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번뜩 눈이 떠졌다. 잠을 푹 잔 것도 아니고 알람이 울린 것도 아닌데 그냥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내 자취방 천장에 매달려 있을 만한 조명이 아닌데 저건.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조명과 차차 눈에 들어오는 구조에 침을 꼴딱 삼켰다. 씨발. 이거 뭐지. 상황 파악이 채 되기도 전에 진동소리가 크게 울렸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지만 이놈의 진동이 어디서 울리는 건지 발원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악!”

 

소리가 나는 쪽으로 좀 더 귀를 기울이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찾아오는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다시 뒤로 쓰러졌다. 아니, 술을 처먹었으면 머리가 아프거나 속이 메스꺼워야 정상 아니야? 나를 괴롭히는 통증에 허리를 급하게 부여잡았다. 그리고 손바닥에 닿은 맨살에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나 지금….

 

“씨발. 미쳤구나.”

 

이불 밑으로 자리한 적나라한 나체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진동소리도 멈춘 뒤였다. 찾아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아무리 취해도 필름이 끊긴 적은 없다며 떵떵거리면서 자랑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발가벗은 정재현의 몸이 눈앞을 스쳤고, 나의 신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서로의 살을 물고 빨던 저질스러운 소리까지 아주 명확하게 기억이 났다. 그냥 콱 죽을까? 그나마 오늘 쉬는 날이어서 지각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아주 사소한 사실이 나를 위로했다. 아니. 사실은 좆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정재현이랑 섹스를 했다. 그것도 아주 앙앙거리며 눈물까지 보이면서.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머리를 침대에 수십 번을 박으면서 해결책이 있을까 뇌를 굴렸지만, 이건 답이 없었다.

 

“아씨. 폰은 어디 있는 거야.”

 

다시금 짧게 울리는 진동소리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팔에 겨우 힘을 주어 몸을 끌었다. 침대 밑에 아무렇게나 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참으로 참담한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깬 뒤로 ‘씨발 좆됐다’를 수십, 수백 번도 더 외치고 있는 나였다. 겨우 팔을 뻗어 바지 끄트머리를 잡아끌었다. 머리가 앞으로 쏠려 하마터면 침대 밑으로 고꾸라질 뻔 했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폰을 꺼내들었다. 오후 2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나 존나 푹 잤구나. 시계 밑으로는 부재중통화와 카톡 알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장은 되어 있지 않지만 익숙한 번호에 나는 다시 한 번 내 현실을 직시했다. 내가 정말, 진짜로, 말도 안 되지만 정재현이랑 떡을 쳤구나.

 

‘일어나면 연락해.’

 

달랑 하나가 다인 카톡을 확인하곤 그대로 대화창을 나왔다.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나가기를 눌러 아예 카톡방을 삭제해버렸다. 내가 미쳤다고 너한테 연락을 하니? 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마음 같아서는 두 다리로 이불을 뻥뻥 차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오랜만이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그렇게 세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이 와중에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가 죽도록 싫었다.

 

“씨발. 왜 이렇게 더워.”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온 몸에 열이 올랐다. 근데 나 어제 씻기는 씻었나? 이런 좆같은 상황에도 한 번 거슬리고 나니 몸이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샤워만 하고 갈까. 어차피 정재현 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었다. 결국 씻고 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각해보니 입었던 옷을 다시 입기도 좀 그렇네. 눈에 담기는 서랍과 커다란 옷장을 얼른 가서 열어보고 싶었지만 선뜻 몸을 일으키기가 무서웠다. 이러다가 진짜 내 허리 끊어지는 거 아닐까. 눈을 감고 마인트 컨트롤을 했다. 괜찮을 거야. 아무리 오랜만에 했다지만 설마 처음만큼 아플까.

 

“아아악! 정재현 이 씨발!”

 

잘 다스렸던 마음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찾아오는 엄청난 고통에 눈물까지 맺혔다. 이런 씨발. 정재현 씨발. 욕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아픔이었다.

 

“세상에.”

