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이 퇴원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그의 실적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그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 이번 일은 그가 자조적으로 하던 예상과 반대로 착실히 실적으로 카운트된 것 같았다. 십년감수 했네, 이 씨…. 부장검사새끼, 하는건 좃도 없으면서 훈수는 또 오질라게 많이 둬요. 그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감칠맛 나게 자신의 상사를 잘근잘근 씹어먹으며 휴대전화 화면을 두들겼다. 이것도 까였으면 정말 성질 같아선 뒤집어엎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나선 갈 곳도 없었겠지만. 

그리고 두 번째로 한 일은 그녀에게 연락하는 거였다. 사실 조금 고민했다. 아니, 그가 자신의 마음속 속삭임에 솔직하지 않았기에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일 뿐, 많이 고민했다. 머릿속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속삭였다. 인제 와서 이걸 무시할 수 있겠느냐고. 그는 망설였다. 과연 그 날 그가 느낀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한순간의 장난이 될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자신을 포장해도,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자타공인의 다혈질이었고,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짓밟고 넘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래서 연락을 했다. 

그녀는 희한하게도 전화를 바로 받았다. 그가 여보세요, 라는 인사도 없이, `놀이터다, 지금 나와라.` 하니 그녀는 전화를 바로 끊었다. 그는 눈을 멀뚱거리며 혹시 까였나, 싶어 인상을 찌푸렸지만, 30초 지나서 저쪽 아파트 입구에서 급하게 뛰어나오는 누군가를 보고 그런 생각은 접어놓았다. 정말 급하게 내려오기는 했는지, 그녀는 집에서 입을법한 수면 바지에 회색 후드티를 걸치고 뛰어왔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를 부르기도 전에 그녀는 그에게로 바로 돌진했고, 그가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다행이다. 그녀는 그의 가슴께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렸다. 그가 놀라서 굳어있자, 또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를 안은 팔을 풀고 뒤로 몇 발 물러났다. 또 말똥말똥한 얼굴이었다. 그가 질렸다는 표정을 하고 가만히 서 있자, 그녀가 그의 손을 확 낚아챘다. 이건 또 왜 이래? 그가 그 물음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그녀가 그의 손을 잡고 끌었다. 

그렇게 걷다가 두 사람은 늦게까지 영업하는 카페에 도착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에스프레소와 코코아를 시켰고, 그는 `무슨 이렇게 극단적인 메뉴 선택이 있나?` 생각했지만 차마 끼어들지 못했다. 진동벨을 받아 카페 한구석에 빈 소파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뒤늦게 물었다. 

"...뭐가 내 건데?"

"코코아요."

"내가?"

"오빠 쓴 거 안 좋아하잖아요."

"내가?"

"저번에 쓴 커피 싫어했잖아요. 설렁탕 먹고."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설렁탕은 한참 전에 먹었는데.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사다 줬잖아요."

"니 그거 아직도 기억하나?"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젊다고 씨이….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곧 진동벨이 울렸고, 그가 일어나기도 전에 그녀는 튀어나가 트레이에 올려진 음료를 받아왔다. 코코아를 그의 쪽으로 밀고 에스프레소를 자신의 앞으로 가져온 그녀가 맛을 한번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내렸다. 

"오늘 잠을 못 자서 약이 필요해요."

그러고 그녀는 배시시 웃는다. 당차게 걸어온 얼굴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도 그를 마주 봤다. 그녀가 말했다. 

"오빠."

"뭐."

"내가 왜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왜."

그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말투로 보아하니 그에게 불리한 진술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그녀가 말했다. 

"우리 설렁탕 먹으러 갔을 때, 오빠가 저 뭐라고 부르면 되느냐고 물어봤었잖아요."

"...어."

"그때 오빠가, `이름 불러도 된다`고 했는데."

"...그랬나."

"또 나 길에서 봤을 때 `오빠 믿지?`이랬잖아요."

"...그거야…."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제 입으로 했던 말이고, 이제 와서 발뺌하기에는 증거가 확실했다. 장훈이 얼굴을 긁적이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때야 내 이래 될 줄 알았나."

