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서점에서 책 읽고 있는데, 책 옆에 누군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탁, 내려놓았다. 뜬금없이 봉변당한 기분에 고갤 들고 쳐다보니, 아는 애다.




 " 잘 숨어다닌다? "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 슬슬 바닥을 보이던 내 커피와 그가 준 새 커피를 번갈아보았다. 내가 좀 날렵해. 너야말로 용케 찾았다?

 그에 대해 간단한 호구조사를 해보자면, 일단 요새 중국에서 돈을 끌어모으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아이돌로써 첫 주연으로 찍었던 웹드라마가 대박을 치면서 연기에도 발을 들인 내 전애인이다. 다른 건 다 필요없다. 내 '전애인'이라는 게 중요하다.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걸 여전히 잊지못한건지 고소한 원두 냄새가 내 코를 간질거린다. 근처 행사에 왔다가 잠깐 빠져나온거라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뭘 원하는데?




 " 다시 돌아와. "

 " 뭘 떠나봐야 돌아가길 하지. "

 " 헤어지자며. "

 " 생각해봐. 우리가 제대로 시작한 적이나 있니? 네가 구라치는 바람에 우린 아직 시작도 못한 걸로 알고 있는데. "




 김지수의 미간이 있는대로 찌푸려진다. 눈이 참 예쁜 아이였다. 밤에 보나 낮에 보나 항상 눈 속에 억만 개의 별을 담고 있는 그였다. 한 때는 저 눈동자가 너무 예뻐 휴대폰 사진첩에 담아놓은 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 어린 게 왜 싫어. 어제까지 스물여덟인 애가 갑자기 스물넷이라 하니 성욕이 확 식어? 그게 아님, 내가 여자라서 안 되는거야? 솔직히 말해봐. 너 과거에 여자 만났다는 거 다 뻥이지. "

 " 내가 남자만 좋아했음 널 만났겠니? "

 "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거야. 이해가. 내가 오 대표보다 열 살이나 어린데 대체 뭐가 꿇려! "




 목소리 낮춰. 보는 눈 많아. 




 " 너 오 대표보다 돈 많아? "

 " 주식 싹 끌어모으면 똑같아. "

 " 그 사람은 부동산 펀드까지 해. "

 " 투기겠지. "

 " 그래, 그 아파트 다 내 것도 아닌데 '투기'라 하자. 아무튼 이제 우리 사이에 오세훈이 들어올 자린 없고, 너와 내가 다시 시작할 계기도 이유도 뭣도 없어. 그러니 돌아가. "




 시작부터 꼬였던 관계다. 사단 회식이 있었던 나와 친구들을 만났던 네가 우연히 같은 고기집에서 밥을 먹었던 게 화근이었다. 그날 술에 취하는 게 아니었다. 담배를 필 거면 곱게 피고 들어가야 했다. 그 추운날 식당 밖에서 잔뜩 술에 취한 남자애들과 시비붙은 네가 걱정되서, 혹여나 누군지도 모르는 네가 맞으면 어떡하나 불안해서, 상대는 남자 셋인데 너넨 고작 여자 둘이라서, 별 같잖은 이유를 다 대며 네게 다가가 같이 싸워주었다. 낮에 작업하다 잠시 넣어놨던 커터칼이 주머니 안에서 잡히길래 그걸로 정신없이 위협하자 남자들은 '또라이 같은 년을 다 보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리곤 그때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네가 뒤돌아서는 날 붙잡아 대뜸 휴대폰을 내밀었다.


 ' 인사는 생략하고, 우리 만납시다. 나 여자 좋아해요. 그쪽은. '

 ' 그쪽이 누군..... '

 ' 나 잘해. '

 ' 그래? 그럼 만나. '


 예상치도 못했던 속궁합이 너무 잘 맞아서, 그냥 댄스학원 다니며 시간 날로 보낸다던 네 한량 기질이 마음에 들어서, 온전히 나만 바라보는 네가 귀여워서, 그래서 만났다. 큰 이유는 없었다. 그땐 네가 대형기획사의 아이돌 데뷔조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며 네 나이가 스물넷인지는 더더욱 몰랐으니까.




