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중에 사냥이라니요. 세상의 눈이 두렵습니다.”

“뒷 산에서 지인들과 활 시위를 겨눈 것 뿐이니, 너무 염려치 마시지요.”


그나마도 희박하던 웃음기를 싹 지운 수양이 제 앞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넘겼다. 왜 아침부터 이리 찾아와 시답잖은 얘기들을 풀어놓는 것인지. 


“듣자하니 대군께서 요즘 감싸고 도는 계집이 있다 들었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입니까.”


수양의 한 쪽 눈썹이 움찔거리며 올라갔다. 


“감싸고 도는 계집이라니요. 그저 부상을 당한 것을 발견하여 측은한 마음에 잠시 거두었을 뿐입니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셔야지요.”

“왕족이라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닌가 봅니다. 나이를 이리 먹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써야 하고. 또,”


수양이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직도 이리 어린애 마냥 대감의 잔소리를 들어야하니 말입니다.”

“대군.”


하하. 수양이 호탕하게 웃었다. 웃음 소리가 멎아갈때 즈음, 수양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그 옛날의 대감이 가르치던 어린 함평대군이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정적이 흘렀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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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들. 유화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제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여자를 가만히 불렀다.


“저기...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아, 일어나셨습니까. 대군 나으리께서 잔치를 여셨습니다, 아가씨.”

“잔치?”

“예.”


잔치라... 남은 아파서 죽겠는데 자긴 신났다 이거지. 하여튼. 인간들이란. 유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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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 김종서 대감께도 전갈을 보낼까요.”

“되었다. 그 자라면 분명 알아서 올 테지. 호랑이 귀가 좀 밝아야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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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이 잔치를 열었다고?”

“예.”

“상 중에?”

“... 예.”

“허, 참... 어찌 그리 망나니 같은 행동만 골라서 하는지. 계속 주시하거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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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시여-”

“명 황제의 동쪽으로 있는 나라를 지배할 분이 틀림없습니다.”




술에 취한 이들의 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가득했다. 차기 왕은 나다, 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듯 수양은 용포를 걸치고 나타났고, 암암리에 수양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수양에게 아부하기 바빴다. 내로라 하는 점쟁이들이 몰려와 수양에게 꾸며낸 점괘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래, 명 황제의 동쪽으로 있는 나라를 지배할 이라. 어디, 김종서의 점괘도 한 번 봐 보거라.”

“예...? 소인이 김, 김종서 대감의 점괘를요?”

“그래. 내 그 자의 점괘가 무척이나 궁금하구나.”


예상치 못한 수양의 말에 일순간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명 황제의 동쪽으로 있는 나라를 지배할 사람이라 점괘를 올린 이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세상에 누가 그곳에서 김종서의 점괘를 보라 명할 것을 예상했겠는가.


“가, 감히 소인이 어찌 김종서 대감의 점괘를 보겠나이까...”

“감히, 감히라 하였느냐. 그럼 내 점괘는 어찌 보셨고.”


수양이 술병을 내던지고 성큼성큼 단상에서 내려와 제 앞의 무관의 칼을 빼들어 사내의 목에 겨누었다.


“내 점괘는 보면서 김종서의 점괘는 감히, 라서 못 보겠다 이 말이냐.”

“나으리, 그, 그것이 아니오라,”



수양의 칼날이 사내의 목을 파고들었다. 행동과는 다르게 웃음을 띄고 있는 얼굴이 오히려 보는 이들의 심장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 나라가, 이 씨의 나라인가 김 씨의 나라인가. 태조께서 피 흘려 세운 종묘사직을 가지고 노는 것을!”

“사, 살려주십시오 대군 나으리. 살려주십시오!”

“내가 손잡은 늙은 호랑이가 내일 당장 어린 왕을 밀어내고 권력을 잡을 수도 있어!”

“나, 나으리! 제발 목숨만,”

“그만들 하시지요.”


고요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연회장을 뚫었다.


“제 점괘까지 봐달라 하시니 감격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군.”


김종서였다. 유유히 걸어 들어와 수양 앞에 마주 선 김종서. 이리와 호랑이의 대립이라.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수군 거렸다. 김종서가 팔을 뻗어 사내의 몸을 끌어 당겼다. 내 점괘는 다음에 자네가 꼭 한 번 봐주시게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등을 떠밀어 벌벌 떠는 사내를 연회장 밖으로 내보냈다.