"또,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오빠가 나한테 먼저 전화하라고 그랬잖아요. 번호 주면서."

"...밥 한 끼 맥일라고 그런 건데. 딴 맘은 없었그든?"

"저는 있었어요."

그의 말이 멎었다.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가 한마디 했다. 징그러운 소리 참 잘도 한다, 그녀는 웃으며 침묵할 뿐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녀의 얼굴을 따라 그렸다. 그녀는 자주 웃고 있었다. 그가 인상을 구기는 것을 대신 상쇄하려는 것처럼. 

"왜 만나자고 했어요?"

"그야, 니가…. 사람 맘 뒤숭숭하게…."

그는 설명하려던 것을 그만두고 작게 욕을 짓씹었다. 그를 화나게 한 장본인인 그녀는 웃을 뿐이었다. 

"작전 성공."

그녀가 장난스럽게 속삭이자, 그도 허탈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마주 봤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몸을 뒤로 기대고, 주위를 훑어봤다. 저녁 커피숍의 평범한 풍경이 평범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 서로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장훈은 가만히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얀빛의 머그잔 안의 코코아를 응시했다. 분명 달 게 뻔했다. 

그리고 문득,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노란 조명이 따뜻한 빛을 내며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대충 빗어 내리지도 않은 새까만 머리칼, 무늬 없는 후드티에 이제는 익숙한 얼굴. 그는 그녀의 앞에 놓인 커피가 쓸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도. 그녀가 흘리듯 말했다. 

"사랑해요."

그도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래."

지은은 한 번 더 에스프레소를 입에 댔지만, 결국 혀가 얼얼할 정도로 쓴맛은 버티지 못한 것인지 금세 잔을 내려놨다. 입맛을 다시던 그녀는 그의 앞에 놓인 코코아를 건드리기 시작했는데, 그가 아무리 엄한 눈빛을 쏘아보내도 모른 척하는 게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그도 오기가 들어 입을 대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잔을 들었고, 과하다고 여겨져도 싫지는 않은 단맛이 입가를 간질였다. 

카페의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불쌍한 아르바이트생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코아 잔은 텅 빈 반면에 에스프레소는 반 잔 넘게 남아있었다. 두 사람은, 아주 익숙한 친구, 혹은 연인처럼, 가로등만이 비추고 있는 골목을 천천히 지났다. 그녀는 별것 아닌 일상에 대해 쏟아냈고, 그는 간간이 웃거나 같이 화를 내주는 것으로 반응했다. 너무 드물지는 않게, 장훈이 무어라 말할 때 지은은 좋은 청취자였다. 그녀는 그의 말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가끔 점멸하는 가로등을 두 사람을 빠르게 지났다. 무슨 일이 있을까 두려웠다. 


그녀의 아파트 앞에 도착하는 것은 빨랐다. 노란빛의 아래에, 그녀는 들어가기 싫다는 듯 뭉그적대며 대화를 이었다. 그도 그게 싫지는 않았기에 가만히 듣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 뿐이었다. 찬 밤공기는 희한하게도 시리지 않았다. 날이 더워지고 있었던 탓일까, 그는 생각했다. 그가 위를 올려다보니, 시선에 놀라지도 않는 벌레들이 불빛을 맴돌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보자, 그녀도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 스키 타러 갈래요?"

"이 날씨에?"

"지금 말고 나중에, 겨울 오면."

"내 스키 몬탄다."

"내가 가르쳐줄게요."

그녀는 웃었다. 그는 따라 웃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아주 아주 잠시, 이런 생활도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에게 속삭였다. 내일 아침에도 보고 싶을 것 같아요. 그는 자신도 그럴 것 같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조금 더 끌어당겨 키스할 뿐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입안의 단맛이 아직도 맴도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충 유치하게 노는 애들(... 어휴 둘다 너무 답답해서 밀어붙였습니다. 이제 가벼운 것만 남았어.... 빨리 이놈들 데리고 놀러가고 싶다*^^*

글러지만 글러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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