령선

 靈船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이 어떤 원인으로 죽고, 구제받지 못한 영혼이 그대로 배 안에 남아 바다를 표류한다는 전설 속의 배. 그 배를 만나면 재난을 당한다고 한다. 


밤중의 바다는 고요하다. 쏟아져 내릴 듯 하늘을 온통 뒤덮은 별무리는 차갑게 숨을 죽이고, 시커먼 바다는 그 속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닫힌 상자처럼 그런 밤하늘만을 반사시킬 뿐이다. 고요한 밤이다. 지루한 밤이다. 그러나 모든 바다에 떠도는 전설은 바로 그 숨죽인 밤에서부터 시작한다. 


깊은 밤 얼큰히 술에 취한 자들이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친다. 

바다는 침묵한다. 사람은 노래한다. 어느 해적선의 나이 지긋한 해적이 짭짤한 바람을 벗삼아 술잔을 기울인다. 소금기 가득한 머리카락을 정리하려고 애쓰며. 그 늙은 해적은 술판을 벌이는 젊은 해적들에게 소리친다. 자네들 그것 아는가? 

해적들은 늙은 해적을 향해 자세를 고쳐 앉는다. 아무리 거친 바다의 무법자들이라도 재미있는 이야기는 늘 좋은 술안주인 법이다. 늙은 해적은 낄낄거린다. 


이런 밤 안개가 자욱하게 끼면 안개 속에서부터 배가 한 척 튀어나온다네.

안개는 끈끈하고 음습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는 늪과도 같고, 바다는 바람 한 점 없어 유리와 같고. 안개를 뚫고 왁자지껄 선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듯 싶다가 그 흥겨움을 쫒아 안개를 헤치고 파고드는 순간 소리가 뚝 끊겨 버리지. 기이한 일이야.


해적들이 술잔을 높게 치켜들며 따라 외친다. 정말 기이한 일이야!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어! 


늙은 해적은 목을 축인다. 해적들의 술은 거칠고 독하다. 그들 자신을 꼭 빼닮은 탓이다. 그녀는 밭은 기침을 내뱉는다. 이것 봐, 젊을 적 전장을 날아다니던 때가 얻그제같은데 이제 나도 나이를 속일 수가 없어.

 아주 어린 해적이 그녀의 말을 받아친다. 그 배에서 가장 어린 해적이다. 똘망똘망 앳된 눈동자가 진주처럼 도르륵 굴러간다. 할망이 언제 전장을 날아다녔어? 선장님이 날아다녔다면 또 모를까! 다시금 한바탕 웃음소리가 배 안을 가득 채운다. 누군가는 휘파람을 휙 분다. 늙은 해적은 소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박는다. 끝까지 들어 이놈아! 

그녀는 다시금 목소리를 낮춘다.


그런데 그 배의 선장은 죽음을 속인다고 했지. 

배조차 이기지 못해. 아무리 거대하고 아름답고 강인한 배라도 죽음의 눈을 가릴 수는 없어. 갑판은 썩어 문드러지고, 밧줄에는 이끼가 끼지. 아무리 쓸고 닦아도 그토록 강력했던 대포에는 녹이 슬어버리고 아름답던 뱃머리는 부러지지.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배 저 배 옮겨 다녔지만, 예외는 없어. 모든 배는 바다에 뜨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야.

그러니 그게 모든 선장들이 원하는 죽음이야, 배와 함께 죽는 것!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그런데 그 선장은... ... . 


"전방에 안개입니다!"


갑판을 살피던 신입이 외친다. 늙은 해적의 입이 벌어진다. 채 삼키지 못한 술이 턱을 타고 뚝뚝 흘러내린다. 해적들의 고개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돌아선다. 짙은 안개가 아가리를 벌리고 바다 위를 달려오고 있었다. 분주하게 해적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술병이 이리저리 치이며 엎어지고 깨진다. 독한 알콜 냄새가 갑판에 사정없이 스며든다. 아침의 청소 당번은 꽤나 고생하리라. 갑판을 딛는 쿵쾅이는 발소리가 안개에 잡아먹힌다. 늙은 해적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더 들이키며, 그저 탄식한다. 

그래, 꼭 저런 안개가.






폐허가 된 배는 용케도 가라앉지 않고 떠 있었다.

