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97자.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잤습니다> 12화에서 이어집니다.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잤습니다>는 14화에서 마무리됩니다. 









몸은 한결 가뿐하다. 역시 그리 오래 머물 몸살은 아니었던 거다. 그래도 영 기력이 살아나지 않는 걸 보니 그런 주제에 여파는 오래 남는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몸은 좀 괜찮냐고 물어오는 메시지에 멀쩡하다고 답장을 보낸다.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가고, 약속이 잡혔다. 자주 가는 영화관 앞. 오후 두 시. 영화는 적당히 가서 골라보는 것으로.


「아침 챙겨 먹어」

「냉장고에 간단히 챙겨 먹을 만한 거 넣어놨으니까」


이게 무슨 소리야? 그의 메시지를 받고 다급히 부엌으로 달려가 냉장고를 열어보니 과연 못 보던 음식들이 쌓여있다. 간단히 데워먹기만 하면 되는 즉석 음식부터 아무래도 쿠로오가 직접 만든 것 같은 음식까지 종류도 제법 많다.


「이게 다 뭐야?」

「언제 이런 걸 다 해놨어요?」

「너 잘 때」

「챙겨 먹어. 거르지 말고」

「제대로 안 먹으면 또 아파」


진짜로 보호자가 되어줄 셈인가? 작게 한숨을 쉬고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요」

「그래도 다 못 먹어요, 이거」


쿠로오에게선 웃는 이모티콘 하나만 날아왔다. 그런 핑계는 들어줄 수 없다는 단호함이 묻어나왔다. 츠키시마도 딱히 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냉장고에 가지런히 정리된 것 중 적당히 하나를 골라 간단한 아침상을 차렸다.


제법 맛도, 목 넘김도 좋았다. 기분도 나쁘지 않다.


적당히 차려입은 것 같지도, 그렇다고 대충 입은 것 같지도 않은 옷을 골라 입는다. 얇은 폴라티에 재킷 하나. 분명 적당한 옷이라고 생각했지만, 집을 나온 순간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찬바람이 훅 끼쳐온다. 츠키시마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옷을 갈아입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저 자신을 비웃듯 코웃음을 한 번 치고 그대로 발을 옮겼다. 어차피 오후 중엔 따뜻해질 테고, 게다가…….


걷다 보면 몸에 오르는 열로 추위를 걷어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가을의 서늘함은 독했다. 츠키시마가 남들보다 지나치게 추위를 많이 타는 탓이기도 했다. 도쿄의 가을에도 이렇게 맥을 못 추는데, 잘도 미야기에서 죽지 않고 살았군. 츠키시마는 남들보다 가을을 이르게 맞이하곤 했으니, 지금 미야기에 있었다면 홀로 겨울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처럼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미야기의 추위를 무사히 겪을 수 있었던 건 늘 츠키시마의 주변을 맴돌던, 유독 츠키시마에게 유난을 떠는 사람들의 공이 컸다. 엄마, 형, 야마구치, 배구부 선배들, 하물며 다른 학교 선배들까지. 삐딱하고 모난 자신에게 왜들 그렇게 극성인지 츠키시마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먹는 것을 좀 소홀히 한다 싶으면 여기저기서 배불러 더는 먹지 못할 정도로 먹을 것을 챙겨주었고,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면 여기저기서 외투나 머플러 따위가 날아들었다. 나이가 들면 그런 것도 자연스레 사라지겠거니 했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어울리지도 않게 자석처럼 사람을 불러 모으는 재주가 있다고, 누군가 츠키시마에게 웃으며 그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쿠로오도 그런 선배 중 한 사람이다. 이상하게 주변을 맴돌며 유난을 떨던. 굳이 제 몫의 고기를 덜어 밥 위에 얹어주고, 자기 머플러를 풀어 목에 둘러주는 그런 사람. 나이가 들어도 여기저기서 챙겨주는 것이 끊이지 않은 건 아마 그가 계속 곁에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 덕분에 츠키시마는 그의 잔소리와 오지랖을 즐기며, 도리어 저 자신에게 마음껏 소홀해질 수 있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간다고 투덜대면서도 귀찮은 내색 한 번 내지 않는 그의 관심이 좋았다. 그가 점점 자신의 응석에 익숙해지는 것도 좋았고.


