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부터는 예전에 풀었던 썰을 좀 서술형으로 정리해 둔 것일 뿐이라 그다지 매끄럽지 못합니다.




정신을 잃기 직전 마다 제이슨은 어떤 소리를 들었다. 제일 먼저, 귓가에서 꿈틀 거리는 거대한 덩어리의 움직임이 그 시작이다. 그것은 보통 어떻게 설명할 방법도 모를 고통과 함께 찾아왔다. 그 다음은 부러지고 뒤틀리는 소리다. 뒤이어 들리는 것은 비명이었다. 가장 끔찍하고도 듣기 싫은 소리다. 제 숨으로 내 뱉고야 마는, 폐부에서 끓는 자신의 비명이었다.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와 함께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할 그 길고 긴 비명이 곧이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생각될 때 즈음, 제이슨의 정신은 언제나 그곳에서부터 끊기곤 했다. 그리고 밤이 지난다.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아마도 끔찍할 밤이.

 그 소리를 누군가가 듣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제이슨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끔찍한 소리가 났다. 익히 잘 알고 있는 그 소리였다. 근육이 움직이고 뼈가 어기적거리는 불쾌한 소리다. 다만 제 몸 안에서 나는 것과 멀쩡히 양쪽 귀로 듣는 소리는 사뭇 다른, 그런 태평한 감상이 지나갔다. 몸이 피곤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피곤함과 함께 찾아온 안도와 평안이 이 끔찍한 합주에도 그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

꼬박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동굴 안쪽 깊숙이 자신이 앉아있던 근처까지 아슬아슬하게 기어들어왔던 햇빛이 슬금슬금 도로 바깥을 향해 물러나고 있었다. 노을이 지고 있다. 꽤 볼만한 관경일 테지만 감상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가 지는 것과 동시에 들리는, 지금도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소리들 때문이었다.


‘늦게도 움직이는구만…….’


제이슨은 거의 만 하루를 꼼짝없이 동굴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제대로 잠들지 못한 몸이 삐걱거렸다. 눈을 뜰 때도 그리 개운치 않은 상태였건만 푹신한 잠자리에서 누울 생각도 못하고 차갑고 딱딱한 동굴 벽에 기댄 채 잠든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꽤나 고역이었다. 달리 목적도 없이 제이슨은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내버려두고 가기엔 찝찝하다는 마음이 휴식도 물리고 – 굉장히 귀찮게도 – 스스로를 신경 쓰이게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제이슨은 눈동자만을 굴려 제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눈을 뜬 것은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난 때였다. 태양이 완전히 지평선 끄트머리로 정수리를 숨긴 후의 일이었다. 처음엔 손가락을, 그다음엔 어깨를,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엔 눈을 깜빡였다. 제이슨은 눈만 아래로 내려다 본 채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의 복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단 겉으로는 멀쩡해져 있었다. 아직까지 새로 돋은 살과 혈흔의 흔적이 붙어 좀 더 심하게 움직이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어쨌든 막 하루 전까지는 아예 빈 공간처럼 날아가 있었던 신체 부위라고는 생각 할 수 없었다. 눈을 뜬 직후에도 그는 한참을 깜빡이고 나서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음과 한숨과 이것저것이 뒤섞인 괴로운 음성이 새어나왔다. '도와줘야하나?' 잠시 망설일 때 그는 어느새 스스로 상체를 일으키고 가까스로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았다. 몰아쉬는 숨은 가빠보였지만 식은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가지 않았구나.”


저녁 인사로는 다소 쌩뚱맞았다. 제이슨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쩐지 내버려두어도 남자는 알아서 이것저것 말을 할 요량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럴 것 같긴 했다만…….”


괜히 심사가 뒤틀려 대꾸하려다가 제이슨은 짧게 혀를 차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멀쩡하게 일어나 앉은 꼴을 봤으니 되었긴 한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난담.


“고마워.”

“뭐가.”


결국은 대꾸해버리고 말았다. 뜬금없는 감사인사가 영 어색했다.


“피를 줬구나.”

“쥐라도 잡아 달라며? 그래서 그렇게 했지.”


제이슨의 대꾸에 남자는 그저 웃기만 했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도 훤히 느껴지는 미소는,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참 잘생겼다. 뱀파이어는 다 그런가? 팔자에도 없는 미남의 얼굴 감상을 하다가 제이슨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네 피를 준거잖아.”


대꾸하기 싫다. 뭘 다 아는 것처럼 저러는 지 기분이 나빴다.


“냄새가 똑 같거든. ‘우리’는 이런 냄새에 좀 민감해서……. 네 냄새가 아직 나.”

“거 참 지독한 식사였겠네.”


제이슨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소리에 남자가 한차례 웃다가 푹 몸을 숙이며 기침을 했다. 조잘조잘 말은 많이도 아직 괜찮은 상태는 아닌가 보다. 그는 한참을 콜록 거린 뒤에 제이슨의 눈치를 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폐가 아직 덜 아문 것 같아.”


