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n Ideal Mate

 · the Avengers(2012)/the Avengers : Age of Ultron(2015)

 · Thor/Steve

 · Sentinel/Guide AU

 · Series [Number of Letters : 9,997]

 · G

 · YOHEI/YH_Kun(yhk_lab@naver.com/@LabYhk)

 · DATE2020802SUN

 · MEMO

  1편에서 3년 반이 지난 뒤의 2편입니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만큼은 완결 짓고 싶어서 이어봅니다.

  다들 탈덕하셨으리라 믿고 안심하며 올립니다(???)






  02.





  뻣뻣한 유니폼을 입은, 마른 장작 같은 사람.

  그게 스티브 로저스의 첫 인상이었지만 의외로 실망하지는 않았다. 숙소에 도착한 토르는 테이블 위에 작은 바구니와 메모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구니 안에는 플래시 드라이브가 들어있었다. 미드가르드 방문은 처음이라고 한 말에 신경을 쓴 듯 메모에는 사용법이 쓰여있다. 묠니르를 내려놓고 토르는 미소지으며 능숙하게 벽에 걸린 스크린에 플래시 드라이브를 연결했다. 어렵지 않게 몇 장의 서류를 본 다음, 재생 시간이 가장 긴 영상을 틀고는 곧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남색과 짙은 회색, 검은색이 세련되게 섞인 옷을 입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명씩 보였다. 짧은 머리에 멋진 수염이 있는 남자는 체격이 크진 않았지만 단단해 보였다. 그보다도 작은 여자는 고양이 같은 인상에 붉은 단발을 야무지게 묶어 넘긴 모습이었다. 둘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다... 토르는 웃었다. 둘 다 센티넬이었다. 그리고 둘 다 한쪽 귀에 자그마한 단말 장치를 착용하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스피커 잡음과 영상의 두 센티넬이 싸우는 음성 사이로 아주 작게 스티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들리지 않았겠지만, 토르에게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마냥 또렷하게 들려왔다.

  ...미드가르드의 가이드인가.

  화면에서 두 센티넬이 각자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며 토르는 조금 감탄했다. 당연히 센티넬에 감탄한 것은 아니었다. 두 센티넬의 능력치는 낮았고 상성도 맞지 않았다. 아스가르드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행히 전투는 길지 않았다. 두 센티넬 중 육탄전을 담당하는 건 붉은 단발머리의 여자였고, 남자는 가끔 귀를 긁적이다 시선을 옮기곤 했다. 그와 동시에 잡음처럼 스티브의 목소리가 들리고 둘은 다음 행동을 했다.

  지키고 싶었습니다.

  문득 그 말을 했을 때 스티브의 표정이 떠올랐다. 어금니를 꾹 깨문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동영상을 멈추고, 토르는 아까 훑어보았던 서류를 다시 스크린에 띄웠다. 그 중 일부러 붉은 색 낙인이 찍힌 서류를 선택해서 확대한다. 임무 중 사망한 센티넬에 대한 보고서였다. 능력 조절에 실패한 센티넬이 가이드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 사망 원인이라 쓰여있었다.

  능력 조절에 실패...

  토르는 웃었다. 결국, 센티넬이 자신의 힘에 도취되었다는 말이다.

  시프가 센티넬 각성을 하고 난 뒤 토르는 전투에서 제외되었다. 시프도 마찬가지였다. 가이드를 잃.은. 호건은 바나하임의 가.족.에게 돌아갔다. 가이드가 있는 펜드럴은 전투에 참가하지만, 그 가이드가 로키인 터라 선두에 나서지 못했다. 이제 바나하임에서 가이드를 얻은 볼스태그는 전투에 응해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토르가 아는 그 신나는 표정으로, 선두에 설 것이었다.

  그것은 아스가르드의 센티넬이 가이드를 원하는 이유였다.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본인의 능력을 조저할 수 있어야 했다. 센티넬로서 얻은 힘에 이끌리지 않기 위해. 자신은 물론 세계를 지키기 위해, 가이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스가르드의 센티넬과 가이드는 인생을 공유한다. 몸의 절반을 공유한다. 서로 감각을 공유하고 감정 또한 공유한다. 미드가르드의 결혼이라는 계약과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토르가 스티브의 그 말에 분노한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그의 처지 때문이었다. 왕족에 가까울수록 센티넬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통제력 또한 그만큼이나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가이드가 없는 위험을 감수하고 전투에 내보낼 수는 없다-

  그것이 오딘의 결론이었다.