 

옷장 옆으로 자리한 전신거울을 지나가다가 눈에 보이는 자국에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쇄골부터 허리까지 키스마크로 가득한 몸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너무 놀라서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계속해서 거울 속의 내 모습과 턱 밑으로 보이는 내 몸을 번갈아서 쳐다봤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정재현이랑 떡을 쳤을까. 어제의 내가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참는댔는데. 나는 살인은 참아도 섹스는 못 참는 그런 등신이었다.

 



13

 



누가 시간이 약이라는 개쌉소리를 퍼뜨리고 다녔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내 분노는 그라데이션처럼 커져갔고 쪽팔려서 혀를 콱 깨물고 죽고 싶었다. 바쁘게 살면 잡생각이 안 난다고? 아무리 바쁘게 움직이고 일에 집중을 해도 허리에서 찾아오는 아릿함은 나를 다시 그날 밤으로 데려갔다. 심지어 이건 약과다. 진짜 눈물이 고였던 건 불현듯 그날 밤을 곱씹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나와 사귀던 당시에도 정재현은 몸이 좋았다. 나와는 다르게 워낙 운동을 좋아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였다. 그 좋아하는 운동을 여태껏 하고 있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재현은 그때보다 몸이 더 좋아졌다. 어깨도 더 넓어졌고 선명하게 자리 잡은 복근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하얗고 다부진 그 야한 몸을 떠올리다가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을 자각했을 땐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정재현에게서 더 이상의 연락이 오지 않았다. 또 다행히 그 다음날은 정재현이 이틀 연속으로 쉬는 바람에 나는 무려 삼일동안이나 정재현의 낯짝을 보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겨우 버텨내고 있었는데, 오늘은 빼도 박도 못하게 정재현을 마주해야했다.

 

“회의 시작할게요.”

 

목폴라를 입은 정재현이 갑갑한지 옷 끝을 늘어지게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이 따뜻한 봄에 웬 목폴라야. 내가 계절감각도 없는 멍청한 놈이랑 떡을 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찼다. 그렇게 나는 회의 시간 대부분을 정재현을 힐끔거리고 욕을 하는 데에 소비했다. 아니 근데 저 새끼는 얼굴이 왜 저렇게 좋아? 생각보다 더 멀쩡한 모습이라 짜증이 났다.

 

“그럼 세일 들어간 겨울상품들은 이번 주까지는 입구 쪽에 두는 게 좋겠네요.”

“글쎄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내가 더 놀랐다. 정재현을 포함한 세 명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로 꽂혔다. 회의 내내 꾹 다물려 있던 입에서 비아냥대는 소리가 나오니 당연히 이상할 수밖에 없겠지. 어떻게든 무마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아무리 세일을 해도 겨울옷은 좀….”

 

그냥 땅으로 꺼지고 싶었다.

 

“겨울도 다 갔는데 누가 그런 두꺼운 옷을 입겠어요. 점장님이면 모를까.”

 

자꾸만 나도 모르게 삐딱선을 탔다. 니가 진짜 돌았구나 김도영.

 

“저는 그냥 후문 쪽으로 뺐으면 좋겠는데요.”

“하하. 그런가? 그럼 도영 씨 말 대로 할까요?”

 

되지도 않는 객기에 점잠대행이 애써 맞장구를 쳤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잠시 나를 빤히 보던 정재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봐 이 새끼야. 짧게 마주친 시선을 급하게 피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속으로는 아무렇지 않는 척 정재현을 욕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재현을 마주하는 게 너무 끔찍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정재현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도영 씨. 잠시 나랑 얘기 좀 하죠.”

 

회의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피신을 할 생각이었는데 정재현의 한마디에 의자를 집어넣던 손이 멈췄다. 여전히 사무실 안에 있는 다른 직원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나빼고 이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정재현 눈치를 봤다.

 

“왜요? 저 바쁜데.”

“그럼 지금 여기서 말 할까요?”

 

애초에 이길 수가 없는 게임이었다. 무슨 얘기인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른 인간들이 있는 곳에서 할 말이 아닌 건 알았다. 고개를 숙여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붙들고 있는 이성의 끈이 입 안 가득 채운 욕을 끌어내렸다.