 " 자야야. "

 " '언니',라고 해. 이 나이 먹어 꼰대질 하기 싫지만, 그래도 여덟 살이나 어린 애한테 이름 막 불리고싶진 않다. "

 " 사랑해. "

 " 그래, 그런 고백들 다 우습고 유치하지. 머리 아파. 가라. "




 그런데 하루는 네가 분위기를 잡더니 내게 그러는 게 아닌가. 사실 나 스물넷이야. 그리고 곧 데뷔해.

 그렇게 우린 헤어졌다. 일방적인 이별이었다. 선고자는 나였다. 이유는, 너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별 거 아니다. 우린 별 거 아닌 이유로 만났고 별 거 아닌 이유로 헤어졌다. 그러니 별 거 아닌 인연으로 쉽게 정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치않다.




 " 내가 죽어도 그럴래? "

 " 말이 되는 소릴 해. 너 안 죽어. "

 " 못할 줄 알아? "

 " 너 못해. 네가 속세에 얼마나 미련이 많은데. 너 뺏길 거 많잖아. 태어나면서부터 다이아 물고 자란 애가 그거 다 포기하고 나한테 온다고? 그럼 내가 뭐, 네 희생 정신에 박수라도 칠 것 같니. "

 " ...... "

 " 지수야. 너가 돈을 포기하잖아. 그거 다 버리고 나한테 오잖아. 그럼 더 매력없다? 너가 어리고 멋지기 전에, 돈이 많은 것도 매력의 일부가 돼. 세상 사는 게 그래. 좆 같고 환멸나도 그게 세상 이치야. "

 " ...... "

 " 그러니 울지말고, 누구 때문에 죽겠단 소리도 하지말고. 지금 네가 갖고있는 것들,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남을 그 돈들, 다 누리면서 살아. 그래도 아쉬운 세상이야. "




 너의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어떻게 그리 쉽게 정리를 해. 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네 손을 잡고 달랬다. 아니, 복수다 싶은 마음에 더 덤덤한 투로 널 꼬집고 할퀴었다. 그렇게 내가 받은 충격에 반의 반만이라도 돌려받길 바랬다.




 " 참.. 사는 게 뜻대로 되지않아. 그치? "
























 " 나 보고싶어서 일찍 왔구나. "

 " 지랄마 진짜. "




 나재민과 있을 미팅 때문에 일찍 나왔더니, 사무실에서 잔 건지 오세훈의 차림새는 어느 때보다 후줄근했다. 주말인지라 직원의 옷차림도 편했다. 대표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책상에 두 다리를 뻗고 누워있던 그가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그러곤 뒤늦게 알아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많은 곳에서 보내온 영화 홍보 자료들과 사단 내의 영화 자료들로 엉망인 테이블을 대충 치우던 그에게 커피나 내려오라며 쇼파에 털썩 앉았다. 이에 그는 자기가 그거 하나 못해주겠냐며 서둘러 커피머신의 전원을 켰다.




 " 하와이안 코나,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아, 케냐도 있어. "

 " 케냐. "

 " 커피 취향도 나랑 맞기까지. "




 다 내려진 커피 옆으로 마카롱 상자도 건네길래 가만히 쳐다봤다. 단 거 싫어하는 사람이 마카롱은 왜 갖고있나 싶어 궁금하던 찰나 묻기도 전에 술술 뱉는다. 선물로 들어온건데 너무 달더라고. 까봤더니 역시나 먹지도 않았다. 유자차도 달아서 못 마시는 양반이 마카롱은 어떻게 먹나 했다.




