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 수정 및 재배포를 금지 합니다.







태릉 선수촌 1

W.대니









“들어가서 아침들 먹고 9시 반까지 개선관으로 다시 모인다. 알았어?!”

“네!!”



대답만 들으면 족히 10명은 넘을 법한 우렁찬 목소리들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10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었다. 남녀를 구분 짓지 않고 두 줄을 이룬 사람들이 뚝뚝 떨어지는 땀을 훔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휴-. 드디어 아침 먹는다.”

“배고파 죽겠어요, 형.”



여전히 트랙을 지켜보는 코치의 앞에서 다들 한숨을 작게 내뱉으며 각자 나름대로의 마무리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 섞여 마찬가지로 마무리 운동을 하고 있던 희연이 점점 가까워지는 별이와 그런 별이를 보며 몸을 풀고 있는 코치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6바퀴 남았다.”

“아,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응, 나 무 할게. 너 배추 해.”

“하아-. 진짜 싫다.”



혼자 25바퀴를 뛰는 것도 서러워 죽겠구만. 어떻게 저런 개그를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칠 수가 있지. 전생에 뻔데기였나. 듣자마자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질색한 별이가 코치 너머에 있는 희연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먼저 들어가. 제 입 모양을 읽었는지 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먼저 밥을 먹겠다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별이는 수신을 완료했다는 듯 그런 희연에게 다시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제 진짜 100일 남았다. 연애는 올림픽 끝나고 즐기시지?”

“제가 알아서, 후우, 자알 할게요.”

“야, 너 진짜 예선 탈락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걔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래서 어제가, 마지막 평일 외출이었다니까요-. 아, 진짜! 코치님 연애나 신경 쓰세요! 확, 그냥-. 그때 일 말해버릴까 보다. 하아,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 그렇게 나와 봐요.”

“…….”



미소와 함께 여유로움이 갖춰졌다. 제 할 말만 마치고 좀 더 앞서 뛰어가는 별이에 코치가 벙찐 얼굴로 그 뒤통수를 보았다가 이내 ‘아오-. 저걸 그냥.’하며 다시금 별이를 쫓았다.



“실력이 받쳐주니까 봐주는 거지. 이따위로 하면서 결과까지 반항적이었으면 넌 내 손에 죽고도 남았다. 어?”



코치의 말에도 별이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상태에서 치켜 올린 엄지가 별이의 몸을 툭툭 찔렀다. ‘어차피 주인공은 나야 나-.’ 씨익 웃으며 한 1년 전 유행했었던 노래를 흥얼거리다가도 뒤지게 힘들어서 몇십 보도 못 뛰고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별이는 앞섬을 잡고 옷을 세차게 펄럭였다. 분명 일어나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추웠던 것 같은데. 더운 걸 넘어서 이제 제 열기에 제가 데일 것만 같다. 저지를 벗어 어깨에 걸친 별이가 거친 호흡을 힘겹게 가다듬었다.



“한 바퀴 남았다.”



옆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코치의 목소리에 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아, 찝찝해. 하지만 얼굴만큼이나 젖어버린 손등 탓에 눈가의 땀이 닦아지지가 않는다. 오히려 문대서 세수를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별이는 티셔츠의 배 부분을 잡아 올려 얼굴을 거칠게 닦아냈다. 땀을 충분히 닦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 올린 티셔츠는 내려가지 않았다. 몸에 직접 닿아오는 찬 공기가 좋아서 좀 더 티셔츠를 잡고 있는데 별안간 귓가에 여러 발소리와 함께 다른 남성의 목소리가 날아든다.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에 별이가 급하게 손을 내렸다.



“오, 문스타. 복근 봐라-. 개인 훈련하는 거야?”

“하아, 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니 너무나도 잘 아는 펜싱팀 코치였다. 별이는 고개를 까딱 숙이고는 그 뒤에 나타난 대열을 훑었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가고 얘 혼자 뛰어요?”

“이미 끝나서 밥 먹으러 갔죠 뭐. 얘는 벌, 억.”