그리 알고 싶지는 않은 사실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리처드 존 그레이슨이라고 했다. 대충 딕이라고 부르란다. 제이슨은 그러려니 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뒤 이은 대답을 요구하는 남자의 눈동자에 마지못해 제이슨 토드, 라고 짧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원하는 대답이었는지 딕의 눈 꼬리가 웃음으로 가득 찼다. 뭐가 웃을 일인지 제이슨은 알 수 없었다.

딕은 일어난 직후에도 그다지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지날 때 마다 조금씩 제 몸의 마디마디를 움직여 볼 뿐이었다. 꼼지락꼼지락 천천히 점검하는 그 모습을 제이슨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루 전엔 말도 제대로 못하더니, 지금은 제이슨과 눈을 마주 칠 때마다 그놈의 입을 열지 못해 안달이었다. 딕은 기운이 나기시작하면서 부터 꼬박꼬박 틈이 있을 때마다 제이슨에게 말을 걸었다.


“알고 있는 늑대인간이 없다고?”

“그래. 없어. 너 같으면 알고 싶겠냐?”


툭툭 내뱉는 퉁명스럽고 거친 말투에도 딕은 별로 상관없는 듯 했다. 때때로 그는 잘 생긴 얼굴에 진지한 근심을 담은 채 제이슨을 빤히 바라보기도 했다.


“무리가 없는 늑대인간은 없어.”

“너 같은 사람도 혼자 다니잖아. 나라고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우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타입은 아니니까. 연대까진 아니더라도 개체를 파악하는 시스템은 있지만……. 제이슨, 언제부터 혼자 다닌 거야?”

“처음부터.”

“처음……?”


언제가 처음이었는데? 딕의 물음에 제이슨은 생각하기 싫은 것을 짓씹으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했다.


“6개월 전.”

“6개월……. 혹시 누구에게 물렸”


말을 잇던 딕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몇 번의 헛기침으로 질문을 물렸지만 제이슨은 그가 물어보려고 했던 소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다 묻지 않았던 것은, 그 나름대로 실례라고 생각했나보다. 어쩌면 스스로의 일도 그다지 떠올리기 싫은 생각이었나 보지. 원해서 이런 존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 점은 딕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제이슨은 어렴풋이 생각할 수 있었다.


“말해두지만, 누군지는 몰라.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없어. 만나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6개월 동안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으니 그쪽도 딱히 날 만나고 싶지 않은가보지.”


만나면 찢어 죽여 버릴 거야.

진심을 담은 뒷말이었다. “그렇구나…….” 딕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제 어쩐다.”


도대체가 뭘 고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뭘 저렇게 고심하면서 기대어 앉은 채 제이슨을 볼 때마다 한숨까지 쉬어가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곧 제이슨은 자신이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란 것도 깨달았다. 나는 또 왜 여기 같이 처박혀서 저 근심걱정 가득 찬 (쓸 데 없이 예쁘장하게 잘생기까지 한) 환자 얼굴을 보고 있는 거야?


“완전 갓난아기 상태이기도 하고…….”

“지금 나 보고 한 말이냐?”

“걱정하는 거야.”


황당한 일이었다. 상대는 간밤에 제 손에 의해 옆구리가 날아간 채로 만 하루를 움직이지도 못하고 앓았던 사람이었다. 물론 인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누구에게 다쳐놓고 또 누굴 걱정하는 거야?


“이쪽의 지식도 별로 없는 것 같고, 그렇다고 무리도 없잖아. 6개월이라니……. 이쪽에선 까마득하게 한참 어린 아기를 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너, 아무 것도 모르잖아?”

“……적어도 늑대인간을 걱정하는 뱀파이어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는데.”

“그거야 케케묵은 레이시스트 같은 소리지.”


레……뭐? 황당한 소리에 말을 다 뱉지도 못한 제이슨에게 딕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내버려두면……제이슨, 언젠간 사람을 해칠 수도 있어.”


실로 지난 밤 그랬을 뻔 했다는 사실에 제이슨은 입을 꾹 다물었다. 대상이 사람이 아니었고 뱀파이어였다는 점이 달랐지만, 눈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 이 피해자는 비록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것을 밝혔던 들 겉모습은 인간과 똑 같았다. 의식이 없던 늑대인간은 딕을 사람으로 알아봤을 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 지난 6개월간 꼬박꼬박 긴 보름밤을 홀로 지새우며 옭아매던 가장 큰 고통이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제이슨은 무척이나 불쾌했다.


“젠장, 그러는 너도 밤마다 사람 피로 배 채우고 다닐 거 아냐? 누군 아닌 것처럼 왜-”

“사람 피 안 마신지는 꽤 됐는 걸.”

