 응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갑 끈에 맨 파란색 띠가 후암고의 색이었다. 공교롭게도 기현의 상대편은 상익의 학교, 청남고 3학년 선배였다. 다행히 별로 친하지 않아 죄책감없이 기현을 맘껏 응원할 수 있었다. 물론 보는 눈이 많으니 속으로만. 기현이 치고 나갈 때마다 파란띠가 크게 흔들렸고, 번번이 득점으로 이어졌다. 상익의 선배도 결승까지 온 실력이니 만만치는 않았다. 그러나 자세, 기세 그 무엇도 장기현을 뛰어넘지 못했다. 기현은 상대에게 한 점도 내주지 않고 결승전에서 승리하였다. 역시, 내가 반한 남자 장기현이야. 상익은 언제 싸인을 받으면 좋을까, 각을 쟀다. 우리 학교가 단체전에서 우승을 하고 난 다음에 시상식에서 받자. 그때는 내 목에도 우승메달이 걸려 있을 테니 위풍당당할 수 있겠어. 뜻밖의 곳에서 이상하게 차오른 결의가 상익에게 독이 될 것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스트레칭은 충분했다. 그간 크고 작은 부상이야 있었지만, 전부 손바닥이나 손목과 같이 상반신에 그쳤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반드시 이기겠다는 욕심 때문이었을까. 혹시나 장기현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담 때문이었을까. 단체전 결승의 네 번째 부장전이 시작되고 몇번의 몸받음으로 기 싸움만 하다가 상대의 허점을 발견하고 머리를 치려 왼발에 힘을 준 순간, 갑작스럽게 격한 통증을 느끼며 상익이 쓰러졌다. 발목 부상이었다. 경기가 중단되고, 의료팀이 들 것을 가져오는 걸 본 이후의 일은 한참 후에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의 외친 외마디 비명, 의료팀을 부르는 감독님의 음성, 주위를 둘러싸고 웅성거리던 사람들만이 흩어져있는 퍼즐처럼 조각조각 떠오를 뿐이었다.



상익이 실려 나간 뒤에 경기는 재개되었고, 청남고는 상익 없이 우승 깃발을 받고 시상식을 치렀다. 뭔가 좀 억울하네, 싶었지만 어쨌든 다친 사람 잘못이라는 걸 쿨하게 받아들였다. 부상은 다행히 많이 심각하지는 않았다. 아킬레스건의 부분적 손상이었는데 상익은 수술을 원하지 않았다. 회복기간이 너무 오래걸리고 재활만으로도 충분히 회복 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열심히 재활을 하는 동안 상익은 3학년이 되었다. 그럭저럭 운동을 해도 될 만큼 회복되었어도 부모와 감독은 상익이 다시 도복을 입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운동선수한테 일 년 넘게 쉬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나? 것도 나같이 급성장한 루키한테 말이야. 별 생각 없이 도장을 기웃거렸다가 욕만 먹고 쫓겨났다. 너 지금 죽도 잡았다가 다시는 운동 못할 수도 있어. 윤상익, 검도 올해만 하고 그만둘 거야? 