 


/

 


철컥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벽에 기대어있던 정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둘 밖에 없는 비상계단에 다시 한 번 쿵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나는 가자미눈을 뜨고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나랑 할 얘기가 뭔지 들어나 보자. 정재현의 맞은편에 자리한 난간에 기대어 섰다. 손을 가져다 댄 난간은 얼음장 마냥 차가웠다.

 

“너 내 옷 입고 갔더라.”

“고작 그거 따지자고 불러냈냐?”

“연락은 왜 안 했어.”

“해야 되니?”

 

날아오는 문장 족족 삐딱하게 받아쳤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전전긍긍하며 떨기 싫으니까.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척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단 말이다.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난간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뭘 그렇게 봐. 너 설마 내가 아까 옷 가지고 뭐라 했다고 이래?”

 

여전히 갑갑해 보이는 목폴라가 눈에 들어왔다. 정재현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기대어있던 몸을 똑바로 세운 정재현이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묘하게 높이 자리한 시선을 마주하며 숨을 참았다.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몸이 죽도록 싫었다.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정재현이 선수를 쳤다.

 

“내가 겨울도 다 갔는데 이 갑갑한 옷을 왜 입었게.”

 

기다란 손가락이 목 부분을 잡아당겼다. 밑으로 늘어진 옷 뒤로 정재현의 두툼한 목이 드러났다. 갑자기 이게 웬 해명타임인가 싶어 웃음이 터질 뻔했다. 물론 정재현의 목에 군데군데 남아있는 자국들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손이 미끄러질 뻔 했다. 차라리 미끄러져서 이 밑으로 떨어지는 게 나으려나.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 많은 걸 무슨 수로 다 가려.”

“…….”

“나는 그래도 너 배려해서 목에는 안 남긴 거 같은데.”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저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나 때문이라고? 지가 저 거지같은 옷을 입은 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정재현 목을 사탕 빨듯 혀를 굴리던 내가 떠올라서. 그래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 죽일 놈의 기억력.

 

“야. 김도영.”

 

별안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정재현을 마주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꽤나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다. 아까보다 한층 더 가까워진 거리에 몸을 뒤로 쭈욱 뺐다. 이러다 진짜 뒤로 넘어가서 떨어지면 그냥 뒤지지 뭐. 그닥 미련도 없는 인생이었다.

 

“너 아직 나한테 미련 남았지.”

 

푸흡. 실없는 소리에 웃음이 났다. 내가 방금까지도 내 인생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근데 뭐? 누구한테 미련이 남아? 뒤로 기울였던 몸을 바로하고 정재현 어깨를 밀쳤다. 얘가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무슨 이런 개소리를 해? 손쉽게 밀려난 정재현이 미친놈마냥 웃어내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웃음소리가 건물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갔다.

 

“무슨 헛소리를 이렇게 무게를 잡고 하냐 너는?”

“헛소리라고.”

“술 먹고 섹스한 게 뭐 대수라고 그런 결론이 나와? 너 진짜 웃긴다.”

 

와. 방금 김도영 존나 쿨했다. 멋졌어.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하며 정재현을 깔봤다. 여태 괴로워했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나는 당당했다. 도대체 이런 깡따구가 어디서 나온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재현을 한방 먹인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정작 상대는 아무 타격이 없어보였지만 말이다.

 

“아님 말고.”

 

정재현이 순식간에 뒤를 돌았다.

 

“자, 잠깐만!”

 

그냥 보내주면 어디 덧 나냐.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정재현을 급하게 불러 세운 꼴이 아주 우스웠다. 요즘 왜 이렇게 나도 모르게 본심이 불쑥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때 정재현한테 입 맞췄을 때도 그렇…. 다시금 떠오르는 악몽에 잠시 머리가 아팠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왜.”

 

보채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얘를 왜 붙잡았을까. 목구멍에 하고픈 질문이 갇혀있다. 정말 물어보고 싶은데 한 편으로는 왜 굳이 이걸? 이라는 의문이 들었다.

