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빌딩의 위에서 앉아 있는 가람에게로 하나의 바람이 다가온다. 차가운 바람이 가람의 뺨을 스친다. 더 이상 열대야라는 단어가, 아니 어쩌면 여름이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때가 된 것인지 한기만이 느껴지는 밤이었다. 가람은 별들이 수놓아진 밤하늘에서 고개를 돌린다.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시계탑. 달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고고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가람은 시간을 확인한다.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는 가람에게 바람이 다가왔다. 가람은 자신의 피부로 느껴지는 한기에 지나가는 여름이 조금은 그리워진다.

달빛과 네온으로 빛나던 거리 사이로 그림자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다.



쩌-억



마치 수박을 가르는 소리, 천을 찢는 소리, 날카로운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동시에 가람의 귀를 강타한다. 가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둘러본다. 괴기한 형체의 검은 실루엣들이 점점 거리를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 거리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채취를 묻히기 시작한다. 입인지, 눈인지 모를 구멍에서 보랏빛과 녹색 빛의 액체가 쏟아져 나온다. 액체들은 점점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점 덩치를 키워나간다. 모여든 액체는 어떠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검은 형체들은 더욱 모여들어 액체를 내뱉는다. 보랏빛과 녹색 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형체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저 액체의 덩어리가 모여 작은 산을 이룬 듯 보였지만, 모여든 액체들의 형태는 변해간다. 처음에는 머리, 그다음에는 몸통 그리고 팔, 다리 등을 차례대로 만들면서 사람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검은 형체들은 더 이상 액체를 뱉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다시 보랏빛과 녹색 빛의 액체를 내뱉으며,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액체들이 한데 모여 아까와 같은 형태로 변하기 시작한다. 변한 액체들은 모두가 사람의 형태가 됐지만, 생긴 것은 각각 달랐다. 가람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하품을 한다. 가람은 시간을 확인한다. 10:47이다.


“올 때가 됐는데.”



어디선가 뜨거운 기운이 몰려온다. 한 소녀가 대량의 불을 이끌고 거리로 들어선다. 소녀는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람의 형태를 한 액체들에게 뛰어든다. 앳된 인상의 소녀를 보고 가람은 인상을 찌푸린다. 소녀는 온몸에 불길을 휘감는다. 사람의 형태를 한 액체는 소녀와 대치한다. 그리고 곧 그들은 싸우기 시작한다. 소녀는 사람의 형태를 한 액체에게 달려들어 그것의 속에 손을 집어넣는다. 엄청난 불길이 둘을 감싼다. 몇 초 후 그 자리에는 소녀만 남아있는다. 가람은 자신이 위치한 곳까지 솟아오르는 엄청난 불길을 보고 꽤 놀란다. 가람은 휴대폰을 꺼내 수호자들의 목록을 확인한다. 가람은 얼마 안 가 목록에서 소녀의 얼굴을 찾아낸다. 소녀의 나이는 불과 16살이다.



“16살? 말이 돼?”



가람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가람은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약간의 시간 후 누군가 가람의 전화를 받는다. 가람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전화를 음소거로 돌린다. 가람은 귀에 들려온 통화의 신호와 함께 욕 짓거리를 내뱉는다. 몇 분가량 가람의 욕설은 지속됐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음소거를 푼다.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어?”



“이번엔 또 뭔데?”



“너 지금 시계탑 주변에 보낸 애, 나이가 몇인지는 알아?”



“한 18? 19?”



“16살이야. 이 정신 나간 인간아.”



“아 그래? 뭐, 요즘 애들은 조숙하잖아? 우리 때랑 다르니까...”



“미친 거지? 이젠 사리분별도 안되나 봐?”



이후로 얼마 간 둘의 대화는 계속된다. 물론 가람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받은 사람을 책망하는 대화였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람의 말을 넘긴다. 그런 태도가 가람의 화를 더 불러일으킨다.



“근데 넌 왜 거기 있는데? 이젠 이런 일 안 한다며.”



“하, 너 같은 인간들한테 협력 안 한다는 거였지 사람들을 다치게 놔둔다는 뜻은 아니었거든?”



“그래? 그럼 네가 거기 간 애들 좀 도와줘.”



“안 그래도 그러고 있거든? 지금 여기 온 애들 중에 성인이 한 명밖에 없는 게 말이 돼?”



“그 이야긴 더 해 봤자 의미 없는 거 너도 알잖아.”



“하... 다현아 정말 어쩌다가 그런 쓰레기들이랑 같아 진거야...”



“... 사람은 큰 일을 겪으면 어떻게든 바뀌기 마련이라잖아.”



“...”