 " 먹지도 않아놓고 단 건 어떻게 안대. "

 " 아는 맛이 무섭거든. "

 " 아 그러세요. "




내 옆에 가까이 앉은 그가 자기 몫의 커피를 마시며 웃었다. 안 떨어질래? 숨소리마저 능글맞은 그에게 퉁명스레 말해도, 그는 떨어지는 척하며 다시 슬쩍 옆으로 다가와 붙어앉았다. 그와 연애할 땐, 이렇게 애정을 갈구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정신 아니었지만. 




 " 곧 서울도 눈 온다던데. "

 " 장 배우 춥다고 난리치겠네. "

 " 감기 조심해야할텐데, 너. "




 그가 내 머릿결을 말없이 바라본다. 만지기라도 하면 곧바로 내 입에서 쓴 소리가 나올까봐 쳐다보기만 하는데도 그 눈빛이 노골적이라 커피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맛 없는 커피도 아니었는데, 그와 내가 헤어진지 벌써 십 년도 더 지났는데, 오세훈의 유일한 능력이라면 사소한 행동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입으로 넘어간 커피가 코로 나올 것만 같았다.




 " 너 감기 잘 걸리잖아. "

 " 양파즙 먹어. "

 " 운동도 안 하고, 밥도 잘 안 먹고. "

 " 운동하고 밥도 잘 먹어. "

 " 그럼 결혼할래? "




 그를 쳐다봤다. 대낮부터 취한건가.




 " 이왕 재혼할거면 너랑 하고싶어서. "

 " 재혼을 왜 하는데. 해줄 사람이나 있어? "

 " 글쎄. 아직 너말곤 딱히 생각해본 사람이 없는데. "

 " 박 감독 곧 적금 만기랜다. 둘이 해. "




 그가 픽 웃는다. 그러곤 은근슬쩍 어깨에 고갤 부비려하길래 재빨리 이마를 밀어버렸다. NO TOUCH.




 " 자야야. "

 " 왜. "

 " 경환이랑 아직도 연락하냐. "

 " 걔가 누구야. "

 " 나 만나기 전에 만났던 애 있잖아. 기타 동아리 회장이었던 애. "

 " 그런 앨 만났었나. "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먹을 불끈 쥔다. 그러곤 조용히 중얼거린다. 하나 클리어.




 " 현호는. "

 " 걘 또 누구야. "

 " 미경 누나는? "

 " 그 언니 결혼했잖아. 나 애 돌잔치도 갔어. "

 " 이혼 안 한대? "

 " 미쳤어? "

 " 그럼 둘에 셋 해결. 너가 또 누굴 만났더라.. "




 가만히 생각해보는데 밖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내 손을 잡고있던 그의 손을 쳐냈다. 됐어, 옛날 얘기해서 뭐하냐. 밖에선 직원이 '나재민씨 왔는데 들여보낼까요' 라며 그에게 물었다. 오세훈은 대답도 하지않고 막 일어나려던 나의 손목을 다급히 붙잡았다.




 " 아파트 줄게. "

 " 그것만 줘. "

 " 안 돼. 나도 가져가. "

 " 그럼 싫어. "




 그가 기운 빠진듯 웃는다.




 " 와.. 나 죽으면 사망보험금 네가 다 가져도? "

 " 돈만 줘. 너 빼고. "

 " 나 산도 있어. 제작년에 농지변경해서 값 꽤 나간다. 그래도 싫어? "

 " 좋아. 나 속물주의라 돈 좋아해. 그거 다 받을테니 '오세훈'만 빼고 달라니까? "

 "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야, 나도 몫이 있어야 딜을 하지. "




 뒤늦게 그가 책상을 똑똑 두드리며 말했다.




 " 나재민씨 들여보내요. "




 오세훈은 두고보자며 앙칼진 눈으로 날 노려봤다. 나재민이 안으로 들어왔고, 오디션 때보단 덜 긴장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테스트를 하기 전 먼저 이 영화에 참여하고 싶은 이유를 물었다. 뭐가 그렇게 끌려서 메일까지 돌렸는지 궁금했다. 연기에 대한 절박함인건지, 아님 그저 잠깐 밀려온 흥미인건지 알고 싶었다.