시선을 대열에 고정시킨 별이가 ‘벌’이란 말을 듣자마자 팔꿈치로 코치의 옆구리를 몰래 가격했다. 조금 더 세게 쳤어야 하는데 드디어 눈에 오래도록 담고 싶은 사람을 찾았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아직 잠에서 덜 깬 눈이었다. 아주 무해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것마저도 사랑스럽기만 했다. 기분이가 매우 좋다.

별이는 씨익 웃으며 뒤처진 코치를 잡아끌었다. 이게 마지막 바퀴니까 끝나면 조금만 보고 가야지-.



“너 내가 만만하지?”

“에이, 제가 어떻게 감히-.”

“와, 얼굴에 웃음 꽃 핀 거 봐라. 좋냐?”

“그럼요-. 좋아 죽죠. 그러는 코치님도 좋아 죽겠다는 표정인데?”



대략 반년 전, 제 코치와 펜싱팀 코치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우연찮게 알게 되면서 코치와 둘도 없이 가까워지게 되었고(서로 같은 성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은 그 사실을 이용해 전보다 더 편한 선수촌 생활과 연애를 즐기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 연애의 반은 코치님이 도와준다고 해야 하나. 선수라면 저녁에 있는 자율훈련 뒤에는 숙소로 꼭 돌아가야 하는 반면에, 코치는 그런 것에 전혀 제약이 없었다. 그렇기에 어디로 도망가지 않을 테니 펜싱팀 코치를 만날 때 꼭 데리고 가달라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 결과, 두 손 두 발을 다 든 두 사람 뒤에 꼭 붙어 다니며 데이트를 하곤 했다. 물론, 펜싱팀 코치가 데리고 나오는 제 사람과 같이.

다른 선수들에게는 미안하게도 어떻게 보면 특혜이기도 하지만 자유를 준 만큼 또 적당한 선을 잘 지키고 있어서 지금까지도 별 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선수관리’ 차원이란 명목이 붙었지만 이런 행보에 전에는 잠깐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던 적도 있었다. 바로 당사자들은 재미가 하나도 없었던 전혀 근거 없는 코치-선수 열애 설. 그 얘기를 듣고 저는 제 코치와 어이없다는 듯 서로를 보고 토를 하는 시늉까지 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길게만 느껴졌던 트랙인데 펜싱팀에 대해 아니, 서로의 애인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달리기가 끝났다. 별이는 몸을 풀기 시작한 펜싱팀 앞으로 돌아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15바퀴도 힘든데 25바퀴를 뛰어서 거친 숨이 도무지 진정되지가 않는다. 당장이라도 맨바닥에 드러눕고 싶은데 얼른 마무리 운동을 하고 아침을 먹자며 잡아끄는 코치였다. 별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펜싱팀이 있는 곳을 향해 턱짓을 해보였다.



“10분만 챙겨주세요.”

“안 돼.”

“그럼 7분?”

“안 된다고 했다.”

“…코치님이 부른다고 하면 되나?”

“너, 내 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냐?”



이를 꽉 물고 얘기하는 코치의 이마에 왠지 만화에서나 볼 법한 사거리 핏대가 선 것 같았다. 별이는 모른 척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안 된다고 하면 별수 없지만 한 번 보니까 계속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잠깐이라도 얘기하고 싶어서 선뜻 알겠다는, 밥 먹으러 간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잠시 이어진 침묵 속에서 몸을 풀며 눈치를 슬쩍 보고 있는데 별안간 코치가 썩은 미소를 머금었다. 슬슬 다가오는 코치에게 어깨를 내어준 별이가 그 위로 두어 번 떨어지는 투박한 손을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무섭게 왜 이래요, 갑자기.



“김 코치님. 애들 이제 트랙 뛰죠?”

“그래야죠?”

“이놈이 세 바퀴 정도 더 뛰고 싶다는데 같이 뛰어도 되죠? 어휴-. 진짜 연습벌레라니까. 우리 별이 100일 남아서 마음 독하게 먹었구나.”



