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라인 추가 되었어요 한번 보고 오시면 좋을 듯 ..! 






무중력 속에 붕 뜬 듯한 기묘한 감각에 얼마나 허우적 댔을까, 루시는 생각보다 늦게 눈을 떴다. 정우가 루시를 그의 안식처로 데려온 지 두 달이 훨씬 넘는 시점이었다. 처음 눈에 비친 것은 당연하게도 뜻밖의 천장이었으니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축 늘어진 몸에 힘을 실으려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황가나 높은 귀족들의 성채는 아닌 듯한 구조에 루시는 뭉근한 고개만 돌려 자신이 있는 곳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기도 잠시 가뭄이 인 듯 메마른 식도가 수분을 달라 아우성이라 별 수 없이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이 몇 시인지 그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 저를 데려 온 정우는, 이곳에 있는 건지. 덮혀 있는 포단을 옆으로 살짝 밀었다. 따뜻한 온기로 덮혀 있던 몸이 순식간에 찬 공기와 맞닿으니 저절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감각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피부로만 느껴졌을 뿐, 그래서 잠시 주춤 거렸을 뿐. 자신이 두 달 넘게 눈을 뜨지도, 몸에 힘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 만무했다. 오랜 기간 동안 회전 하지 않던 뇌가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잔뜩 녹이 슨 쇠가 움직이는 것과 같이. 그런 뇌는 활성화가 덜 됐으니 몸이 따라줄 리 없었다. 제 의지와는 다르게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어찌 제어할까. 

눈을 질끈 감을 반사신경 조차 깨우치지 못한 루시의 몸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무릎 부터 시작된 고통은 신경을 타고 정수리까지 도달한다. 다잡지 못한 정신 또한 육신과 같이 몸서리 치기 시작했다. 신음 소리가 구순 안에서 맴돌고 있을 때 쯤, 저 멀리서 부터 계단을 느릿하게 오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득해졌다가 선명해지기 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새 루시는 이젠 온 몸으로 퍼지는 고통을 모두 느껴야했다. 


”바닥이 찹니다.”

”…아아.”


엎어진 루시 위로 무감하기 그지 없는 성음이 내려앉는다. 그 성음과 함께 루시의 입에서 또한 앓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방 밖에서 허공을 떠돌던 찬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니 한기가 서렸다. 힘을 줄래야 줄 수 도 없어 몸을 웅크리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는 루시를, 리암은 장탄식의 한숨을 내뱉고 무릎을 굽혀 루시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손쉽게 들어올려진 루시는 매섭게 리암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암은 붕 뜬 루시의 몸을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그러면 루시는 침을 삼키어 메마른 식도를 적셨다. 


”..제가, 얼마나 여기 있었나요.”

”두 달 넘게 누워만 계셨습니다.”


두 달 넘게 아무 것도 안하고 처누워만 있었어요 너님은. 어디서 큰 소음이 났고 그 곳엔 누가 있는지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제 아무리 루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들, 넘어진 사람을 보면 괜찮냐고, 하다 못해 일어날 수 있겠냐는 형식적인 물음 정도는 던지는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던가. 루시는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리암을 향해 고앙 했다. 


”깨끗한 천 좀 가져다 주실래요.”

”…..”

”보시다시피 계속 누워만 있었더니 거동이 조금 힘들어서.”


리암의 시선이 루시의 무릎으로 향했다. 새빨갛다 못해 붉은 혈흔히 무릎에서부터 발목을 타고 흘렀다. 아. 리암은 속으로 탄식했다. 잠시 중요한 사찰로 자리를 비운 정우였다. 이 곳에는 아주 소수의 사용인들이 있지만 그들 보다는 제 종사인 리암을 더 신뢰했다. 두 달 넘게 깨어나지 못하는 루시를 홀로 두는 것이 마음 쓰여 리암에게 루시를 잘 살피라 명하고 이곳을 떠났다. 돌아와 이 몰골을 보시게 되면 칼날을 제 목에 들이미시겠군. 머지 않아 있을 제 미래가 그려졌지만 리암은, 제 앞의 루시를 마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하고 수상히 여겼다. 어쩌면 성찬보다도 더. 




