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도 모른 채 난호는 공격당하고 있다. 뼈를 맞은 듯 한 저릿한 아픔이 난호의 온 몸에 퍼진다. 눈앞의 상대는 난호보다 두 배쯤은 덩치가 커 보인다. 그의 주먹이 날아오고 난호의 온 몸이 흔들린다. 점점 뒤로 밀려나는 난호. 상대는 공허한 눈으로 난호를 계속해서 공격한다. 마치 정해진 일만 반복하는 기계처럼 틈이 없다. 그 때문일까 난호는 도망칠 수 없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막는 것이 난호의 최선이다.

공허한 눈을 가진 상대가 갑자기 공격을 멈춘다. 난호는 도망친다. 숨을 헐떡이고 온 몸에 땀이 쏟아진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졌을까 공허한 눈은 난호에게로 돌진한다. 난호는 바로 방어자세를 취한다. 주먹질과 발길질이 이어진다. 난호는 침착하게 막아내며 빈틈이 나오기를 기다리지만, 여전히 상대에겐 빈틈은커녕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다. 점점 더 공격이 거세진다.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누적 됐을 때 난호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인지 눈을 감는다. 팔에 점점 힘이 풀리기 시작한다.

난호는 어둠 속에서 소리와 팔에 느껴지는 고통에 의지한다. 곧 팔은 바닥을 향하고 고통이 온 몸으로 내리 꽂힐 것이다. 하지만 난호는 두려움이나 공포보다는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분노가 더욱 크게 느낀다. 난호의 팔이 완전히 내려갔을 때 고통은 멈춘다. 난호는 눈을 뜬다. 공허한 눈은 아까와는 다르게 난호를 바라보지 않고 있다. 


‘설마... 봐주는 건가?’


난호는 입술을 꽉 깨물고 억지로 팔을 들어 올린다. 다시금 상대의 공허한 눈이 난호를 압박한다. 난호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팔을 내려놓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이 고통의 틈새를 찾아 공허한 눈을 쓰러뜨려야 한다.’라는 생각이 난호를 지배한다.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조금 흐르기 시작할 때, 주먹을 막고 있는 팔이 보라색으로 변해갈 때 난호는 눈을 감는다. 침착하게 틈이 나길 기다린다.

순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고, 난호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팔을 뻗는다. 소리와 고통 그 틈새를 파고든 난호의 주먹이 공허한 눈에 닿는다. 난호는 눈을 뜬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눈앞에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모습만 보인다. 난호는 소름과 함께 매우 기쁜 얼굴을 짓는다. 

 

 

 

 

♬ ♪ ♩~

 

 

익숙한 음악 소리에 난호는 잠에서 깨어난다. 몸을 벌떡 일으켰지만, 아직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난호의 몸은 자꾸만 비틀거린다. 난호는 가누지 못하는 몸에 힘을 풀고 눕는다. 다시 베개에 기댄 난호는 눈을 뜨지 않고 손으로 머리맡을 뒤적뒤적 거리며 휴대폰을 찾는다.

손에 닿은 차가운 액정에 소름을 한 번 느낀 난호는 눈을 살짝 뜨고 알람을 멈춘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5시. 보통 사람에게는 아직 한참은 이른 시간. 당연하게 아침보다는 새벽이라고 취급받는 시간. 난호는 눈을 비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몸이 자꾸만 침대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5분 정도 고민을 계속하던 난호는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고 침대에서 벗어난다. 잠옷을 벗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난호는 기지개를 크게 펴고 방문을 나서려 한다. 문고리에 손을 올렸을 때 난호는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며 거울로 걸어간다. 소매를 걷고 거울에 팔을 비춰본다. 거울 속에는 흉터가 조금 있지만 나름대로 깨끗한 팔이 보인다. 난호는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과 함께 방을 나선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현관에 도착한 난호는 운동화를 꺼내기 위해 신발장 문을 연다. 조금 낡은 경첩 때문에 끼익 거리는 소리가 현관을 채운다. 난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본다. 다행히 아무도 그 커다란 소리를 듣지는 못한 것 같다. 난호는 신발 장 안을 둘러보며 운동화를 찾기 시작한다. 