  아스가르드를 지키기 위한 전투, 아홉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을 위해, 토르는 가이드를 찾아 헤매는 여행을 시작했다...

  지키는 자라.


  +


  닉 퓨리는 한 달이라는 기간을 조건으로 스티브가 아스가르드에 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 결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토르라는 이름의 외계인이 가진 분위기 때문인지, 쉴드에서는 스티브가 마치 휴양지로 여행이라도 가는 듯한 분위기였다. 걱정하는 이들보다는 부러워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스티브 또한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짐은 다 준비되었나?"

  퓨리가 숙소로 들어오며 물었다. 그 뒤로 콜슨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스티브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앉으라는 말 대신 소파를 가리켰다. 그 앞의 테이블에는 크지 않은 더플 백 하나가 반쯤 빈 채 놓여 있었다.

  "외교의 기본은 선물 아닌가요. 기념품이라도 가져가야 할 텐데요."

  "보이저 2호가 아직 날고 있을 테니 선물을 원하면 좌표를 일러주게."

  시니컬한 퓨리의 대답에 스티브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정작 그 말을 꺼낸 콜슨도 머쓱하게 웃는 표정만 짓더니 곧 작은 손가방을 스티브에게 내밀었다.

  "혹시나 해서요. 개인용으로 우주 최장거리 통신이 가능합니다."

  "고맙네."

  가방을 열자 가정용 휴대 전화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휴대 전화보다 조금 무거웠지만 한 손에 들지 못할 것도 없었다. 별 다른 말이 없는 걸로 보아, 사용법도 비슷한가 보다. 가방에 챙겨넣고 있는 데 그 사이 소파에 앉은 퓨리가 입을 열었다.

  "쉴드에서 책임지는 사적 방문이야. 국가 간- 아니군. 세계 간 분쟁을 일으킬만한 일은 하지 말게."

  콧방귀를 뀌는 말투였다. 직접 경험한 게 아니면 믿지 않는 퓨리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기도 했다. 그건 스티브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초대에 응한 것 뿐입니다. 그런 일을 일으킨다면 그건 저쪽이겠지요."

  "그리고, 가능한한 많은 정보를 부탁하지. 쓸모가 있을 법한 건 뭐든."

  그 말을 들은 순간 스티브는 아주 잠깐 동작을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가 다시 뜨거워지고 스티브는 퓨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닉 퓨리는 그다지 크게 동요한 것 같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브루클린은 제가 관리하겠습니다."

  숙소의 벽장에서 여벌 유니폼을 꺼내온 콜슨이 불쑥 말했다. 스티브의 아파트를 말한 것이리라. 스티브가 콜슨 쪽을 바라본 사이, 퓨리가 일어섰다.

  "그럼, 잘 다녀오게."

  "...감사합니다."

  마지막에서 껄끄러워진 인사치레가 끝나고 퓨리가 나간 다음에야 스티브는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업무 외엔 그와 미묘하게 맞지 않았다. 과연 스티브가 그렇다는 것을 아는 듯, 쳐다본 콜슨이 약간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닫고 스티브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토르라 이름을 밝힌 외계인은 눈에 띄는 존재였다.

  요란한 갑옷과 망토 대신 편안한 차림을 한 그는 헬리캐리어를 마치 제집처럼 누비고 다녔다. 특별히 시끄럽게 굴거나 이목을 끌기 위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따가울 정도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네, 호탕한 성격에, 붙임성도 좋고요. 사람이라 한다면,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콜슨이 스스럼없이 대답한다. 조금 느슨해진 표정으로 웃으며 스티브가 턱을 살짝 끄덕이자 그가 이어 말했다.

  "술내기를 했었거든요. 바에서 맥주를 물처럼 마시길래... 알아주는 술고래들이 다 나가 떨어졌습니다."

  "하하..."

  "국장님 안대까지 털릴 뻔했지요."

  "닉이요?"