“일찍 왔네요. 기다렸어요?”

“나도 방금 왔어. 차가 덜 막히더라고.”


그는 이미 영화관 입구에 서서 츠키시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당연한 듯이 따뜻한 커피를 두 개 들고서. 츠키시마 역시 익숙하게 그것을 건네받았다. 거의 식지 않은 것을 보니 방금 왔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며 쿠로오의 눈치를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다. 곧 잔소리가 쏟아질 거다.


“너 안 추워? 오늘은 나도 쌀쌀하던데.”

“안 그래도 오면서 후회하던 참이에요.”

“돌아가서 더 챙겨 입고 나오지 그랬어. 저녁엔 더 추워진다는 것 같던데.”

“그러면 늦을까 봐. 아슬아슬하게 나왔거든요.”

“뭐 볼지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늦어도 상관없잖아. 아직 컨디션도 제대로 안 돌아왔을 텐데.”

“다 나았다니까요.”

“그러다 훅 가는 거야. 이거 들고 있어 봐.”


쿠로오는 연신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자기 몫으로 들고 있던 커피까지 손에 쥐여주더니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츠키시마의 목에 꼼꼼하게 둘렀다. 애초에 이것도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알고 준비해 온 것 같다. 보온보단 장식용인 것처럼 두르고 있었으니까. 그는 츠키시마의 목이 완전히 덮이도록 여기저기 손 본 뒤에야 제 커피를 도로 가져갔다.


“잔소리쟁이.”

“누가 자꾸 말을 안 들으니까.”

“볼 거 뭐 있는지는 좀 봤어요?”

“아직. 나도 요즘 뭐 하는지 잘 몰라.”


커피를 홀짝이며 영화관에 들어갔다. 무작정 영화관에 가고 싶다는 고집으로 오기는 했으나, 아무리 시간표를 둘러봐도 볼만한 것이 딱히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영화관은 여전히 예고편부터 쾅쾅대는 소리가 귀를 울리는 블록버스터나 그리 웃기지도 않은 개그를 남발하는 B급 코미디 영화로 가득 차 있다. 모두 둘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볼 게 별로 없네.”

“그러게요.”

“어쩌지? 영화는 다음에 볼까?”

“음…….”


상영 시간표를 훑어보던 츠키시마는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조용한 거면 돼요. 뭘 보고 싶어서 오자고 한 건 아니니까.”

“으음…….”


쿠로오는 난감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그 이상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가만히 츠키시마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전광판에 흐르는 영화 제목 몇 개를 중얼거리며 하나둘 셈하더니,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뭔가를 뒤지기 시작한다. 츠키시마도 그의 곁으로 다가가 함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이거. 잔잔한 로맨스래. …일단은.”

“평은… 좋진 않네요.”

“지루하다는 걸 보니 조용하긴 하겠지만. 어때?”

“좋아. 이걸로 해요.”

“재미없어도 탓하기 없기야.”

“당신이야말로.”


인기가 없긴 없는 모양인지, 상영관도 달랑 하나에 상영 시간마저 많지 않다. 티켓을 끊은 쿠로오와 츠키시마는 로비에 앉아 전광판에 지나가는 영화 예고편에 관해 시시콜콜 떠들며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상영 시간이 다 되어 천천히 짐을 챙겨 들어가는데도 같은 관에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광고가 거의 끝날 쯤이 되어도 텅텅 빈 좌석은 좀처럼 채워지질 않았다. 이거 거의 전세 내게 생겼군. 그나마 불이 완전히 꺼지고 영화가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다급히 두 커플 정도가 들어와 저만치 먼 곳에 자리를 잡는다.