신으려는 운동화 위에 쪽지가 하나 올려져 있다.

 

 

수련을 게을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너무 이른 시간에 나가 새벽의 더러운 공기를 마시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네 의견을 존중해서 말리진 않겠지만 학교 가기 전에 씻고 아침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게는 들어와라. 그래도 2학년의 첫 등교일이니.

 

 

비록 딱딱하고 멋없는 글이지만 난호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쪽지를 곱게 접어 트레이닝 복 주머니에 넣는다. 운동화를 꺼낸 난호는 운동화가 어제보다 깨끗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멍하니 운동화를 보던 난호는 뭔가 떠오른 듯 갑자기 눈이 맑아진다. 갑자기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뒷면을 펼쳐 그 위에 글자를 몇 자 적고 현관을 나선다. 오늘은 왠지 평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는 듯하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누군가 방문을 열고 나온다. 난호의 아빠인 ‘이 순’이다. 그는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가 난호가 제대로 닫지 않은 신발장 문을 닫는다. 신발장 문을 닫자 한 쪽지가 눈에 들어온다. 순은 신발장 문에 붙은 쪽지를 떼어 읽고는 따뜻하고 뿌듯한 미소를 띤다. 항상 엄한 모습으로 대했던 자신에게 이런 말 남겨준 난호에게 고마운 한 편, 벌써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먹먹해 진다. 그는 방으로 걸어가 부인의 사진이 있는 액자 주변에 쪽지를 두고 부엌으로 향한다.



난호는 달리고 있다. 아직은 겨울만큼 찬 공기가 가득하다. 이 찬 공기가 폐를 채울 때마다 잠이나 피곤함은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문제는 몸이 조금 둔해진다는 거다.

난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순이 남긴 쪽지를 생각한다면 평소보다 빠르게 달려야 제 시간에 학교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난호는 다리에 힘을 집중하며 좀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평소라면 혹시나 사람과 부딪힐까 봐 속도를 낮추는 구간도 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좋은 기분과 순의 쪽지에 부응하기 위해 난호는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는다. 귀 한쪽에서 이어폰이 빠졌을 때도 말이다.

난호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덜렁거리는 이어폰을 잡고 다시 귀에 꽂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 난호의 노력이 무색하게 반대쪽 귀에서도 이어폰이 빠진다. 이런 거슬리는 일이 일어나자 난호는 그냥 휴대폰에서 이어폰을 뽑아내고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물론, 계속 달리면서.

무언가를 친 감각. 난호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제발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난호의 눈앞에는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넘어져 있다. 앞머리가 눈을 덮어 눈을 볼 순 없지만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아마도 기절 한 것이 아닐까. 난호는 놀란 채 바로 그 남자아이의 어깨를 잡고 살쩍 흔들며 말을 걸어본다.



“저기! 괜찮아요?”



보통 사람이라면 부딪힌 상대에게 사과를 하는 게 먼저겠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무술 수련을 했던 난호는 그 보다 부딪힌 상대의 상태를 먼저 확인 해야 했다. 

몸 그 자체가 일반인에게는 커다란 바위나 산. 현대적으로는 표현한다면 승용차와 비슷한 수준이기에 난호와 부딪힌 사람은, 특히 달리고 있는 난호와 부딪힌 사람은 열에 열 최소한 골절이 된다. 그 때문에 순은 난호가 학교를 다닐 때부터 언제나 일반인들에게 함부로 힘을 쓰지 말라는 것을 당부했다. 난호가 순에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콧방귀를 뀌며 ‘나 같은 애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다고.’라고 생각했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이 놀던 친구의 몸을 거의 박살 내다시피 한 후부터는 언제나 남들이 자신에게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오늘 아주 잠깐 부주의를 보였고, 그로 인해 학교보다 병원을 더 먼저 가게 생긴 것이다.

말이 없는 남자아이를 보며 난호는 안절부절못하다 하다 손에 힘을 뺀 채로 남자아이의 뺨을 두드려본다.



“...”


“미치겠다 진짜...”