  의외였다. 그 감정을 그대로 실은 스티브의 목소리에 머쓱한 표정으로 콜슨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도 놀랬습니다. 그 전에 저희들이- 어..."

  말하다 멈춘 콜슨이 스티브의 눈치를 보는 듯 하더니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내기 포커를 했었거든요. 그, 여기 오셨던 날 밤에 말입니다."

  스티브가 도착한 그 날 이야기인 것 같다. 그나저나 외계인 손님을 상대로 내기 포커라니. 공공연하게 다들 하고 있었지만 들키면 내기에 걸린 금액에 따라 징계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지구의 돈이 없다며 옷을 걸고 했다가- 저희들이 홀랑 벗겨버렸지요. 아마 술내기는 그 보복이었지 싶기도 하고요.."

  "진압대원들도 속이 편하네요."

  그 말에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콜슨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속된 말로 계급장 떼고 붙어보자는 속셈이었지요. 국장님에게 들키고는 조마조마했습니다만, 뭐..."

  말 대신 어깨를 으쓱인 콜슨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고, 스티브도 모처럼 마음 편하게 웃었다. 국장이 제 안대를 걸고 술내기를 했다니, 진압대원들이 외계인 손님과 벌인 비공식적인 장난 같은 건 이미 징계 대상에서 벗어났을 터였다. 게다가, 그 외계인이라면 아마도 호쾌하게 괜찮다고 말했으리라. 그런 상상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유쾌하게 내기 포커를 하고 술을 진탕 마실 수 있는 외계인이라.

  어쩐지 스티브는 그가 좀 부러웠다.


  +


  마지막으로 스티브는 담당하고 있던 센티넬에게 연락을 했다. 쉴드 센티넬 파트에서 연락했겠지만, 스티브는 본인이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다. 예상했던 대로 이미 연락을 받은 데다 가이드도 바뀌었다고 한다.

  "가이드는 괜찮은 거 같아?"

  /대충. 안 맞아도 어쩔 수 없는 걸.

  다른 이들은 앙칼진 고양이 같다고 하는 나타샤지만, 스티브는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다. 스티브는 토니보다는 나타샤와 일하는 것을 더 좋아했는데,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그녀가 제게 친하게 구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냐며 놀렸지만-

  "이렇게 되서 유감이야."

  /그러게. 우리 꽤 괜찮았는데.

  "그래. 블루스 브라더스처럼."

  /정말. 노인네 아니랄까봐.

  나만 반겨주는 고양이 같아서 좋은 쪽에 가까웠다.

  그래, 나타샤는 그런 느낌이었다.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 고양이가 나한테만 친한 척 하는 느낌. 물론 그녀는 미인이었고, 서로에게 호감도 있었지만- 이성으로서 가지는 호감은 아니었다. 토니는 항상 그걸 놀리곤 했다. 그렇게나 미인인데 그런 생각이 한 번도 안 들었다고?

  /그럼, 잘 지내. 건강하고.

  "...응. 너도 조심해."

  /당연하지.

  그리고 끊는다. 아마 이제 나타샤와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연락처도 어디 사는 지도 이미 알고 있지만, 바뀐 가이드와 상성을 생각해서라도 연락은 하지 않는 게 현명했다. 곧 스티브는 토니에게 연락했지만 받지 않았다. 이것도 예상했던 일이라, 스티브는 한숨을 내쉬며 음성 메시지만 남겼다. 나타샤에게 말한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아스가르드에 가는 것은 그 나름 기밀이었기에 말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쳐다보다, 스티브는 그대로 전원을 껐다.


  아스가르드에 어떻게 가는 지 스티브는 알지 못한다. 결국 반 정도 밖에 채우지 못한 가방을 메고 숙소를 나서며, 스티브는 토르가 헬리캐리어에 도착했을 때의 영상을 떠올렸다. 작은 토네이도와 함께 나타났던 토르의 영상이었다. 아마 그 소용돌이가 외계로 통하는 길인 거겠지. 말이 안 되는 소리였지만, 그렇다면 이 모든 게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스티브는 고지식하지만 눈 앞에 일어난 일을 부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센티넬 진압대원들과 일일이 인사하는 중인 토르가 보였다. 악수를 하기도 하고, 어깨를 두드리기도 한다. 며칠 머무르지도 않았는데 무척 친근해 보이는 제스처를 나누는 것에 스티브는 감탄했다. 제게도 저런 친화력이 있다면. 그러나 부러워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라, 스티브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렇게 일일이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하고 토르는 곧 스티브 쪽으로 걸어왔다. 처음 만난 날보다는 익숙해진 그의 차림새에 스티브는 조금 웃어보였다.