…….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양반아!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숨을 다잡고 있던 별이가 경악과 동시에 어깨에 둘러진 팔을 매섭게 내쳤다. 온 힘을 다해 노려보고 있는데도 눈에 보이는 미소는 가실 줄 모른다.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기특하다는 칭찬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이로 가장 막내인 별이는 차마 입 밖으로 큰소리를 내지 못하고 최대한 목소리를 죽여 가며 주먹으로 코치의 등을 툭툭 쳤다.



“얘기할 시간 달랬지, 언제 운동할 시간 달라 그랬습니까?”

“3바퀴 돌면 10분 정도 되더라고. 왜? 시간 더 필요해?”

“…….”



아, 젠장. 이제 와서 안 하겠다고 말하기에는 펜싱팀이 벌써 제자리를 남겨두고 대열을 거의 다 맞춰 놓았다. 별이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주먹을 꽉 쥐고 파이팅 포즈를 해보였다.



“그, 그럼 열심히 해야죠.”



병을 주는 건지 약을 주는 건지. 이제 와서 챙겨준다고 김 코치님한테 신호 보내는 것 봐. 하, 얄미워 죽겠네. 어깨를 토닥이는 손을 붙잡아 매몰차게 내친 별이가 코치가 있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갈라니 입술을 축였다.



“그럼 용선이가 별이랑 맞춰서 뛰고 15바퀴 간다-. 실시!”








* * *








“저, 사인 좀 해주세요!”



집합시간 20분 전, 도복으로 바꿔 입고 슬슬 걸으며 집합 장소로 향하던 중이었다. 난데 없이 앞으로 훅 들이 밀어진 하얀 종이와 펜에 별이와 희연이 앞에 선 사람을 한 번,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다시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 와중에도 옆을 지나치며 인사를 건네는 동료선수들었다. 별이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가 종이를 받아 들고 눈앞에서 흔들었다.



“무슨 사인이요?”

“언니. 별이 언니 사인이요.”

“역시 우리들의 문스타.”

“문스타는 무슨 문스타야. 여기 언제 들어왔어요? 처음이죠?”



엄지를 치켜들고 놀리는 얄궂은 행동에 정색한 별이가 펜 뚜껑을 입에 문 채 다짜고짜 희연을 빙글 돌렸다. 등에 종이를 올려놓자마자 알아서 허리를 살짝 굽혀준다.

앞에 선 여자로부터 들려오는 어제 입소했다는 말에 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사인을 해갈 사람은 다 해가서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도 안 나니까. 펜을 현란하게 놀리며 한창 사인하고 있는데 희연이 인기 없는 사람을 더 서럽게 만들 거냐며 큰소리를 친다. 닥치고 가만히 좀 있어보라는 별이와 꿀렁대는 희연 사이에서 수줍게 서있던 여자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냈다. 이윽고 화면에서 흘러가기 시작한 영상 하나가 별이와 희연의 앞으로 자랑스럽게 내밀어졌다.



“저희 아빠, 아니, 아버지가 이거 보시고 언니 멋지다고 바로 팬 되셨거든요.”

“이게 뭐,”

‘……점수 따려는 태권도죠. 저는 이게 태권도라고 생각 안 하거든요. 무슨 발 펜싱도 아니고, 이번엔 제 방식대로 할 겁니다.’

“…….”

“크흡.”



무언가 했더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4년 전 올림픽 인터뷰 영상이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별이의 옆에서 희연이 급하게 입을 틀어막으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담았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4년 전에 탄생한 모든 영상을 삭제시켜버리고 싶다. 불태워버리고 싶다. 지금 발차기를 미친듯이 하고 싶다.

별이는 밀려오는 창피함에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엄지손가락으로 재생 바 중간을 눌러버렸다. 그 탓에 영상은 극 초반에서 중간으로 넘어가 또 다른 인터뷰를 들려주었다.



“……저한테 의미가 없는 메달인, 죄송, 흡, 합, 니다.”



미친…. 미성년자였던 문별이가 주저앉아 세상 서럽게 운다. 별이는 영상 속의 제 모습을 보자마자 홈 버튼을 미친 듯이 누르기 시작했다. 제발 꺼져줘라, 4년 전의 나.

