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본 줄 알았다. 우석은 회의실 중앙에 다리를 꼬고 앉은 승연을 보고 그대로 나와서 문 앞에 붙은 푯말을 확인했다. SBC 드라마국 2회의실. 다시 문을 열자 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일 년 만에 보는 승연은 살이 내려 좀 더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검지로 테이블 위를 똑 똑 두드리던 승연이 멍하니 선 우석을 보고 입을 열었다.



“똑바로 찾아온 거 맞고, 회의실은 감독이랑 작가한테 말해서 삼십 분 빌렸어.”

“무슨 권한으로...”



없는 권한도 만들어내고 남을 사람이지. 우석은 물으려다 관뒀다. 



“내가 이 드라마 세트장 지어주고 소품 협찬해주고, 광고 넣어 줄 건데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줘야지.”



어떻게 사람이 이래. 멀쩡한 낯을 보는 우석의 속이 뒤틀렸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알면 절대 이렇게 행동 못 해. 



“나 만나줘.”

“.....”

“연애하자는 말이야.”

“미쳤어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됐어요. 혼자 하세요.”

 


더 들어줄 수가 없다. 나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손목이 턱 붙잡혔다. 말로는 선택권을 줘놓고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몰아붙일 기세다. 와,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당신 이러는 거 서지연 씨도 알아요?”

“몰라? 이제 남이라.”

“.....”

“이혼했어.”



승연이 우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 눈을 보자마자 꼭 일 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당신의 밤  6




지방에서 녹화하는 음악방송 시간에 맞추느라 새벽부터 일어나서 밴에 올랐다. 벌써 입김이 나오는 날씨였다. 퉁퉁 부어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준호가 보더니 밤에 혼자 라면 먹었냐고 묻는다. 우석은 대답할 힘도 없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을 내리 달려 휴게소에 도착했다. 삼십 분 안에 아침 먹고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매니저 형의 말에 제일 빨리 나온다는 비빔밥을 주문했다. 메뉴 사진에 날계란이 있길래 못 먹는다고 빼달라고도 했다. 이 기분으로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평일 아침, 사람이 별로 없는 휴게소 푸드코트에서는 아침 뉴스 소리가 제일 크게 들린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렸다. …오늘 P그룹 차남 조승연 P전자 전무와 서제원 대한당 대표의 장녀 서지연 씨의 결혼식이 W호텔에서 열립니다. 결혼식은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이며 이 자리에는 정재계의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것으로…



비빔밥 그릇에 숟가락을 대자마자 날계란 노른자가 톡 터져서 사방으로 퍼졌다. 아, 못 먹는다고 했는데, 빼달라고까지 말했는데… 힘없이 풀어진 계란을 보다 갑자기 울컥 가슴이 저려왔다. 이게 뭐라고, 계란 하나 안 빼준 게 뭐라고 이렇게 서러워. 콩나물이 붙은 숟가락을 쥐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맞은 편에 앉은 형준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형, 왜 그래. 왜 울어. 어디 아파요?



“계란… 빼달라고 했는데, 말…했는데.”



형준이 어쩔 줄 몰라 하다 저가 주문한 순두부찌개를 우석 앞으로 민다. 형, 이거 먹어요. 그거 제가 먹을게요. 음식을 바꿔줘도 여전한 상태. 이젠 저도 울 것처럼 눈가가 빨개진다. 음식을 받으러 갔던 매니저 형과 나머지 애들이 돌아와서 황당한 얼굴을 했다. 음식 앞에 두고 오열하는 애 하나,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가가 시뻘게진 나머지 하나.



고작 차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왔다고 사람들이 그새 확 달라진 억양으로 이야기한다. 옆 테이블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두 명이 국밥을 앞에 두고 뉴스를 본다. 



“서제원이가 대통령 되면 P그룹이 우리나라 다 해묵겠네. 부자만 더 배 부르는 세상이고.”

“뭐 그런 게 하루 이틀이가. 다 끼리끼리 하는 거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당신 얘기를 해. 근데 난 아무한테도 당신 얘기를 할 수가 없어.






되도 않은 사교 모임을 무슨 1박 2일 동안 한다는 거야. 입에 경련이 나도록 웃느라 진이 빠진 승연은 호텔룸에 들어서자마자 윤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 하나 더 잡아. 지연은 막 핸드백을 내려놓다 그 말을 듣고 표정이 있는 대로 구겨진다. 