“뭐?”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연이은 황당한 말에 제이슨은 또 말문이 막힌 채 입을 뻐끔거렸다. 그럼 쥐나 잡아 달라 했던 말이 설마……?


“얼마나 됐는데?”

“음, 글쎄. 90년? 100년 정도인가? 말 해놓고 보니 얼마 안 된 것 같기도 하다.”


기어코 제이슨은 그저 장단 맞춰 주는 것처럼 보일까봐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황당한 질문을 제 입으로 말해버리고야 말았다.


“……너 도대체 몇 살인거냐?”

 

 

 

별로 탐탁치는 않았지만 딕의 말은 제이슨이 수긍할 만한 이유들이 붙어있었다. 첫째, 제이슨은 인간이 아닌 자들이 생활하는 방식에 있어서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로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둘째,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위험에 처할 수 있으며 이것은 자신이 가해 상황이 아닌 그 반대의 때가 올 수도 있다는 것(딕은 잠시 ‘헌터’라는 인간들의 집단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셋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 제이슨에게 가장 최악인 한 예시를 마지막으로 말한 딕은 뒤이어 덧붙이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내가 막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기묘한 일이었다. 딕의 말은 모두 맞았지만 그것을 감히 떠올릴만한 늑대인간은 없을 것이다. 뱀파이어와 함께 다니는 늑대인간은 없고, 늑대인간을 돕는 뱀파이어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어쨌든 딕은 꽤나 납득할만한 이유를 나열하며 제이슨을 반박하지 못하게 했고, 결국 동이 터오기 시작하며 눈에 띄게 피곤해하면서도 몇 시간 가량을 또 떠드려고 했던 딕은 똑같은 의미를 담은 다른 수다를 더 하려는 바람에 결국 제이슨에게서 마지못한 동의의 의미를 담은 욕과 대답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일종의 항복 선언과 비슷한 느낌에 제이슨은 이를 갈았지만, 아침이 오자마자 곤히 잠들어버린 이에게 화를 낼 기회는 이미 지나가 버린 지 오래였다.




***

 

 

 

제이슨과 딕은 서로 이형의 존재라는 점에선 같았지만 살아가는 시간은 달랐다. 제이슨은 낮에 눈을 뜨고 밤에 잠이 드는 오랜 인간의 방식이 익숙했고,그것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딕은 해가 뜨는 아침에 피곤해했으며 밤이 되어야 비로소 움직이는 존재였다. 처음 며칠은 낮의 시간마다 죽은 듯 눈을 감는 딕을 보며 그가 잠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을 원활히 움직이고 작은 소동물의 피로 배를 채운 딕은 벌건 대낮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궁금함을 표현한(물론 질문하는 과정은 굉장히 퉁명스러운) 제이슨에게 딕은 그저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잠이 오는 경우는 없어.”


몸 상태가 멀쩡하면 그럴 경우도 없다는 것이다. 제이슨은 처음 딕을 만났던 때 하루 이상을 또박 누워있던 그를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땐 잤잖아.”

“잔 게 아냐. 그냥 활동을 멈춘 거지. 피곤했으니까.”

“그런 경우 보통은 잠을 자는 게 사람이야.”


딕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난 인간이 아니잖아.”


꿈도 못 꾸는 걸. 딕의 중얼거림은 별 것 아닌 듯 그저 지나가고 말았지만 제이슨에겐 이상한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제이슨은 언제든 잠이 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 잠자리가 편안했던 기억은 인간일 때나 아닐 때나 별로 없었어도.


“잠을 자지도 않는 다면 뭘 하는데?”


딕은 그저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얗기만 한 손가락 끝에 걸린 것은 이제 겨우겨우 차오르기 시작한 손톱같은 작은 달이었다. 제이슨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 달구경이라고?


“저 찢어 죽일…….”

“달은 죄가 없어, 제이슨.”


욕을 내뱉으려는 제이슨의 어깨를 톡톡 토닥이며 딕은 말했다.


“태양이 딱히 잘못이 없듯 말야.”




***




“더러워”


식사 머리맡에서 하는 소리로는 예의 없을 말이었지만 제이슨이 보기에 그것은 식사가 아니라 사냥 직후의 단계였다. 늦은 밤 침대 두개짜리 모텔 방을 빌려 샤워를 하고 나오는 동안, 그 사이 어떻게 어디서 무슨 속도로 잡아온 것인지 모를 생쥐 한마리가 딕의 손에 들려있었다.


“명색이 뱀파이어가 죽은 쥐나 빨아먹고 사냐.”

“사람을 잡을 순 없잖아.”


그리고 이거 일단 살아 있는데. 괜히 또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딕에게 제이슨은 머리를 털던 수건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거 정말 착한 뱀파이어도 계시네.”


