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필리엔보다 무거운 존재니까요?"

"그, 어, 네."

딜레마에 빠진 듯한 필리엔을 말똥말똥 쳐다보던 릴리가 그를 꾹 끌어안았다. 옷이 평소보다 가벼워서 그런지 필리엔이 숨쉬거나 침을 삼키는 것마저 전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천천히 체온이 스몄다.

필리엔이 말한 게 릴리가 생각하는 그 의미가 맞다면, 지금 말하는 무게라는 것을 굳이 다르게 표현하자면 중요도라고 할 수 있었다. 세상과 얼마나 얽혀 있고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세상과 결속된 존재인지 나타내는 의미였다. 존재의 무게라고 할 수 있었다.

필리엔에게 이게 효율적인 방식이라면, 자기 입으로 자신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거나 다름 없었다. 아마 필리엔이 정확하게 이해했을 것 같지는 않고 대현자가 해준 이야기를 옮긴 것이겠지만 말이다. 릴리가 전에 이카트 가문에서의 입지가 낮으니 필리엔을 동부로 데려가기 좋겠다고 잘 됐다고 생각한 벌이라도 주려는 건 아닌지 세상을 상대로 의심이 들 정도였다.

릴리는 북부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스야는 자신이 세상의 끝으로, 벌어진 틈새로 밀어넣은 병사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세상 전반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존재고 존재 유무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특별히 더 단호할 것도 없이 그저 설명하는 태도로 존재 의미가 없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스야의 눈에 필리엔은 어떻게 보일까? 

릴리는 그냥 필리엔을 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혹시 많이 무거워요? 불편하거나 몸에 무리 가거나 하면 말해요."

"아뇨. 전 좋아요."

나는 게 좋다는 건지 상태가 좋다는 건지 릴리가 안아줘서 좋다는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렇게 있는 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새나 곤충처럼 날개를 퍼덕이며 날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더 그래 보이는 면도 있었다. 열심히 난다기 보다는 차라리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물론 하늘엔 수면 같은 경계면이 없어서 똑같은 방식일 수는 없겠지만.

허공에 떠 있는 상황에 조금 익숙해진 릴리가 슬그머니 먼 풍광을 보았다. 지평선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귓가엔 바람이 부는 휘파람 같기도 하고 이불이 펄럭거리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끝없이 들려왔지만 돌풍이 몸을 떠밀지는 않았다. 아, 추락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 그건 릴리가 감당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시선을 내리자 발아래로 도시가 펼쳐졌다. 캄캄한 어둠 속에 총총 박힌 작은 별 같은 빛이 길을 따라 도시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모습은 거미줄에 걸린 아침이슬이 새벽빛에 반짝이는 것처럼도 보이고 빛으로 촘촘하게 점 찍은 곧은 잎맥처럼도 보였다.

위에서 보니 지상을 수놓은 빛들이 더 아득했다. 저 멀리 작은 점처럼 보이는 빛이 전부 도시의 불빛이라는 게 놀라웠다. 시야에 담기는 이 넓은 지역이 전부 이어진 도시이고,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했다. 조금 전에 필리엔과 함께 걸어온 길이 저 속에 포함되어 이렇게 작게 보인다는 것도 신기하기만 했다. 

좀 전에 길을 걸으며 마주친 불빛들이 이렇게도 보일 수 있다니. 릴리는 상상한 적 없는 풍경이었다. 필리엔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물론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자면 필리엔도 처음부터 이럴 작정은 아니었겠지마는……. 그 정도는 너그러이 참작하도록 하자. 그래도 릴리에게 좋은 걸 보여주고 싶어한 마음이 예쁘지 않은가.

"고마워요, 필리엔."

릴리가 다시 필리엔을 보았다. 바로 시선이 마주했다. 바람이 가볍게 옷자락을 흔들었다. 도시의 하늘 위에 달처럼 하얗게 빛나는 필리엔의 녹색 눈은 꼭 지금껏 한 번도 다른 것을 바라본 적 없는 것처럼 릴리를 보고 있었다. 이 순간 릴리는 필리엔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졌다. 

릴리가 지금 보고 있는 걸 필리엔도 보고 있을까? 같은 기쁨과 같은 황홀함을 느끼고 있을까?

릴리는 질문하는 대신 턱을 들었다. 가까스로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스치듯 떨어졌다. 릴리는 좀 웃었다. 하지만 필리엔은 생각하는 바가 달랐는지 가슴이 훅 부풀며 숨을 한 번 크게 쉬더니만 릴리의 허벅지를 받쳐 위로 끌어올렸다. 릴리가 씩 웃으며 다시 입 맞췄다. 바람 소리가 휘몰아쳤다.

