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토 코타로 X 아카아시 케이지

*AU로 인해 원작과 설정이 다른 점 주의해주세요.

*하이큐 등장인물이 주변인물로 나옵니다. (보쿠아카를 제외한 커플링 요소 없음)

*5월 보쿠아카 온리전에 비공개 외전을 40p정도 포함하여 나올 예정입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세요. 이번에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05. 너는 나를 들었다 놨다 해.


코코. 보쿠토는 꿈을 헤매는 표정으로 어떤 이름을 불렀다. 코코라고 불린 이름의 주인은 본가에 있던 시절 키우던 작고 하얀 말티즈였다. 생애 처음 가족으로 맞은 강아지는 지나친 사랑으로 성격이 새침했지만 보쿠토를 유독 잘 따랐다. 보쿠토가 잘 채비를 하고 있으면 다른 곳에 있다가도 쪼르륵 달려와 얌전히 옆에 앉아 기다리며 보쿠토를 바라보곤 했다.


“엄마가 같이 자면 버릇 나빠진다고 했는데...”


하지만 검은색으로 가득 차 초롱거리는 눈을 보고 있자면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보쿠토는 주위를 살핀 후 코코를 안아들어 침대 위에 올려주었다. 영리했던 코코는 침대에 올라오고 나서도 또 얌전히 앉아 보쿠토가 누울 때까지 기다렸다. 방의 불을 끄고 보쿠토가 침대에 누우면 그제서야 꼬물꼬물 다가와 옆구리에 턱 박혀 몸을 둥글게 마는 털뭉치를 사랑스럽게 만지며 함께 잠에 들었다. 그래, 마치 지금처럼.


부들부들거리는 무언가를 꿈결에 코코라고 생각해 열심히 만지작거리던 보쿠토가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물론 보쿠토는 그 부들거림의 정체가 같은 자리에 누워 자신의 옆구리에 찰싹 붙어 잠이든 아카아시의 머리카락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으음...”


새근새근,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던 아카아시는 잠결에 누군가 끊임없이 머리를 만지작거리자 신경이 쓰였는지 작은 투정을 부리며 바르작걸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손길이 사라지지 않자 인상을 쓰고는 으음, 하는 투정어린 소리를 내더니 기지개를 펴듯 팔을 위로 쭉 폈다.


“악!”

“보, 보쿠토 상?!”


아침에 보쿠토가 세상 모르게 늘어져 있으면 심심한 건지 조그만 발로 퍽퍽 보쿠토의 얼굴을 때리며 못살게 굴던 코코였지만, 보쿠토는 우리 코코 힘이 이렇게 셌었나 생각하며 얼굴을 강타한 얼얼한 고통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번쩍 잠이 깼다.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앞에 보이는 얼굴에 보쿠토는 다른 의미의 외마디 비명을 한번 더 질러야 했다.


“꺄악!”


보쿠토가 어제 그렇게나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신 원인이었던 사람은 왜인지 보쿠토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카아시의 얼굴색과 자세 보다는 일어나자마자 아카아시가 보였다는 사실에 공황상태에 빠진 보쿠토가 “아카아시? 아카아시?”하고 당황 섞인 목소리로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보쿠토 상! 어, 얼굴!”

“어, 어?”

“쌍코피! 휴지, 휴지 갖고 올게요!”


주르륵, 인중을 기준으로 양갈래로 나뉘어 흐르는 핏줄기에 아카아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뛰쳐갔다. 하지만 정작 맞아서 피를 흘리는 당사자인 보쿠토는 아직 파악되지 않는 상황에 뚝뚝 떨어지는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다 뭐야.


“많이 아픕니까?”