올해만 검도하고 그만둘 생각이었다. 동네도장에 가끔 나가는 정도면 몰라도, 대학에 가서까지 소속을 가지고 검도를 계속할 마음이 없었다. 단체생활은 적성에 안 맞았다. 어릴 때부터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던 상익은 여럿이서 같이 무언가를 한다는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누군가 참견하는 것도 싫었고, 누군가를 참견하는 것도 싫었다. 나만 잘한다고 이기는 건 아니지만, 내가 잘하면 어쨌든 나는 이긴다. 뭣보다 운동동아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쓸데없는 군기 잡기는 딱 질색이었다. 내가 검도로 밥 벌어 먹고살 것도 아니고, 변변치 못한 멍청이들한테 고개 숙이면서 살 이유가 없지. 그럼에도 상익이 검도를 선택하고 단체전까지 나갔던 건, 그나마 검도가 매우 개인적 승부이고, 단체전 역시도 개인전의 총합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청남고 감독이 아버지 친구라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고등학교 2년 동안의 취미시간을 탈탈 털어 전부 검도에 쏟아부었다. 원래 가진 재능에 노력까지 더해지니, 상익의 실력은 하루하루 눈이 부시게 발전을 거듭했었다. 그러다 부상으로 연습을 쉬니, 빠르게 상승했던 실력이 다시 빠르게 하강했는데 그것 역시도 크게 아쉽지 않았다. 한때 즐거웠으니 그걸로 만족하자. 딱 거기까지. 대학생 때는 좀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 원래부터 한 우물을 파는 성격도 아니었고, 세상에는 검도 말고도 간지 넘치는 스포츠가 널리고 널렸다. 예를 들면 스키나 패러글라이딩 같은 거.





뭐, 어차피 올해 고등부에는 장기현도 없으니까. 장기현 없는 전국대회라니, 우승해봐야 뭐 하겠어. 아무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드니 약간 남아있던 검도에 대한 열정이 한순간에 파시식 식었다. 죽도고 호구고 일단 집에 가져가긴 했는데, 방 한구석에 처박아놓고 쳐다도 안 봤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발길을 뚝 끊냐며 의리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후배들 연습 한번 봐주러 간 적도 없었다. 다음 달 대회는 구경하러 올 거지? 응원해 줄 사람 많은데 저까지 굳이. 와, 상익이 냉정하네. 고3이라 이거냐? 그게 아니고, 기합소리만 들어도 아킬레스건이 아파져서 그래요, 감독님. 




근데 또 내가 검도를 그만둔다고 장기현 경기를 안 볼 수는 없잖아? 상익에게는 아직 장기현에 대한 열정은 남아있었다. 추계대학대회시즌이 가까워지자 상익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기현이 어느 대학교에 진학했는지, 어떤 경기에 출전 할 예정인지 분주하게 조사했다. 금, 토, 일 지방경기일정. 수능공부 따위는 내팽개치고, 찬우네 집에서 주말내내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몰래 짐을 쌌다. 모아둔 용돈으로 경기장 근처 호텔을 예약하며 잠깐 현타가 왔다. 찬우야, 나 지금 너무 스토커 같지 않냐? 흐음. 스토커까지는 아니고 파이팅 넘치는 빠돌이정도로 해두자. 고마워. 뭘 또 고맙기까지, 아버님 잘 계시지?




그때 조금 더 오래 고민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과거 중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을 고를 수 있다면,

상익은 아마 장기현의 경기를 보러 갔었던 그 가을날을 선택할 것이다. 






















상익에게 오늘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세시 회의에 팀장님께서 새 막내를 데리고 오기로 하셨다. 오늘 아침부터 너무 신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을 나섰었다. 힘들고 서러웠던 일 년 간의 막내생활을 청산하는 기념비적인 날인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저번 주까지만 해도 경민선배가 틈만 나면 내년에 새 막내 안 뽑을지도 모른다고 농담 같지 않은 장난을 쳐왔던터라 은근히 쫄리고 있었다. 괜히 불안해져서 송년회 때 팀장님한테 슬쩍 물어봤다가 혼나기만 했다. 후배는 무슨 후배. 일이나 똑바로 해라. 넵. 대답이야 우렁차게 하고 왔지만 속상함을 숨길 수 없었다. 팀장님, 미워. 어깨 축 처져서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데 부팀장님이 슬쩍 오더니 눈을 찡긋거렸다. 이미 뽑아 놨으니까 걱정 마. 상익도 눈을 찡긋거렸다. 부팀장님, 사랑해요.