“보는 눈 많아. 방 따로 쓰면 분명 말 나와.”


“서지연이랑 다른 층으로 잡아.”

-네 알겠습니다.



승연이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지시를 내리자 지연은 보란 듯이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집어 던졌다. 제법 큰 소리가 나서 돌아본 승연은 한심하다는 듯 잠깐 시선을 줬다 금세 거둔다.



“하, 진짜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른들은 빨리 애 가지라고 난리인데… 수치스러워서 남한테 말할 수도 없고.”

“어디 가서 누가 물어보면 나 고자라고 해.”

“걔 전에는 여자도 스폰 해줬다며. 설마 나랑 안 하는 게 아직 걔 못 잊었다는 그딴 웃기는 이유는 아니지?”



줄곧 미동 없던 승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지연은 그제야 반응을 보이는 승연에게 질렸다는 눈을 한다.



“지연아.”

“….”

“걔, 걔. 하지 마. 김우석 니 친구 아니야.”

“….”

“남들 앞에서처럼 지연이라고 불러줄 때 입 다물어.”



싸늘하게 쏟아지는 말은 누가 봐도 진심이었다. 미련 없이 방을 빠져나가는 승연의 뒷모습을 보던 지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보석이 박힌 뾰족한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밴에서 내리자마자 지하주차장에 클락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잘빠진 은회색 재규어에서 내린 남자가 차체에 등을 기대고 이쪽을 바라본다. 미친 거지. 조승연을 알아본 매니저 형만 눈이 커졌다. 엥. 너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근데 차 되게 비싸 보인다. 그러게… 낯이 좀 익은 거 같기도 하고… 애들이 그에 대해 무어라 더 떠들기 전에 등을 떠밀어 올려보냈다. 불안한 눈빛의 매니저 형한테는 괜찮다고, 어서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우석은 멤버들과 매니저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까지 보고 나서 승연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마자 차 문까지 열어주는 폼이… 작정하고 온 것 같아서 어이가 없었다. 우석이 시트에 등을 기대고 앉는 것까지 지켜보고서야 돌아서 운전석에 올라탄다.



“찾아오지 마세요.”

“번호 알려주면 불쑥 안 찾아올게. 연락하고 올게.”

“장난해요? 알면서 그걸 왜 물어.”

“내가 준 거 말고. 네가 멤버들이랑 카톡하고, 부모님한테 전화하고, 지진 나면 재난 문자 받는 그 번호 달라고 말하는 거야. 지금.”

“....”



말문이 막혔다. 뾰족한 말이 튀어나오려다 그대로 들어간다. 운전대 위에 놓인 그의 손등이 잘게 떨리는 걸 봤을 때... 뻔뻔한 낯짝으로 그보다 더 어이없는 소리를 줄줄 늘어놓은 주제에 뭐가 두려운 거냐고. 넘칠 듯 말 듯 찰랑이던 감정이 작은 떨림 한 번에 속절없이 넘쳐흐른다.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둘렀던 가시가 힘없이 뽑혀 나간다.



정말 난 왜 이러는 걸까. 또 상처받을 걸 아는데, 똑같은 이유로 다시 불행해질 게 뻔히 보이는데.



우석은 끝내 번호를 알려주지 않고 숙소로 올라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애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질문을 쏟아낸다. 형, 아까 그 남자랑 아는 사이에요? 연예인인가? 같이 일한 적 있나,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박혔다.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냈다. 오래 충전을 안 해서 전원이 나가 있었다. 정말 이 번호로는 연락하지 않을 생각인지 전원을 켜봐도 부재중 기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걸 썼을 때… 딱 두 마디를 내뱉은 승연은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어볼 생각도 못 하고 주저앉아서 울었다. 어제 일처럼 선명한 기억에 우석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싫어하는 버릇. 뭘 해도 조승연부터 생각나는데 어떻게 잘 지내. 나 진짜 잘 못 지냈어. 당신이 중국에서 무슨 계약을 땄는지, 언제부터 신사업에 착수하는지, 장학재단에 기부는 얼마나 했는지… 신문 귀퉁이에 실린 기사까지 찾아보면서 청승 떨었어. 서지연이랑 같이 찍힌 사진이라도 보면 온종일 그 생각에 괴로워서 밤에는 잠도 못 잤어.