정우와 리암은 당시 마수의 출현을 가장 먼저 목격했다.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신전 근처를 지나던 것도 한 몫했다. 큰 굉음을 따라 보면 이 수도에, 그것도 성스러운 루치아의 신전에 존재할 수 없는 마수의 출현에 정우와 리암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탑을 드나드는 이 입니다.”

”스켈루스의 제자였나.”


현 마탑주, 스켈루스에게는 제자가 있다고 들었다. 항간으로는 스켈루스 보다도 더 수월하게 마력을 다룰 수 있다고 하던데. 그건 그저 떠도는 소문일지, 소문으로 위장한 진실일지. 정우는 지성을 내려다보다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닿은 곳을 따라갔다. 마수가 노리는 것, 바들거리며 떨고 있는,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백색 수단을 입고 있는 검은 두상의 사제가 그것이었다. 기시감이 들어 정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기시감이 온 몸을 덮쳤을 때 마수를 피해 구르다시피 한 루시의 모습이 비로소 완전히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나가려던 정우의 몸이 우뚝 멈춰섰다. 기시감과 함께 기묘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쳤기 때문이다. 정우도, 리암도 그 광경에 눈을 떼지 못 했다.제 눈 앞에서 일어나는 실재는 정녕.


”주군, 저건…”


새카만 먹과도 같던 루시의 머리가 끝에서부터 점점 새하얗게 물드니 그 모습을 아무런 말도, 낯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던 정우에게 리암이 혼란스러운 듯 묻는다. 저건 마력이라고 봐야할까. 신전의 사제가 마력을 다루는, 마탑에 숨어든 자 였던가? 혹시 스켈루스의 또다른 제자인가? 혼동의 파도 속에 떠밀리기도 전에 정우가 낮게 제 종사를 불렀다. 리암. 제 이름 한번에 또, 제 주군이 대담한 짓을 할거란 생각이 든다.

 아무리 자신을 살렸다고 한들, 저 수괴한 자를 정녕 받아들이시겠다고요?

 속으로만 삼켜야하는, 존재 할 수 없는 물음이라는 걸 리암은 정우가 루시에게로 떠난 뒤 깨달았다. 아아 정우를 가장 오래 보았던 이라 자부하기엔 시간이 더욱 많이 걸릴 듯한 예감이 들었다.





/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백발과 그에 못지 않게 희디흰 안광. 리암은 정녕 대성당에서 제 주군을 숨겼던 그 사제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들었다. 자신의 외관을 변하게 하는 마력을 다루는 건가 싶다가도 그때 마수에게 쫓기다 시피 한 그 모습은 매칭이 안되었기 때문에 리암은 자신을 꿰뚫는 안광에 굴복 할 수 밖에 없었다. 의원을 불러오겠다며 바람처럼 사라진 리암을 뒤로 루시는 어느정도 다 잡힌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죽음을 수천 번 경험한 황태자의 피난처라 이거지. 크지 않은 창으로 부터 금빛 황궁이 보인다. 나름 그 후작가에 며칠 지내본 바로는 이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방실을 준다는 건 아주 귀한 손님이라는 거나. 그도 아니면.


”…..”


이 매너 하우스*의 주인이거나. 거칠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저가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인물이었다. 이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면서 뭐가 그리 급하시다고 뛰어오신 건지 흐트러진 금가락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두 눈을 깜빡이는 루시를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정우가 새하얀 루시와 대비된 색을 발견했다. 어느새 흉측하게 굳어버린 검붉은 피가 그것이었다. 정우가 미간을 찌푸림과 동시에 의원으로 추정되는 노체가 구급함으로 추정되는 목갑을 들고 허리를 굽히었다. 