영화는 조용했다. 잔잔히 흘러가는 음악과 평화롭기 짝이 없는 영상은 제법 조화로운 편이다. 그러나 후기에 왜 그렇게 짜증이 가득 담겨있었는지, 평점은 왜 그렇게 혹독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서사는 허술하고, 인물은 매력이 없다. 오직 주인공의 내적 갈등만으로 두 시간가량의 서사를 이끌어가겠다는 듯 영화 내내 이렇다 할 큰 사건 따윈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 내적 갈등마저도 별 볼 일 없어 츠키시마에겐 그리 감흥을 주지 못했다.


주인공이 ‘어쩌지?’, ‘어쩌지?’ 하고 고민하는 사이 일은 점점 꼬이고, 갈등은 깊어져만 간다. 사실 그리 큰 문제도 아닌 것 같은데 작중 인물들은 이걸 어떻게 해야 좋으냐며 세상 진지하게 고민을 이어간다. 고민이래 봤자 그냥 진작 털어놓으면 해결될 일들이다. 이전 씬에서 이렇게 행동했으면 애초에 문제도 되지 않았을 테고. 대체 왜 저기서 갑갑하게 구는 건지 주인공의 심리를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 영화에 집중할수록, 츠키시마의 머릿속엔 짜증만 더해졌다. 잔뜩 기대했던 영화였거나, 혼자 보러 왔다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상영관을 떠났을 거다.


그러나 오늘은 애초에 영화가 목적은 아니다. 츠키시마는 스크린에서 다른 곳으로 집중을 돌리기로 했다. 오늘은 무언가를 보고 싶었다기보단, 그저 이 장소에 있고 싶었을 뿐이다. 탁 트였지만, 좌석에 고립된 채로. 귀가 웅웅 울릴 정도로 시끄럽지만, 그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그저 말없이 그와 한 공간에……. 굳이 이곳에 오자고 한 이유는 정말 그것뿐이다. 청승맞기 짝이 없는 이유라 쿠로오가 궁금해하는 눈치를 보였어도 차마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야, 난 당신이랑 데이트 같은 게 하고 싶은 거니까.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맛없는 음식을 먹어도 서로 불평을 늘어놓으며 떠들다 보면 불만이라곤 다 사라지는. 아니,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아서 뭘 해도 상관없는, 그런 거.


쿠로오와 그런 게 하고 싶어서, 츠키시마는 자꾸만 영화관에 가자고 졸랐다. 아무런 사이도 아닌 이들이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오롯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행위는 오직 이곳에서만 가능하니까. 그래서 츠키시마는 쿠로오와 함께 영화관에 오는 것을 좋아했고, 사실 아무렇게나 선택한 영화가 잔뜩 지루하기만 하고 재미없어도 좋았다. 대단히 불순한 목적이지만, 목적을 위해선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영화 평점에 별 반 개 정도는 더 줄 수 있을 것 같다.


츠키시마는 다리를 꼬아 앉으며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변을 관망하듯이. 시선을 조금 뒤로 물리니 조금만 눈을 돌려도 그의 모습이 보인다. 쓸데없이 좋은 풍경을 남발하며 화면이 뒤바뀌는 저 영화보단, 그를 관찰하는 게 훨씬 즐겁다. 츠키시마는 다시 쿠로오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그를 관찰하겠다 결심하고, 화면에 단 한 순간도 집중하지 못한 채 쿠로오의 손끝만 바라보았던 그 날처럼.


쿠로오도 이 영화엔 아마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할 거다. 그와 영화 취향만큼은 비슷한 편이라 알 수 있다. 아마 상영관을 나간 뒤엔 혹독한 평가를 쏟아내겠지. 그런데도 그는 좀처럼 스크린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심지어 영화를 보는 눈빛은 제법 진지하다. 그는 늘 그랬다. 재미없고, 지루하고, 영 덜떨어진 영화라도 허투루 보는 일이 없다. 이런저런 단점을 투덜대면서도 그는 꼭 ‘그래도 이런 건 나쁘지 않았어.’하고 꼭 한 가지씩은 좋은 평가를 덧대었다. 그런 성격인 거다. 그는 심지어 못 만든 영화에도 친절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듯이.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을 친절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이 좋다. 장난스럽고 가벼운 태도로 주변을 편안하게 만드는 그 모습도. 그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것이 좋다. 그것이 비록 모두를 향한 눈빛이고, 그것에 반해버린 츠키시마도 그의 눈빛에 반한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일지라도.