들어오기만 해. 그동안 갈고 닦은 내 모든 추1 노하우를 전수해서 초 엘리트 막내로 만들어줄게. 우리 함께 역대급으로 적게 털린 연수기간을 만들어보자.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필드 일이 꼬여 상익은 네 시 반이 돼서야 사무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팀회의 벌써 끝났겠지? 이미 포획된 막내가 한 두시간 사이에 튈 리 없음에도 마음이 급했다. 허겁지겁 사무실로 가니 이미 공터에는 팀장님 차는 물론이고 선배들 차가 거의 빠지고 없었다. 대신 주차장 한구석에 못 보던 검은색의 커다란 SUV가 있었다. 오, 막내 차인가? 차만 봐서는 뭔가 남자답고 의젓할 거 같은 이미지인데. 얼른 보고 싶은 마음에 술 취한 사람처럼 출입문 비번을 두 번이나 틀리고서야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사무실에는 부팀장과 준형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고, 부팀장 뒤에 서 있는 새 막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 상익이 왔네. 윤상익, 신병 받아라."

"아, 부팀장님. 뭔 군대도 아니고, 신병이 뭡니까."

"우리끼리니까 하는 애기지만 솔직히 군대가 낫지 않냐?"

"왜 갑자기 속삭이십니까."

"뉴페이스 있으니까 수줍어서 그러지."

"팀장님 있는 데서 말씀하시지. 불러 드릴까요?"

"그러지 마라. 팀장님 바쁘시다. 뭐해, 장기현. 맞고참한테 인사해."




부팀장의 재촉에 드디어 신병, 아니 신규대리가 천천히 몸을 돌려 상익을 보았다. 




익숙한 이름, 아는 얼굴이었다. 

키 180. 몸에 딱 붙는 블랙 수트. 고동빛이 살짝 도는 리젠트컷.

지난 몇 년간 부단히 잊으려 했던 이름. 아무리 내다 버려도 사라지지 않아 결국 깊은 곳에 가둬놓고 못을 박아 봉인한 이름. 결국 잊지 못하고 이따금씩 생각날 때마다 치를 떨게 하는 그 이름.

장기현.




상익은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 있었다. 기현이 얼굴이 보인 순간부터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순간까지 슬로우모션이 걸린 것처럼 시간감각이 비현실적이었다.










"왜 그래, 상익이. 후임 들어온 게 너무 기뻐서 그래?"

"아, 자꾸 군대처럼 말씀하지 마십쇼. PTSD 옵니다."

"오, 준형이. 군대 빡쎈 데 다녀왔어?"

"그냥 뭐 남들 다 가는데 갔다 왔죠, 뭐."

"남들 다 가는데 어디? 왜 얼버무려. 면제 아냐?"

"뭔소리하십니까. 해병대 갔다왔슴다."

"............. 몇 긴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부팀장님, 설마 해병대 갔다오셨슴까?"

"............. 아니?"

"아 뭡니까. 부팀장님, 어디 다녀오셨슴까. 빨리 말해보십쇼."

"나 아직 미필이야. 내년에 갈 거야."

"부팀장님 지금 나이가 몇 갠데 내년에 군대를 갑니까."



상익이 고생해라. 치영이 들러붙는 준형을 떼어내며 황급히 사무실 떴다. 화이팅! 준형도 상익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도망가는 치영을 쿡쿡 찌르며 쫓아나갔다. 부팀장님, 어디 가십니까. 얘기 안 끝났습니다. 입대신청 하러 병무청 간다, 따라오지 마.









똑딱똑딱. 

둘만 남고 비워진 사무실에 시계 초침소리만 들렸다. 저 소리가 평소에도 이렇게 컸었나. 쿵쿵쿵쿵. 초침소리에 맞춰 심장도 같이 뛰었다. 한번 거슬리기 시작하니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이러다 초침소리로 고막이 터지겠다 싶은 순간, 상익이 더 이상 못 참고 입을 열었다. 





"몰랐어요. 정말로."




