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과 IT업계를 거쳤지만 그동안 나는 커리어의 대부분을 인하우스에서 쌓았고, 디자이너로 도약하기 위해서 에이전시 경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느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인하우스 디자이너는 어떤 회사에 소속되어 그 회사 안에서 발생하는 디자인 업무를 담당하게 되고, 에이전시의 디자이너들은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하게 된다. 따라서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은 자사 상품이나 브랜드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기 쉬우며, 어떤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디자인을 수정하거나 프로덕트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회사 내부의 관계자들과 지지고 볶는 과정에 전부 관여해야 하므로 정치적인 일에 큰 에너지를 써야 하는 단점도 있다. 반면에 에이전시의 일이라는 것은 의뢰받은 일을 수행해서 클라이언트에게 넘기는 것이므로, 프로덕트에 대해서 뚜렷한 주인의식을 가지기는 힘들지만 짧은 기간에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고 실력을 쌓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에이전시의 인간들은 외향적인 인간들이 주도해서 끌고 나간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에이전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클라이언트에게서 일을 따내는 것이므로,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하거나 무조건 큰 목소리로 의견을 밀어붙이는 능력이 중요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내 문화도 내가 지금까지 IT 업계에서 경험했던 것보다도 훨씬 시끌벅적해서 마치 미드 매드맨이나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세계에 떨어진 것 같았다. 피치가 성공해서 큰 클라이언트를 획득하면 그 날은 맥주를 온 회사에 돌리고 다들 치어스를 외쳤고, 금요일 오후에는 바에 회사 카드를 걸어놨으니 내려가서 마음껏 마시라는 독려도 있었다. 근무 시간에 전동 킥보드 레이스를 벌였고, 수요일 밤에는 탁구 대회가 열렸으며, 여름에는 해변에 모여서 비치볼을 했고, 할로윈에는 코스튬 대회를 열었고, 크리스마스에는 회사 밖 잔디밖에 나가서 샴페인을 터뜨리고 놀았다. 당신이 술을 좋아하는 파티 피플이라면 즐거울 수 있겠지만,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고 이런거 할 시간에 그냥 집에나 빨리 보내줬으면 싶었기 때문에 참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술자리에서 오른쪽 사람들끼리 이야기하고 왼쪽 사람들끼리 이야기하고 나만 중간에 끼어서 묵묵히 논알콜 음료를 마시고 있자면 정말 도망가버리고 싶었다.

회사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일하는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집중해서 디자인 작업을 하기 위해서 아무도 없는 회의실 안으로 도망치는 일도 빈번해졌다. 서로가 자기 목소리를 크게 높이는 회의에서는 나까지 아무말을 얹기 싫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보니 일부 극단적인 인싸들에게 "자기 주장을 말하지 않는다" "팀 플레이어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것을 싫어했을 뿐 꾸준히 훌륭한 아웃풋을 내고 있었고, 직속 상사와 팀원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단지 떠들썩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평가 절하를 당해야 한다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이후에 생각해 봤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말이 없고 수줍은 극단적인 내향인은 절대 아니다. 할 말도 하고 자기 주장도 있지만, 이 때는 너무 에이전시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었던 것 같다.

에이전시의 또 하나의 난점은 클라이언트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디자이너가 뛰어난 아이디어를 내놓아도 클라이언트가 싫다면 끝인 것이다.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해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문가는 나와 우리 팀원이지만, 클라이언트의 기분에 따라서 이걸 파란색으로 바꿔줘 빨간색으로 바꿔줘라는 요구를 하나하나 다 들어주고 있다보니 결과물이 산으로 가기 일쑤였고 업무에서 불만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클라이언트의 요구 자체가 '이것이 애초에 필요한 것인가?' 싶은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어떤 호텔 체인이 억대의 예산을 들여 만들고 싶다고 제안한 플랫폼은 '과연 이걸 사람들이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에이전시는 클라이언트가 돈을 준다고 하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꼬박꼬박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 바쳤고, '혹시 나는 디지털 쓰레기를 생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난점도 많았지만 나는 이 에이전시에서 항공, 호텔, 리테일 관련 프로젝트를 다수 맡을 수 있었고, 거의 찍어내는 수준으로 디자인을 양산하다 보니 실력도 많이 늘었다. 이력서에 에이전시에서 일을 했다고 한 줄 적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어떤 회사들은 채용 공고에 에이전시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우대한다고 적어 놓는 경우도 있을만큼, 에이전시에서의 경력은 확실히 커리어에 도움이 되었다. 아직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면 얼마간의 에이전시 경험은 충분히 추천할 만 하다. 하지만 나는 내향적인 사람으로서 에이전시의 문화에 너무 지쳐버려서 앞으로도 당분간은 에이전시에서 일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일본을 거쳐 홍콩에서 디자이너 일을 하고 있는 비혼 여성. 재미있고 영양 많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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