두루마리 휴지 하나를 통째로 풀어온 듯 한 양의 휴지를 들고 허겁지겁 돌아온 아카아시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휴지를 돌돌 말아 보쿠토의 콧구멍에 하나씩 꽂아주었다. 뒤늦게 몰려오는 불쾌한 감각에 보쿠토가 한쪽 눈을 찡그리자 아카아시가 미안함과 걱정이 섞인 얼굴을 했다. 보쿠토는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아카아시가 자신한테 (보쿠토 기준으로) 다정한 표정을 하는 것을 보고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으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괭창아.”

“일단 진정될 때까지 빼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응.”


유혈사태의 흔적이 남은 이불을 거둬내며 아카아시가 슬쩍 보쿠토의 눈치를 봤다. 오로지 얼굴만 본다면 좋게 말해도 귀여운 상은 아닌 사람이 퉁퉁 부어서는 양 콧구멍에 하얀 휴지를 끼우고 앉아있는 모습이 솔직히 많이 귀여웠다. 계속 보고 있으면 웃어버릴 것 같아 치운 이불을 들어 재빨리 욕조에 두고 돌아오자 보쿠토가 공손히 앉아 얼굴만을 움직이며 이리저리 집을 둘러보고 있었다.


“뭐 봐요?”

“나 아카아시 집응 처음이장아. 그래서 구경하고 잉성서.”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별 건 없죠? 구조가 똑같아서.”


양 코가 다 막혀있어 옹알이와 비슷한 소리가 나자 보쿠토가 슬쩍 한쪽 휴지를 빼고 킁킁거렸다. 더이상 피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른 쪽 휴지를 마저 뺀 보쿠토가 이물감이 남아있는 코를 씰룩거리며 머쓱한 듯 뒷 목을 긁었다.


“저기 아카아시. 내가 왜 여기서 잤어? 내가 막 행패부린 거야 혹시?”

“저한테는 아닌데, 행패라고 하시니 생각났네요. 어제 쿠로오 상이 연락하면 죽여버린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쿠로오가?”

“네. 여기까지 힘들게 끌고 오신 게 쿠로오 상이거든요.”


진짜 죽었네…. 지은 죄는 아는지 얼굴이 창백해져 중얼거리던 보쿠토가 앞에 앉아 있는 아카아시에게 물었다. 아카아시는 정말 괜찮아?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아카아시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열쇠 찾아서 집에 넣어줬으면 혼자 편하게 잤을텐데."

"그 생각 안 한건 아닌데요."


한번 말을 끊은 아카아시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신체 건강한 남성이 으레 그렇듯이 아침이라 아래가 반쯤 씩씩해 있던 보쿠토가 그걸 보더니 슬쩍 옆에 있던 베개를 끌어 왔다. 다행히 아카아시는 그걸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부러 데리고 왔습니다."

“왜, 왜 그랬어?”

“할 말이 있어서요.”


자신의 생각을 꿰뚫는 것 처럼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봐오며 할 말이 있다고 말하는 아카아시에 보쿠토의 심장이 철렁했다. 할 말?


“그게 뭔데?”


긴장한 것이 역력한 얼굴로 물어오는 보쿠토를 바라보는 아카아시의 눈이 순간 진해져 보쿠토가 꿀꺽, 큰 소리로 침을 삼켰다. 아카아시의 입이 열리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 처럼 보였다.


“보쿠토 상...”



삐약삐약삐약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사 옥상에 올라온 보쿠토는 난간에 아무렇게나 기대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귀에 댄 휴대폰에서는 처음부터 기본으로 설정해 놓은 건지 쿠로오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통화 연결음이 흘러나왔다. 능글거리면서도 몸에 밴 매너와 인상 좋은 미소가 특징은 쿠로오는 보쿠토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손 꼽히는 좋은 사람이지만 기본적으로 화가 나면 오랜 친구라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운 모습을 보였다. 사과가 늦어질 수록 화를 돋울뿐이라는 걸 아는 보쿠토는 그래서 진짜 죽음은 막기 위해 친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달칵


피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연결음이 끊기고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리자 보쿠토가 눈을 질끈 감고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뗐다. 하지만 멀어진 휴대폰에서 예상 외로 별 소리가 나지 않자 한쪽 눈을 슬그머니 뜬 보쿠토가 멈칫하며 다시 휴대폰을 귀로 가까이 댔다. 