츠키시마는 영화에 조금도 집중하지 못했다. 내용이 지루해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정신을 돌릴 수 있는 것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두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특별하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영상에 집중하는 그를 관찰하는 것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비추는 스크린의 빛이 바뀔 때마다 쿠로오의 얼굴도 조금씩 변한다. 따뜻한 얼굴이었다가도 곧 차갑게 변했고, 잠시 후엔 가볍고 장난스러운 얼굴이 된다. 무엇이 지금 그의 감정을 비치는 진짜 얼굴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모습을 눈으로 좇다 보면 두 시간은 물 흐르듯 금방 지나간다.


아주 대단한 여정에 마침표라도 찍듯, 비장하게 제 마음을 전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대단원을 향해 간다. 츠키시마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시간 동안 지루하리만큼 질질 이끌려왔던 갈등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한없이 쉽게 풀어진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며 영화는 시시하기 짝이 없게 끝이 나버렸다.


영화관의 불이 켜지고, 크레딧이 오른다. 자연스레 저를 돌아보는 쿠로오와 눈이 마주쳤다.


“어땠어?”

“음……. 나쁘진 않다… 정도.”

“정말? 넌 엄청나게 혹평할 줄 알았는데. 집중을 안 한 거 아냐?”

“그렇기도 하고.”

“최근엔 영 집중을 못 하는데?”

“집중할만한 내용도 없었잖아요, 이번 건. 내용은 최악이야.”

“나쁘지 않았다며?”

“덕분에 귀는 좀 편안했으니까. 음악은 좋더라고요.”


퉁명스레 말하니 그도 별말 않고 그저 웃는다. 저만치 먼 곳에 앉아 영화를 본다기엔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있던 커플들은 불이 켜지자마자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상영관을 벗어났다. 아마 저들에게도 영화는 은밀한 곳에서 연인과 단둘이 있을 구실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거다. 뭐가 그리 급한지 황급히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쿠로오와 츠키시마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화를 보고 난 뒤의 패턴은 비슷하다. 서로 영화에 대한 평을 나누며 근처의 괜찮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술을 곁들인 식사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식사를 마치면 이전엔 술을 마시러 바나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겼었고, 어떨 땐 바로 호텔이나 누군가의 집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둘 사이엔 시시콜콜 잡다한 이야기가 오갔었다. 최근에 있었던 일들, 보았던 것, 들었던 것, 먹었던 것, 읽었던 것, 만났던 사람…….


쿠로오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그와의 대화는 편했다.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었고, 그는 어떤 이야기든 들어주었다. 쿠로오를 좋아하는 감정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좋은 대화상대였다. 그와 자게 된 이후에도 그 점만은 변함이 없었다. 대화를 나누고, 즐겁게 웃다가 분위기가 야들야들 무르익어가면 슬쩍 자리를 옮기고 몸을 겹쳤다.


그런데 오늘은……. 영…….


“음……. 츳키.”

“…네.”

“어떻게 할래? 오늘.”

“음…….”


츠키시마의 시선이 어색하게 허공을 빙빙 맴돈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오늘은 당신 집으로 가고 싶어요.”


쿠로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식사를 마친 둘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온다. 그의 집은 이곳에서 걷기에는 조금 먼 곳에 있지만, 둘은 선선하고 좋은 날씨를 핑계로 걷기로 한다. 사실은 츠키시마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쿠로오는 츠키시마의 컨디션과 추위를 걱정하지만, 츠키시마가 재차 고집을 피우자 더 말리지는 않는다.