“불필요한 살생은 하등 좋을 것이 없지요.”

“오셨습니까. 안 그래도 막 전갈을 보내려던 참인데, 어찌 알고 이리 먼저 오셨습니까. 하하.”

“호랑이 귀가 좀 밝아야지요.”


김종서는 웃었지만 수양은 웃지 않았다.


“아까 분명 상 중이니 백성들의 시선에 주의하시라 당부드렸거늘, 이젠 잔치까지 여십니까.”

“하하. 아까 분명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라 일렀을텐데요.”

“이제 아예 대놓고 모반을 하시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아직 버젓이 주상이 계신데 대체! 그 의복은!”


수양이 용포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그리곤 아까의 그 미소를 다시 지어 보인다.


“연회 분위기에 흥이 올라 술기운이 과했던 모양입니다.”

“... 반역의 길을 걷지 마십시오.”


수양을 한참이나 가만히 노려보던 김종서가 돌아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양은 칼을 내던지고 돌아서며 호탕하게 웃는다.


“오늘은 여기서 파해라.”


궁을 쏙 빼닮은 연회장이 적막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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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조용해진 밖. 유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개를 살짝 내밀어 밖을 보니 사람들은 어느새 다 물러가고 고요했다. 


“잔치가 뭐 저리 빨리 끝난담. 난 음식 맛도 못 봤는데. 치사한 놈 같으니.”

“아쉬우냐?”

“엄마야!!!!!!!! 아, 놀랬잖아,”


수양이었다. 소리 없이 뒤에서 나타난 수양에 놀란 유화가 비명을 질렀다. 


“... 요.”


상당히 짧은 유화의 말에 심기가 불편했는지, 수양이 한 쪽 눈썹을 들어 올린다. 그 눈빛에 압도된 유화가 소심하게 요, 를 덧붙인다. 아니. 근데 생각해 보면 내가 존대를 할 이유도 없잖아. 내가 공주인데. 이 사내는 고작 인간이고. 


“아니, 근데 내가 왜 당신한테 존대를,”

“시장하면 따라 오거라. 잠도 오지를 않는데, 술 벗이나 되어주거라.”

“시장하면 술을 먹어, 요,  당신은? 무슨 되도 않는,”



꼬르륵. 눈치도 없게 유화의 뱃 속에서 소리가 났다. 수양이 혀를 찼다.


“잔치 음식이 어쩌고, 하며 입이 댓발이나 나와있더니. 곱게 따라오거라.”



수양이 걸음을 옮겼다. 잠시 수양을 노려보던 유화가 수양을 따라 나섰다. 수양을 따라 방으로 들자, 상에 놓인 다과들. 유화가 헛웃음을 친다.


“인간들은 잔치에 고작 다과를 먹는 모양이지?”

“그건 내 혼자 먹으려고 둔 주안상이고. 잔치 음식을 더 내오라 하면 되는 것을. 쯧.”

“그럼 얼른 내오던가... 요.”


말 끝에 뒤 늦게 존칭을 붙이는 유화를 보며 수양이 웃음을 터트린다.


“넌 네 좋을 때만 뒤에 존칭을 붙이는 게냐. 퍽 재미있구나. 거 앉거라.”


상 앞에 자리를 펴고 앉은 수양이 유화에게 맞은편에 앉으라 손짓했다. 방석도 없는 제 자리에 유화가 가만히 수양을 쳐다보자 수양이 손짓으로 문 옆에 놓여있는 방석 더미를 가르킨다. 참나. 나보고 가져다 쓰라고? 


“저런... 씨... 치사한 놈...”


유화가 중얼대며 방석더미에서 방석을 하나 가져다 수양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래. 어디 술이나 한 잔 따라보거라.”


수양이 잔을 들고는 유화에게 술병을 건넸다. 


“이게 미쳤나. 어디 감히. 공주한테. 술을 따르라 하는 것이냐.”

“말이 길구나. 신이니 뭐니, 이젠 공주냐. 되었다.”


수양이 스스로 잔을 채웠다. 그리곤 유화의 잔을 끌어다 채워주고는 건넸다. 