 장태영 배우님의 숨결과 목소리, 눈빛, 모든 걸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 이유는 그뿐입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장 배우 부를 걸 그랬네.. "




 나재민 또한 이유는 별 거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장태영의 팬이었고, 장태영의 드라마를 보며 장태영의 사진을 갖고 다녔다. 아이돌 데뷔를 한 것도 장태영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장태영은 모르겠지만.

 역시나 오늘의 테스트 연기도 부족함이 없었다. 군더더기 하나없이 깔끔한 연기에 오세훈은 믿을 수가 없는지 다시 한 번 물었다. 회사에서 연기 배우고 왔어요? 그리고 나재민의 대답은 똑같았다. 아뇨, 따로 배운 적 없습니다. 굳이 배웠다고 한다면, 장태영 배우님의 드라마와 영화를 본 것 뿐입니다.

 장태영은 알고 있을까. 자기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남자애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자길 흠모해왔다는 걸.

 시나리오 중 한 부분이었던 대사를 홀로 곱씹더니, 갑자기 두 눈이 벌게져 엉엉 우는 걸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뭐 이런 물건이 다 있지. 이런 별종이 왜 이제서야 나타난거지. 시발 왜 하필 아이돌로 데뷔한거야? 나라가 망조길에 들어 모든 걸 뺏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제 새어머니인 중전 하나만 바라보며 자리까지 내려놓는 세자의 단심을 오직 목소리와 눈빛 하나로 증명해냈다. 결국 난 녀석에게 백기를 들어야만 했다.




 " 작가님. 저 잘해요. "

 " 뭘 잘하는데. "

 " 뭐든요. 시키시는 건 다 할게요. "




 녀석이 이겼음을 인정한 순간 떠날 채비를 하던 내 앞을 나재민이 막아섰다.




 " 길 막지마. 버르장 머리 없는 것도 컨셉이야? "

 " 컨셉이 아니라 어필이요. "

 " 대체 지금 뭘 어필하는 중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

 " 섹스 어필이요. "




 오세훈의 눈썹이 씰룩거린다.




 " 돌았니? "




 섹스어필. 오세훈의 미간도 좁아졌다.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다 씨익 웃으며 '촬영 잡히는 날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고 먼저 떠나는 나재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 할 말을 잃었다. 문이 탁, 닫히고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오세훈이 한 마디 했다.




 " 쟨 왜 너한테 섹스어필을 하는건데? "

 " 낸들 알아. "



























 왕에게 모욕당하는 장면이었다. 태영의 눈꺼풀이 미약하게 떨리는 걸 잡아내자, 뒤에 있던 스탭이 장난 아니라며 놀라워했다. 이에 찬열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컷, 하자마자 태영은 긴장이 풀려 긴 숨을 내뱉었다.




 " 막내야, 장태영이야. "




 태영이 자신의 연기에 후회가 없는만큼, 사단 사람들도 그의 연기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예민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던 찬열은 좀더 그 믿음이 견고했다. 태영과 찬열 사이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흐름으로 상대를 알아차리는 쿵짝이 있었다. 태영이 컨디션 좋은 날 훨훨 날아다니면 찬열은 더 높이 날 수 있도록 더 큰 날개를 달아주었다. 자야의 뮤즈가 태영이듯, 찬열의 페르소나도 '장태영'이었다.

 찬열의 옆에서 모니터링을 하던 중 태영의 눈엔 뭔가 아쉬운 게 발견된듯 했다. 감독님, 한 번만 더 가면 안 될까요. 몇 년을 포커페이스로 살아온 사람인데 마지막에 말 한 마디로 눈꺼풀 떨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뭐든 완벽하지 않겠냐만, 태영이 아쉽다하니 찬열은 흔쾌히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꺼풀을 떠는 대신 눈빛으로 표현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의견에 찬열은 하고싶은대로 하라며 자리에 앉았다.