 

“할 말 없으면 나 간다.”

“너는! 너는 나한테 미련 없었어? 아니, 없어?”

 

과거형을 현재형으로 고치는 등신스러운 모습을 아주 대놓고 보여줬다. 누가 들어도 미련이 존나 뚝뚝 묻어나는 질문이잖아 이거. 물어보고도 아차 싶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입술에 피가 터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질문을 받은 사람보다 한 사람이 더 좆됐다는 표정을 짓는 이 상황이 끔찍했다. 정재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왜 궁금한데.”

“그거야!! 나만 대답하는 게 억울하니까….”

 

당차게 지른 목소리가 갈수록 기어들어갔다. 망신살 제대로네 나.

 

“너 어차피 나한테 미련 없다며. 굳이 끝난 일에 대답할 필요 없는 거 같은데.”

 

그냥 씨발 네. 아니오. 둘 중 하나로 답하면 죽기라도 하는지 길게 늘어놓는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뒤를 돈 정재현이 미련 없이 비상계단을 떠났다. 미련 없이. 미련…. 없이.

 

“으아아….”

 

머리를 감싸 안고 계단에 철푸덕 앉았다. 결국 또 나만 바보가 됐다. 세상 쿨한 척은 다 해놓고 이게 무슨 개쪽이야. ‘정재현이 눈치 채지 못 했다’라는 경우의 수를 둬봤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아는 정재현은 눈치 백단 천단이니까. 저 새끼는 그런 질문은 왜 해가지고! 허공에 엿을 날리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 근데 정재현한테 진짜 미련 없나...? 분명 아까는 그냥 웃어넘겼던 개소리가 지금에서야 진지하게 다가왔다. 나 지금 저 개소리 왜 곱씹는 건데. 누가 보면 진짜 내가 정재현한테 마음 있는 거 같잖아. 계속되는 거지같은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씨발 아니야!!”

“도영이 형.”

“아악!!!”

 

혼자 헤드뱅잉을 하며 소리를 치는 와중에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던 나는 산발이 된 채로 이민형을 올려다봤다. 나를 향한 시선에는 혐오감과 애잔함이 공존했다. 나 도대체 얘한테 왜 자꾸 이런 모습 보이니.

 

“그…. 재현이 형이 그만 땡땡이 치고 들어오래요.”

“뭐?”

“제가 한 말이 아니라요. 아니 솔직히 제가 한 말이 맞긴 한데. 재현이 형이 꼭 땡땡이라고 말하라고 해가지고.”

 

횡설수설 말을 더듬는 이민형을 째려봤다. 물론 이민형이 아무 잘못이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지금은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아랫입술로 바람을 불자 앞머리가 흔들거렸다. 신경질적으로 다리를 세웠다.

 

“갈 거야! 가려고 했어! 나 막 땡땡이에 미련 있고 그런 사람 아니거든?”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는 나를 보는 이민형의 표정이 점점 썩어 들어갔다. 그런 이민형을 애써 무시하곤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부딪히는 발소리가 크게 비상계단 내부를 울렸다. 내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발걸음뿐이라는 게 존나 한탄스러웠다.

 



14



 

나는 그 날 뒤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정재현을 괴롭혔다. 물론 대놓고 부딪히긴 싫어서 바퀴 달린 오리콘을 일부러 정재현 쪽으로 세게 밀고서는 모른 척을 한다든가, 아님 저 멀리서 걸어오는 정재현을 보곤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갈긴다든가의 아주 사소한 복수였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찌질해서 스스로가 같잖았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서 그랬다. 감히 나한테 미련이 없어? 누군 지랑 헤어지고 밤낮 구분 없이 질질 짜고 식음을 전폐했건만. 생각할수록 괘씸해서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날 나를 덮친 것도 정재현이었다. 그냥 나는 아주 가벼운 어? 프뤤치 키스 정도만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래놓고 미련이 있니 마니 떠벌린 그 입이 아주 가증스러웠다.