난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119를 누른 후 통화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가락을 뻗는다. 갑자기 무언가가 난호의 손목을 움켜쥔다. 난호는 휴대폰에서 고개를 뗀다. 남자아이는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하품을 크게 한다. 난호는 멍한 얼굴로 남자아이의 하얗고 긴 손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말을 건다.



“저기 괜찮아요?”


“아, 네. 그게 좀 피곤해서... 안 그래도 비틀거리면서 걷고 있었는데 부딪혀서 죄송해요.”


“네? 아뇨, 아뇨. 제가 죄송하죠. 제가 부딪힌 거 같은데... 그보다 몸은 괜찮으세요?”


“몸이요...? 아, 걱정 마세요 제가 좀 많이 튼튼해서요.”


“아뇨, 그래도 뭐 욱신거리는 곳이 있거나 뭔가 뜨거운 곳이 있거나...”


“걱정 마세요. 저 정말 괜찮아요. 그냥 좀 피곤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뿐이지... 아, 이건 부딪히기 전부터 어지러웠던 거니까...”


“그래도 병원 한 번 가보는 게 어떠세요...? 정말 꼭 한 번 가보셔야 될 거 같은데...”


“네? 병원이요? 겨우 부딪힌 걸로요? 제가요? 하하. 웃기신 분이네. 전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정 그렇게 걱정 되시면 휴대폰 번호라도 주세요. 제가 진짜 병원 강 될 정도로 아파지면 연락드릴 테니까.”



남자아이는 일어선 후 몸을 툴툴 털고는 난호에게 휴대폰을 내민다. 난호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남자아이를 바라보다 남자아이의 휴대폰을 받고는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한자리를 남겨뒀을 때 남자아이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온다. 벨 소리가 울린다. 연예인에 관심이 없는 난호도 아는 노래. 지금 인기의 절정을 찍고 있는, 좋든 나쁘든 사람들의 입에서 항상 오르내리는 아이돌의 노래다. 난호는 남자아이에게 휴대폰을 건넨다. 남자아이는 휴대폰을 받자마자 난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어간다. 난호는 걸어가는 남자아이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직... 번호 다 입력 못했는데...”



남자아이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행복한 분위기를 잔뜩 풍겨댄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발걸음 하나하나에도 행복함이 묻어 있는 것 같다. 난호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다 다시 뛰기 시작한다. ‘그냥 저런 사람인가 봐.’라는 안일한 생각과 함께 점점 더 남자아이에게서 멀어진다.



적당히 물기를 닦은 난호는 교복을 입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입는 교복이 조금 어색하지만 거울 안의 자신이 조금은 만족스럽기도 하다. 아직은 물기가 남은 머리가 찰랑거린다. 

가방을 챙기고 1층으로 내려온 난호를 본 순은 아직 덜 마른 머리를 봤지만 아무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 등교 첫날부터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식탁에 앉는 난호에게 익숙하지만 지겹지는 않은 냄새가 닿는다. 식탁 위에 밥그릇이 올려지고 순이 난호의 반대편에 앉는다. 밥을 먹기 시작하는 난호와 그것을 지켜보는 순. 순은 어릴 적의 난호를 떠올리며 새삼 커버린 난호의 모습에 조금은 뿌듯해 하며 죽은 아내를 떠올린다.

밥을 먹다 고개를 든 난호는 순과 눈이 마주친다. 순을 보자마자 아침에 자신과 부딪히고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남자아이에 대해 이야기 하려다 누군가와 부딪혔다는 이야기를 하면 분명 잔소리가 이어질 거라는 생각에 괜히 딴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런 영양가 없는 대화가 평소 대화가 그렇게 많지 않은 두 사람에게는 꽤 즐겁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순이 끄지 않고 나온 TV에서는 잘나가는 아이돌 D군과 정체불명의 연습생 A군에 관한 스캔들이 나오고 있다. 나이 차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여전히 성인과 미성년자의 연애라는 것. 그리고 갑인 아이돌과 을인 연습생의 스캔들이기에 TV는 떠들썩하다. 물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순과 난호에게까지 닿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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