옷을 다시 단단히 여미고 길을 걷는다. 쿠로오는 조금 앞에. 츠키시마는 조금 뒤에. 나란히 걷던 걸음에 어느새 그렇게 조금씩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둘 사이에 대화가 없기 때문이다. 저녁 공기를 마시며, 주변을 풍경을 바라보며 걷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보지만, 사실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하고 기묘한 분위기는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츠키시마는 가만히 쿠로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따금 여름 같은 미소를 짓는 주제에 가을이 퍽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여름이니, 가을이니. 지나치게 감상적인데……. 멍하니 쿠로오를 바라보던 츠키시마는 그렇게 자신을 조소한다.


어색하다. 왜 어색해졌지? 이제까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어색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심지어 사고를 치고 당황하다가 막 깨어난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조차도. 대화가 불편해진 걸까? 왜 이렇게 됐지? 왜 그의 모습이 이렇게나 서늘해 보일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말할 수 없는 게 있으니까. 그에게.


“저기, 쿠로오 씨.”

“…응?”

“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 모르겠다. 이제 다 짜증이 난다. 왜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렇게 긴 시간을 혼자 속 썩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별거 아닌가? 별거 아니긴 하지. 내가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해? 나는 술을 엄청나게 마셨었단 말이야. 기억나지 않는다고 바로 말하지 않은 거? 창피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굳이 솔직히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랬어. 그럴 수도 있잖아.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이상해? 어쩔 수 없잖아. 저 사람이 나빴어. 자꾸 착각하게 만들고, 잘해주고, 무슨 이야기든 다 들어주잖아. 저런 눈으로 보잖아. 뜬금없이 불러 세워도 그대로 서서 바라보고 귀를 기울여 주잖아. 갑자기 불러서 아무 말도 안 하고 노려보고 있는데도 독촉하나 하지 않고 기다려주잖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어? 저렇게 다정한데. 이게 친절이건, 다정이건 이제 그런 걸 따질 기력이나 인내심 같은 건 없다. 츠키시마는 마구 착각해도 된다. 왜냐하면, 모든 원인은 이 사람이 제공했으니까. 이 사람이 나빠. 그러니까 책임을 져야지. 나를 이렇게… 바보 머저리로 만든 책임을. 억지라고 해도 상관없어. 이제까지 무슨 억지든 받아줬으니까, 이것도 받아줘야지. 날 응석받이로 만든 게 누군데.


“그 사람, 만나요?”

“…에. 누구?”

“어제 나한테 오기 전에 만나러 가던… 전에 사귀었던 사람 말이에요.”

“아……. 뭐…….”

“진지하게 다시 만나기로 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그냥. 궁금하니까.”

“…….”


쿠로오의 얼굴이 건조하게 굳어간다. 츠키시마는 영화관에서 보았던, 지나치게 차가워 보이던 그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갑작스레 차가운 바람이 훅 끼쳐와 츠키시마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그러기로 한 건… 아냐.”

“그럼?”

“그러자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 그 사람에게서.”

“대답은?”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고……. 그런데 나 왜 갑자기 취조받는 거야?”

“내가 궁금하니까요. 사실 지난번에, 둘이 끌어안고 있는 걸 봤거든요.”

“…….”


츠키시마는 다시 충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성이니 뭐니 하는 건 그의 앞에선 아무런 힘도 발휘하질 못한다. 충동적으로 뱉은 추궁에 그가 당황이라도 했으면, 얼버무리기라도 했으면,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할 거면 차라리 어물쩍 넘기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쿠로오는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침묵할 뿐이다. 화가 난 듯, 불쾌한 듯한 그의 태도에 츠키시마도 덩달아 짜증이 난다.


멈춰선 몸에 파고드는 바람은 전보다 더 서늘하다. 자꾸만 몸이 떨린다. 추위는 몸을 쓸데없이 긴장시키고, 긴장된 몸은 자꾸만 여유를 잃는다. 이 상황도, 쿠로오에게도 짜증이 난다. 그에게 이런 억지밖에 부리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짜증은 충동을 몰고 온다.


