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은콩] 계약으로 묶인 가족

 

 

W.나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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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문빈이야.”

 

빈은 그 말을 너무 해맑게 말했다. 마치 아이가 평생을 원하던 걸 얻은 것처럼. 한편, 그런 빈을 보는 은우의 속은 점점 타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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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우와 빈은 원래 남이었다.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 하진이 떨어져있던 둘을 데려와 같은 집에서 키우고 자라게 했다. 그렇게 둘은 가족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은우는 총명하고 눈치도 좋았다. 또래 아이들보다 뛰어난 점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하진은 은우를 많이 아꼈다. 하진은 항상 은우와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은우를 가르쳤다. 은우는 책과 하진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그에 반해 빈은 어린 은우만큼 총명하지도 눈치가 빠르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항상 하진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어렸던 빈은 은우를 충분히 미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빈은 은우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하진에게 받은 사랑을 은우를 통해 받는다는 생각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한 번 하진이 긴 출장을 다녀온 날이 있었다. 하진은 집에 돌아왔을 때 양손 가득 선물을 사왔었다. 그 많은 선물은 다 은우에게로 돌아갔다.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은우 옆에서 빈은 배고픔을 느꼈다. 빈은 그때 처음으로 하진에게 배고프다고 칭얼거렸다. 그날 빈은 밥을 다섯 공기나 먹었다. 그 뒤로 빈의 식탐은 끊이질 않았다. 은우는 그런 빈을 흐뭇하게 봤다. 하진 역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애석하게도 빈은 밥을 먹고 난 뒤 속에 있는 걸 밤마다 게워냈다. 그걸 물 마시러 가는 은우에게 발각되기도 했다. 은우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달고 빈에게 아프지 말라며 웅얼거렸다. 빈은 조용히 가서 은우를 안아주었다. 눈물을 달고 있는 건 은우였는데 젖어가는 건 은우의 어깨였다. 은우는 빈을 자기 방으로 데려왔다. 빈은 은우의 침대에 누워 편히 잠들었다. 그 뒤로 빈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을 때 은우의 방에서 잠을 잤다. 은우는 그게 좋아 빈에게 같이 자자고 조를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은우는 몽글거리는 기분에 신이 났다. 

 

둘은 어느새 자라 중학생이 되었다. 은우는 중학교를 다니는 내내 빈에게 같이 자자는 말을 했다. 빈은 그게 이상하지 않았다. 은우와 빈이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을 때였다. 은우와 빈이 학교를 간 시간, 하진은 집을 청소하고 있었다. 은우의 방을 청소하러 들어갔을 때, 하진은 은우의 침대 밑에서 작은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하진은 나무상자를 열어봤다. 안에는 은우의 이름이 적힌 공책을 꺼냈다. 아버지라고 아들의 일상이 궁금했는지 하진은 고민도 하지 않고 은우의 공책을 열었다. 공책의 정체는 일기장이었고 하진은 은우의 일기를 읽으면서 서서히 표정이 굳어갔다. 하진은 청소를 하다 말고 은우의 방을 나갔다. 곧 은우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하진은 은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에 오면 곧장 서재로 오라고. 은우는 그 문자를 받고 무얼 가르쳐주실까 하며 설레어 했다. 

은우는 집에 들어와 곧장 서재로 갔다. 서재에 들어간 은우는 하진의 앞에 앉았다. 하진은 손에 들려있던 은우의 일기장을 은우에게 줬다. 은우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다. 하진은 은우의 일기장 속 한 구절을 읊조렸다.

“‘하루 종일 빈이 생각만 났다. 빈이가 웃는 게 좋다. 빈이가 내 옆에 있는 게 좋다. 그냥 다 좋다.’ 은우야. 이거 네가 쓴 거니?”

은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닥만 봤다. 하진은 책상을 내리쳤다. 은우는 그런 하진의 모습을 처음 봤기에 더 무서워했다. 하진은 은우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은우는 계속 침묵했다. 자신이 말하면 안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진은 그때 처음으로 은우를 때렸다. 그리 왜소하지 않았던 은우는 하진에게 맞아도 꿈쩍하지 않았다. 은우는 공포심을 느끼지 않았다. 은우가 느낀 건 반항심이었다. 

그날 후로 은우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진은 은우 대신 빈을 서재에서 가르쳤다. 처음 서재에 들어간 빈은 기뻐했다. 드디어 하진에게 사랑을 받는다며 좋아했다. 그래도 계속 배고픔에 시달렸다. 빈이 혼자 은우의 방에서 자는 날이 많아졌다. 학교에서 은우가 질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빈은 은우를 기다렸다. 은우는 오지 않았다. 빈의 허기짐은 전보다 더 심해졌다. 은우가 있어 하지 않았던 구토를 이젠 매일 밤 했다. 