  "왔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야. 조금 더 천천히 왔어도 될 뻔 했어."

  그러면서 토르가 망치를 들어보였다.

  "다들 이걸 들어 보고 싶다 하더군. 혹시 자네는 어떤가?"

  손잡이를 내밀며 묻는 그 말에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지키기 위한, 지지 않기 위한 싸움이 아니면 스티브는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무기에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스티브는 동영상으로 몇 번이나 그의 전투 방식을 본 이후라, 어떤 무기인 지 이미 알고 있었다. 가질 수 없으면, 탐내지 않는다.

  “그렇군. 그럼 갈까.”

  그리 말하며 토르가 스티브에게 다가선다. 옆에 서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체격차는 가까이 붙어서자 현저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붉은 색 망토와 화려한 금발 때문일까, 아스가르드 인은 스티브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절로 몸이 굳는 것을 참으며 스티브는 반 걸음 정도 비켜 섰다.

  "더 가까이 오는 게 낫겠군."

  그러나 그가 그리 두지 않는다. 땅을 울릴 것만 같은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그가 붙임성 있게 웃더니 팔을 벌려 스티브의 어깨로 뻗는다. 괜찮은가? 하고 묻는 말에, 스티브는 어쩔 수 없이 끄덕이며 조금 더 옆으로 다가섰다. 그러자마자 토르가 스티브의 등에 손을 대고는 끌어당겼다. 거의 끌어안긴 모양새가 된 것에 스티브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럼, 이제는 꽉 잡게."

  그와 동시에 토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망치를 위로 들어올린다. 어쩐지 그건 조금 우스워서 스티브는 저도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동시에 토르가 무어라 커다랗게 외치자마자, 오색빛의 기둥이 스티브와 토르를 덮치듯 쏟아져내렸다.


  귀가 먹먹하고 손가락이 아팠다. 본인 체중의 몇 십배는 되는 힘이 스티브를 짓눌러대고 스티브는 매달린 손에 힘을 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바람에 펄럭대는 망토 소리가 전신을 휩싼다고 생각한 순간 갑작스레 몸을 짓이기던 중력이 사라졌다.

  "괜찮은가?"

  귓가를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에 스티브는 겨우 눈을 들어 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빛 속을 '날고 있을 때' 토르가 계속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닫고 스티브는 똑바로 서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니, 힘을 준 순간이었다.

  "스티브! 이런"

  토르의 목소리가 분명 크게 들린다고 생각한 순간 멀어지고 스티브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눈 앞이 빙글빙글 돌며 깜박거린다. 시야에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워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같았다. 집에 있기보다 병원에 있을 때가 더 많았던 날들, 코 끝에 소독약 냄새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시절. 머리가 웅웅 울리는 가운데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무슨 말인 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종내 토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토르의 마지막 말만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가 결정할 일이다.

  그는 나를 말하는 거겠지. 멍한 정신으로도 그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시야가 새까맣게 가라앉았다.


  +


  창백해진 얼굴의 스티브가 주저 앉기 전에 그를 안아들었다. 바이프로스트를 열어주었던 헤임달이 잠깐 눈을 크게 떴지만 그것뿐이었다. 품에 쓰러지다시피 안긴 남자는 과장하자면 종잇장마냥 가벼워서 토르는 혀를 찼다. 날듯이 에이르에게 도착한 토르가 침상에 스티브를 내려놓자마자 이미 연락이 닿았던 듯 그가 다가왔고, 그러자마자 동시에 반짝이는 모래 같은 것이 스티브의 위에서 춤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드가르드 인이네."

  반짝이는 가루들은 정확히 스티브의 모형을 만들었다. 에이르가 손을 휘저음과 동시에 출렁이더니 일부분만이 커졌다.

  “기본은 같습니다.”