*매너 하우스[Manor house]  : 서양에서 장원(莊園)의 영주나 대관(代官)의 주거를 말함. 성 만큼 본격적인 방어시설을 갖추지 않은 중세 후기의 저택.


”농인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됐어. 내가 하지. 나가 있으라 해.”


리암의 신호에 의원은 빠르게 다가와 침대에 앉은 루시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의원이 구급함을 엶과 동시에 정우는 자신이 하겠다며 의원을 물리라 명했다. 그럼 리암은 의원을 데리고 훤히 열려 있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정우는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옆의 암체어에 걸쳐놓았다. 황태자인 자신의 지위는 아예 도외시 하려는건지 무릎을 굽히고 열린 함에서 천에 알코올을 적셨다. 황태자인 줄 몰랐다고 하면 이러한 대우를 눈 딱 감고 받겠다만 이미 이 제국의 작은 태양임을 알고 또 그리 여겼기에 루시는 일부러 정우의 칭호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전하. 밖에 있는 의원을 불러주세요.”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그런게 아니라... 그리고 제게 경어를 쓰지 말아,”


경어를 쓰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루시의 청은 끝맺히지 못했다. 젖은 천이 무릎 위 상처에 닿으니 쓰라려 절로 인상을 일그렸다. 아아. 동시에 작게 신음하여 다리를 뒤로 빼면 정우는 루시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고정했다.


”많이 아프면 제 어깨를 잡아도 괜찮습니다.”


이제는 굳어버려 다소 흉하게 자리 잡은 피를 닦아낸다. 발목 근처에서 부터 찢어진 무릎 정중앙까지 그렇게 젖은 천이 루시의 오른 다리를 쓸었다. 제법 날이 추운 듯 한데 이상하게 몸이 더워진다. 루시는 입 한번 달싹 대지 못하고 발가락만 오므렸다. 두 어번 정도 다시 알코올을 적셔 소독을 반복하니 천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일련의 치료과정을 반복하던 정우가 다시 한번 깨끗한 천을 집어 루시의 작은 무릎을 돌돌 감아 고정했다. 아 여긴 밴드가 없지. 


”또 아픈 곳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어요.”

”두 달 넘게 아무 것도 못 드셨으니 치료하고 아래 내려가서 식사를 같이 들죠.”


그동안의 고단 했던 방랑자 신세를 언제쯤 면하려나, 신전에서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그런 푸념을 하곤 했다. 펠리시아의 장님에서부터 후작가의 머물다 간 고아, 신전의 반쪽짜리 사제. 성녀로서의 자질을 깨우치기 전에 죽겠다고. 두 달여간의 행동반경을 상기시키던 루시는 별안간 이 모든 행동이 무력하다 생각 됐다.

신성력을 일깨웠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그 힘으로 다 죽어가던 생명을 살렸다는 것에 대한 보람. 루시는 그 어느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럴 틈이 없었다는게 옳았다. 신성력을 깨우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한 마수는 아직까지도 선명히 떠올라, 루시의 어깨가 작게 떨었다. 정우가 그 떨림을 목도해 또 아픈 곳이 있냐며 갑작스레 고개를 들어 물으면 루시는 고개를 젓는다. 없어요. 

식사를 함께 들자는 말을 하며 정우는 제법 꼼꼼히 고정 된 루시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이곳 내부에 따로 실력 있는 의원이 있지만 그를 부르지 않은 것은 리암이 아직 루시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겠다. 정우는 제 종사의 뜻을 나름대로 존중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으세요?“

”.....“

”그 날 계셨던거죠? 카엘룸에.“


사실, 리암이 옳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숨겨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리도 수상한 자를 제 거처로 받아들인다는 게 올바른 일이 겠는가. 리암이 무얼 걱정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정우는 함을 정리 하다 별안간 루시의 물음에 멈칫했다. 


