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

언젠가 누구라도 사랑을 한다.

내가 너를 발견한 것처럼.



“있지, 유마삐는 운명이라는 말을 믿어?”


센리는 종종 ‘운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곤 했다. 연기를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보통 고교생에 비해 감수성이 풍부한가 보다. 그에 대한 유우마의 감상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처음에는.


그러고 보면 첫 만남부터 인상적인 이미지였지. 이따금씩 눈을 감으면 그 날의 기억이 유우마의 머릿속에 그려지곤 했다. 모든 것이 새로운 도쿄에서의 첫 날. 벚꽃이 만발한 낯선 등굣길. 먼저 자신을 불러 세우던 목소리.


나 이런 우연한 만남 같은 거,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타입이거든.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말은 여전히 선명하게 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그건 우연 같은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가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맺어지지 않을, 그저 손 안에서 스르륵 빠져나갈 매듭 없는 운명의 실이었다. 흐드러지는 벚꽃 사이로 환하게 웃는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파스텔 톤으로 가득 칠해진 거리에서 제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오렌지 빛깔 머리카락. 눈부신 그 위로 내려앉은 연분홍빛 꽃잎 한 점이 눈에 걸렸다.


벚꽃, 붙어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을 바라보는 밝은 미소에, 유우마는 입을 다물었다. 차마 건네지 못하고 목구멍 안쪽에서 맴돌던 말은 하얗게 물들어가는 풍경과 함께 서서히 뭉개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꽃잎을 태운 바람이 유우마를 향해 거세게 불어왔다. 먼지라도 들어갔는지 따끔거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겨우 다시 눈을 뜬 순간, 문득 느껴지는 이질감에 유우마는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유마삐. 듣고 있어…?”

“……아.”


기억과는 다른, 조금은 초조해 보이는 센리는 제 앞에 서 있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유우마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지금 이 풍경은 현실이었다. 벚꽃으로 가득한 풍경에 그만 옛 추억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그런 건 상대방한테 예의가 아닌데.


“미안, 니토. 잠깐 멍하니 있었어.”

“아니, 나야말로 피곤할 텐데 붙잡고 있어서 미안…. 그만 돌아갈까?”


애써 초조함을 갈무리하며 웃음을 띠우는 센리의 모습은 평소보다 어색해 보였다. 그건 유우마 역시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센리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여전히 이질적인 분홍색 벚꽃 잎은 그의 머리카락에 걸려있었다. 신경 쓰인다. 저 벚꽃도,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니토도. 지금 이대로 그를 보낸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먼저 붙잡으면 된다. 처음 만났던 그 날의 너처럼. 운명의 실이 이 손에서 흩어져나가지 않도록. 유우마는 걸음을 나아가려는 센리의 팔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인력에 그는 살짝 놀란 기색으로 유우마를 돌아보았다.


“유마삐?”


유우마는 대답보다 먼저 손을 뻗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 다가오는 그림자에 센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벚꽃, 붙어있어.”


그 목소리에 센리는 긴장 풀린 웃음을 흘리며 유우마를 바라보았다. 그런 센리와 눈이 마주치자 유우마는 그제야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는 손바닥 안의 벚꽃을 꾹 쥐며 센리를 마주보았다.


“니토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는데, 난 아직 못 들었어.”


하고 싶은 말이라면 이쪽도 있었다. 뒤늦게 매듭을 지어야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먼저 실을 잡아당겨준 건 상대였다. 비록 그 끝에 묶여 있는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해도, 바라는 상대가 아니더라도. 지금은 기다려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척 하려고 했는데. 유마삐가 붙잡았으니까 나도 유마삐 책임으로 돌려보려고.”


평소보다 투명한 센리의 미소에 유우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부한 멘트지만 나, 유마삐가 좋아.”


문득 제 손가락에 걸린 실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는 실의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 앞에는 센리가 서 있었다.


“……우연이다.”

“응?”

“아니, 우연은……아닐지도 몰라.”


자그마한 그의 혼잣말은 아직 센리에게 닿지 않은 상태였다. 유우마는 거듭 떠올려 봐도 어떻게 말을 정리해야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부터 어휘력은 좋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러니 더욱 곤란할 뿐이었다. 그저 귀 끝부터 조용히 피어오르는 열기에 그는 조용히 시선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유마삐?”


다시 한 번 들려오는 센리의 목소리에 유우마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그의 시선이 정면으로 와 닿았다. 눈빛이 마주한 순간 그는 센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도, 니토를 만나게 돼서, 이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고 생각했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제 감정에 대해 제대로 된 정의조차 내릴 수 없어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뱉어내는 게 고작이었다.


“운명을 믿냐고 물어봤었잖아. 솔직히 그런 거 잘 모르겠어….”


그야 그 전까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까.


“……그래도 운명이라는 게 진짜 있다면, 내 운명은 니토다.”


사실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전부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몸을 끌어당기는 손짓이 느껴졌다. 니토, 상대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센리는 자신을 꼬옥 안고 있었다.


“응. 나도 유마삐가 내 운명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센리의 목소리는 어쩐지 평소보다 약간 낮게 제 귓가에서 울렸다. 어색하게 허공에 떠있던 유우마의 손은 조심스럽게 센리의 등을 마주 안았다. 작년보다 익숙해진 교복 마이의 질감이 손끝에 와 닿았다. 문득 한쪽 어깨가 촉촉해져가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껴안는 센리의 손에는 처음보다 조금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다행이다.”


담백한 유우마의 말에 센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았다. 



2019.08.30 드리밍

리퀘: 센유우로 운명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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