여전히 끅끅거리며 웃는 희연과 고개를 갸우뚱하며 바라보는 여자에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별이가 종이와 펜을 급하게 돌려주고 희연을 잡아 끌었다. ‘그만, 웃어라.’ 말 한 글자 한 글자에 감정을 꾹꾹 담아 내뱉었는데도 여전히 웃겨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별이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흑역사 중에서도 최악인 4년 전, 저 인터뷰 내용 때문에 올림픽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한참을 시달려야 했다. 태권도 하는 사람들을 욕보인다느니, 역시 한국은 메달을 따도 행복하지 않다느니 하는 외신반응에 윗사람들로부터 욕이란 욕은 다 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을 몰랐기에 기분대로 저렇게 했던 것이었다. 만약 알았다면, 알았다면 저렇게 안 했지…. 아, 창피해.

개선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간신히 원래의 얼굴색을 되찾은 별이가 희연의 등을 손바닥으로 떠밀며 안쪽으로 먼저 들여보냈다.



“너 안 들어가?”

“잠깐이면 돼.”

“아, 알았으-.”



제 등 너머로 펜싱팀원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의도를 알아챈 희연이 더 이상의 보챔 없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별이는 바닥을 툭툭 차며 조금 기다렸다가 금방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재빠르게 다가가 손목을 낚아챘다.



“찾았다.”

“어, 별아-.”



선수촌 내 훈련 시간은 정해져 있기에 어쩌면 만날 수도 있겠다 생각은 했었지만, 별이가 기다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다.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용선이 이내 다른 동료들과 있을 때보다 더 밝게 웃어 보였다. 오늘 아침에 3바퀴나 더 달리면서까지 봐 놓고 또 뭐가 그리 좋은지. 환히 웃으며 얼굴 이곳저곳을 눈에 담는 별이에 용선은 대열을 벗어나 잠깐 서서 살짝 흐트러져 있는 별이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 손길을 가만히 받다가 이내 손을 겹쳐 잡고 천천히 내린다. 용선도 입가에 미소를 걸고 다정하게 쳐다보는 별이의 시선을 마주했다.



“왜-.”

“그냥. 그냥 좋아서.”

“뭐야. 나 이제 가야 돼, 별아.”

“알았어. 이따 봐요. 훈련 잘 하고 다치지 말고-.”



별이는 그 말을 끝으로 용선의 볼을 감싸 쥐었다. 곧바로 입을 맞추려는데 용선이 뚱한 표정으로 한 발짝 멀어진다.



“왜?”

“누가 보면 어떡해.”

“아무도 없어. 그리고 힘내서 운동하게 한번만 해주지-.”



한 발짝 다가가 이번엔 한 손으로 뒷목을 천천히 끌어 당겼다. 서로의 숨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제 옷을 꼭 쥐는 용선에 다시금 다가가 입을 맞추려는데 채 닿기도 전에 손에 있던 얼굴이 빠져나갔다. 별이는 이게 뭔가 싶어 용선이 서있던 곳에서부터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용선의 뒤로 용선의 코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와, 진짜. 이건 무슨-.



“어휴-. 선수보호차원에서 데려갑니다.”

“뭐에요, 김코치, 아!”

“예-. 죄송합니다. 빨리 데리고 가세요. 안 들어 가냐?”



딱 소리와 함께 이마에 고통이 스며들었다. 손바닥으로 맞은 곳을 문지르는 별이의 뒤로 죄송하다는 말을 건넨 코치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훈련 끝나고 해, 끝나고.








* * *








“우리 문별이 선수. 해외에서도 극찬이 자자하던데, 덕분에 우리나라 태권도 미래가 아주 밝네요. 이번에도 잘할 거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펜싱 플뢰레 부문 김용선입니다.”

“아-. 저번 올림픽 때 시합 잘 봤어요. 그때 멋지게 금메달 따내는 거 직접 봤는데, 진짜-. 이번에도 파이팅 합시다.”

“아, 네-.”



한 줄로 세워 놓고 뭔 짓이람. 차례차례 손을 잡아주며 걸음을 옮기는 대통령을 따라 기자들도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는 가운데 별이가 뻐근한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가 쿡 찔러오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며 등을 문질렀다. 보나마나 코치님이겠지. 올림픽 100일 전이라며 방문한다는 대통령 소식에 전 올림픽 메달리스트들 중 이번에도 국대로 뽑힌 선수들에게 집합 명령이 떨어졌었다.