그러다 어느 추운 날 밤, 은우가 집으로 돌아왔다. 서재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온 빈은 돌아온 은우에게 달려가 안겼다. 은우는 익숙하게 빈을 안아줬다. 그 뒤로 하진이 보였다. 은우는 왜 이제 왔냐며 칭얼거리는 빈의 등을 토닥이며 하진을 매섭게 노려봤다. 하진은 은우를 서재로 불렀다. 빈은 하진의 음성에 안고 있던 은우를 놔줬다. 은우가 움직이지 않자 빈은 은우의 등을 밀었다. 은우가 서재로 들어가는 것을 본 빈은 은우의 방으로 가 은우를 기다렸다. 

서재에 들어간 은우는 작아진 의자에 앉지 않았다. 하진이 은우에게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해도 은우는 앉지 않았다. 하진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앞에 당당히 서있는 은우를 바라봤다. 집에 안 들어온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은우는 전과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턱을 날카로워졌고 눈매는 더욱 선명해졌다. 덩치도 하진을 넘어섰고 특히 은우를 감싸던 분위기가 극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은우는 하진에게 물었다. 

“잘 지내셨어요?”

은우의 목소리는 거칠게 변해있었다. 하진은 그런 은우에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은우는 철저히 하진의 가르침대로 행동했다. 하진은 뿌듯함은커녕 반감이 들었다.

“그동안 뭐했니?”

“글쎄요. 어떤 답을 해야 아버지가 만족을 하실까요?”

“이놈이...!”

“그때처럼 해보세요. 저는 아버지가 뭘 하든 상관없어요.”

 

하진의 손이 은우의 마른 뺨을 때렸다. 은우의 고개를 하진의 손과 반대편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진의 놀란 표정은 금세 포악하게 바뀌었다. 하진은 저벅저벅 걸어가 창가 옆에 있는 골프채 하나를 들었다. 골프채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있었다. 골프채는 허공을 가르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서재에는 둔탁한 소리와 하진의 힘겨운 신음만 났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방에 들어온 은우는 침대에서 곤히 잠에 든 빈을 봤다. 오랜만에 보는 빈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피었다. 은우가 조용히 의자에 앉으려 했으나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가 침대 모서리에 부딪혀 은우 입에서 아픈 신음이 튀어나왔다. 은우는 재빨리 입을 막아봤지만 이미 빈은 잠에 깬 상태였다. 

은우의 기척을 느끼고 일어난 빈은 두 팔 벌려 은우를 환영했다. 하지만 은우의 상태를 본 빈은 절대 웃을 수 없었다. 빈은 침대에서 일어나 은우에게 갔다. 은우는 얼굴을 가렸다. 그렇다고 빈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빈은 은우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가득 달았다. 빈은 은우가 아플까 만지지도 못하고 빈의 손은 은우의 얼굴 근처를 방황했다. 은우는 눈이 휘게 웃었다. 빈은 그 모습에 더 마음이 아팠다. 빈은 당장 1층으로 내려가 구급상자를 들고 왔다. 

은우의 상처를 하나씩 치료해주면서 빈은 속상하다는 티를 잔뜩 냈다. 빈은 조심스럽게 누가 이랬는지 물었다. 빈의 기억 속에 분명 은우가 들어왔을 때는 상처가 없었다. 은우는 아무런 말도 안 했다. 하진은 은우와 사이가 안 좋은 것이었지 빈과는 사이가 좋은 걸 알고 있었다. 빈은 미안해했다. 서재로 들어가라며 은우의 등을 떠민 자신이 미워졌다. 빈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은우는 그 소리에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았다. 

은우와 빈은 몰래 집 밖을 나왔다. 나가자는 은우에 불안했던 빈은 어디 갔는지 밤공기를 즐기는 빈이었다. 빈은 편의점 간의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과 소시지를 흡입하고 있었다. 은우는 그런 빈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나 없을 때 너 굶겼냐?”

빈은 볼에 음식을 가득 담아두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빵빵하게 부푼 볼 때문인지 굉장히 다람쥐 같은 빈을 보고 은우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은우는 가만히 앉아 빈을 보기만 했다. 빈은 그런 은우를 향해 웃었다. 눈 녹듯 사라지는 눈동자에 은우의 심장도 녹아버릴 것 같았다. 마냥 좋아해도 모자랄 판에 은우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뒤로 은우는 집에 꼬박꼬박 잘 들어오고 학교도 잘 갔다. 다만, 학교에서 있는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는 문제아가 되었다. 보다 못한 은우의 담임은 하진에게 전화를 했다. 그 얘기가 하진에게 들어오자 하진은 다시 은우를 서재로 불렀다. 매일 밤마다 서재에 불려간 은우는 매일 밤마다 보기 흉한 상처를 가지고 2층으로 올라왔다. 은우가 방에 들어가면 빈은 구급상자를 뒤적거리며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 밤 빈은 은우의 상처를 치료해줬다. 