  그리고 에이르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토르 또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이런 쪽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토르에게도 지금 스티브의 상태는 그닥 좋지 않아보였다. 고통스러운 듯 숨을 쉴 때마다 온 몸이 크게 들썩이고,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옆에 선 에이르를 바라보지만, 그는 거의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러나 급한 손놀림을 보아 서두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원래 이런 체질인 듯 합니다.”

  그 말에 토르는 잠깐 무어라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

  에이르가 있다.

  그러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모두 눈에 들어오는 순간 동요되었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 비쩍 마른 남자가. 제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감정을 억누르던 어설픈 사람이.

  그래서 이렇게 동요한 거겠지.

  -그게 뭐 어때서?

  그가 거절한다면 슬프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스티브를 보며 깨달은 것에 토르는 자조하듯 웃었다. 아는 거라고는 짧은 질문에 대한 답과-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겨우 그것 뿐인데.

  “...이 분입니까.”

  토르의 여행 목표를 모르는 이는 아스가르드에 없다. 에이르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였다. 하지만 에이르가 단순히 호기심에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하지만, 토르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해줄 수 없었다.

  “그가 결정할 일이지.”


  어쨌거나 아스가르드에 돌아왔으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미 본성에는 전령이 닿았을 터였다. 오랜만에 온 고향이다. 당연하다시피 저를 앞뒤로 따르는 시동들과 느긋하게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레 뒤로 물러나는 이들이 보인다. 새삼스레 제가 어떤 지위에 있는 자인지 떠오르고 토르는 쓰게 웃었다.

  "그래, 미드가르드까지 가서-"

  중앙 정원이 보이기 시작하고 본성에 들어서자마자 비아냥이 섞인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기껏 데려온 게 비쩍 마른 막대기 같은 남자야?"

  로키였다.

  "그래, 마중 나와줬구나. 고맙다, 로키."

  토르의 대답에 흥, 하고 코웃음친 그는 양손을 들어 휘저어댔다.

  "수준 떨어지는 마법이라도 부리는 건가?"

  로키의 그 제스처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아챈 토르가 콧소리를 섞은 웃음을 한 번 냈다.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걷는 모양에, 로키가 옆에 와 선다.

  "좋겠어, 나갔다 오면 찾아주는 가족들도 있고."

  "누구와 달리 반가운 아들인 거겠지."

  "하. 능숙해지셨군."

  "펜드럴 얼굴에 달린 멍 만큼이나 능숙할까."

  과연 그 말에야 겨우 로키가 입을 다물었지만, 빈정대는 표정만은 그대로였다. 또 무어라 한 마디 하려는 동생에 앞서 토르가 말했다.

  "긴 여행을 마친 참이다. 오늘은 피곤해."

  "그건 내 알바 아니지만, 어머니 앞에서 체면은 차려야 할 테니 참아주지."

  "고마운 마음씀은 꼭 갚도록 하마."

  대화를 주고받던 형제가 나란히 멈춰선 곳은 오딘의 사실(私室) 앞이었다. 입은 옷을 한 번 확인한 토르는 시동이 문을 열기 전에 망토를 한 번 털었다. 로키가 눈썹을 들며 우스운 표정을 지었다.

  널따란 방의 안쪽, 편해 보이는 긴 의자에 오딘이 몸을 반쯤 눕히다시피 앉아있었고, 그 옆에 부인이자 가이드인 프리가가 있었다. 들어선 두 아들 중 로키가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옆으로 물러서고, 토르는 한쪽 무릎을 꿇어 예법대로 인사를 올렸다. 사실(私室)에서 하는 인사로는 다소 거창했지만, 가이드를 찾는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아스가르드를 떠나 있었기에 토르는 일부러 그렇게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그래. 미드가르드엔 아무 일이 없구나."

  토르의 어머니이기도 한 프리가가 웃으며 말했다. 느긋하게 앉아있던 오딘이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는 잠깐 몸을 일으켰다. 아무 것도 아닌 움직임이지만 서로 꿰 맞춘듯한 자연스러운 동작에 토르는 과장해서 웃으며 대답했다.

  "사소한 정치적인 다툼들 외에는 평온합니다."