4년 전과 똑같이 월계관 그러니까, 체력 단련장에서 보여주기 형식으로 꼼짝없이 몇십 분을 서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재미도 없고 상당히 지루하다. 별이는 제 순서가 지났으니 이제 그만 나가도 되는지 코치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조용히 손을 맞잡아오는 용선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별아.”

“아, 응-.”



긴 말 없이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별이가 곧바로 단전 밑에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 사납게 움직였던 애가 목소리 하나만으로 차분해지더니, 태도가 확 바뀌었다. 한쪽에서는 웃음소리가 별이의 뒤에서는 한숨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 * *








“다른 분들은 지금 대통령님과 같이 식사하러 가실 거고, 훈련 사진은 태권도팀부터 찍을 겁니다. 대통령님 식사 마치시면 지금 여기 계신 분들 그대로 건물 앞에서 사진만 찍으면 끝이구요.”



예상시간보다 늘어지는 일정 탓에 기자들 중 한 명을 붙잡고 물어보니 밥도 못 먹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말에 다시 개선관으로 돌아왔다. 별이는 코치가 던져주는 호구를 마지못해 받아 들었다. 용선을 포함해 모두 식당으로 간 지금, 대포 같은 카메라를 지니고 있는 몇 십 명의 기자를 쭉 훑어본 별이가 제 코치를 찾았다.



“진짜 해요?”

“해야지. 발만 들고 서있을 수는 없잖아. 희연아, 준비 됐냐?”



팔과 다리 보호대를 하지 않는 것은 좋지만 체급 차이까지 무시하고 정말이지, 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보여주기 식인 겨루기였다. 별이는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질끈 묶고는 보호대를 찼다. ‘어차피 사진 찍으려고 하는 거니까 적당히 하자.’ ‘오키.’ 등 뒤로 다가와 보호대 끈을 당겨주는 희연과 빠르게 합의를 본 별이가 이내 뒤돌아서 제 헤드기어를 가볍게 툭툭 내리쳤다.



“시작!”



코치의 목소리와 함께 가볍게 뛰기 시작한 희연과 별이가 스텝을 바꿔가며 조금씩 옆으로 돌다가, 미리 합을 맞춰 본 듯 서로 번갈아 가며 공격을 주고받았다. 각자 제 스타일이 아닌,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겨루기를 하는 둘에 코치도 눈치를 채고는 기자들의 눈치를 쓱 살폈다. 그래, 사진만 잘 찍히면 됐지.

평소와는 다른 스타일에 이따금씩 어색함이 느껴졌다. 별이와 희연은 그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한 번씩 몸싸움을 하듯 가까이 붙었다. 그럴 때마다 살벌한 눈빛대신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 끝나는 건데, 이거.”

“몰라, 배고프다.”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주고받았다가 코치의 제지로 다시 멀어졌다. 두 사람은 때마다 가까이 붙어서 대화를 몰래 이어나갔다.



“저기, 문별이 선수.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보여 줬던 그 발차기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뛰다가 멈춰 서서 되묻고는 코치님을 슬쩍 바라보니 턱짓을 하신다. ‘아, 알겠습니다.’ 세계 선수권 대회라면 굳이 어떤 것인지 얘기하지 않아도 K.O. 시켰던 발차기를 가리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발 뒤로 물러선 별이가 희연을 향해 되도록 높이 올려 찰 테니 돌려차기로 들어오고 나서 바로 고개를 숙이라고 신호를 주면서 다시금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그게 쉽게 되냐는, 왠지 욕이 담긴 것 같은 희연의 입 모양을 본 것 같지만 다들 하라는데 어쩔 수 있나.