 

“점장님. 이거 반품 나가는 거죠?”

“어 맞아. 폴리에 좀 넣어주라.”

 

저 멀리 서있는 정재현과 유일하게 나보다 이 매장에 늦게 들어온 알바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볼펜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오늘 또 어떻게 저 자식을 골탕 먹이나 따위의 궁리를 했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실실 웃어대? 아 진짜 또 재수 없네.

 

“도영리더님!”

 

꽤나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 소리와 동시에 정재현이 이쪽을 쳐다봤고 나는 급하게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틀었다. 혹시나 훔쳐보던 게 들켰나 싶어 크게 목을 가다듬었다. 모든 움직임이 뚝딱이가 된 것 마냥 불편했다.

 

“그냥 부르면 될 걸 뭐 그렇게 크게 불러.”

“저 지금 형 세 번째 부르는 거거든요?”

 

황당한 표정을 지은 이해찬이 입을 삐죽였다. 이게 어디 형님 앞에서 입을 내밀어. 자꾸만 정재현이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존나 꼰대스러운 멘트에 이해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요새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막 혼자서 중얼거리고 사람 말 잘 못 듣고. 방금은 너무 꼰대 같아서 나 여기 소름 돋았잖아.”

 

무슨 오바를 또 이렇게까지 떠는지 자기 팔까지 들어서 보여주길래 그대로 잡아 내렸다.

 

“응? 나요?”

 

갑자기 손가락 끝으로 자기를 가리킨 이해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가 왜 이래. 묘하게 어긋나있는 이해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떡하니 서있는 정재현이 보였다. 쟤 아직도 저기 서있네. 이해찬을 향해 환하게 웃은 정재현이 고개를 저으며 사무실로 향했다. 얼씨구. 아주 해맑은 미소도 짓고 살 판 났네 정재현.

 

“와. 얼굴 진짜 끝장난다.”

“지랄. 너 저런 스타일 좋아하냐?”

“저 얼굴이 스타일 따져가면서 먹힐 얼굴은 아니잖아요 솔직히.”

“너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아?”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그것도 능력이다 능력.”

 

쌍엄지를 치켜드는 깝죽거림에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계산을 하러 오는 손님을 보고 겨우 참았다. 아 근무환경 너무 구리다.

 



15

 



“…을 좋아한다고?! 재현이형이?”

 

정확히 목적어가 잘린 문장에 발걸음을 멈췄다. 창고에서 옷을 찾던 와중에 박스가 터진 걸 보고 테이프를 가지러 사무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사무실 바로 앞에 위치한 휴게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정재현이 누굴 좋아하는데? 당장이라도 쳐들어가서 묻고 싶었다.

 

“아 그렇다니까. 이백퍼센트야.”

“와. 오바. 근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눈빛이 달라. 내가 또 눈치 백단이라서 이런 건 바로 캐치하거든.”

 

거들먹거리는 이해찬과 깜짝 놀란 이민형의 대화가 차곡차곡 내 귓속에 쌓였다. 그러니까 정재현이 누굴 좋아하냐고. 제발 그 이름을 한 번만 더 말해주길 바라면서 망부석처럼 그 자리를 지켰다.

 

“근데 확실한 거 맞냐.”

“나중에 딱 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려있는 게 누가 봐도 사랑이야 그거.”

“솔직히 나도 약간 둘 사이가 심상치 않은 거 같긴 했어.”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듣게 되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들어야했다. 감히 나를 잊고 정재현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거기서 뭐해요.”

“으아!!…니 근데 테이프가 어딨더라.”

 

곧 벽과 하나가 될 기세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와중이었다. 창고 문이 벌컥 열렸고 뒤이어 정재현이 들어왔다. 진짜 뒤지게 놀라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프로답게 아무렇지 않은 척 테이프를 찾았다.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휴게실을 지나 사무실로 들어갔다. 얘들아 혹시 테이프 어딨는지 알아? 일부러 질문까지 던지며 ‘나는 테이프를 찾고 있다’를 존나 강조했다. 근데 이놈의 테이프는 진짜 어디로 간 거야. 서랍을 뒤지는 손이 분주했다.