"...쿠로오?"

"이 망할 부엉이 새끼 전화기는 왜 귀에서 떼고 지랄이야? 내가 너처럼 무식한 줄 알아 다짜고짜 소리나 지르게!"


인사는 생략하고 마치 눈 앞에서 자신을 본 듯한 생경한 묘사를 하며 사자후를 내지르는 쿠로오에 놀란 보쿠토가 몸을 움찔하며 주위를 살폈다. 여기 쿠로오가 있을리가 없는데. 더듬더듬, 보쿠토가 말을 이었다.


"뭐야 무섭게."

"네가 하는 짓이 다 거기서 거기지 이 멍청아. 아카아시 군이 말 안했어? 연락하면 죽여버린다고 전해달라고 했는데."

"말 해줬어…."

"근데 전화를 해? 죽여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냐?"

"제가 잘못했습니다."

"됐으니까 끊어라. 진짜 화났으니까."

"다신 술 마시고 쿠로오 님을 힘들게 하지 않겠습니다."

"쓸데없이 몸은 좋아서 짜증나게 더 무겁고. 어제 허리 다 나가서 이제 장가도 못 가 이 망할 새끼야."

"죄송합니다."


죄인인 보쿠토가 쏟아지는 폭언에도 공손하게 허리를 조아리며 쿠로오의 말들을 받아냈다. 계속 앵무새처럼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만 반복하던 보쿠토가 이젠 거의 무릎을 꿇을 때쯤 쿠로오가 잠시 폭언을 멈추더니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제 아카아시 군이 집에는 잘 넣어줬냐?"


조금 분이 풀렸는지 아까보다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보쿠토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쿠로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다시 보쿠토의 얼굴을 어둡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무룩해진 얼굴로 입을 삐죽이며 보쿠토가 말했다.


"나 어제 아카아시 군 집에서 잤어."

"뭐? 왜?"

"내가 일어나면 할 말이 있어서 자기 집에서 재웠다고 하더라."

"무슨 할 말?"

"나도 몰라."

"뭐?"

"모른다고."


아니, 그게. 다시 생각해도 김이 빠지는지 보쿠토가 맥없이 흐물거리며 아침을 생각했다. 원래도 진중한 얼굴이긴 했지만 유난히 진해진 눈빛과 굳건한 입매에 절로 긴장해 침만 꿀꺽꿀꺽 삼키던 보쿠토는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는 아카아시가 입을 여는 모습을 꼭 주먹을 쥐고 바라보고 있었다.


"보쿠토 상..."


뭐지, 내가 불편해서 이사를 간다는 걸까. 아니면 어제 같이 민폐인 행동은 자제해달라는 걸까. 기다렸다가 한대 치려고 재웠다는 걸까. 긍정적인 면은 하나도 없는 불길한 생각만이 보쿠토의 머리를 뒤흔들고 있을 때 아카아시가 벽에 걸린 시간을 손가락을 가르켰다.


"출근 안 하십니까?"

"어?"

"지금 7시 40분인데요."

"어?!"


벽에 걸린 시계가 야속하게도 지각이 임박해졌음을 알리고 있자 정신을 차린 보쿠토가 허둥지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쩔 줄 몰라하는 보쿠토에게 침착하게 짐들을 건넨 아카아시가 빠르게 현관으로 달려가 대충 신발을 구겨신는 보쿠토를 뒤따라갔다.


"출근 잘 하세요."

"어, 고마워 아카아시!!"