”..잠시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루시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녕 머무는 이 곳이 [구원의 성녀] 라는 소설 속이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에서 우연은 필연의 다른 말이었다. 지성이 그곳에 마수를 푼 것도 우연이고, 정우가 딱 그 순간 카엘룸을 지난 것도 우연. 남자 주인공들이 자신을 누르던 저주가 풀리던 순간에 맞춰 온 것도 우연. 지금 정우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거처에서 상처를 치료 받는 것도 우연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일까.

김여주는 다시금 원작을 복기했다. 



뱀한테 물린 상처 주변으로 퉁퉁 부은 아리아의 발목을 정우가 약하게 그러쥐었다. 발목 부터 마비되는 것 같은 감각이 생경해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많이 아픕니까?”

”아, 아니요. 괜찮아요.”

“아프면 제 어깨를 잡아요. 세게 잡아도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아무리 그래도...”


정우는 만류하는 아리아의 발목에서 손을 떼고 아리아의 허벅다리 위로 얹어진 두 손을 잡아 제 어깨 위로 친해 올려두었다. 괜찮다는 듯 별 말 없이 살풋이 웃고 옆에 의원이 가져다 준 천으로 가려진 얼음이 든 주머니를 잡았다. 조금만 참아요. 가냘픈 발목이 얼음 주머니를 견디지 못할까, 정우는 한 손으로는 아리아의 발목을 잡고 한 손으로는 얼음 주머니를 그 위로 얹었다. 그 순간 따라 제 어깨죽지의 옷깃을 움켜쥐는 힘에 작게 웃었다. 

단순한 부상에서 시작된 열상은 빠르게 퍼져갔다. 이대로면 열상에 허우적댈 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그러쥔 발목을, 움켜쥔 어깨를 놓지 않았다.

구원의 성녀 中 



우연이라기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활자들이 선명하다. 이와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원작에서 정우는 다친 아리아의 상처를 직접 치료해준다. 그 기점은 작 중 극 후반부에 속했으며 원작에서도 일부 마물은 출몰했다. 광장에서 시작된 무자비한 마물의 횡포로 인해 도망치던 아리아는 깊은 산기슭 절벽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쓰러진 그녀를 발견 한 게 황태자다. 그게 황태자와 여자 주인공의 때늦은 첫 만남 이라면 첫 만남이었다. 본연의 모습을 숨긴 채 황태자는 아리아를 그저 상처 입은 방랑자로, 아리아는 황태자를 깊은 산 속 거주하는 경부로. 

서로의 정체를 마주 하게 되기까지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에레무스에 황태자를 가두어 루치아를 향한 기도를 올려 그의 저주를 해결하려 했지만 그 전에 안타깝게도 제국의 하나 뿐인 황태자는 마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한 연유로 진작 제국은 황태자의 죽음을 인정하고 가엾게 여김과 동시에 안도했다. 저주 받은 황태자의 죽음을 희생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루치아의 노기를 잠재웠으니 이제 이 제국은 평온할테다. 제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 부고가 만 천하에 알려진 지 2년 뒤 마력전쟁, 쿠데타가 발발한다. 

마력 전쟁의 잔해가, 지성의 마력이 제국을 집어삼키기 전 발현된 아리아의 신성력. 이 제국을 굽어 살피실 성녀의 강림이시다. 그 부서진 잔해 속 정신을 잃은 지성을 껴안고 있던 아리아를 향한 제국민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황태자의 죽음, 마력 전쟁 그리고 성녀의 탄생. 이제 루치아의 힘을 이어받은 성녀님이 모든 걸 보살피실거야. 사람들은 굳게도 믿었다. 모든 것은 이제 평온할거라고. 

제국민의 신념은 정확히 1년 뒤, 마력전쟁과 성녀의 발현, 그리고 황태자의 영면식을 치르기까지 도합 3년 후, 산산이 조각난다. 피로 점칠 된 에레무스의 저주 받은 황태자가 살아 돌아 왔기 때문이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정우는 반란의 준비를 마친 채 스스로 황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물의 피인지, 인간의 피인지도 모를 피릿내를 뒤집어쓴 채 황제의 앞에 서 면수했다. 입은 망토를 벗어 피로 점칠 된 얼굴을 마주했을 때 황제는 소스라치게 놀라 발작했다. 