발을 번갈아 가며 스텝을 밟을수록 점점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거리를 조금씩 좁히며 두세 번 뛰었을까, 알맞게 제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별이에 희연이 주저하지 않고 오른발로 별이의 옆구리를 노렸다. 이쯤 되면 들어 올 것이라고 별이도 예상했었는지 반 바퀴 돌면서 기막히게 날아드는 오른발이었다. 희연은 발등으로 별이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밀어내며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뒤로 젖혔다. 짜고 치는 대련이라 한들, 그래도 상대의 주 기술을 알고 맞는 멍청이 같은 짓은 하기 싫으니까.

빠르게 피한 탓에 무게 중심을 잃고 뒤로 주저앉은 희연이 별이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야, 앞으로 숙였으면 맞고 기절했겠는데?’ 기자들이 단체로 ‘오-.’하는 소리에 묻힐 뻔했지만 간신히 알아들은 별이가 손을 뻗어 희연을 일으키며 픽 웃었다.



“넌 체급 짱이라 맞아도 괜찮아.”

“짱이라니 한 체급 차이잖아. 다음엔 어디로 숙여야 하는지 앞뒤도 구분해서 말해줄래?”



남들이 보기엔 너무 말라서 저 발차기를 맞아도 아플까 생각이 드는 별이지만, 여러 번 맞붙어본 희연은 특히 뒤 후려 차기에 있어서 스치기만 해도 몸이 저릿저릿한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괜히 국가대표로 뽑힌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겨루기를 할 때마다 들어오는 공격에 흠칫할 때도 많았고, 지금만 해도 ‘하마터면’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연달아 나온다. 내심 가슴을 쓸어내린 희연이 갑갑한 보호대를 벗어냈다.



“어?!”



그에 반해 무심하게 별 탈 없이 겨루기를 마쳤다는 생각을 한 별이가 하나둘씩 나가는 기자들 사이로 용선을 발견하자마자 급하게 머리보호대를 벗어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떨어져 있는 기둥에 기대서서 제 코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용선의 코치에게 잠시 시선을 둔 별이가 금방 눈길을 거두고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용선의 볼을 콕콕 찔렀다.



“뭐야아-.”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요? 점심 먹으러 간 줄 알았더니.”

“겨루기 시작할 때부터? 밥 먹을 선수들 안에 많다고, 코치님이 너 봐도 된다고 해서 따라왔어.”

“오구, 그래써요? 발차기하는 것도 봤나?”

“봤지. 봤는데….”



싱글벙글 웃으며 눈을 지그시 맞춰오는 별이에 용선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태권도가 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발을 주로 사용하는 운동에 있어서만큼은 이상한 자부심을 갖고 매일 같이 놀려오는 별이였다. 용선은 오늘도 그 눈빛을 읽어내고는 ‘나도 다리로 잘하는 거 있거든. 그만 놀려-.’하며 검지로 별이의 이마를 꾹 밀어냈다.



“아-, 귀여워, 진짜. 뭔데요?”



볼을 콕콕 누르는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다시금 가까이 붙은 용선이 별이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저보다 살짝 큰 키지만 까치발을 들기엔 자존심 상하는 그런 키 차이. 고개를 조금 숙여준 덕에 제 앞에 가까워졌다. 귓가에 작게 속삭인 용선이 순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렇게 제 할 말만 하고 천천히 멀어졌다. 그런 용선을 두고 제가 무슨 얘기를 들은 건가 싶어 멍해진 별이가 소리가 날 만큼 침을 느릿하게 삼켰다. 오늘 훈련 몇 시에 끝나더라….



‘다리로 네 허리 감는 거 잘해.’






[01, Epilogue]






“코치님!!!!”

“아이씨, 깜짝이야! 왜!”

“오늘 희연이랑, 방!!”

“안 돼.”

“네? 아니, 끝까지 들어보…….”

“응, 방 바꾼다고? 안 돼. 안 바꿔줘. 그럴 생각 없어. 돌아가.”



(……)










- - - - -

보시면 글이 예전과 조금 달라진 걸 느끼실 수 있으실텐데, 태릉 2편까지는 2020ver.로 나갑니다 ㅎㅎ


※ 국대 개정을 준비하는 기간에 블로그 close가 결정났기에 전부가 아닌, 개정 된 부분까지만 2020ver.으로 올립니다. 참고 바랍니다.

대니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