“할 말 끝났으면 그만 전화 끊어. 난 충분히 바쁘니까.”



“앞으로 한 번만 더 이 시간에 미성년자들 출동시킨 거 내 눈에 띄면 내가 직접 추종자들 건물에 쳐들어가서 다 부숴줄 테니까.”



“그럼 있는 힘껏 막아 줄게.”



가람은 다현과의 통화를 종료한다. 다현은 한 숨을 내쉰다. 스스로 가람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가람이 자신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것도, 또 이 곳으로 함부로 쳐들어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당장 가람에 대한 생각을 잊기로 한다.

가람은 다현이 언제부터 그런 자신만 위하는 늙은이들과 한 패가 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거리에는 불을 일으키는 소녀 외에도 돌을 두른 소년, 번개를 떨어뜨리는 소년, 독을 뿜어대는 소녀 등 10명 정도가 사람의 형태를 한 액체를 없애고 있다. 가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들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그들은 가람의 존재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전투는 점점 격해졌다. 아무리 쓰러뜨려도 인간 형태를 한 액체는 끝없이 생겨난다. 거리에서 싸우는 이들은 처음에는 혼자서도 가뿐히 사람의 형태를 한 액체들을 압도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 명이 하나의 액체를 저지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들은 둘, 셋씩 모여 사람의 형태를 한 액체들과 싸워간다. 누구라도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이 지쳐가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가람 또한 그들이 지쳐가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가람은 한 숨을 내쉰다. 현장에서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경험 없는 아이들을 현장에 투입한 것에 살짝 화가 났다. 가람은 추종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관리하는 수호자들. 그것도 아직 저렇게 어린애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내키지는 않지만 도움을 주기로 한다.

가람은 턱을 괴고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인다. 검은색의 괴기한 형체들은 한 대 묶어 거리에서 싸우는 이들의 앞에 놓인다. 괴기한 형체들은 버둥거리면서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을 내뱉는다. 가람은 한 손을 살짝 쥔다. 거리에서 싸우는 이들의 눈 앞에서 그 많은 괴기한 형체들이 순식간에 터져 죽는다. 괴기한 형체가 터진 자리에서는 검은 연기가 솟아올라 흩어진다. 검은색의 괴기한 형체들이 사라지자 사람의 형태를 한 액체들은 점점 형태를 잃어간다. 이내 처음부터 거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사라진다.

가람은 거리에 있는 이들이 자신이 보여준 행동을 보고 뭔가를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거리에 있는 이들은 거리를 더 돌아다니며 구석진 곳, 빛이 닿지 않는 곳 등 곳곳을 확인한 후 괴기한 형체나 액체들이 거리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하고, 거리에서 떠나간다. 가람은 시계탑을 보았다. 11:43이다.



“올 때가 한 참 지났는데...”



가람이 말을 한 순간 시계탑 주변의 하늘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내 하늘에는 하나의 굵은 선이 생긴다. 그 선은 마치 공간을 찢는 듯 보인다. 선은 점점 커지더니 하나의 투박한 원이 되었고, 검고 붉은색의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가람은 그 투박한 원 앞으로 날아간다.



가람은 투박한 원과 마주한다.



하늘에 생긴 투박한 원은 가람보다 몇십 배는 커 보인다. 가람은 능력을 사용해 떨어지는 액체가 거리에 닿지 않게 하고 있다. 그때였다. 여러 목소리의 속삭임이 들리더니, 투박한 원안에서 커다란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커다란 눈은 밖을 살펴보는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 이내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투박한 원을 잡은 손이 나타난다. 그 손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원을 점점 찢으며 크게 만들어 간다. 이내 늑대의 머리와 비슷한 형체가 투박한 원 밖으로 기어 나온다. 가람은 ‘요즘은 갈수록 이상하게 생긴 것들이 튀어나온다.’라는 생각을 하며 늑대 머리를 가진 형태에게 다가간다.

원 밖으로 완전히 나온 형체는 늑대의 머리를 가진 채 6개의 팔을 휘저으며 검붉은 액체를 뿜어낸다. 가람의 코에는 씁쓸한 향기가 살짝 멤 돈다. 늑대의 머리를 가진 형체는 자신을 바라보며 하늘에 떠있는 가람을 발견하고는 굉음을 내지른다. 가람은 귀가 아픈 듯 잠시 인상을 쓰더니 손을 들어 올려 늑대의 머리를 한 형체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손을 점점 모으며 포갠다. 그 순간 늑대의 머리는 몸과 분리됐다. 그리고 곧 몸통과 함께 구겨졌다. 가람은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머리보다 작게 구겨버린 늑대의 머리를 한 형체를 투박한 원 안으로 밀어 넣는다. 가람은 붙잡고 있는 대량의 검붉은 액체들을 아주 작게 만든다. 하늘은 언제 검붉은 액체로 뒤덮였냐는 듯 맑아진다.