최근 상사에게 이달의 요주의 인물로 찍혀 지각을 하면 삶에 위협을 받을지도 모르는 보쿠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사와 함께 뛰쳐 나갔다. 빼꼼 현관문 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보쿠토는 이미 집으로 쏙 들어간 후였다. 행동도 빠르지. 그보다 할 말 그거 아닌데…. 순식간에 홀로 남은 아카아시가 아무도 듣지 못 할 말을 복도에 흘려보냈다. 뭐, 좋은게 좋은 거라고 사람은 살리고 봐야지. 어깨를 으쓱해 보인 아카아시가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에 돌아간 보쿠토는 씻는 둥 마는 둥 물을 끼얹고는 벨트를 잠그며 신발을 신고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며 집 밖으로 나왔다. 금요일에 마셨어야 했는데, 미쳤지 내가. 뒤늦게 전날의 무모했던 자신을 속으로 나무라며 보쿠토가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한명 더는 도저히 무리일 것 같아 보이는 전철에 무식하게 몸을 들이밀고 탄 덕분에 다행히 지각은 면한 보쿠토가 회사에 도착해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외근이 없어 영혼 없는 눈으로 타자를 치며 모니터를 응시하던 보쿠토는 출근한지 한시간이 되어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할 말이 출근 안 하시냐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시험기간에 모든 창의력이 올라가듯 일하는 시간에 비약적으로 머리가 좋아지는 보쿠토가 타자를 치던 손을 멈췄다. 설마, 출근 안하세요 그 말 하려고 그 고생을 하며 나를 자기 집에 재웠으려고. 게다가 눈도 그렇게나 진지했는데….


뭘까, 뭘까? 화면에 알 수가 없네를 몇번이나 쓰다 지우던 보쿠토가 저멀리 상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이자 재빨리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하는 척 했다. 상사가 사무실에서 나가자 다시 알 수가 없네를 쓰며 아침의 일로 눈이 멍하니 풀린 보쿠토가 한 30번쯤 썼다 지운 알 수가 없네를 알 까지 썼을 때 불현듯 입을 헤 벌렸다.


'설마….'


화해의 밤 얘기였던 거 아닐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원래 술을 마시면 헛소리를 하는게 주사라고 말하던 아카아시의 모습이 보쿠토 눈 앞에 아른거렸다. '헛소리' 그 단어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떡이 되도록 술까지 마신 자신에게 한줄기 광명같은 기대에 보쿠토의 눈이 반짝거렸다. 맞아 죽더라도 그게 뭐냐고 붙잡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이 놈의 회사가 문제야 회사가!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상사의 자리를 노려보던 보쿠토가 벽에 걸린 시계로 눈을 돌렸다. 퇴근까지 약 7시간 30분. 1초, 1초 가는 게 보이는 시계침을 하나하나 노려보던게 오늘 아침 10시 30분의 일이었다.


"그렇게 된거야."

"뭐? 뭐가 그렇게 돼?"

"지금까지 생각했잖아."

"술 덜 깼냐? 무슨 소리야?"


회상을 마치고 밑도 끝도 없이 한 말에 쿠로오가 황당해 하는 목소리를 귀 저편으로 넘긴 보쿠토가 자세를 바로 하고 눈 앞에 펼쳐진 도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오늘따라 블럭을 따라 늘어진 빌딩들이 눈에 들어왔다.


"쿠로오. 저기부터 저기까지 내 꺼 였으면 지금쯤 난 얘기를 듣고 있었겠지?"

"알아듣게 얘기해 좀."

"아니야. 미안하다고."


다음에 비싼 초밥을 쏘겠다고 약속한 보쿠토가 전화를 끊고 울렁거리는 마음에 하늘로 울렁거림을 뱉어내겠다는 듯 숨을 길게 내뱉었다. 모든게 착각일 수도 있지만, 혹시나라는 단어가 자꾸만 뒷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얼른 퇴근하고 싶어어…. 안 그럴 것 같으면서 귀엽게 머리에 잔뜩 까치집을 짓고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그 얼굴이 너무나 보고싶었다. 생각해보니까 새삼스럽지만 같이 자기까지 했다는 사실에 심장을 강타당한 보쿠토가 이잉 앙탈을 부리며 몸을 이리저리 꼬아댔다. 6시 되면 누가 불러도 자리에서 뛰쳐 나오리라 생각하며 보쿠토가 크게 소리쳤다.


