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는 이 시각, 매우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며칠 전 알게 된 이가 아프다고 손수 수레까지 끌어와 누울 자리를 봐주는 정국의 모습이 꽤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한참동안이나 심심했던 태는 순간 원인 모를 장난기가 동하였다.


  "무슨 짓을 했기에 내 아이의 상태가 이틀이 지나도록 저러한가?"

  "자네 아이 아닐세. 이미 다 끝난 얘긴 줄 알았는데."


  발끈하는 정국의 목소리에 태는 제 허벅지를 손으로 치며 껄껄 웃었다. 


  "자네 표정이 지금 어떠한지 아는가? 대체 저 아이가 자네에게 무슨 짓을 한 게야. 아님, 긴긴밤 저렇게 끙끙 앓을 정도로 거칠게 안은 게야?"

  "쓸데없는 소리. 그런 거 아닐세."

  "그런 사람이 관직도 필요 없다, 녹도 필요 없다. 그저 저 아이만 달라, 그랬단 말이지."

  "귀한... 향인이 아닌가. 그 정도는 내어 놔야 하는 줄 알았지. 향인이라고는 하나 사내인데, 윗사람들의 감상품이 되기엔 처지가 좀 가엾어 그러네."

  "흥, 자네에게 내 향인 하나 못 내어줄까, 그래도 저 아이는 어쩐지 좀 내어주기가 마땅찮은데.."


  정국의 미간에 금세 굵직한 주름이 패인다. 그만 멈추어야 함을 알면서도 태는 이 재미를 끊기가 힘들었다. 


  "내 조금만 더 고민해 봄 세. 네 아이 모두 그 향기가 달라 참으로 고민이 되는구먼."

  "...."

  "다른 아이들 향기는 어떨지 자넨 궁금하지도 않은가?"

  "그런 이유로 저이를 데려가려 하는 게 아닐세."

  "그런 이유, 무어. 아! 목덜미에 코를 박고 좆을 처박는 그런 거 말인가."


  두 눈을 반짝이며 정국의 반응을 살피는 태의 태도에 정국이 매섭게 눈을 치켜 뜬다.


  "..부끄러운 줄 아시게."

  "이보게, 친우. 그건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닐세. 사내라 함은 당연 지닐 본능적인 욕망 아닌가."

  "내 자네와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군."

  "왜, 정녕 자넨 그 실한 좆을 저이 안에 처넣고 난향 가득 소리 지르게 만들고 싶지 않단 말인가."


  정국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식는다. 아하... 저이 단단히 화가 났군. 태는 죽마고우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여 피식 괜한 웃음이 나왔다.


  "근처에만 가도 난향이 진동을 하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자네에게만 말해 주자면, 네 아이 가운데 저 아이 향이 가장 진하고 고고하다네."


  태는 은밀한 비밀을 말해주듯 정국 가까이 몸을 숙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 내 저이가 아깝지 않을 리가! 내 고뇌를 자네도 좀 이해해 주게. 하아, 이를 어찌하면 좋을고.." 


  태가 호탕하게 웃으며 제 말의 속도를 올렸다. 정국은 순간 제 벗의 못된 버릇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불쑥 볼 벽을 혀로 쓸어냈다. 







애절만가(愛切滿歌)

 w. 딜라일라 







  

  황제의 논공행상이 끝나고 높은 자리들의 연회가 한창이다. 벅적지근한 연회 따윈 딱 질색이나 잠시 후 보자던 태의 눈빛이 생각나 정국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몸은 좀 괜찮아졌을까. 정국의 머릿속에 힘없이 주저앉던 가련한 눈동자와 살기 등등한 시퍼런 눈동자가 순차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저를 경계하던 불안한 눈동자로 생각이 번지던 찰라 태자전하의 입궁 소식이 커다랗게 울려 퍼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태자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치레를 한 태가 곧바로 정국을 향해 걸어왔다. 


  "역시 큰 선물을 한 보람이 있구려."


  장난스런 표정으로 굳이 내지 않아도 될 생색을 낸다. 정국은 핏 하고 웃으며 태자의 뒤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봉토도 관직도 내 제대로 챙겼네. 진의 적귀, 명색이 내 하나뿐인 친우인데 향인 하나 때문에 그 체면을 깎을 수야 없지."

  "태자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아하하하, 되었네. 되었어. 내 그리 인사 받고자 한 일은 아니니."