그래도 그 이상은 더 말하지 않았다. 뱀파이어는 꼬박꼬박 피를 마셔야하는 줄 알았거늘, 며칠에 한번 꼴로 쥐를 잡아 해결하는 딕을 보아하니 사람처럼 삼시 세끼를 모두 챙겨먹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어쩌면 생각보다 그가 꽤 인내하는 것에 길들여진 뱀파이어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사서 먹지.”

“뭘?”

“많잖아. 좀 깨끗한 애들.”


펫샵이라던가……. 제이슨의 말에 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너무 불쌍하잖아.”

“쟤랑 걔들이랑 뭔 차이인데?”


알 수 없는 기준이었다.

어쨌든 딕은 잠시 쥐를 내려놓고 제이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째 선뜻 식사를 하지 않는 모습에 이번엔 제이슨이 의아해 할 차례였다.


“뭔데?”

“음……더러우면 나가서 먹을까?”

“아, 됐어. 쥐가 더러운 게 문제가 아니라,”


제이슨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그냥 먹어도 네가 괜찮겠냐고. 걱정의 대상이 다른 곳에 가 있었음을 밝히기 전에 제이슨은 얼굴을 팽하니 돌리고 딕의 맞은편 침대 위로 드러 누워버렸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씨발, 뭘 알아듣고 웃고 지랄이야……. 꿍얼거리는 투덜거림에 결국 금방 끝날 웃음이 더 이어지고 말았다.


“그만 쳐 웃어.”

“그럼 목욕 시키고 먹을까?”

“아, 됐어!”


급기야 제이슨이 던진 베개에 얻어맞은 딕이 낄낄거리며 몸을 돌렸다. 손에 들린 쥐도 그와 동시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 것인지, 딕의 식사는 언제나 그렇게 제이슨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그마저도 최근에 뒷모습이라도 보게 되었던 것일 뿐, 한사코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려는 그에게 짜증과 욕설을 한바가지 퍼부은 제이슨의 노력(?)이랄지, 저렇게 조용하고 짧은 식사의 모습을 대략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나갔다 오겠다는 딕을 방 안에 붙잡아 두기까지의 과정은 제이슨 스스로가 생각해도 좀 억지 가득한 것들 투성이었지만, 그래도 괜히 마음에 찝찝함을 남겨두느니 차라리 방 안에 들어 앉아 식사하는 뒷모습이라도 구경하는 게 나았다. 내가 먹는 건 싱글벙글 매일 쳐다보는 주제에 왜 네가 먹는 건 숨기고 난리야? 뭐 이렇게 성질을 냈던가, 그 말에 드물게 난감해 하는 예쁘장한 얼굴을 구경하게 된 건 덤이었다.

 식사는 금방 끝나곤 했다. 하긴, 작은 쥐에서 뽑힐 피가 뭐 얼마나 되겠냐만, 제이슨은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저거로 식사가 되긴 하는 건가?’

알게 뭐람. 돌아누운 등 뒤에서 뒷정리를 하고 침대 위를 정리하는 딕의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밤이라고 잠이 들진 않겠지만, 꼭 잠들 것처럼 톡톡 베개를 털고 이불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은 딕이 신경 쓰였다. 제이슨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꺾어 딕을 바라보았다. 흥미 없는 표정으로 TV채널을 돌리고 있는 딕의 팔목이 눈에 들어왔다. 제이슨의 눈엔 허여멀겋기만 한 팔뚝이다. 뱀파이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가끔 한 밤중에 볼 때마다 지나치게 하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딕에겐 결코 약하다는 표현을 붙이기엔 어울리지 않았고, 오히려 탄탄하게 잡힌 잔 근육과 균형 잡힌 몸매로 몸만 보면 건강한 청년의 모습이었지만 – 이 생각을 하면서도 제이슨은 결코 훔쳐본 것이 아닌 그냥 눈에 들어와서 떠오른 것일 뿐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 어쩐지 좀 부실해보였다. 제이슨은 그 원인을 벌써 몇 주 째 며칠 주기로 보고 있는 딕의 식사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동물 피로 대신한다는 그 모범 정신은 내가 상관 할 바 아니라지만 정량이 되긴 하는 것인지.

늑대인간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제이슨의 입맛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고기는 언제나 좋아했었고, 술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야심한 시각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본 칠리핫도그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늑대인간이 되어서도 꽤 구미 당기는 간식거리였다. 먹고 즐기기 위함은 물론 배를 불리기 위해서 제이슨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꽤 많았다.