 다시 슛이 들어가고, 왕에게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욕들을 듣던 태영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한 순간 찬열이 '오케이!' 하며 크게 외쳤다.

























 자야가 주문한대로 OST 나갈 음악을 고르는데 뭔 놈의 말이 다 안 맞는다. 얼마 전 그에게 OST로 원한 분위기를 말해주던 자야의 설명대로라면..




 ' 그 막 클래식하기도 하고 모던하기도 하면서 존나 재즈 같은데 판소리 같기도 하고 가야금이 막 바이올린처럼 그 뭐야, 막 피아졸라 oblivion 망각 알지. 존나 구슬퍼. 그거처럼. 근데 막 너무 그런 건 아니고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악장 같이 처음이 퉁, 퉁, 퉁 여유롭게 빠른데 점점 웅장해지면서 존나 오케스트라 필 하모닉 런던 시발. 알지. '




 " 뭘 알아, 알기는.. "




 이와중에 엊그제부터 안쪽 이까지 쑤시기 시작했다. 아 시발.. 반 년에 한 번씩 스케일링을 받는터라 치과를 자주 가는 편인데도 그렇게 열심히 다닌 게 무색할만큼 너무 아팠다. 요근래 밥 대신 초콜릿으로 끼니를 떼운 게 원흉이었다. 지이이잉, 때마침 휴대폰 화면이 반짝거린다. 발신자 번호엔 자야의 이름이 떴다.




 " 어. "

 - 죽이는 거 발견. 완전 대박이야. 이따 와서 들어봐. 피아노곡인데 여기다 가야금이랑 해금 덮으면 게임 끝이야.

 " 저작권 개무시하네. "





 어금니가 시린건가, 아님 그 옆니가 문제인건가. 반대손으로 뺨을 부여잡은 채 끙..거리며 앓았다. 치아 건강이 오복五福 중 하나라던데 난 이렇게 날리는구나. 망할 놈의 충치. 충치 아니면 풍치, 둘 중 하나일테다. 뭐가 되든 가만두지 않겠다. 다 부셔버리겠다.




 " 나 이가 너무 아파. 충치 있나봐. "

 - 갑자기 웬 충치. 

 " 치과 들렸다 가야할 것 같은데. 추천받아요. "

 - 뭔 추천, 나도 치과 바꿔야해. 저번에 스케일링하러 갔다가 이빨 다 갈리는 줄 알았어. 너나 좀 알려줘라.

 " 너 참 도움 안 된다. 끊어. "

 - 네 잇몸 화이팅.




 그러곤 전화를 끊으니, 그 사이에 부재중 연락이 쌓여있다. 휴대폰을 자주 보지 않을 뿐더러 헤어진 후에도 계속 연락이 올까봐 일부러 무음으로 했는데 역시나 전애인의 연락은 끝나지 않았다. 동남아 여행을 즐겨했던 놈이었다. 그 습한 기후가 좋다며 매해 겨울마다 홀로 떠났다. 그런 놈과 만나던 중, 뜬금없이 처음보는 외국 여자가 작업실로 찾아왔다. 한 손엔 앳된 남자애의 손을 잡고 내게 말했다. 그 사람을 찾고있는데, 자신한테 있는 건 당신 주소 밖에 없어서 이렇게 찾아올 수 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결론은, 미안하다고.




 " 싸이코 새끼. "




 곧장 여자를 내 차에 태워 놈의 회사로 향했다.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을 거라며 낙하산으로 한 자리 꿰차 앉았던 놈은 우리가, 아니 그 '모자'와 '내'가 나란히 나타나자 귀신을 보기라도 한 것마냥 크게 놀랐다. 그러곤 재빨리 지갑에 있던 모든 돈을 꺼내 어서 사라지라는듯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쓰레기도 그런 쓰레기가 없었다.