투박한 원 안에서는 이상한 속삭임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지만, 가람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무표정하게 투박한 원을 바라보고 있는다.



몇 분 후. 12:00



투박한 원 안에서는 한 소년이 나왔다. 소년은 가쁜 숨을 내쉬는 것, 몸에 검붉은 액체를 여기저기 묻힌 것 외에는 가람과 같은 평범한 인간처럼 보인다. 단지 가람보다 키가 좀 더 크고, 깔끔한 정장 차림인 것이 가람과의 차이라면 차이다. 투박한 원 밖으로 나온 소년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는 입을 연다.



“인간들이여! 보아라! 너희의 멸망을 가지고 내가 여기에...!”



말을 이어가던 소년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뭔가를 찾는 듯하다. 가람은 크게 하품을 하며 소년에게로 다가간다. 소년은 가람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본다. 이내 자신의 손을 뻗었다. 소년의 어깨와 팔을 타고 검붉은 액체들이 가람을 향한다. 가람은 지겹다는 듯 두 손을 모은다. 소년의 팔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액체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밑으로 떨어진다. 소년은 앞으로 조금 나아간다. 그리곤 손을 뻗는다. 소년과 검붉은 액체는 마치 어떠한 보이지 않는 구에 갇힌 듯 보인다. 가람은 소년에게서 검붉은 액체를 뽑아내며 소년과 분리시킨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한 참 기다렸잖아.”



“무엄하다! 니 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모르지, 대충 그림자 어쩌고 놈들 중 하나겠지.”



“그림자? 하! 인간들이란, 잘 들어라 나는!”



“시끄러워.”



소년의 팔과 다리가 끔찍하게 꺾인다. 소년은 울부짖는다. 가람은 신기한 표정을 하며 소년을 바라본다.



“뭐야? 고통도 느껴? 너 보통 놈은 아니구나? 설마 아까 나온 개도 네가 만든 거야?”



소년의 신체에서는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소년은 숨을 헐떡인다. 가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본다. 검붉은 액체는 뽑히듯, 여전히 소년과 분리되고 있다.



“대답해.”



소년의 부러진 팔과 다리는 누군가 당기는 듯 팽팽하게 당겨진다. 소년은 더 크게 비명을 내지른다. 금방이라도 소년의 팔과 다리가 몸통에서 떨어질 듯이 보인다. 가람은 소년의 대답을 기다린다. 하지만 소년은 대답을 할 수 있어 보이는 상태가 아니다. 소년은 가람을 바라보며 눈에서 검붉은 액체를 흘린다. 그마저도 가람이 소년에게서 따로 분리시킨다.

소년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다. 소년은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인다. 가람은 잠시 눈을 감고, 양반 자세를 취한다. 무언가 깊이 생각을 하는 듯 보인다. 가람이 손 짓을 몇 번 하더니 투박한 원은 접혀 들어 그 자리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듯 사라진다. 투박한 원이 있던 자리를 지켜보던 소년이 다시 가람을 쳐다본다. 가람은 소년을 바라본다.



“이름이 뭐지?”



“카.. 카 엘리고...”



소년은 두려운 듯 고개를 푹 숙여 아래를 바라본다. 가람은 한 숨을 내뱉고 눈을 위로 굴린 다음 검은 액체들을 소년의 주위로 올려 보낸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떠돌던 작게 만든 검붉은 액체 또한 소년의 주변에 푼다. 소년의 육체는 순식간에 검붉은 액체들을 빨아들이더니, 점점 회복된다. 가람은 손짓을 해 소년의 팔과 다리를 풀어주고, 자신의 바로 앞으로 끌어온다.



“좋아, 카엘. 앞으로 넌 날 좀 도와줘야겠다. 내가 궁금한 게 좀 있거든.”



가람과 마주한 소년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일렁인다. 가람은 처음으로 소년에게 미소를 보인다. 마주한 둘의 사이에는 차가운 바람만이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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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들 = 영웅집단

추종자들 = 수호자들을 관리하는 집단

조력자들  = 추종자들, 수호자들의 간부집단 = 현재 다현의 위치 : 대부분의 경우 직접 현장에 나서지 않음. 

가람 = 전직 수호자 최강의 능력자. 현재는 자취를 감춘 채 살아감.

그림자들 = 어느 순간부터 지상에 나타나는 괴기한 검은 형체 그들이 내 뿜는 액체, 투박한 원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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