찢어져 넝마가 된 돛은 펼쳐 보았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 말려 있었다. 돛을 말아올린 밧줄은 너덜너덜하기 짝이 없는데다 푸른 이끼가 잔뜩 끼어 미끌거렸다. 갑판이 나앉은 곳은 육안으로도 몇 군데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니,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배의 측면에는 수많은 상흔이 적나라하게 뚫려 있었고그것만으로 이 배가 겪어 왔을 고된 항해를 짐작케 만들었다. 갑판 곳곳에 부러진 해골이 굴러 다니고 있었다. 이미 배라고 불릴 수 없는 그것은 짙은 안개 속 간신히 몸을 숨긴 채 수명을 아득바득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배였을 것이다. 그것이 한창 바다를 누빌 때는. 저 부러진 뱃머리조차 한때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침과 함께 떠오르고 정오와 함께 빛나고 지는 해와 함께 바다 위로 그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을 것이다. 

거칠게 부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뱃머리 위에 유령선의 선장은 걸터앉아 있었다. 턱을 괸 채로.


해를 보지 않아 창백한 낯이 음울했다. 희뿌연 안개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늘어뜨린 빛 바랜 금발은 바다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어쩌면 그 일부는 이미 바닷속에 수장되었을지도 몰랐다. 그 선장 자신이 수장되어버리고 싶은 만큼만. 소름끼치도록 조용한 바다에 감히 입을 맞추고, 태초에 모든 선장들이 그러했듯 이 무너져 내린 배와 함께 가라앉고 싶다고 선장은 생각했다. 


고요를 찢어내며 소란이 일었다. 안개가 흐트러진다.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이 침묵을 뒤흔든다. 폐허가 된 배의 선장은 고개를 들어올린다. 

또 다시 그녀를 찾아온 손님이다. 





헬가 슈미트는 용머리호의 선장이다. 

한때 그 나이 많은 해적은 용기사라 불렸다. 용머리호의 뱃머리에 용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는 데다, 헬가 슈미트가 이끄는 그 배는 날렵하고 재빨라 언제나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항구도시에서도 헬가 슈미트와 용머리호를 모르는 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름 높은 용머리호도 오늘 끝장을 보려는 모양이었다. 


배의 선두에 서 헬가는 짙고 음울한 안개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것은 헬가의 배를 좀먹고 있었다. 돛을 있는 대로 내려도 이렇듯 바람 한 점 없는 바다 위에선 무용지물이다. 헬가는 한숨을 푹 내쉰다. 허리를 있는 대로 젖히며 탄식을 내뱉는다. 안개가 짭짤하게 혀 끝을 스친다. 지독하게 익숙한 냄새다. 


그러나 선장이 망설여서야, 배가 옳은 방향으로 향할 리 없다. 헬가는 배의 방향을 고정시키고, 전방을 예의주시하라 이른 후 돛을 최대한 펼치라 지시한다. 조금의 바람이라도 받고자 하기에. 또한 가장 늙고 노련한 해적에게는 암초가 있는지 살피라 일렀다. 그녀는 언제나 귀신 같이 배 앞의 장애물을 눈치채곤 했으니. 

그러나 늙은 해적은 술을 더 들이키며 손사래쳤다.


"소용 없수, 선장."


"소용이 없다니."


"선장,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보셨나? 깊은 밤, 잠은 오지 않고, 안개가 자욱하게 소리마저 덮어버릴 제 배는 홀린 듯 안개 속을 향한다고 하지. 안개 속에는 낡다 못해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배가 한 척 서 있어. 그 배의 이름은... ... ."


아르고노트 호야, 선장. 아르고노트 호. 

기억해 둬. 그 배의 선장은 제 배를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니까.


헬가는 그 늙은 해적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에 절어 흐리멍텅해야 할 해적의 눈이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날 믿어, 선장. 늙은 해적은 제 선장에게 속삭인다. 나를 믿어. 선장, 그녀를 만나. 당신만 할 수 있어.


용머리호의 선장은 지혜롭고 늙은 제 부하를 내려다 본다. 해적 주제에 물에 닿기를 그토록 기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그토록 사랑하는 제 부하를. 바닷속을 제 손바닥 훑듯 바라보는 자를. 그건 꼭... ... .


헬가 슈미트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 전방을 주시하던 해적들이 입을 모아 외친다.


"선장, 유령선입니다!"





선뜩한 동화 풍의 로잔헬가가 보고 싶습니다..... 글이 안 써져서 끊어 갑니다.


레몬빵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