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게 우산을 건네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내가 시린 비를 다 맞으며 돌아갈 수 있도록, 평소처럼 한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 그냥 서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나도 아무런 생각 없이 너를 대했을 거고. 이제 와서 이런 비참한 감정에 혼자 허우적거릴 필요도 없었을 거다. 이건 말하자면, 다 네 잘못이었다. 왜 특별한 의미도 없이 너는 움직이는지. 나는 그게 늘 궁금했다. 너는 왜 매사에 논리와 정황상 옳은 행동을 지표 삼아서 움직이는 걸까. 생각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네가 흔히 하는 뭐가 논리적이고 효율적인지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너의 행동에 치이는 불쌍한 존재들을 너는 돌아볼 줄 알아야 했다. 너는 말하자면 밑창이 딱딱한 부츠 같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그 밑창에 짓밟힌 개미였다. 그러니까 네가 다 잘못한 거였다. 아무것도 담지 않을 것 같은 눈을 하고서 나를 쳐다보거나. 내게 손을 내밀거나. 내게 그 그윽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일도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물론, 한때는 네가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기는 했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 주겠노라 통보하는 것은 역시 잔인하다. 너는 빌어 처먹을 놈이 분명했다. 그렇게 내 세계로 들어와서 불쑥 우산 하나를 내밀고 사라져서는 그걸 돌려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 너는 정말 나쁜 놈이다. 너는 이곳에서 몇 명에게 우산을 건네줬을까. 또 그중에 몇 명이 나처럼 네가 준 우산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속에 울컥 솟아오른 억울함이 내 콧속을 틀어막았다. 코끝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숨이 맵다. 아주 웃기다.

 “닥터.”

 그러니까, 너는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야 한다. 곁으로 다가오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그냥 내가 가져온 이 우산이나 받아 갔으면. 너를 향해 우산을 흔들어 보이자, 너는 가만히 서서 나를 쳐다본다. 그렇게 쳐다보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아니, 그냥 네가 빨리 이 우산을 받아 들고 저 멀리 가 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뉴 벌칸으로 돌아가거든 나를 기억 속에서 그냥 지워버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너는 그럴 것 같지만. 그냥 말은 해 보는 거야. 나를 지워버려. 나도 너 같은 벌칸은 만난 적 없었다고 생각하고 살면서 다음부터는 누가 건네주는 우산 같은 건 받아 들지도 않을 테니까. 비가 오면 맞지 뭐. 맞아도 안 죽는다. 머리털이 빠진다는 말은 근거 없는 뜬소문일 뿐이지만, 만약에 정말로 머리가 다 벗겨진다고 해도 차라리 그게 났겠다.

 “밖에는 비가 옵니다. 제게는 다른 우산이 있고요. 이걸 다시 돌려주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닥터는 분명히…,”

 그래. 따로 가져온 우산은 없어. 내게는 우산이 이것뿐이지. 그런데 어째. 내가 이걸 쓰기 싫은걸. 버리기는 좀 그렇고. 때마침 주인이 나타났으니 다시 돌려주려는 건데 왜 받지를 않느냔 말이야. 그냥 받아. 가져가 버려. 그리고 돌아서란 말이야. 우산을 쥐고 다시 흔들었더니 너는 앞으로 불쑥 다가온다. 딱 두 걸음 하고도 반만큼의 거리에서. 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거나. 반듯한 앞머리가 살짝 기울어진 것 따위는 난 이제 모르는 척할 거다. 네 뾰족한 귓바퀴처럼 뾰족한 눈썹 끝이 올라가는 모습도 보지 않은 셈 칠 거고. 사실 나는 오늘 너도 만나 적 없다고 생각 할 거다. 그냥. 널 처음 봤을 때처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거다. 그때 짐에게 했던 말은 다 거짓말이야. 그냥 녀석을 약 올리려고 했던 말이었지. 정말로 네가 마음에 들었던 적은 없다. 정말로, 한 번도.