황가의 저주 받은 황태자가 살아있다. 에레무스에 가두어졌던 황태자가 돌아왔다. 황가는 불안에 떨기도 잠시 이 섬뜩하고도 끔찍한 사태를 잠재울 수 있다 여겨 손을 뻗은 곳이 신전이었다. 정확히는 더이상 공작가가 아닌 신전에 머물게 된 성녀, 아리아였다. 


“...정우? 네가 왜...”


그때 정우와 아리아는 서로의 정체를 마주한다. 상처 입은 방랑자와 깊은 산 속의 경부가 아니라, 진정한 본래 성녀와 황태자로. 황태자의 존함을 아는 것은 황가의 극 일부와 아리아 뿐이었으니. 원작에서도 아리아에게 정우가 자신의 본래 이름을 밝히니 리암은 소스라 치게 놀랐었는데.




”...루시?”


아프면 어깨를 잡아도 된다는 제안을 하며 직접 상처를 치료해주는 황태자. 원작은 비틀어졌다. 다만, 찢어지진 않았다는 건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흐름에도 틈틈이 원작의 설정과 장면은 그대로 반영 되었다. 이상하게 간담이 서늘해지니 상념에 깊이 빠진 것 같은 루시를 정우가 일깨웠다. 이제는 김여주 보다 루시라는 이름이 더 익숙했다. 루시의 고개가 제 자리를 찾으니 마주한 황태자의 두 눈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때 저한테 말씀 해주셨잖아요. 제가 안전하지 않다고.”

”..네, 그랬죠.”

”사실 전 안전을 따질 위치가 아니에요. 원래, 죽었어야 했거든요.”


그러한 수심 어린 눈빛에 루시는 정우가 내뱉었던 말을 확인하고 팠다.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겠다며. 이곳이 안전한지 확인 해보아야하지 않는가.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실담에도 정우는 아무런 낯빛 없이 무덤히 귀담아 듣기만 했다. 아무런 반응도,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런 정우의 반응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루시였다. 보통 이렇게 담담하게 반응할 소재가 아닌데 말이다.


”그저 신기해요.”

”..무엇이요?”

”비슷해서요.”


그렇게 반응할 이야기가 아닌데. 펠리시아 고아원, 그 곳에서 자란 유년 시절 그리고 일어난 화재. 단편적으로 이야기를 풀면 정우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 실담이 끝나고 조용히 두 어번 눈을 깜빡이고 하는 말이, 신기하다는 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뭐가? 루시는 순수히 의문이 들었다. 확인을 하려 제 실담을 토해냈건만 오히려 저가 앞의 황태자에게 의구심이 들었다. 


”나도 죽었어야 했으니까요.”


동화되는 감정에 정우의 낯빛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내뱉는 구절이 영, 참혹하긴 하지만. 금발의 가락 사이로 보인 눈빛에는 대성당에서의 처연함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를 만난 것에 대한 벅차오름이, 언뜻 비쳐온다. 


”…전하, 제 말은.”

”정우입니다.”


죽을 고비를 수십번 넘기게 된 것도, 도망자 신세가 된 것도, 제 아비에게 버림을 받은 것도 모두 신탁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루치아를 향한 기오 쯤은 루치아께서도 이해하시지 않을까. 에레무스에 처음 갇혔을 당시에는 루치아의 대한 불신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불신은 정우에게 오히려 득이 되었다. 불효라는 큰 죄를 지어도 이해해주시겠죠. 내가 당신을 염오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겠죠. 아비의 업보를 대신 짊어진 채 살아가는 나를, 보살펴주시겠죠.


”내 진짜 이름.”


이 모든 게 당신의 뜻이니. 월출한 달이 루시의 등 뒤로 비춰졌다. 정우는 낭요해 눈이 멀 듯 했지만 온전히 담아낸다. 상아를 삼킨 안광을.