“자, 내 기분이 좋을 때 받아마시거라. 헛소리만 해대는 계집이 뭐 예쁘다고 내 이리 잔까지 쥐어주랴.”


수양이 건넨 유화가 잔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 


“쯧. 저 보아라. 내 비우기도 전에 먼저 비우기는. 버르장머리도 없지.”




수양이 혀를 차고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잔을 비웠다.


“참나. 자기가 마시래놓고는. 그나저나, 기분이 왜 좋은데.”

“나에게 묻는 것이냐?”

“아니, 말 벗 해달라고 부른 거 아닌가. 말도 못걸게 하면서.”

“어허, 또 그리 말을 막 뱉지.”

“아니. 내가 왜 당신한테 존대를 해야 하냐고. 타당한 이유를 대 봐.”


유화가 수양의 잔을 채우곤 제 잔도 채웠다. 잔을 들어올리곤 수양 앞으로 내민다.


“일단 짠.”


허, 참. 수양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유화의 잔에 제 잔을 부딛혔다. 그리곤 단숨에 비워낸다.


“좋아. 내가 왜 당신에게 존대를 써야 하는지 말을 해 봐.”

“이 보아라. 또. 그래. 조선의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이다. 주상의 숙부, 대군이다. 내, 무엇하러 굳이 그걸 또 말 해주고 있는지. 이 정도면 되었느냐.”

“아. 고작 왕위? 난 하늘의 대를 이을 이다. 상제의 딸, 천계의 공주. 누가 들어도 내가 자네 보다는 윗전 아닌가?”

“또, 또 그 소리지. 지금 그 소리를 나보고 믿으라는 게냐.”


아. 속터져. 이걸 어떻게 보여줘. 능력도 다 사라진 마당에. 유화가 잔을 또 비운다. 그리곤 손을 휘휘 내저어 보인다.


“아무튼, 아무튼. 난 공주라니까. 그것도 저기, 하늘나라.”


몇 잔 안 비웠는데 벌써 취한 것일까. 유화가 한층 더 신난 듯 손으로 하늘을 쭉 가르킨다.


“그러니까! 우리 호칭 정리 좀 하자고. 당신이! 나한테 유화 공주님-, 하고 깍듯하게 부르던가. 그럼 나도 대군 나으리-, 하고 불러줄 테니까아. 아니면! 둘다 편하게 말을 까던가. 야! 하고. 흐흐.”


야래, 야. 유화가 실실 웃어대고는 술병에 손을 뻗는다. 쯧, 하고 혀를 찬 수양이 유화의 손을 잡아다 가만히 내려놓는다.


“취한 것인지, 실성한 것인지. 미친 게지. 그래, 네 이름이 유화인가 보구나.”

“그래! 내 이름이 유화다! 네 이름은 뭐냐!”


손을 뻗어 수양을 가르키던 유화가 힘 없이 앞으로  엎드러진다. 그리고 밖에서 들려오는 몸종의 소리.


“나으리, 음식을 들일까요.”

“그리 잔치 음식 타령을 했는데, 입에 대보지도 못하고 뻗었구나. 되었다, 물리거라.”


수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화를 안아들어 침상으로 옮겼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에 취해버린 유화. 방 안에는 고른 숨소리와 술잔 내려놓는 소리만 가득하다. 잠든 유화를 앞에 두고 수양은 끝없이 병을 비워낸다.


“불쌍해 ...”


눈은 감은 채로 유화가 입을 연다. 조용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불쌍해. 그 한마디가 수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 무엇이.”

“당신... 불쌍해.”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유화가 다시 잠에 들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저 계집의 입에서 불쌍이라니. 무엇이 그리 불쌍한 것일까. 잠든 유화의 얼굴을 수양이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자세히 본 적 없던 얼굴이 유난히 고왔다. 웃기기도 하지, 거슬리는 말들만 내뱉는 계집이 뭐가 예쁘다고. 계속 이리 밟히는 것인지. 호기심일까, 호감일까. 그저 혼란스러웠다. 그래. 그저 술김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그저 술김인 게지.”


수양이 일어나 이불을 끌어올려 유화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나지막히 읊조렸다. 




“내 이름, 이 유(李 瑈)다.”


수양이 방을 나섰다. 달마저 구름에 가리워진 밤이었다.


이정재 2.5D위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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