어느 날, 하진은 은우를 부르지 않고 빈을 불렀다. 매일 밤 은우의 모습을 봐온 빈은 서재에 가는 게 두려웠다. 빈이 조심히 서재로 들어가자 하진은 빈에게 앉으라는 듯 눈짓을 했다. 빈이 소파에 앉아 하진은 보고 있던 종이를 내려놨다.

“빈이 너 이제 은우한테 여지 같은 거 주지 마라.”

“네?”

“무슨 뜻인지는 차차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은우 곁에 머물지 마.”

빈은 은우를 멀리하라는 하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빈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하진은 그런 빈에게 나가보라 말했고 빈은 조용히 서재를 나갔다. 빈은 또 배가 고팠다. 빈은 2층으로 올라가 은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하진의 말도 안 되는 지시에 빈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다. 은우가 방문을 열자마자 빈은 은우의 손목을 잡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은우는 무턱대고 자신을 끌고 가는 빈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빈을 감싸고 있는 어떤 분위기가 은우를 가만히 있게 만들었다. 빈이 은우를 끌고 온 곳은 편의점이었다. 은우는 편의점에 도착하자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비장한 표정을 하고 온 데가 여기냐?”

“배고파서 그래...”

“컵라면 사줘?”

“나 돈 있어”

“없는 거 같은데”

빈은 있다고 하면서 주머니를 뒤져봤다. 후드와 바지. 총 4개의 주머니를 뒤져봐도 먼지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빈은 어색하게 웃었다. 은우는 휴대폰 케이스 뒤에 끼워둔 만원을 빈에게 줬다.

“많이 먹어. 우리 빈이”

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별안간 얼굴을 들이미는 은우에 빈은 말을 더듬으며 어설프게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빈은 컵라면을 고르면서 편의점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은우를 힐끔거렸다. 빈은 손에 집히는 라면을 집어 들고 뜨거운 물이 담긴 컵라면을 조심히 들고 나왔다. 자연스레 은우에게 잔돈을 건넸지만 은우는 빈에게 가지라면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빈은 그렇게 하진의 말을 무시하고 은우와 전보다 더 가깝게 지냈다. 그러다 하진은 하교한 빈을 데리고 어디론가 갔고 조용한 집 안에 은우 혼자 남은 날이 있었다. 은우는 나간 빈을 기다리다가 잠에 들었고 그 사이에 하진과 빈이 집에 돌아왔다. 밝은 표정으로 집에 들어 온 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뛰어올라가 은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방문이 열리자 금방 잠에서 깬 은우가 보였다. 빈은 너무 들떴는지 그런 은우는 신경도 안 쓰였다. 은우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빈은 자랑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은우에게 보여줬다.

“나 이제 문빈이야!”

빈은 그 말을 너무 해맑게 말했다. 마치 아이가 평생을 원하던 걸 얻은 것처럼. 한편, 그런 빈을 보는 은우의 속은 점점 타들어가고 있었다. 빈은 은우의 분위기를 읽지 못했다. 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은우에 빈은 어리둥절했다. 은우는 1층으로 내려갔고 빈은 그런 은우를 따라갔다. 하진은 서재에 있었다. 은우는 어릴 때 이후로 처음 서재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 서재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은우를 본 하진은 예상했다는 듯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던 은우는 서재 문을 잠갔다. 빈은 잠긴 서재 문 앞에서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서재 안에선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빈은 2층으로 올라갔다.

서재 문을 잠군 은우는 브레이크 없이 하진에게 다가갔다. 하진은 여유로운 미소만 짓고 있었다. 

“빈이 이름 왜 바꾸신 거예요?”

“바꿔야 할 때가 온 것뿐이야. 그 일이 있지 않았으면 너는 더 빨리 바꿨을 거야. 왜? 무슨 문제라도 있니?”

은우는 이를 꽉 물었다. 하진의 속셈을 모두 파악한 은우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은우와 빈은 피로 묶인 가족은 아니지만 계약으로 묶인 가족이었다. 하진은 그걸 은우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빈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꾸었다. 은우의 턱 근육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진은 그런 은우는 관심에도 없다는 듯 행동했다.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은우는 꽉 물었던 이에 힘을 풀었다. 

“내가 아버지처럼 될까 봐 이러는 겁니까.”