 

“여깄네요. 테이프.”

 

사무실 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고 있는 병아리들과 무표정을 한 정재현이 보였다. 정재현이 턱으로 휴게실 테이블 끝을 가리켰고 거기엔 테이프가 쌓여있었다.

 

“아니 누가 테이프를 죄다 여기 가져다놨지? 하하.”

“형. 여기가 원래 테이프 자리잖아요.”

 

아오. 씨발. 너무 당황해서 뇌까지 굳었나보다. 여전히 실실 쪼개는 이해찬과 또 나를 애잔하게 쳐다보는 이민형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도저히 정재현까지는 볼 자신이 없어서 급하게 테이프 하나를 챙겨서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아 퇴사 말려.

 



16

 



직장인에게 칼퇴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결국엔 정재현이 좋아하는 인간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한 채로 지옥철에 몸을 실었다. 폰을 꺼낼 공간도 없는 사이에 끼여서 골똘히 고민을 했다. 도대체 그 인간은 누구인가.

 

“설마 걔인가.”

 

꼬들꼬들하게 잘 익은 라면을 앞에 두고 젓가락을 내팽개쳤다. 구불구불한 면발에 겹쳐 보이는 건 히피펌으로 머리를 볶은 그 아이였다. 나보다 늦게 들어왔지만, 또 나보다 정재현과 친해보이던 그 애. 정재현과 그 아이가 자주 붙어있던 장면들이 눈앞을 스쳤다. 눈빛이 다르다던 이해찬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어쩐지 실실 쪼개는 게 이상하다고 했어. 서서히 맞춰지는 퍼즐에 점점 기분이 드러워졌다. 그럼 나랑 섹스했던 밤에 통화한 것도 걔인가? 설마 벌써 둘이 사귀나? 근데 나랑 잤다고?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어 무한증식을 했다.

 

“아 뭐야. 다 퍼졌네.”

 

모락모락 나던 김은 어느 샌가 자취를 감추고 퉁퉁 분 면발이 나를 반겼다. 결국 들었던 젓가락을 다시 한 번 내팽개쳤다. 하기야 내가 지금 라면을 후루룩 씹어 삼킬 기분은 아니지. 차라리 잘 됐다 싶어 그대로 냄비를 싱크대에 처박았다.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그릇을 애써 무시했다. 이럴 줄 알고 그릇을 많이 사두긴 했는데 진짜 이렇게까지 쌓아 둘 줄이야. 참 스스로가 징그러웠다.

 

“오늘은 그냥 잠이나 일찍 자야겠다.”

 

는 개뿔. 열시도 안 됐는데 잠이 올 리가 없지. 결국 내려뒀던 폰을 다시 집어든 나는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짤막한 예능 영상을 보거나 과일 맞추기 게임 따위의 정말 쓸모없는 일을 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정재현은 SNS를 하나? 걔나 나나 딱히 SNS에는 관심이 없었던 터라 사귈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었다. 결국 하던 게임을 급하게 닫고 인스타를 다운받았다. 그랬더니 이번엔 로그인을 하라 그래서 또 꾸역꾸역 계정까지 만들었다. 한글로 이름을 입력하려니 자꾸 사용을 할 수가 없다는 알림이 떠서 겨우 영어로 이름을 입력해서 만들어낸 소중한 계정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잠시 현타가 왔지만 그래도 궁금해 뒤지는 것보단 나았다.

 

“씨발. 무슨 정재현이 이렇게나 많아.”

 

돋보기 모양을 누르고 정재현 이름까지 곱게 적어 넣어서 드디어 끝인가 했더니 염병. 주르륵 뜨는 정재현들의 계정에 욕이 절로 나왔다. 프사가 없는 인간들도 여럿이라 이건 뭐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게 더 쉬울 정도였다. 이거 좀 쉽게 사람 찾는 법 없나.

 

“어. 해찬아. 나 도영이형인데.”