  "그래. 그곳의 센티넬들은 요즘도 저주 받았다고 내쳐지거나, 신격화 되는가?"

  오딘이 아는 미드가르드는 그런 곳이었다. 어설프게 각성한 미드가르드의 센티넬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괴로워하다 미치거나, 혹은 죽었다. 아니면 죽임을 당했다- 오딘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들이 미드가르드와는 교류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류 없이 지내오면서, 미드가르드는 아스가르드 인들에게 미개한 세계가 되었다.

  "초인으로 분류되어, 범죄를 해결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추린 토르의 말에 오딘의 눈이 한 번 크게 뜨이더니, 곧 이어 고개를 끄덕인다. 오딘의 그 표정에 토르는 속으로 안심했다. 말없이 다시 긴 의자에 몸을 반쯤 뉘이는 오딘이 편하도록 도운 프리가가 두 아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저녁 회의는 중회의실에서 있을 예정이란다."

  그리 말하며 웃는 얼굴에 고개를 끄덕이고 토르는 일어섰다. 그대로 돌아서서 사실(私室)를 나서려는 두 아들의 뒤로 프리가가 다가갔다.

  "환영회는 손님의 상태가 좋아지면 하자꾸나."

  프리가가 토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의 대가인 어머니는 이미 아스가르드의 모든 일을 다 보고 있는 듯 하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겠다고 대답하려는 데, 로키의 빈정거리는 입매가 보였다. 어머니에게만큼은 애정을 숨기지 않는 동생이다. 괜히 놀려먹고 싶어진 토르가 어머니의 손을 한 번 잡았다.

  "알겠습니다. 저녁에 뵙겠습니다."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들에게 맞춰주기라도 하는 양, 프리가가 토르의 뺨에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 대었다. "면도를 하는 게 좋겠구나." 눈꼬리를 접으며 웃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끝낸 토르가 로키를 흘깃 바라보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어대고 있었다. 눈치 빠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로키다. 당연히 저를 놀려먹으려 한 걸 알아챈 로키가 흥, 하고는 먼저 발을 돌렸다.

  오찬 전 후의 정무 회의와 달리, 정찬 후 회의는 말그대로 일일 업무에 대한 보고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주 간단히 끝나기 때문에 참석자는 보고할 사항이 있는 사람 외에는 들지 않는다. 정말 평온한 시기엔 식사를 하면서 진행했다고 한다. 그게 언제였는 지 모르겠지만.

  후계자라고는 해도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이라 토르는 아직 본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거처로 발을 옮기다 토르는 문득 떠오른 것을 물었다.

  "펜드럴은?"

  "나야 모르지."

  파트너가 된 센티넬과 가이드는 같이 생활하기 마련이다. 시프와 토르처럼 어릴 때부터 파트너로 훈련한 것이 아니라면, 본딩*을 위한 동거는 필수였다. 왕의 아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펜드럴에게 로키와 함께 별궁을 쓰라는 명이 있었던 것을 토르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등록 안 했구나."

  그 말에 로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어머니의 능력은 손톱만큼도 물려받지 못한 토르였지만, 로키가 아직 펜드럴과 파트너 등록을 하지 않은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펜드럴이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토르는 로키의 성격을 알 뿐이었다.

  자신만큼은 아니었지만 전투를 즐기던 로키를 토르는 기억한다. 거기에 마법 소양까지 탁월했다. 모두가 다 그는 센티넬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화기가 끝나갈 때까지도, 그저 좀 늦어지는 것 뿐이라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로키는 센티넬 각성을 하지 못한 채 성인식을 맞이했다.

  한동안 로키는 스스로를 별궁에 가둔 채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어머니인 프리가만이 로키의 마법을 뚫고 별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에겐 동생의 마법이 소용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찾아간 프리가가 로키를 설득하려 했지만 평생을 믿어왔던 본인의 모습을 통째로 부정당한 충격은 오래갔다. 별궁에 칩거하던 로키가 제 발로 나온 것은, 목덜미를 겨우 덮는 길이의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자라고 나서였다. 원래도 마른 동생은 핼쑥한 모습이었고, 어딘가 그늘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펜드럴을 고른 것은 로키였다. 아스가르드의 어떤 센티넬이 감히 오딘의 아들을 거절할 수 있을까. 펜드럴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볼스태그나 호건은 펜드럴을 불쌍하다 여겼지만 의외로 그는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아는 사람이라면 헤임달 정도겠지만, 그의 살아온 인생만큼이나 무게를 달고 있는 입은 오딘이 명한다 해도 굳게 닫혀 있으리라.