이제 진짜로 다 모르겠어. 그만 참을래. 말 한마디를 제대로 하질 못해서 상황을 자꾸만 답답하게 몰고 가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되기는 싫다. 그렇게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은 서사를 지루하게 만들 뿐이다. 쿠로오는 그 지루한 주인공에게마저 진지한 눈빛을 보내주었지만, 그것도 그뿐. 그저 그렇게 흘러가듯 잊히고 말겠지. 그러긴 싫다. 우리의 사이가 지루해지고, 어색해지고, 그렇게 점점 잊혀질 바엔 차라리 먼저 전부 망쳐버리고 싶다.


“내 말은 다 들어준댔죠.”

“…그래.”

“그럼 그 사람한테 전화해서. 더 만날 수 없다고 말해요. 아니. 더 만나기 싫다고 해. 전화도 말고 메시지로 보내는 게 좋겠어.”

“하……. 츳키.”

“다 들어준다면서요.”

“너 갑자기 대체 왜 이러는…….”

“내가 어제 왜 아팠는지 알아요?”


츠키시마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말은 그저 억지일 뿐이다. 기어이 쿠로오의 입에선 한숨이 터졌다. 그가 츠키시마를 말리려는 듯, 한 발짝 다가온다. 츠키시마는 즉시 두 걸음 물러섰다. 길 한복판에서 이상한 대치가 이어졌다.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너…….”

“나 당신 때문에 아팠어요.”

“…….”

“당신 신경 쓰느라 예민해져서, 그래서 아팠다고요. 또 아프긴 싫어. 아플 때마다 당신 탓할 거야.”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도 다른 사람보다 나랑 자는 게 좋다면서요?”

“…응?”

“그럼 나랑만 자요. 섹스도 나랑 하고, 만나는 것도 나랑만 해.”


츠키시마는 이제 쿠로오의 얼굴은 바라보지도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마구 방황하며 언어가 입에 걸리는 대로 마구 뱉어댔다. 그렇게나 토해내지 못해 안으로 씹어 삼키기만 하던 말들은 한 번 물꼬가 터지자 좀처럼 멈출 수가 없다. 츠키시마가 보기에도 지금의 자신은 꼴사납다.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고 애써 제 외투를 움켜쥔 두 손은 더없이 초라했고, 마구 억지를 부리고 있는 주제에 상대방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모습은 비겁했다.


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츠키시마는 쿠로오의 발이 조금만 앞으로 움직여도 곧장 뒤로 물러섰다. 이 꼴사나운 모습을 그가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구제 불능이라고 혀를 차면서 이대로 두고 가버렸으면 좋겠어. 그러나 머릿속의 말도 안 되는 바람과는 달리 쿠로오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떠날 줄을 몰랐고, 츠키시마도 좀처럼 터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거 알아요? 나 사실 당신이랑 처음 잤던 날, 하나도 기억 못 해요.”

“뭐…….”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이 안 나요. 우리가 어쩌다 자게 됐는지, 그날 바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당신이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너 갑자기 무슨…….”

“그냥. 내 말 들어줘요. 아무 말 하지 말고!”


이제 츠키시마는 절박해졌다. 충동적으로 아무렇게나 말을 토해내다 보니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거다. 여기서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린다고 한들, 사태는 수습되지 않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진짜로 내가 다 망쳐버린 거면 어쩌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한다. 그럭저럭 괜찮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헛된 욕심을 부리다 결국 일을 그르치게 되고 마는 걸까? 나는 정말… 그의 섹스 파트너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랬었는데…….


그러나 역시 그를 독차지하고 싶다. 그의 주변에 마구 질투하고 싶었고, 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역시 만족할 수 없어. 쿠로오 테츠로는 가는 사람 막지 않고, 오는 사람도 막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런 나도 받아주지 않을까? 꼴사납더라도. 이제까지의 정이 있으니까…….