  정국의 등을 호되게 때리며 태가 껄껄 웃어댔다. 


  "그래도 내 애를 쓰긴 썼네. 뭣도 안 한 사람들이 어찌나 그렇게 욕심들만 그득한지. 아마 하루, 이틀 중으로 만나볼 수 있을걸세. 잊지 말게. 좋은 경험 하시면 꼭 나에게도 일러주고."

  "자네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어찌 이리 변한 게 없는가?"

  "나만 변하지 않았는가, 자네도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 벽창호인 성격은 그대로이지 않는가."

  "파락호인 자네보담야 낫네."

  "어허! 감히 황실의 태자에게 파락호라니."

  "이럴 때만 태자인가?"

  "내 자네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 고자는 아닌 듯한데, 아니... 혹시 내가 모르는 새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겐가."


  태가 유난스레 근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정국의 아랫도리와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 얼굴 보았으니 되었지. 나는 그만 일어나 보려네."

  "아하하하, 내가 잘못했네. 내 자네만큼 놀리는 재미가 있는 이를 보지 못해 그런 거이니 너그러이 용서하게."


  정국은 어릴 때와 변한 바라곤 저 커다란 덩치 뿐인 친우를 바라보고 어쩔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민이 정신을 차린 건 진국에 도착하고도 하루가 지난 오밤중이었다. 귀한 향인이라 그런지 나라에서는 극진히 지민의 병세를 보살펴주었고, 본디 시간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 그런 고질병이기도 했다. 

  말을 걸어주는 이도 묻는 말에 대답해 주는 이도 전혀 없다. 이미 주인이 있는 물건에 손대지 않는 사람들처럼 나인들은 철저히 전리품으로서 저희가 해야 할 일만을 해 나갈 뿐이었다. 

  그러기를 여러 날, 나인들이 아침부터 분주하게 지민을 씻기고 치장할 준비를 한다.





  "..이보시게,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하네."


  지민이 당혹스런 눈으로 침방 나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물러가는 침방 나인을 다시 한번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 정국은 황제로부터 하사품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막대한 하사품에 식솔을 비롯한 노비들까지 구경이 늘어졌는데, 순간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하사품 중 가장 값진 품목인 향인 하나가 가마에서 내리지 않은 까닭이었다. 당황한 관리가 가마의 문을 열려 했지만 안에서 부여잡고 버티는지 도무지 열리지가 않는다. 점차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려는 찰나 결국 정국 본인이 가마 곁으로 다가갔다. 


  "나다. 거두어 달라고 한 것은 네 놈이 아니더냐."


  황당해하는 정국의 목소리에 잠시 후 가마의 문이 살짝 열린다. 하지만 더 이상 열리지 않고 멈춰 있는 문에 인내심을 상실한 정국이 고개를 숙여 가마 안을 들여다본다.


  "이게 무슨.."


  정국은 순간 말을 잃었다. 고개를 숙이자마자 느껴지는 그윽한 난향에 머리가 아찔해진 것도 잠시, 눈 앞에 펼쳐진 지민의 모습은 감미로운 난향마저도 지워버릴 만큼 강렬한 자극이었기 때문이다.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달빛으로 짠 듯한 고운 여인의 옷을 입은 지민이 비단 여러 폭에 겹겹이 쌓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얼굴을 붉혔다. 매끄러운 상앗빛 피부에 물먹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인다.


  "괜찮다. 나오거라."


  정국은 그리 말하고는 위에 걸친 제 쪽빛 도포를 재빨리 벗어 쥐었다. 


  "잠시 모두 뒤돌아 서거라."


  위엄있는 목소리로 명을 내리고는 가마에서 내리는 지민의 어깨 위에 바로 제 도포를 둘러 씌웠다. 고약한 친우가 이렇게 저를 골리는가. 정국은 껄껄대며 웃고 있을 태를 생각하곤 제 옷자락 속에 들어온 고운 이를 힘주어 당겨 안았다.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준비된 옷이 이것 밖에 없다고 하여.."


  정국에게 어깨를 감긴 채 종종걸음으로 처소에 들어선 지민이 변명하듯 황급히 말했다. 달싹이는 붉은 입술의 혈색이 보기에 나쁘지 않다.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놓으라 일러두마."


  정국은 지민과 채 눈을 맞추지 못하고 다급히 별채를 빠져나왔다. 어깨에서 떨어진 손끝에 울렁대는 단향만이 아련히 스미었다.