일 년 동안 차곡차곡 한쪽으로 기울었던 마음이 어느새 중간 지점을 지나 반대로 기울어진다.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듯. 다시 시작해서는 안 될 이유가 이렇게나 많은데… 후회할 선택을 하고 싶어졌다.



사람이 이성적인 판단만 했다면 역사의 절반은 휴지조각이 될 거야. 고삐가 풀린 마음은 때때로 복잡한 생각을 흔적도 없이 덮어버린다. 오랜만에 그를 떠올리며 잠이 들었다.






“50억이나 투자한 드라마가 잘 제작되고 있는지 투자자 입장에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요.” 



혹시 불편하거나 그러시진 않죠? 슈퍼 갑의 걱정에 대본 리딩을 하러 모인 모두가 큰일이라도 난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요. 절대 아니요. 불편할 리가… 배우들과 스텝들의 격한 반응에 승연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응원차 간식 사 왔는데 드시면서 하세요. 호텔 베이커리 로고가 박힌 상자에서 마카롱이며 조각 케이크가 줄줄이 나왔다. 비서 두 명이 테이블에 그걸 모두 세팅하고 나니 대본 놓을 자리도 빠듯해졌다. 



정작 제일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인 건 우석이었다. 조승연에게 회의실을 강탈당한 이후로 뭔가를 눈치챘는지 감독과 작가는 승연과 우석을 번갈아 보며 속닥거렸다. 하, 진짜… 연기 제대로 못 하면 투자금 뺀다고 한 것도 아닌데 다들 긴장해서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실수가 연이어 터지고 마침내 30년 내공의 중년 배우마저 대사를 씹고 나서야 감독이 쉬었다 가자며 리딩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게… 니가 어떻게 좀 해보라는 호소라서 마냥 모른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우석은 여전히 뒤쪽 의자에 앉아서 대본을 들여다보는 승연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복도를 가로질러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소품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답지 않게 고분고분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다들 불편하게… 할 일 없어요? 한가해?”

“번호 알려주면 불쑥 안 찾아온다고 했잖아.”

“하…”



승연의 핸드폰을 빼앗듯이 가져가서 꾹 꾹 번호를 저장했다. 여기서 틀리게 가르쳐 줬다가는 정말 드라마가 통째로 엎어질 것 같아서 맞게 눌렀다. 우석이 빨리 안 꺼지냐는 눈빛을 했다. 빈 공간이 거의 없이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어서 승연이 문을 열고 나가야 우석도 나갈 수가 있었다.



“이렇게 좁고 어두운 데 있으니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런 부담감이 드네.”

“.....”



속으로 온갖 욕은 다 하고 있을 것 같은 표정. 우석이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꾹 깨물었다. 할 말 있어? 도리도리. 있는 거 같은데. 맑고 동그란 눈동자가 갈등하느라 흔들흔들. 이내 결심했는지 한숨을 폭 내쉬고 물어온다. 



“이혼했다는 기사 하나도 없던데, 한 거 맞아요?”

“그게 궁금했어? 이혼남인 줄 알고 만났는데 유부남일까 봐?”

“만난다고 안 했어.”

“알아.”



엠바고 걸어놨어. 곧 기사 나갈 거야. 승연이 코앞까지 고개를 들이밀고 낮게 속삭인다. 그게 이 거리에서 할 얘기야? 뒤통수에 바로 닿는 상자 더미 때문에 고개를 뒤로 빼지도 못하겠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시선. 우석은 뼛속까지 꿰뚫리는 것 같은 기분을 견딜 수가 없어서 눈을 꽉 감았다. 얼굴이 타들어갈 것 같다.



“키스 안 해. 눈 떠.”



어느새 두 뼘 거리만큼 떨어진 승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여유가 넘치는 얼굴. 그래, 난 예전부터 저게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우석이 뒤돌아 나가려는 승연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금세 아까처럼 얼굴이 가까워졌다. 웬만해서 보기 힘든 당황이 서린 눈동자. 너는 안 해도…



“나는 해.”



입술이 급하게 부딪혔다. 키스라기보다 도장을 찍는 것 같은 입맞춤. 잠시 굳었던 승연이 우석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뜨거운 혀가 정신없이 얽히고 등 뒤에서는 박스 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 여기에서. 처음부터,


다음 편은 아마도... 재회 기념 노딱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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