딕이라고 해서 그런 인간들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끔 자신이 주도적으로 제이슨을 끌고 심야의 펍이나 바에 들어가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즐기기도 했으며, 제이슨이 툴툴거리며 선심 쓰듯 추가로 산 1인분의 핫도그를 건네받고 맛있게 먹어치우기도 했다. 가리는 음식도 없거니와 당연하다는 듯 고기는 그도 좋아하는 듯하다. 가끔 지나치게 레어로 먹는 것도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밤마다 잠들기 직 전까지 딕의 행동을 곁눈질로라도 보게 된 제이슨이 몇 가지 알 수 있었던 건, 딕은 생각보다 신체활동의 영역을 굉장히 최소화한다는 것이었다. 가끔씩 보이는 그의 민첩한 행동들을 – 담벼락 정도는 가벼운 문턱을 넘어가 버리듯 훌쩍 뛰어 올라가는 등의 – 보았을 때나, 가볍게 술에 취하고 웃고 떠들거나, 야밤의 사람들 사이에서 휘적휘적 걸어 다니는 모습들을 보았을 때 그가 결코 외부활동을 거부하거나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즐거워한다. 때때로 그는 자신이 마치 보통의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인간과 섞이고 아무렇지 않게 말상대를 찾아내며 쉽게 친해지기도 했다. 가만히 놔두면 충분히 마당발이었을 스타일이다. 비록 제이슨이 볼 수 있는 딕의 행동반경이란 건 이 정도의 평범한 모습들뿐이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성격 상 절대 가만히 있을 타입은 아니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딕의 활동 영역은 그 성격에 비해 지극히 좁았다. 딱 그 뿐이었다. 밤의 거리를 활보하고, 가끔씩 맛있는 것을 맛보고, 적당히 구경하다가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침대를 찾는다. 그러고선 잠들지 못하는 밤을 저렇게 TV채널을 돌리거나 동물 다큐멘터리 따위를 찾아보며 보내는 것이다.


‘계속 그래왔을까?’


태양이 뜨면 돌아다닐 수 없는 몸, 잠들지 않는 밤, 아무도 눈 뜨지 않는 고요한 시간에 TV리모컨을 쥔 채 가만히 있는 뱀파이어라니. 제이슨은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 마다 인상을 찡그리곤 했다. 인간은 아니라지만,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게 뭐였더라.

맛있는 것을 즐긴다. 딕도 분명 그런 것 같았다. 인간의 맛을 잊지 못하며 인간의 음식을 즐기는 꼴을 벌써 몇 번째 봤으니까. 음식이란 맛도 맛이지만 분명 배가 불러야 할 것이다. 물론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엔 음식을 먹는 것인지 그냥 채워 넣는 것인지 모를 식사를 하는 때도 아주 많았지만, 어쨌든 배는 채울 수 있다. 충분히 먹을 수 있으니까. 맛도 성에 차지 않는데 배조차 부르지 않는 음식을 평생 먹을 수는 없다. 제이슨의 얼굴이 더더욱 구겨졌다. 제이슨은 그러한 경우를 잘 알고 있었다. 텅 빈 냉장고, 먼지만 쌓인 식탁, 질척거리고 더러운 거리에서 눈치를 보며 먹을 것을 훔쳐 달아나면서도, 그 마저도 제대로 취할 수 없는 밤의 나날들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주 어린 날의 시간이었다.

도저히 즐길 만한 일은 아니다. 그것도 평생을 그래야 한다면 제이슨은 세상을 향해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온갖 욕을 서슴없이 쏟아 부을 수가 있었다.

뱀파이어에게 맛있는 음식은 무엇일까.

딕은 제가 잡아온 쥐의 피에 대해 평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평가할 가치가 없을 음식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딕은 자신의 입맛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없다. 그것은 그가 피를 마셔야 살아갈 수 있는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자신의 식사를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간의 피를 벌써 백년 남짓 마시지 않았다 하는 희귀한 이 뱀파이어를 두고 제이슨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피를 떠올렸다. 제이슨은 그에게 제 피를 먹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처음 만난 날, 자신 때문에 다치고 정신을 잃은 그의 입술 안에 제 스스로 낸 피를 흘려 넣었다. 뭐, 완벽한 ‘인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난 사람이잖아? 괜히 켕기는 부분을 애써 정정하며 제이슨은 그날 그렇게 정신을 차렸던 딕을 생각했다. 딕은 웃으며 제이슨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때는 별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었지만 제이슨은 가끔 묻고 싶었다. ‘그래서, 맛이 어땠을까?’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아, 귀엽다.”


상념은 딕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끊겼다. 뭔가 싶어 돌아보니 딕의 시선은 TV속에 나오는 새끼 고양이 영상에 박혀 있었다. 제이슨이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잠시나마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던 얼굴은 곧 이어 새끼 고양이의 장면이 지나가자마자 채널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평소와 똑같이 돌아갔다. 제이슨은 그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을 ‘기운 없는’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그냥 봐서 그렇단 소리였다. 결코 그를 심도 있게 관찰했다던가 신경 쓰는 쪽이 아닌-


“야.”

“응?”


