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츠무기.”


아직 가시지 않는 피로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몇 번이고 제 이름을 불렀다. 평소보다 몇 배는 무겁기 짝이 없는 눈꺼풀을 겨우 치켜뜨고 나서야 츠무기는 목소리의 주인이 타스쿠라는 걸 깨달았다. 머리맡의 난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전히 누워있는 자신과 다르게 몸을 일으켜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츠무기는 의아함을 느꼈다. 평소 아침이 약한 자신을 억지로 깨워재끼는 타스쿠의 모습이라면, 분명 지금보다 훨씬 고조된 목소리로 미간에는 조금 더 짙은 주름이 껴있을 터.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혹시 화난 건 아닐까 걱정까지 할 정도로 신경질 적인 느낌이 들었을 텐데 말이다. 츠무기는 느릿하게 눈을 꿈뻑거렸다. 아직 잠이 덜 깬 탓일까, 흐릿한 시야로 타스쿠의 모습이 몇 겹으로 겹쳐보였다. 타스쿠. 무슨 일이라도 있어? 입을 벌려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어쩐지 칼칼한 목구멍에선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타, 스쿠…”


반쯤 공기가 섞인 목소리로 열심히 뻐끔거린 건 그의 이름이었다. 흐릿한 츠무기의 언어를 듣자마자 타스쿠의 표정은 살짝 굳어졌다. 잠깐 이마 좀. 허락을 구한다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말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걷어내 이마를 감싼 타스쿠의 손은 제 이마와 체온을 비교하더니 금세 한숨과 함께 떨어져나갔다.


“감기군.”


타스쿠의 진단 결과는 꽤나 심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연례행사처럼 맞이하는 츠무기의 감기였다.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황에 타스쿠는 침착하게 행동을 시작했다. 우선 타스쿠는 잠버릇에 한쪽으로 내팽겨진 츠무기의 이불을 그의 턱 밑까지 꼭 덮어주고 나서야 침대에서 내려왔다. 분명 저번에 감독이 감기 걸렸을 때 잔뜩 사두었던 감기약이 담화실 어딘가에 남아있을 터였다. 그대로 푹 자고 있어라, 츠무기. 가볍게 충고를 던진 타스쿠는 방을 나섰다.


기숙사에 감기약은 없었다. 담화실의 서랍이란 서랍을 모조리 뒤지고 나서야 내린 결론은 타스쿠에게 있어 아쉬운 이야기였다. 생각해보면 환절기 감기가 유행이라고 감독 이후로도 몇 명이 가벼운 감기 증세를 보이던 시기가 있었다. 츠무기나 감독처럼 앓아 누운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기억 못 해 괜히 애꿎은 서랍들만 어지르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사러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갈 채비를 하기 위해 다시 방에 그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아침 연습에 대해선 다른 녀석들에게도 말해둬야겠지. 어느새 잠든 츠무기를 확인한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겉으로 보기에도 꽤 유약해 보이는 것처럼 츠무기는 제 또래보다는 조금 부실한 편이었다. 편식이 심한 것도 아니고 게으른 생활을 하는 건 아니지만, 어찌된 일인지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은 그였다. 후천적인 영향은 결코 아니었고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뿐이었다. 예전부터 운동을 좋아하던 타스쿠였기 때문에 츠무기에게도 여러 번 함께하기를 권했지만, 어째 몸을 움직일수록 건강해지기보단 체력이 떨어지는 건 신기한 현상이었다. 언젠가 같이 축구를 하다가 츠무기가 공에 맞아 기절까지 했을 때, 타스쿠는 깨달았다. ‘츠무는 절대 운동과는 맞지 않는다.’ 고. 같이 운동을 하면서 건강해지기 어렵다면 타스쿠로서 츠무기의 건강을 지키는 방법은 달리 없었다. 그저 아플 때마다 함께 있어주는 것 뿐. 그리고 오랜 시간을 그런 츠무기의 곁에서 보낸 만큼, 타스쿠는 겉보기와 달리 꽤나 간병 스킬이 뛰어난 편이었다.