  "...전투가 없었으니까."

  -필요하지 않아.

  로키의 그 말도 사실이어서,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가르드의 경계에서야 다른 외계의 생물들을 항상 견제하느라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지만, 아스가르드 성곽의 가장 안에 사는 이들은 그런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물론, 외곽 수비대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사냥’을 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좋아. 오늘 저녁은 실컷 마시자고.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너나 오랜만이겠지."

  "축하술은 마다하지 않는 거라고 했다, 형제여."

  바나하임의 친구들이 항상 제게 하던 말을 건네며 토르는 로키의 어깨를 끌어안고 개구지게 웃었다. 투닥투닥 하는 사이이긴 해도, 로키는 토르가 친하게 구는 걸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 못 이기는 척 저를 따라 웃는 동생을 보며 토르는 지금에서야 겨우 집에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전투가 있으면 좋겠다.


  -


  언제나의 악몽이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 갇혀, 눈 앞에서 자신의 센티넬을 놓치는 꿈.

  산산히 부서지는 제 센티넬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꿈.

  오렌지빛 소용돌이만이 시야에 낙인처럼 찍혀, 눈물조차도 흘릴 수 없는 꿈-

  스티브는 눈을 떴다. 동시에 뺨 위로 물기가 흘러내렸다. 느릿하게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나서야 뭔가가 보였다...

  금빛.

  제 위로 부서져 내릴 것 같은 금빛이 반짝이며 출렁거렸다. 그건 마치 토르의 머리카락처럼 보였다. 빛을 받아 부서지는 황금색- 그 생각이 들자마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일어났군요."

  "......"

  누구인지는 몰라도, 스티브가 생각한 그 사람은 아니었다. 촛점이 돌아오고 스티브는 잘게 고개를 흔들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긴 드레스 같은 것을 입은 사람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천이 스치는 소리는 마치 자장가 같았다. 무척 조용한 곳이다. 유리병이 가볍게 부딪히며 내는 작은 소리들이 맑게 울렸다.

  그 때까지도 스티브는 약간 멍한 상태로 누워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스티브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들어, 스티브가 착각한 바로 그 금빛의 가루 같은 것을 쓸어내는 동작을 했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 의료적 처치를 받은 것이겠지. 외계에 나올 일이 없으니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정신을 잃기 전보다 훨씬 편했다.

  "...감사합니다."

  금빛 가루가 다 사라지고 나서 스티브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앉았다. 스티브의 그 말에, 그 사람은 눈을 한 번 크게 떴다가 입술을 당겨 웃어보였다. 어색한 미소였다. 곧 몸을 돌려 무언가를 톡톡 치는 손놀림을 보고 스티브는 문득 퓨리와 헬리캐리어를 떠올렸다.

  "움직일 수 있겠나요?"

  "...그럴 수 있을 것 같군요."

  아직 손이 가볍게 떨리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괜찮았다. 침상에 일어나 앉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왔다. 우아한 골격의 여성 -이었다- 은 젊어보이기도 했지만 늙어보이기도 했다. 까만 머리와 까만 눈의 그는 잡으라는 것처럼 스티브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스티브는 무심코 그 손을 잡았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손을 잡은 채 침상에서 내려와 선다. 스티브가 선 것을 확인한 그가 자연스레 손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떨림이 멈추었다.

  "에이르님, 어디로 모실까요."

  놀라 그를 쳐다보는 데, 똑같이 하얀 옷을 입은 시동이 애띤 목소리로 묻는 게 들렸다. 의사인가 보다.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자겠지. 그리고...

  이건 어느 쪽의 능력이지?

  "토르의 귀빈이시니, 본성으로."






  TBC.


  *본딩 bonding - 유대감 형성, 여기서는 정신적 연결을 의미합니다.


BL/2차창작중심/성인/부녀자/글쟁이

YOHEI/YH_Kun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