필리엔이 할 수 있는 건 단순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란다. 그래서 저택에 가까운 곳까지 날아서 가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릴리는 걸어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라고 생각했지만 날아갈 수 있다고 얘기하는 필리엔이 조금 신나 보여서 그냥 참기로 했다. 

"혹시 무서워요?"

"아뇨.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상황이 조금 낯선 거예요. 이건 무서운 게 아니죠."

릴리는 필리엔의 쇄골쯤에 얼굴을 박은 채로 잘도 그렇게 나불거렸다. 하지만 곧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는데, 정말로 아무 것도 안 보이니까 더 불안해진 때문이었다. 

무서운 거든 낯선 거든 일단 릴리가 안정적으로 잘 붙어 있는 걸 확인한 필리엔이 느긋하게 하늘을 스쳤다. 바람이 불며 허공에서 기묘한 휘파람 소리가 났다. 고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도시 위에 뿌려진 별들이 서서히 가까워지며 제각각 모습을 분간할 수 있게 변해갔다. 곧 불빛이 비추는 건물의 윤곽들마저 눈에 들어왔다.

"아, 와장창 나무다."

"무슨 나무요?"

릴리의 질문에 필리엔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소리내서 말했나요?"

"그러니까 제가 들었겠죠? 나무 이름이 좀 특이한 것 같은데요."

필리엔은 지금 상황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바람이 한 번 릴리의 머리카락을 크게 휘날리게 했다. 좀 전에는 고도가 높아서 바람이 심한가 했더니 낮은 곳까지 내려와서도 바람이 훙훙 불었다. 아무래도 자연적인 바람은 아닌 듯했다.

"아, 그러니까 이건……. 원래 이름은 아닌데 그냥 그렇게 불러요.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 건 아니고 그냥…… 저랑 형만요."

땅이 가까워지며 사방이 점점 익숙한 시야각으로 돌아오자 여유를 되찾은 릴리가 작게 웃었다.

"뭐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아, 진짜 별거 아닌데 그냥, 어릴 때 얘기에요. 형이 나무 기둥을 차면 제가 저 나무 아래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잡는 장난을 치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역시 좀 이상하죠? 미안해요."

필리엔이 설명하다가 혼자서 평가하고 사과까지 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허공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가 길 한가운데 내려 섰다. 땅굴로 숨어드는 작은 짐승들의 몸짓처럼 마른 땅에 빗물이 스미듯 필리엔의 몸에서 광채가 사그라들었다. 릴리는 모든 게 끝났음을 확신한 이후에 필리엔에게 매달려 있던 걸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릴리는 두 다리로 단단한 바닥을 딛고 선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이게 이리도 짜릿한 감각이었던가? 아아, 대지여! 땅이라는 것이 이리도 소중한 것인 줄은 잃기 전엔 미처 몰랐네.

마음속으로만 땅에 키스를 날린 릴리가 두리번거리다 필리엔이 말한 나무를 보았다. 정말로 조롱조롱 작은 열매가 달려 있기는 했다. 반가운 땅과 재회한 릴리의 마음속에 호기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게다가 지금 아무 것도 안 하면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 헤어져야 하지 않는가. 부질없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고 싶었다.

"재밌었나 봐요? 요즘엔 안 해요?"

"네? 아, 그야 어릴 때 했던 거니까요."

릴리가 쪼르르 나무 아래에 섰다. 필리엔은 달빛 아래로 흐릿하게 보이는 표정만으로도 상당히 부정적인 심상을 전달해냈다. 릴리는 쉽게 필리엔의 표정을 읽었다. 그렇지만 알아차린다고 해서 꼭 받아들인다는 법은 없는 법이지.

"뭐 어때요. 맨몸으로 하늘도 날아봤는데 이 정도 가지고."

결국 필리엔이 졌다. 릴리가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채 똑바로 서서 바라본 영향도 있을 것이다. 원하는 건 당연히 얻어야 하고 하고픈 건 당연히 하고야 마는 사람처럼 당당한 릴리의 기세를 꺾기엔 무리가 있었다.

필리엔이 슬그머니 나무 옆으로 다가갔다. 릴리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필리엔은 한숨을 쉴까 말까 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그냥 빨리 해치우자는 심정으로 잽싸게 나무를 찼다. 수관들이 흔들리며 달려있던 열매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우왁! 와!"