사실 츠키시마는 쿠로오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는 꿈을 수도 없이 꿨었다. 그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날이면 늘 꿨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그리고 꿈에서 쿠로오는 늘 난감하고,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츠키시마를 바라보다가 아주 어렵게 입을 연다. “미안해.” 고작 그 한마디로 끝. 꿈에서 깨어난다. 츠키시마는 그렇게 수도 없이 쿠로오에게 차였고, 차였고, 또 차였다.


“난……. 난 그러니까…….”


일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몰고 간 주제에 가장 중요한 말은 자꾸만 목에 걸려 속 시원하게 나오질 않는다. 미치겠네. 말하기 힘들어. 무서워. 몸의 떨림이 더없이 심해진다. 이것이 추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혐오 때문인지, 쿠로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질투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요. 그래도 내 마음대로 질투하고 싶어. 당신이 다른 사람 만나는 거 싫어요. 나는… 그러니까 나는…….”


쿠로오는 아무런 말이 없다. 가만히 숨을 고르는 그의 호흡조차도 몇 발자국 떨어진 이 거리에선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기분으로 날 바라보고 있을까? 대체 어떤 얼굴로. 그러나 츠키시마는 여전히,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만 차갑거나 건조해도 정말이지 견디지 못할 것만 같다.


“나는… 당신이랑 섹스 파트너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츠키시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끝내 울음까지 섞이려 하는 것을 간신히 억눌러 참아냈다. 자신이 없다. 츠키시마는 언젠가 쿠로오에게 고백하는 말도 안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이렇게 꼴사납고 비참한 모습으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지는 않았었다. 하물며 꿈속의 츠키시마조차 차이는 그 순간까지도 침착하고 덤덤했었다. 너무 싫다. 다 망했어. 나라도 질려버릴 거야, 이건.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가 없다. 츠키시마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간신히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토해냈다. 어쩌면. 아주 잘하면 그의 동정이라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하기 짝이 없는 희망을 걸고서. 어쩌면 그의 입에서 ‘미안해’가 아니라 다른 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꿈은 반대랬는데. 그렇다면 꿈속의 결말과는 조금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헛된 희망을 품고.


“나는 쿠로오 당신을… 좋아해. 정말로…….”


아. 제기랄. 기어코 눈물이 솟구쳐 오른다. 좋아한다는 말과 함께 터져 나온 눈물은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막아낼 수가 없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 덕에 쿠로오의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사귀어줬으면 좋겠어요. 나랑…….”


마지막 말은 떨림이 너무 심해 발음까지 듣기 흉할 정도로 뭉개졌다. 그와 알고 지낸 몇 년, 그 긴 세월 동안 속 안에 눌러 담은 채 꿈에서밖에 하지 못했던 말을 간신히 뱉었는데, 후련함이나 기쁨보단 압도적인 비참함과 절망이 츠키시마를 짓눌렀다.


다 끝났다. 츠키시마가 할 수 있는 말이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사형선고를 기다리듯, 쿠로오의 말을 기다린다. 그런데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무리 눈을 닦아내도 로퍼의 발등 위로 툭툭 떨어지는 눈물까지는 막아낼 수 없었다.


“난…….”


말문이 막힌 듯 침묵을 지키던 쿠로오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츠키시마도 마침내 고개를 든다. 흐린 시야 너머 보이는 그의 얼굴은 그러니까…….


마치 절망과도 같은, 당혹감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 모습은 츠키시마가 상상하던,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는 쿠로오의 모습과도 달랐고, 꿈속에서 츠키시마의 고백을 덤덤하게 듣던 모습과도 전혀 다른 것이다. 츠키시마는 그 순간, 그에게 냅다 달려가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미… 안해. 나는…….”


아. 젠장.


내가 다 망쳤어.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거, 말고요!!”


츠키시마는 끝내 눈을 질끈 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새 부르튼 눈이 따가운데도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뒤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다 망했어. 내가 다 망쳤어. 츠키시마는 작게 몸을 웅크리며 두 손을 들어 제 귀를 틀어막아 버렸다. 그래서 당황한 듯 저에게 다가오는 발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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