 여자는 울었고 나는 절망했다. 멀리 타국으로 아이와 함께 비행기까지 타고와 눈 앞에서 문전박대 당한 여자와 그게 전부 사실임을 인정해야만 하는 내 처지가 별 차이 없어 보여서, 그래서 그 연민을 견딜 수가 없었다. 왜 하필 너 같은 새끼가 내 인생에 끼어들어서, 살면서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이런 개 같은 경험까지 겪게된건지. 이걸, 고맙다고 해야하는건지.

 이별을 결정하기까지 망설임은 없었다. 죽을 때까지 개고생하다 객사로 뒤져버리란 저주를 퍼부운 뒤 여자와 아이를 차에 태우고 공항까지 바래다주었다. 저런 새끼 아빠라 생각하지말고 그냥 죽었다 생각하란 내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었다. 아이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보게된 아빠가 자신을 보자마자 꺼지라며 돈을 쥐어줬으니, 아이도 엄마 못지않게 아팠을테다. 여자는 끝까지 미안하다고 했다. 사과해야 할 놈은 따로 있는데, 같이 얻어맞은 놈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눈물을 뚝뚝 떨구는 여자를 말없이 바라보다 당신은 잘못한 것 없으니 여기서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리라 당부했다. 저런 개새끼 만난 것도 다 잊고 아이랑 조심히 돌아가시라고.




 " 아, 네. 충치 검사할 건데 오늘 예약되나요. "

 - 음... 4시 괜찮으시겠어요?

 " 괜찮아요. 4시까지 방문할게요. "

 - 네, 예약해놓겠습니다. 




 치과 진료 예약을 마친 후 곧장 떠날 채비를 했다. 항상 가던 곳이라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대충 알고 있다. 뜬금없이 떠오른 더러운 기억에 괜히 기분만 잡쳤다. 귀에 꽂아놨던 연필을 책상 위에 던져놓곤 차키와 휴대폰을 챙겼다. 치과로 향하는 동안에도 이 안쪽이 욱씬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신호가 걸릴 때마다 욕지기가 터져나왔다. 아, 진짜 너무 아프다. 혀 끝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작날듯이 아파왔다. 좆 같은 이빨. 좆 같은 인간.

 서둘러 치과에 도착해 들어오니, 남자애 하나가 대기석에서 문진표를 작성중이었다. 다리도 길쭉하고 군살도 없는 걸 보면 모델일 가능성이 컸다. 잘생긴 사람을 보면 화도 덜 난다던데, 내 치아 상태는 그 수준을 넘어섰다. 잘생긴 놈을 봐도 쑤시는 건 똑같았다. 아 시발, 이러다 사람 잡겠다.




 " 아까 전화로 예약했는데요. "

 "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

 " 단 영이요. "

 " 아, 문진표 작성하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

 " 네. "




 문진표를 받아와 남자의 옆에 털썩 앉았다. 남자는 날 힐끗 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문진표 질문을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대충 읽고 체크한 나완 달리 남자는 모든 질문에 신중했다. 데스크에 제출하고 오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테이블 위를 똑똑, 두드렸다. 자리에 앉으려던 남자가 쳐다본다.




 " 다단계 아니고 100% 사심으로 묻는건데. "

 " ...... "

 " 내가 휴대폰 주면 그쪽 번호 줄 수 있어요? "

 " ..네? "

 " 싫으면 모른척 지나갈테니 부담스러워말고요. "




 날 빤히 보더니 자신의 이름이 불려진 후에야 고개를 끄덕인다. 잽싸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주니 제 번호를 꾹꾹 누른다. 곧 남자의 전화벨이 울렸고 내 번호가 뜬 화면을 보여준다. 남자가 먼저 일어섰다.




 " 연락할게요. "

 " ...... "

 " 웬만하면 밤에. "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진료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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