  






  칠흑 같은 검은 눈이 저를 내려다본다. 아, 아... 소리를 내려 입을 벌렸지만 목구멍 언저리가 막히기라도 한 듯 바람빠진 쉰소리만 겨우 새어 나올 뿐이었다. 검은 눈동자는 금세 주위로 번져나가 온 세상을 검게 만들었다. 아니야... 이건 붉은 빛. 아니, 검붉은 빛. 아버님... 아버님..아아... 나의 아우야!

  지민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쭈볏 섰다. 온몸에 드는 오한에 지민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이불을 끌어와 턱 끝까지 둘러썼다. 한번 깨어난 잠은 쉽사리 다시 들 수 없었다. 



  한편 정국은 빠른 걸음으로 지민의 처소에서 빠져나왔다. 설명할 수 없는 제 모습에 순간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차피 제 것인데, 밤손님 담을 넘듯 몰래 침소에 들어와 향기만 훔쳐 가는 모양새라니. 

  지민이 제집에 들어온 지 벌써 이레인데 정국은 애써 지민을 찾지 않았다. 허! 정국은 허탈하게 웃으며 두 손을 올려 마른세수를 하였다. 갑자기 지민이 눈을 떴을 때,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을 가리고 말았다. 뭐라 설명을 할고... 이렇게 실없이 들킬 바에야 그냥 제대로 훔쳐보기라도 할 것을. 면피 두꺼운 밤손님이 아직은 시린 밤기운을 업고 훌쩍 문지방을 넘었다.  





  늦은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날이 밝도록 그칠 줄을 모른다. 지민은 대청마루에 앉아 기와의 끝에서 떨어져 내리는 비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패전국의 노예, 망국의 백성, 황제의 하사품, 대장군의 전리품. 여느 귀족 부럽지 않게 고운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진국에서의 지민의 신분은 엄밀히 말하자면 노비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을까... 다른 식솔들은... 그리고 윤이 형님..

  떨어지는 낙숫물에 주춧돌 일부가 움푹 패였다. 지민은 가라앉은 눈으로 주춧돌에 온몸을 부수며 떨어지는 물방울을 멍하니 응시하였다. 이 물방울처럼 살고 싶었는데... 형님,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뭘 그리 보고 있는 게냐."


  말도 안 되는 기시감에 지민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 내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하구나."


  순간 지민의 눈망울이 빗물에 번진 것처럼 울멍해진다. 그럴 리가 없지. 여기 있을 리가 없지..


  "또 어디가 안 좋은 게야, 어찌 또 안색이 그 모양이야."


  정국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살짝 혀를 찼다. 제가 그리도 신경 써 살펴보라 일렀거늘, 작은 몸이 안 본 새 더 작아진 것만 같다. 


  "아니 되겠다. 내 앞으로는 한 끼 정도는 너와 같이 겸상을 해야겠구나. 제대로 먹긴 하는 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지 원,"

  "아닙니다. 과분하게 챙김 받고 있습니다."

  "흐응... 그럼 네 스스로 잘 먹지 않았다는 게 아니더냐."

  "그건..."

 

  지민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정국은 그런 지민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맘 편히 지낸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

  "...."

  "그래도 어찌하겠느냐.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어차피 일어난 일이라면...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는 게 속이라도 편하지 않겠느냐."

  "나으리.."

  "응?"

 

  저를 향해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 묻었다. 정국은 다정히 물음에 응하며 시선을 마주했다.


  "왜 이리 제게 잘해 주십니까."


  생각지 못한 맹랑한 질문에 정국은 잠시 멈칫했다. 그렇지, 네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매우 다정했구나. 지민을 데려온 이후로 몇 날 며칠을 홀로 묻고 답했던 질문이었다. 


  "글쎄, 왜일까.."


  정국은 지민을 자리에 앉히며 저도 그 옆에 털썩 앉았다. 어느새 지난한 겨울이 끝나가는지, 내리는 빗줄기에서 향긋한 봄내음이 풍긴다.


  "못난 얼굴이 안 되어 보여서 그런가."


  정국은 복잡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지민을 돌아보며 씩 하고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

tmi 1. 죽마고우인 둘은 서로에 대해 매우 잘 알아요. 태형은 제가 지민의 난향을 이미 알고 있다는 데서 정국이 화가 났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실임! 그런데 정국이는 지금 자기가 기분이 안좋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걸로.

enfp 자라나는 연성러

딜라일라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