짭성녀

: 로판을 비틀겠습니다





만개 했던 목련이 지고 다시 피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재현은 업무를 보다 제 집무실 한 쪽에 위치한 새장 속 부리로 털을 고르고 있는 자신의 전서조, 청조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어렴 풋이 기억만이 남은 그 날, 제 전서구가 돌아왔을 때 다리에 묶인 지물은 그대로 였다. 다만 수상쩍은 점은 지물 곳곳에 혈흔으로 추정 되는 것이 스며들었다는 것이었다. 묶인 지물이 신전에서의 양피지이라기에는 감촉이 매끈했다. 수신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회송되었다. 청조의 다리, 자신이 보냈던 간찰을 살펴보면 군데 군데 혈흔이 스며들어 알아 볼 수도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서조를 통해 전달 했던 질의서. 재현은 혈흔 투성이인 지물을 구겨 버렸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 요청해야할 듯 싶었기에.



”교황을 만나 뵈러 바론테로 향하셨습니다.”


카엘룸에는 부산스럽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재현은 주교인 성찬을 찾았으나 성찬은 당시 기어코 제 할아버지를 뵈러 북쪽 지방의 바론테로 향했다고 한다. 연유인지, 핑계인지. 재현은 카엘룸에서 소득 없이 마차에 몸을 싣으려던 때 카엘룸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익숙한 문양의 마차를 보았다. 그것은 후작가의 문양이었다. 분명 세례식 이후 후작가의 영식이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풍문을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실지였나. 후작가의 마차를 바라보다 저 멀리서 재민이 다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처음 보는, 종사로 추정되는 동혁이 있었다. 무언가 의심스러운 점으로는 그들의 딱딱하게 굳은 안색 위로 혼란스러운 듯한 기색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카엘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재현은 마차에 올라탐과 동시에 사용인에게 고했다.


”카엘룸에 속한 이들의 명단을 찾아봐라.”


루시라는 자를 꼭 알아내어 고해.




루시라는 자에 대해서 알아 봐주십시오

주인에게 도착하지 못한, 청조의 다리에 묶여 있던 질의의 대한 답을 직접 파헤치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명단에는 루시 라는 명칭이 버젓이 존재했다. 재현은 사용인을 보내 신전에 루시 라는 자를 데려와라 명했지만 다음 날 돌아온 사용인은 안절 부절해 하며 이리도 고하더라.


”..갑자기 사라졌다 합니다.”


꺼림칙하다. 재현은 그리 즉감했다. 

사실 루시에 대해 알아보게 된 것은 아리아가 주 요인이었다. 신전으로 갈 때면 언제나 아리아 몰래 제 심복을 심어 동행하도록 하였다. 제 아무리 신전의 사제가 보고를 한다 한들, 거짓을 고할 지도 모를 뿐더러 제 심복을 심어두는 편이 더 확실하다 생각됐기 때문이다. 청조를 통해 양피지에 적힌 통고와 제 심복의 답보는 모두 일치했다. 신앙심을 높이기 위해 썼다는 600카르트. 재현은 그 신앙심에 쓰일 보상액을 높여도 괜찮겠거니 생각했었다.


"돌아오는 길, 공녀님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무엇이?"


어김 없이 신전에서 아리아가 돌아온 이후 제게 답보를 하러 온 사용인이 평소와 다른 서두를 열었다. 재현의 손에서 움직이던 퀼펜이 멈추었다. 매끈했던 소공작의 미간이 찌푸려지니 사용인은 입이 타들어가며 손이 축축해져 뒷짐을 지었다. 


”..어딘가 불안해보이셨습니다. 창밖을 응시하시면서 작게 독백하시길..”


통렬한 재현의 눈빛에 사용인은 부러 호흡을 가다듬었다. 크게 침을 삼키고 구순 밖으로 내뱉는다. 