은우의 말을 들은 하진의 동공은 희미하게 흔들렸다. 은우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항상 완벽하던 하진이 삼촌의 결혼식 날 술에 떡이 되어 들어왔던 날을. 그날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들었던 하진을 잘 부탁한다는 말과 익숙한 목소리를 은우는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진은 은우가 그때를 기억할 줄 몰랐다는 듯 당황을 했다. 은우는 하진에게 여유가 없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은우는 하진이 입을 열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끝까지 기다를 생각은 또 없었다. 하진이 적잖이 당황한 것을 본 은우는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고 서재를 나갔다.

다음 날, 은우는 빈과 같이 등교하지 않았다. 학교에 오지도 않았다. 항상 은우와 같이 먹던 점심을 혼자 먹을 생각을 하니 입맛이 없어진 빈은 매점에서 빵을 사들고 반으로 갔다. 반에 들어가려는데 반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들은 빈은 반에 들어갈 수 없었다.

“차은우가 문빈 좋아한다며”

“가족이니까 좋아할 수 있지”

“야. 가족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문제지”

빈은 결국 조퇴를 하고 말았다. 혼자 들어온 집은 조용했다. 빈은 익숙하게 발을 움직여 은우의 방으로 갔다. 은우의 체향이 풍겨오자 긴장이 풀린 듯 빈은 침대에 빨래 널린 듯 누웠다. 빈의 시선에선 침대 밑이 훤히 보였다. 은우의 침대 밑에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다. 빈은 손을 넣어 나무 상자를 꺼냈다. 최근에도 사용했는지 먼지가 전혀 쌓여있지 않았다. 빈은 나무 상자를 열어봤다. 상자 안에는 상자 크기에 딱 맞는 공책이 하나 들어있었다. 빈은 공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책장이 넘어갈수록 빈의 표정은 오묘하게 굳어갔다.

그때, 빈의 손에 있던 공책을 누군가 가져갔다. 빈이 고개를 들어 위를 봤다. 은우가 공책을 들고 있었다. 은우의 표정은 두려워하는 듯 했다. 

“너 이게 봤어?”

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는 심란한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은우는 나무 상자에 공책을 넣고 빈을 밖으로 내쫒으려 했다. 빈은 은우의 행동에 싫다는 듯 약간의 저항을 했다. 은우의 표정은 꽤나 비참해 보였다. 방 밖으로 나간 빈은 문을 닫으려는 은우를 잡았다. 

“너, 나 좋아해?”

은우의 눈빛이 선명해졌다. 빈은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빈에겐 확신이 필요했다. 빈이 물러나지 않자 은우는 스스로 꼬리를 내렸다. 은우의 목소리는 떨렸다.

“좋아해...”

빈은 고개를 끄덕이곤 잡았던 은우를 놓았다. 닫히는 방문 사이로 빈은 은우를 향해 웃었다. 하지만 은우는 그 웃음을 보지 못하고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빈은 1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진이 들어오고 빈은 하진에게 할 말이 있다 말했다. 하진은 따뜻하게 웃으며 서재에서 기다리라 했다. 서재에 들어간 빈은 하진의 책상 위에 있는 액자를 봤다. 밝게 웃고 있는 하진과 은우 그리고 그들보다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빈이 보였다.

하진이 서재에 들어와 빈에게 무슨 일이냐 물었다. 빈은 들고 있던 액자를 제자리에 두고 익숙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하진은 빈의 맞은편에 앉았다. 빈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저보고 은우 곁에 있지 말라고 하셨죠? 그 이유가 뭔지 말해주세요.”

“그런 문제면 그냥 가라”

하진은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마냥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가려 했다. 빈은 지었던 미소를 거두고 하진을 차갑게 봤다. 

“은우가 저 좋아해서 그래요?”

하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진은 몸을 틀어 빈에게 다가갔다. 빈은 하진의 표정을 읽으려 했지만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빈은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질문이 핵심이라는 것을.

“네가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다고 달라질 게 있니?”

“네. 그러니 말해주세요. 궁금한 건 언제든 물어보라고 뭐든 답해준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고 하면 어쩔 거냐?”

빈은 차가웠던 표정을 다시 따뜻한 미소로 만들었다. 원하는 답이 나온 것 같은 만족감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빈은 점심을 걸렀음에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오히려 밥을 먹은 것 같은 포만감이 빈을 따뜻하게, 나른하게 만들었다. 처음 느끼는 포만감에 빈은 행복해 했고 처음 보는 빈의 행복한 표정에 하진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셔도 계속 은우 곁에 있을 겁니다. 저도 은우가 좋으니까요.” 




아스트로 차은우 x 문빈 시즌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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