제이슨을 돌아보는 딕의 얼굴엔 언제나 미소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을 바라보는 제이슨은 언제나 항상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비실거리는 새끼. 이렇게 말하면 딕은 어이없어 했지만 제이슨은 절대 고운 말로 제 한마디를 정정한 적이 없었다.


“……배 안 고프냐?”

“음? 식사는 방금 했는데. 제이슨 혹시 출출해?”


뭐 먹으러 나갈래? 야심한 시각에 아무렇지 않게 바깥에 나가겠냐고 권유하는 것은 그가 잠들지 않는 뱀파이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몸에 베인 천연덕스런 딕의 대꾸에 제이슨은 그저 팽 하니 등을 돌리고 억지 잠을 청할 뿐이었다.


“제이슨?”


한 번 더 부르는 소리는 들렸지만 제이슨은 못 듣는 척 눈을 감았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 어어, 썅, 이거 왜 이러는데. 잠들기 위해 돌아누운 것이었지만 마음처럼 쉽사리 잠이 오지는 않을 것이며 오늘은 특히 더 그럴 것이 분명했다.

배 안 고프냐 라니, 미친, 무슨 질문이 그래?

딱히 이상할 것 없는 질문이었지만, 순간 목젖까지 올라왔던 질문을 억지로 삼키고 내뱉은 말이 있었다. 혀를 말아 넣는 기분으로 대충 내둘렀지만 하마터면 물어볼 뻔 했다. 아니, 요구할 뻔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었을 때 딕의 반응을 상상할 수가 없었기에 아주 순간적으로, 본능적으로 피했을 뿐이다.

제이슨은 아주 잠시 인간의 피를 마시는 딕을 생각했다. 눈을 감고 피를 빨아 올려 맛있게 목울대를 넘기는 딕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신없이 음미하며 놓지 못하는 딕의 하얀 손가락도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에 취한 채 잠시간 현실을 잊는 그의 눈이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상상했다. 아마도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일 것이고, 그리 나쁘지도 않을 것 같다.

제 목에 입술을 맛 댄 채 가까이 있는 딕의 모습이었다.

 

‘……어디까지나 상상만 했었는데.’


상상만 했던 것이 바로 며칠 전이었다. 제이슨은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비실비실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볼 때 마다 막연하게 떠올린 상상 같은 것이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소망이나 욕심 때문은 아니라, 그저 그 뿐이었다. 언젠가는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들이다. 요구도 무엇도 없이 억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뭐 그 정도면 나쁠 것이야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 하나 불편할 것도 없이……. 그냥 평소처럼. 사람이 맛있는 것을 보고 먹고 즐기는 게 일상이듯이, 그냥 녀석도 그러길 바랐다. 제이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남이 밥 먹는 모습을 넉살 좋게 구경할 재간은 없더라도, 딕이 맛있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한 번 정도 구경하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야.”


제이슨은 제 품안에 늘어져 있는 딕을 불렀다. 목소리는 거칠어도 안긴 몸을 조금씩 흔들거나 내려다보는 눈길은 조심스러웠다. 딕의 대꾸는 없었지만, 무어라 달싹이는 입술의 반응을 확인한 제이슨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오늘은 침대도, 푹신한 침구도 없는 밤이다. 제이슨 스스로는 어떻게 기어들어왔는지 생각나지 않는 숲의 깊은 안쪽이었다. 유독 어두운 밤이다. 비가 오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귀신같이 벼랑 아래의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것도 제이슨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제이슨은 오늘 밤을 기억하지 못한다. 먹구름에 잔뜩 가려져 비까지 쏟고 있는 밤인지라 도통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는 하늘이었지만, 제이슨은 그 하늘에 대고 이유를 찾으며 욕을 하고 있었다. 제이슨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자신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를.

딕의 몸이 차가웠다. 언제나 따뜻할 일이 없는 그의 몸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 심한 것 같다. 눈을 뜬 직후 제이슨은 거의 본능 적으로 제 몸을 살피는 것도 잊고 그를 찾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고작 몇 번 반복되지도 않았는데 조금 익숙해졌다고 제 몸의 생체기를 살피는 것보다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그를 찾는다. 딕을 만나고 나서 제이슨은 자신의 몸을 살피지 않아도 되었다. 스스로가 다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항상 피 냄새는 끊이지 않았다. 그 정도가 약하고 강한 것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그 근처를 맴돌았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는 것과 동시에 항상 맡게 되는 그 냄새는 제이슨으로 하여금 안도감과 비참함을 함께 가져왔다.

그가 있다.

살아있는 모습과 같이 죽은 것처럼.