"퇴근!!"


분명히 뱉어냈는데, 아까보다 더 울렁거리는 심장에 부르르 떤 보쿠토가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도쿄 하늘을 뒤로 하고 하나둘 옥상을 나가는 사람들을 뒤따랐다.



누가 봐도 급해보이는 걸음으로 보쿠토가 어두워진 거리를 뛰듯이 발을 움직였다. 5시 55분부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히 짐을 싸던 보쿠토는 58분이 되자 다리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시침이 움직이는 걸 100번 정도 눈으로 따라가던 보쿠토는 6시가 되자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어 누가 붙잡기 전에 재빨리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오늘따라 느리게 오는 것 같은 지하철에 핸드폰 화면을 켜 시간과 위치 알림을 5초 단위로 번갈아 보던 보쿠토가 사람을 가득 채우고 역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에 몸을 우겨넣었다. 평소엔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아쉬웠는데 오늘따라 이것마저 느리게 느껴졌다. 혹시 아카아시가 집에 없더라도 기다릴지언정, 보쿠토는 한시라도 빨리 멘션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야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에 도착하고 나서도 빠른 몸짓으로 밖으로 나온 보쿠토는 집에 가까워 질수록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잔뜩 술에 취해 귀찮을게 뻔한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와 뒷처리를 해주면서까지 하려했던 말이 사소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들었다.


저멀리 멘션이 보이기 시작하자 걸음이 더 빨라진 보쿠토에게 3층 복도에 검은 인영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싶어 계속 인영을 보면서 걷는데, 점점 거리가 좁혀질 수록 그것이 오늘 하루종일 자기가 생각하던 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됐을 때, 복도에 우두커니 서있던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 


'애초에 취하게 해야 겠다는 생각이 잘못이었어.'


심장이 머리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쑥 하고 떨어지는 기분으로 보쿠토가 멘션 계단을 세칸씩 뛰어올라갔다. 아카아시가 인사하던 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맨정신에, 꼭, 맨정신에 일단 마음을 전해야 겠다. 보쿠토가 헉헉 거리며 3층에 도착했을 때 아카아시는 아직 들어가지 않고 계단 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카, 아카아시…."

"잘 다녀오셨어요?"

"왜, 밖에 서 있어."

"아, 보쿠토 상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막 오셔서 좀 그렇지만 아침에 할 말 있다는 거 말인데요…."

"저기, 근데. 내가 먼저 말 하면 안될까?"

"네?"

"나 아카아시한테 예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숨을 크게 들이 마신 보쿠토가 아카아시가 뭐라 하기도 전에 성큼, 아카아시 쪽으로 큰 보폭과 함께 가까이 다가갔다. 몇걸음 안가 아카아시 바로 앞에 닿은 보쿠토는 순서가 틀렸다고 소리쳤던 아카아시에게 지금이라도 제대로 순서를 다시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마도 땀 범벅에 얼굴은 빨개져 그닥 멋진 모습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까 인사하던 아카아시를 보던 그 순간의 그 감정을 지금 꼭 전하고 싶었다.


"있잖아,"


더운 날씨에도 밤바람이 기분좋게 불어오고, 바람을 타고 전해진 보쿠토의 이어진 말에 아카아시의 눈이 커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를 마무리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갈 시간에 둘의 시간은 이제 시작이었다. 303호 아저씨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바람에 둘이 함께 보쿠토의 집으로 도망칠 때까지 복도는 그렇게 무언가의 말들로 채워졌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 이랬다, 저랬다 했던 지난 날들을 드디어 한 곳에 가둘 수 있는 그 말들이었다. 

HQ! Haiky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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