 

결국 내가 찾은 해결책은 현대문물에 빠르게 적응하는 새싹이었다. 저장된 번호가 없어서 걱정했지만 다행히 매장 인간들을 모아놓은 단톡이 있어서 재빠르게 친구 추가를 한 뒤 보이스톡을 걸었다. 내가 SNS는 안 해도 카톡은 빠삭하게 꾀고 있단 말이지.

 

“저기 그…. 있잖아.”

“아 뭔데요! 빨리 말해요. 나 바빠.”

“바빠? 뭐한다고 바쁜데 니가.”

“배그요.”

 

참 이해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말해야 티 나지 않고 잘 돌려서 말할 수 있을지 고민을 좀 하고 전화를 했어야했다. 급한 마음에 다리가 달달 떨렸다.

 

“끊을게요.”

“인스타!”

“뭐요?”

“내가 인스타를 만들었거든. 그래서 너랑 친구를 좀 먹고 싶은데 어떻게 찾아야 하나 싶어서.”

 

망했다. 그냥 오늘만 보고 삭제할랬는데 얼떨결에 계정을 만든 것까지 털어놔버렸다.

 

“이런 건 그냥 카톡으로 보내도 되잖아요.”

“빨리 친구 만들고 싶어서 그랬지 하하.”

“계정 카톡으로 보낼게요. 진짜 끊어요.”

“아니 잠깐…!”

 

정말 가차 없이 끊긴 전화에 혀를 찼다. 이 나쁜 자식. 내가 여태 지한테 떠먹여준 커피가 얼만데. 내가 진짜 궁금한 건 이해찬의 계정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정재현 계정을 찾는 일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다. 현타가 거하게 오려는 그때 카톡 하나가 도착했다. ‘kinghaechan.’ 아이디도 어쩜 이렇게 이해찬답지. 진짜 바쁜 건지 아님 내가 귀찮은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이디 하나만 달랑 왔다. 내가 앞으로 커피 사주나 봐라.

 

“대박.”

 

역시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구경이나 할까 싶어 이해찬 계정을 들어갔다. 와. 얘는 팔로워도 되게 많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보다가 익숙한 음료 사진에 눈길이 갔다. 내가 사주려던 걸 정재현이 뺏어가서 결제한 그 음료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진을 눌렀고 사진에 태그가 되어있는 계정이 눈에 들어왔다.

 

_jeongjaehyun

 

이건 누가 봐도 정재현이었다.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에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 했다. 이해찬 이 자식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되는 걸까. 앞으로 이해찬의 커피는 쭉 내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정재현의 계정을 눌렀다. 꽤 많은 수를 기록하고 있는 팔로워 수에 눈썹이 움찔했다. SNS에 관심 없다던 사람치곤 너무 높은 숫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팔로잉 수는 아주 깔끔하게 0이었다. 진짜 이상한 놈이다.

 

“아니 얘는 이럴 거면 인스타를 왜 해.”

 

사진 하나 없이 텅텅 빈 피드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친구도 안 먹고 글도 안 쓰면서 뭣하러 이딴 걸 만들고 지랄이야. 건져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팔자에도 없는 염탐을 하려니 목이 뻐근했다. 자세를 고치려고 몸을 꿈틀거렸다.

 

“아악!”

 

그러다 얼굴 위에 위치하던 폰이 정확히 내 코와 인중을 때리며 추락했고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인상을 찌푸리며 급하게 인중에 손을 가져다댔다. 진짜 존나 아파. 겨우 진정을 시킨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혹시나 멍이 든 건 아닐까 싶어 후딱 화장실로 가 거울까지 보고 왔다. 잘생긴 얼굴에 흠집이 나면 안 되지.

 

“씨발 뭐야 이거!”

 

아까까지만 해도 파란버튼이던 팔로우 버튼이 하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지금 얘를 팔로우 한 건가?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재빠르게 팔로우 취소버튼을 찾고 있는 와중이었다.

 

_jeongjaehyun님이 회원님을 팔로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주여. 고통스럽지 않게 죽는 약이 있다면 부디 제 입에 넣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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