”루시...라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끊긴 통고와 되돌아온 피의 질의서. 그리고 사라진 루시 라는 심인. 재현은 고개를 틀어 창유 사이로 발할 준비를 하는 목련 망울을 응시했다. 벌써 몇 번이나 지고 폈지. 그 날 남았던 미심쩍은 감정이 이제는 흉스럽다. 그와 동시에 제 집무실 문을 가볍게 잇따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라버니 아리아에요.”

”들어오렴.”


재현은 루시에 의해 아리아에게 위해가 가해질까 염려스러웠다. 아직까지도 풀지 못한 찜찜함을 뒤로 메마른 퀼펜을 내려놓은 재현이 암체어에서 일어났다. 야심한 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열 여덟의 아리아는 얇은 모슬린* 차림이었다. 창백한 낯을 보니.

*모슬린[muslin] : 기본 800수에서 1,200수의 면사를 촘촘하게 짜서 표백하지 않은 투명한 직물. 


”또 악몽을 꾸었나보구나.”


4년 간 아리아는 악몽을 빈번하게 꾸었다. 이전에도 간간이 악몽을 꾸었으나 한동안은 잠잠하다 했는데 어느새부턴가 재발했다. 자세히 말을 하는 것을 꺼리지만 정확히 4년 전 신전을 다녀온 이후, 악몽은 현재까지도 지속 되었다. 제 사용인에게 루시 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그때부터 아리아의 악몽이 도지기 시작했다면 어쩌면..재현은 조심스레 예상해보았다. 아리아의 악몽은 루시와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얼굴도 모르는 루시를 향한 이 악징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 차림으로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제는 원숙한, 재현은 아리아와 함께 침방으로 들어갔다. 아리아가 심한 악몽을 꾸는 날이면 재현이 언제나 곁을 지켰다. 빈틈 없이 맞닿은 몸에 아리아는 더욱 재현의 품을 파고들었다. 재현이 아리아가 입은 얇다 못해 투명한 모슬린을 지적하면 아리아는 그 말에 대꾸 하지 않고 그저 재현의 품 속에서 섬어했다.


“..꿈이 너무 뜨거워서요.”


극열한 악몽에 아리아는 매번 앓았다. 감히.








짭성녀

: 로판을 비틀겠습니다



제국의 저주 받은 황태자황가와 대립하는 공작가의 소공작루시를 선망하는 빈민가의 개새끼신전 카엘룸의 추기경상단 제일 가는 후작가의 하나 뿐인 후계자황가와 맞먹는 크기의 마탑 주인






오른쪽 배우가 입은 옷이 모슬린


4 years later . . .

작 중에서는 18살이면 성인임. 내 마음. 암튼 그럼. 애들 다 성인이란 거임. ^^!

루시라는 자에 대해서 알아 봐주십시오

이건 9화때 재현의 청조 다리에 묶여있던.. 지성이가 키우는 마수에 할퀴어져 다 죽어갔던.. 지 살기 위해 루시 버리고 도망 쳤던 그 청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재현이 보냈던. 

꿈이 너무 뜨겁다 는 말 펠리시아 고아원 화재랑 연관 있음

사담이 지금 생각이 안 나거든요? 일단 잡수고 있어봐요..?

+ 본문에 관해서 덧붙일 설명 같은 게 있을까 했는데 없는 것 같아가지고 이번 회차 사담은 없..음.

하고픈 말은 그냥.. 복 많이 받으세요 저 보다도 더 많이 받으세요!!!!!!!!!!!!!

+ 타임 라인 추가

사실 11화 쓰면서도 타임 라인을 헷갈려 하실 듯해서 다음화 12화에 넣으려고 하긴 했는데 지금 넣을게요!

제국력 460 기준부터 464 까지 정우를 제외한 다른 남주들이랑 루시는 일절 만나지 못한 건 아니고 그냥 .. 스포라서 자세히 말을 못 하겠으나 마주치긴 해요 한쪽만 일방적으로

그건 다음회차 봐주시면 되어요! 궁금하신 점 있음 편지나 댓글 자유로이 남겨 주세요 마지막 연휴 기똥차게 즐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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