 “진심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사실이야. 기실, 내가 너를 퍽 마음에 들어 할 이유도 없잖아. 너는 논리 괴물이고, 남을 생각하는 배려도 없고. 이제 곧 뉴 벌칸으로 갈 거고. 지구는 쳐다보지도 않겠지. 사직서를 낸 걸 알아. 뉴 벌칸은 인구 조절 계획이 한창이라지. 폰파가 뭔지도 알아. 벌칸에 대해서 나도 안다고.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이제는 나도 알아. 네게도 약혼녀가 있겠지. 그리고 너는 돌아가면 우리가 결혼이라고 부르는 본딩을 할 테고. 그리고 한참 있다가 너는 스타플릿으로 돌아오거나 벌칸 과학 아카데미에 들어가거나 하겠지. 뉴 벌칸은 지구에서 더 멀다고 들었어. 스타플릿에서 뉴 벌칸의 재건을 돕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구와 뉴 벌칸 사이에는 왕복선도 다니지 않지. 아마 나는 몇 년 후에 네 얘기를 떠들지도 몰라. 아 벌칸, 나는 한 번 본 적이 있어. 아니, 같이 일했던 적이 있었지. 아주 논리적이고 똑똑한 작자들이야. 그렇지만 다시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아. 그들은 너무 논리적이거든. 이렇게 말이야. 그러니까 얼른 받아.

 너는 그제야 네 우산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걸 살펴보지도 않은 채 거리는 조금 더 좁혔다. 이제는 한 발자국 반. 그만큼의 거리 안에서 숨을 들이쉬면 네 냄새가 난다. 콧속이 화끈 달아오르는 매운 냄새.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 너는 그대로 따라온다.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어, 스팍. 내 부름에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스꽝스럽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리의 행동을 춤이라고 부르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어떤 움직임도 춤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에는 저도 이견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면, 너는 반 발자국을 더 내게 다가와서, 우리의 사이는 발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거리가 된다. 키가 비슷해서 서로의 시선이 아주 가깝게 부딪히는 게 불편했다. 조금 더 물러나려고 고개를 뒤쪽으로 물리면, 너는 손을 뻗었다. 좀처럼 뒷짐을 진 채로 잘 움직이지 않던 팔이 불쑥 다가와서, 내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는 손가락 세 마디의 틈. 딱 그만큼의 공간을 남기고, 너는 다시 입을 연다. 입술이 반듯하다. 보면서도 보지 않은 척 눈을 돌리면 네 뾰족한 눈썹이 흐릿해지며, 내 입술에, 네가 닿는다.

 “제가 뉴 벌칸에 돌아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스터 스팍과 아버지를 만나서 상의할 일이 있기 때문이고, 그건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건 분명, 너였다. 나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고. 손끝으로 살결을 가볍게 문질렀다. 너는 계속 떠든다. 내가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건 신경 쓰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평소와 같은 얼굴로, 너는 내 뒷덜미에 얹어 놓은 손가락을 움직여서, 바짝 깎인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까칠까칠한 감촉에 아랑곳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으로, 너는 다시 나를 끌어당긴다. 그래, 사실 나는 네가 떠드는 얘기를 듣지 않았다. 그 순간 네가 나에게 닿았다 떨어진다, 이 로비에서.

 “조금 전에 다시 확인했지만, 역시 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을 미스터 스팍과 상의하려 했지만, 이제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그리고 오해를 정정하자면 제가 스타플릿에 제출했던 것은 휴가 요청서였습니다. 현재 뉴 벌칸에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엔터프라이즈의 부함장까지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일단 돌아가서 당신을 생각하는 제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습니다. 이 입맞춤도 당신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나서 이루어졌어야 했지만. 이렇게 계획이 어긋난 것은 어쩔 수 없겠죠. 우리 사이에는 항상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으니까요. 우선은 제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이 우산을 보관해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레너드.”

 너는 내게 다시 우산을 건네줬다. 손안에 손잡이를 넣고서, 손을 꽉 잡아 주기도 했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걸 내려다봤다. 새까만 우산은 너를 닮았다. 나는 네가 이 우산을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건네주었을까 궁금했던 것을 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여전히 네 눈 속에는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새까맣고, 환한 빛 아래서는 조금 갈색인데. 그 안에 지금은 내가 있다. 네 속에 있는 건 나인가? 너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너를 따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나는 네게 스며든 빛이었구나. 이제야 알았다. 이 역시 네가 말이 너무 적은 탓이다. 너를 탓하다가도. 나는 역시 여기서 너를 기다릴 거다. 너도 벌써 이걸 아는 것처럼 내 손을 다시 쥐었다. 나는 역시 네가 조금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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