목이 잠겼는지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알았으면... "




알았으면 뭐. 짬찌막내 주제에 팀장님이 데려오려는 신입을 퇴짜 놓을 수 있을 리가. 어제까지도 진짜 후배가 오기나 할지 그 걱정으로 밤을 새웠는데. 



그렇다고 그런 말은 할 수 없어, 말을 하다 말고 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나만 이렇게 당황스러워? 입술을 풀로 붙여놨는지 잘난 장기현씨는 리액션이 전무했다. 뭔 생각을 하고 계시나. 어웨이에서도 하나 기죽은 기색 없이 고개를 쳐들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의기소침해진 건 오히려 홈그라운드인 상익 쪽이었다.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는 모르겠다. 마치 영겁과 같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상익에게는 방금 일어난 끔찍한 일에 대해 적응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게 도대체가 상상이나 예측이 가능한 일이야? 침묵이 길어질수록 다시 입을 여는데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다 갑자기, 지금 이 순간마저 자신이 느끼는 고통이 기현이 느끼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크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왜 늘 나만 이래야 해. 




"팀장님께는 제가 말씀 드릴게요."




기현이 대답 없이 상익을 보았다. 예전처럼 무심한 그 눈빛에 지난 몇 년간 상익이 단단히 다져놓은 지반이 무너지며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우리 회사에 다른 팀 많아요. 방법은 팀장님이 찾아서 연락 주실 겁니다. 내일, 나오지 마세요."




상익도 모른다. 팀장님한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팀장님이 어떤 방법을 찾아주실지. 그냥, 상익은 내일 또 기현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이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도 몇 번이나 도망가고 싶었다. 




"안녕히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기현을 지나쳐 문으로 걸어갔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니, 아까 사무실에 들어와 기현을 처음 봤을 때 이후로 한 번도 기현의 눈을 다시 본 적이 없었다. 숨이 막혀 기현과 더는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보이려 애를 썼고, 그건 이미 실패했음을 직감했음에도 상익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 그 바람이 이루어지려면 아직 절차가 좀 더 남아있음을 안다. 팀장이 한 결정이 번복되려면 또 뭘 해야 할지 모른다. 당장 오늘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일 그리고 모레 일은 지금 당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상익은 문고리를 잡고 돌려 문을 열었다. 밖으로 발을 떼려는 순간, 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목은 괜찮아?"





저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상익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개새끼야, 뭐라고? 마땅히 해야 할 그 말이 기도 어딘가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얼빠진 표정을 하고 기현을 가만히 보았다. 묘한 정적에 기현도 약간의 의아함을 담아 상익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상익이 뚜벅뚜벅 기현에게로 걸어가더니, 다 와서는 뛰었다. 주저 없이 기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불의타. 기현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 그때처럼 꺼져. 너 그거 잘하잖아."





분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맞은 방향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기현을 보며 한참을 씩씩댔다. 입술이 터졌는지 입가에 붉은 이슬이 맺힌 기현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더 화가 났다. 상익이 주먹을 한 번 더 세게 쥐었다가 숨을 깊고 길게 내쉬면서 풀었다. 다시 기현에게서 돌아섰다.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와 무슨 의미가 있나. 분노도, 책망도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상익은 이번엔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문을 꽝 닫고 나왔다. 기현도 상익이 사무실 문을 닫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익이 차에 타 시동을 걸고 미친 사람처럼 거칠게 운전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한참을 달려 인적 드문 산길에 차를 세웠다. 차 밖으로 나와 막혀 있던 목을 틔우고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야. 미친새끼야. 니가 어떻게 감히 나한테 그딴 소리를 해.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

정말 그렇다면, 이 재회도 신의 뜻일까.

대답 없는 하늘을 향해 상익이 원망을 토해내며 울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사는 주말 중에 별도의 공지로 다시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눌러주시는 독자님들. 언제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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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 대신 써주실 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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