약국에서 종합 감기약을 사고 타스쿠가 들른 곳은 다름 아닌 편의점이었다. 일회용 마스크와 해열패드, 둘이서 먹기에 적당한 크기의 아이스크림 통을 고르고 나서야 타스쿠는 계산을 마쳤다. 어렸을 적부터 감기와 친했다고는 해도 그 시절부터 약을 잘 먹던 건 아니었다. 딸기 향, 바나나 향 등 아무리 달콤한 향을 첨가한다고는 해도 약은 약이었다. 달짝지근한 향과 비례하는 씁쓸하고 떫은맛은 어린 츠무기의 입에는 독과 마찬가지로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입에 대기도 싫어하던 약의 해결방법을 찾은 건 그와 같이 어린 아이인 타스쿠였다. 쓴 감기약을 먹을 때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여주는 건 꽤나 어린 아이다운 발상이었다. 아무래도 아픈 아이에게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이는 건 괜찮을까 싶기도 했지만,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소리에 그 이후 츠무기가 감기에 앓고 있을 때면 타스쿠가 매번 약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가져왔다. 물론 츠무기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쯤엔 이미 감기약 맛에 대한 면역은 생겼지만, 그렇다고 아이스크림을 안 먹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스쿠는 지금까지도 습관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츠무기가 다시 잠에서 깬 건 타스쿠가 약과 함께 죽을 들고 왔을 때였다. 그가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오미는 특제 계란죽을 만들어주었다. 아파서 음식을 잘 넘기지 못하는 것과 츠무기가 계란 요리를 좋아한다는 것, 두 가지를 모두 신경 쓴 오미다운 요리였다. 그와 다르게 요리에 별로 자신 없는 타스쿠의 입장에서는 꽤나 고마운 일이었다.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츠무기였지만, 해열패드와 숙면의 효과인지 처음보다는 열이 내려가 있는 걸 확인한 타스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행여 뜨거워서 제대로 못 삼킬까, 후후 숨을 불고 나서야 그는 츠무기에게 죽 한 숟가락을 먹일 수 있었다. 남들이 보면 과보호라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타스쿠와 츠무기 사이에서 이 정도 거리감은 옛날부터 당연했다. 서로 지나치다는 자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서로가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이 정도로 챙기는 건 오히려 아쉬울 정도였다. 예전 같았으면 단순히 소꿉친구라는 말로 묶는 정도였지만 지금 두 사람을 잇기에 그 한 단어로는 부족했다.


“타-쨩, 감기 옮으면 어떡해….”


나른하게 울리는 츠무기의 목소리에 타스쿠는 괜히 그의 머리를 손으로 헤집었다.


“난 츠무랑 다르게 튼튼해서 감기 따윈 안 걸려.”

“에……. 그거 지금 나 돌려서 까는 거 아니야?”

“알았으면 얼른 나아라.”


타스쿠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대로 츠무기에게 숟가락을 넘겼다. 이젠 어느 정도 식었으니깐 혼자서도 먹을 수 있지? 벌써 죽의 반 이상은 직접 떠먹여준 그였지만, 뒤늦게 엄격한 척을 해보였다. 그런 타스쿠의 언행이 우스운지 츠무기는 눈에 띄게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타스쿠를 바라보았다.


“타-쨩은 어차피 감기 안 걸리니깐 뽀뽀해줘…. 그럼 알아서 죽 먹을게.”

“하?”


이게 지금 환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확연하게 자신을 놀리는 듯한 츠무기의 말투에 타스쿠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한껏 앓아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꽤나 거슬린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츠무기의 옆머리를 귀 뒤로 깔끔하게 넘겼다. 열 때문에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은 눈에 보이는 것만큼 따뜻해서, 그 온기가 타스쿠의 손을 타고 느껴졌다. 어느새 자신을 향해 두 눈을 꼭 감아 보이는 츠무기의 행동에 타스쿠는 헛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타스쿠에게 있어서 츠무기가 죽을 알아서 먹든 자신이 직접 먹여주든,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무기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타스쿠는 그가 내세운 우스꽝스러운 제안에 응해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자기 애인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감기 걸릴까봐 이런 소리는 못 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떠올리면서도 타스쿠는 이미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피식 올라가는 제 입꼬리를 츠무기가 발견하기 전에, 타스쿠는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쳐 올렸다.


츠키오카 츠무기가 이렇게 욕심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제 목을 두 팔로 감으며 끌어당기는 츠무기의 행동이 과연 환자라는 사람이 할 짓인가 속으로 잔뜩 꿍얼거리면서도, 그대로 뒤로 넘어가버리는 타스쿠 역시 어찌할 도리 없이 욕심쟁이였다.


약과 함께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츠무기가 먹게 된 건 벌써 해가 다 져버린 이후였다.



2018.03.07 에이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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