비가 오고 지랄이야……. 제이슨은 대상이 없는 욕을 중얼거리며 딕의 몸을 가까이 끌어안았다. 주변에 옷가지가 있었다. 아마 딕이 챙겨둔 것이 분명했다. 주제에 뱀파이어라고, 죽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평소에 장담하던 걸 마치 매번 증명해보이기라도 하듯, 제이슨의 보름달 밤은 언제부터 인가 이런 식이었다. 무방비하게 방치되었던 고된 밤이 마치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밤인 것처럼,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게 느껴도 된다는 식으로 딕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피 냄새와 상처를 안은 채로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걸 막아줄 수 있을 거라고 하더니, 직접 몸으로 막는 다는 것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제이슨에게 이런 모습은 매번 비참함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연민과 안도감이 기억나지 않는 밤을 홀로 버텨준 이를 안게 했다. 아무리 그러안고 있어도 딕의 몸이 따뜻해지는 날은 없었다.

오늘 밤은 동굴 같은 곳도 찾지 못했나보다. 아마 비가 오기 때문일 수도 있고, 비가 오기 때문에 멈췄을 수도 있었다. 곧 있으면 동이 터올 시간이었지만 비가 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태양이 가려져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차가워져 있는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제이슨 진짜 따뜻하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주제에 태평스럽게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열이 나거나 식은땀을 흘리는 것은 아니지만 딕은 분명 앓고 있었다. 그는 오늘 밤도 다쳤다. 제이슨이 멀쩡하게 보름밤을 보내는 날이 이어질수록 그 밤마다 딕이 다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처음엔 옆구리였지만, 그 다음엔 어깨였다. 그리고 또 그 다음은 허벅다리가 부러졌던가. 오늘은 왼쪽 팔이 너덜거린다. 피가 많이 났을 것이다. 이런 걸 두고도 딕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요령이 생겼다고도 했다. 그 요령이라 함은 결국 얼마나 덜 다치고 안전한 방법으로 늑대인간을 막아서냐의 문제일 뿐이었지만, 그 안전함이 뱀파이어의 기준이라 해도 어쨌든 곧 죽을 것 같이 다치는 건 한결 같았다. 제이슨이 안전하게 보름밤을 보낼 때 마다 딕은 꼬박 하루를 앓았다. 그는 늘 괜찮다고 했다. 제이슨이 무언가를 해치거나 그것 때문에 스스로 위험해 처하는 일 보다는 훨씬 안전한 경우라고 했다. 그 아무렇지 않은 친절과 천연덕스러운 미소가 제이슨에겐 비참한 일로 다가왔다.


비가 거세졌다. 아마도 이 밤을 기점으로 다음날 까지 종일 퍼부을 것만 같았다. 빗줄기가 그대로 둘의 몸에 부딪혀왔고 서늘함 또한 아무것도 가릴 것 없이 닥쳐왔다. 제이슨은 딕이 미리 준비했음이 분명한 옷가지들을 끌어와서는 제 몸보다는 딕의 몸 위를 덮었다. 딕이 그 몸짓에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춥잖아, 제이슨. 얼른 입어.”

“됐어.”


무어라 더 말하려는 걸 그대로 제지하고, 제이슨은 딕의 너덜너덜해진 왼쪽 팔을 바라보았다. 피는 더 나오지 않았지만 그건 딕이 뱀파이어였기 때문에 그럴 것이고, 비가 와서 다른 때 보다 더 서늘한 체온 탓인지 상태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제이슨이 잠시 자세를 고쳐 잡았을 때,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딕은 종종 끙끙거리는 신음을 작게 내보냈다.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양새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럴 때 마다 제이슨은, 괜히 마음에도 없는 것을 챙겨 주겠단 식으로 더더욱 퉁명스럽게 말하곤 했다.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됐어. 비가 오잖아.”


이런 날은 다 숨어 있어. 역시나 작은 소동물 따위를 빗대어 말하는 딕에게 제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다.


“괜찮아, 제이슨. 오늘은 별 거 아니야. 좀 쉬면 어차피 괜찮아 질 걸? 거기다 따뜻하기도 하고.”


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는 모양새마저 어찌나 아무렇지 않은지, 오히려 그 태연함이 제이슨의 입을 매번 다물게 했다. 젠장, 그런 게 아니라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시란 소리야.”

“뭘?”


뭘 당연하다는 듯이 배제 하는 거냐. 제이슨은 한숨을 쉬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딕은 항상 평범한 뱀파이어의 사고에서 당연히 나올 수도 있을 사고의 범위를 미리 차단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사고방식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제이슨은 바지주머니를 뒤져서 찾아낸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계는 아침 6시를 향해가고 있었고 구름만 아니었다면 이미 하늘은 꽤 밝아져올 시간이었다. 비가 오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차피 다른 데도 찾아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제이슨은 당장 오늘 밤 깨끗한 방을 구해 푹 쉬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피를 마시라고.”

“괜찮다니까.”

“누가 쥐새끼 피 따위나 마시래?”


결국 버럭 외치는 제이슨의 목소리에 딕이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똑바로 제이슨을 향한 눈에 거절의 눈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입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어서 때를 놓칠 새라 무어라 말하려고 벌리는 입을 향해 제이슨은 재빨리 자신의 손목을 말 그대로 처박아 넣었다.