뭐가 많이 떨어지긴 했는데 괴상한 소리까지 내면서 손을 휘저었는데도 손에 잡힌 건 별로 없었다. 릴리는 열매 몇 개와 나뭇잎을 손에 쥐고 필리엔을 보았다. 그래도 용케 몇 개는 건졌다. 필리엔은 무슨 죄를 고백하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어릴 때 했던 거라고……."

그때 갑자기 릴리가 필리엔의 말을 끊었다.

"잠깐만요."

목소리가 퍽 진지했다. 릴리의 눈빛이 앞에 있는 사물을 보지 않는 것처럼 변했다. 기억 속으로 침잠하는 노인의 깊은 시선과도 같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이건 설마……?"

릴리가 중얼거렸다. 필리엔도 긴장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냐, 이건……. 하지만 그럴 리가?"

"왜 그래요?"

그 순간 릴리가 춤 추기 시작했다. 필리엔은 갑작스러운 전개를 따라가지 못하고 멍하니 릴리를 보았다. 

필리엔의 당황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릴리가 엉망진창 스텝을 밟으며 몸을 흔들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지난번에 축제에서 추는 춤을 알려주었을 때를 되짚어 보자면, 릴리의 춤 실력이 그 사이에 급격하게 퇴보한 것으로 보였다. 릴리는 박자를 마구 쪼개며 빙글 돌고 도중에 풀쩍 뛰고 몸을 흔들었다. 아니, 다시 보니 저건 춤이라기 보다는…….

"으악! 송충이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붙은 벌레를 떼어내려고 몸부림치는 꼴에 가까웠다. 상황을 이해한 필리엔이 펄펄 뛰는 릴리를 붙잡고 등을 살폈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릴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안에 들어갔어요!"

예상한 것보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릴리가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릴리는 벌레 한 마리에 벌벌 떠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나빴다. 어릴 때 송충이에 쏘였던 기억이 어찌나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지금 두 배로 쏘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릴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벌벌대는 동안 필리엔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쩔쩔 맸다. 그야 그렇겠지. 옷 안에 들어가 버렸는걸!

릴리의 성화에 필리엔이 옷 틈으로 손을 넣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릴리의 몸과 옷 사이에 공간이 거의 없어서 필리엔의 손이 깊게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실내복이 여러모로 두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흐윽, 그냥 찢어요!"

"네?"

"나 죽기 전에 빨리해요!"

릴리는 거의 울먹이며 소리쳤다. 필리엔은 어정쩡하게 손을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고 있다가 결심한 듯 릴리의 뒤편에서 옷을 쥐었다. 릴리가 눈을 꾹 감았다. 부욱 하는 소리가 났다. 릴리는 눈을 꼭 감은 채 숨도 참으며 가만히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진짜요?"

"네. 진짜요. 그리고 송충이도 아니었어요."

필리엔의 말에 릴리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필리엔은 릴리의 옷 안에 들어갔던 불운한 곤충을 휙 던져버린 뒤 릴리의 옷을 손으로 추스르며 토닥였다.

"이런 일로 릴리가 울기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운 거 아니에요. 그냥 조금 눈물이 찔끔한 거죠. 눈을 찌푸리느라요."

릴리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필리엔은 참으려고 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다행히 릴리는 보지 못했다.

"벌레를 무서워하는지도 몰랐어요."

"벌레가 무서운 게 아니라…… 어릴 때 옷에 지금처럼 송충이가 들어갔었단 말이에요. 그때 엄청나게 고생했거든요. 사흘은 앓았을 걸요. 그러니까 전 벌레가 무서운 건 아니에요. 송충이에 쏘인 기억이 무서운 거죠."

"알았어요. 그래도 이번엔 송충이 들어간 게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릴리는 기운이 쭉 빠져서 고개만 끄덕였다. 제 발로 서겠다는 한 톨의 의지조차 사라진 모습으로 릴리가 필리엔에게 완전히 기대었다. 필리엔은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릴리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반복적인 동작에 릴리도 조금 안정되는 기분을 느꼈다. 릴리가 슬쩍 필리엔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잠깐 꼼지락거리던 릴리가 입을 열었다.

"필리엔은 함께 하늘을 난다는 비유의 뜻을 알아요?"

말하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릴리가 완전히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필리엔은 잠시 침묵했으나 결국 답을 하기는 했다.

"그런 의도는 없었는데요. 보통은 없죠?"

필리엔의 대답에 릴리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비유가 아닐 수도 있었다는 생각 들지 않아요? 다들 잠든 밤에 길거리에서 이런 소란을 부리는 대신 말이에요."

"미안해요."

"됐어요."

릴리는 그냥 필리엔을 꽉 끌어안아버렸다. 



-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