“웁!?”

“씨발, 안 물면 될 거 아냐.”

“에이은!”


막힌 입으로 도지지 않고 항의의 목소리를 내보내는 딕에게 제이슨은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내려 보며 말했다.


“이미 피 냈거든. 그리고 빌어먹게 아프거든? 무는 게 싫으면 그냥 받아먹기라도 하면 되잖아. 빨대 꽂았다고 생각해. 그냥 핥아 먹던 가. 어차피 나 죽을 만큼 먹으란 소리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냥 닥치고 마셔. 난 빨리 깨끗한 방 찾아 들어가서 샤워하고 싶은데 네 놈이 꼼짝 못하는 바람에……젠장, 비는 왜 이렇게 와?”


괜히 주저리주저리 말을 많이 했다. 명치가 조일 것처럼 쿵쿵 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비가 와서 다행이지, 젠장……. 때 아닌 추위가 무색하게 몸이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손목에 닿은 딕의 입술이 유난히도 차갑게 느껴진다. 제이슨. 목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움직인 입술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았다.


“맛 없어도 빨리 마셔. 억지로 네 목구멍 속까지 처넣기 전에.”

“…….”


작은 콧바람이 느껴졌다. 웃었나보다. 이내 반항을 포기한 듯 멀쩡한 딕의 오른손이 입술에 붙은 제이슨의 팔목을 살짝 붙잡았다.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제이슨은 무의식 적으로 딕의 입술 가까이에 힘을 주어 붙였던 팔에서 긴장을 풀었다. 조금 떨어진 팔목과 딕의 입술 사이로 따뜻한 체온과 차가운 입김이 부딪혔다.


“미안, 제이슨.”


식사 인사로는 어울리지는 않는 말인데. 덧붙여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쓰린 기분에 제이슨은 고개를 돌렸다. 한숨과도 같은 나지막한 숨소리와 동시에 딕의 입술이 팔목에 닿았다.

 흐르던 피와 흘러가는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프지도 않았다. 정말로 물지 않으려는 듯 입술만을 맞댄 채 목울대를 넘기며 피를 받아 마시고 있는 딕은 어느덧 눈을 감고 있었다. 감은 눈꺼풀의 속눈썹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 조금 찡그리는 듯도 했던 눈썹을 보고 제이슨은 괜한 생각까지 했다. 아 씨, 그러고 보니 전전날부터 짜증난다고 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신경이 쓰였다.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갑자기 이유도 모르게 열이 올라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딕의 입가에 가까이 붙인 팔목을 빼지는 않았다. 알게 뭐야. 다음엔 담배 말고 술을 마시지 뭐.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딕은 어느 순간 제 입가에서 제이슨의 팔목을 부드럽게 밀어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순순히 팔을 물리고, 제이슨은 식사를 끝낸 딕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딕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표정에 불편하다거나 거북해 보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아 괜히 내심 안도했다.

식사를 끝난 후에, 흔히들 뭐라고 말하더라.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누군가와 평범한 식사를 해 본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뭐, 둘의 식사가 또 평범한 사람들과 같을 리도 없었지만 제이슨은 그렇게 핑계를 대기로 했다.

대신에 제이슨은 딕을 힘주어 가까이 끌어당겼다. 품에 걸쳐놓은 모양새나 마찬가지였던 그를 더 가깝게 당긴 바람에 흡사 꼭 안고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다행이도 딕의 거부 의사는 없었다. 딕은 그저 얌전히 제이슨의 손길에 이끌린 채 그의 가슴과 어깨에 차가운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제이슨이 옷가지를 끌어 그의 어깨를 덮을 때, 그는 한참 만에 다시 웃은 듯도 했다.

 

 

 

“식사다운 식사인 거지.”


그 후로 제이슨은 종종 딕에게 팔뚝을 내밀었다. 때가 되었다 싶을 때 어딘가로 나가 볼 채비를 하는 딕의 어깨를 붙잡아 돌리고 내미는 일이 대다수였다. 난감해 하는 딕의 표정이 나름 재밌기도 하다. 배고프잖아? 일부러 이죽거리는 표정에 난처하다는 듯 스치는 미소는 결코 화를 내거나 당황해 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못말리겠다는 표정이다. 걸쳐 입으려던 재킷을 도로 옷걸이에 걸어두며 딕이 말했다.


“그렇게 쥐가 싫어?”

“응.”


더럽거든. 세상에 그렇게 불쾌할 일이 따로 없을 것이란 표정을 그대로 지어보인 제이슨이 말했다.


“깨끗이 닦았으니까 얼른 먹지?”


결국 웃음이 터졌다. 식사의 시작 전에 어울릴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듣기에는 좋은 소리였다.

잡식성 독거 오타쿠

마늘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