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스가] 주고받기 1-2
written by 휘엔


"어?"

나도 모르게 나온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는지 옆 사람의 불만스러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서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깜빡이는 남자의 시선을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까.

흑발의 머리카락과 짙은 청록빛의 눈동자가 어딘가 익숙했다. 낯설지 않은 모습인데 순간 어디서 만났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던 사이, 상대는 자신을 알아봤는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봤다.

"아, 후쿠로다니의 2학년 부주장...!"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 뜨거운 여름날 체육관에서 연습 뒤에 인사하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뜻밖의 만남에 당황하고 있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스가와라 씨, 오랜만입니다."
"응, 아카아시 군.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봄고 이후엔 본 적도 없고, 친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가 아니다 보니, 배구를 그만둔 이후로는 잊혀진 인물이었다.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에도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두르고 있던 아이였지만, 그때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조금 더 어른의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고, 조금 신기했다.

"시간 괜찮으면 앉을래?"
"스가와라 씨만 괜찮으시다면요."
"혼자라서 쓸쓸했는데 오히려 고맙지."

자신도 아직 저녁 전이라며 주문하고 오겠다고 한 아카아시를 보내고 자리를 옮겨 기다리자, 곧 그가 트레이를 들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스가와라 씨, 도쿄에 계셨군요."
"응. 대학 때문에 왔어. 정말 오랜만이다, 몇 년 만이지? 4년?"
"봄고 이후니까 그쯤 된 것 같아요."
"우와, 벌써 그렇게 됐구나. 아카아시 군은 잘 지냈어? 어떻게 지내?"
"저 ㅇㅇ에서 대학 다니고 있어요. 이쪽에서 자취하고 있고요."
"엣? 진짜? 같은 동네 주민이었잖아?"

그렇게 큰 동네도 아닌데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마주쳤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몇 쵸메(丁目)? 나 1쵸메!"
"전 3쵸메요."
"아, 반대라 그런가."

그래도 이제라도 만나서 왠지 기뻤다. 타교에 학년도 달랐고 합숙 때 대화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기에 친하지는 않았지만, 매 순간순간을 열정적으로 살았던 청춘의 한 페이지에 들어있던 사람이라 그런지 묘한 반가움이 들었다.

"스가와라 씨는요?"
"응?"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야 그냥 학교 다니고 알바하고 그렇게 지냈지. 지금은 취업 준비 중."
"취업 준비하시면서 이사 준비하시려면 힘드시겠네요."
"응? 이사?"
"아, 아니셨나요?"

아카아시의 눈동자가 슬쩍, 옆에 두었던 가방으로 향했다.

“부동산 봉투가 보여서 이사 준비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아까 그와 인사를 하며 가방 아래에 대충 밀어 둔 서류를 그 짧은 순간에 보았나 보다. 그러고 보면 합숙 때에도 2학년 부주장인데 3학년 주장을 잘 다루고, 부원들과 타교의 학생들까지 섬세하게 잘 챙겨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던 것이 생각났다.

”틀렸다면 죄송해요.”

잠시 옛 생각을 하는 사이에, 반응이 없는 나를 보고 실수했다는 듯 아카아시가 고개를 숙였다.

"아냐 아냐. 틀리지 않았어! 슬슬 새집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그렇군요. 그런데 이사하긴 조금 애매한 시기 아닌가요?"
“응, 그렇지. 사실 지금 친구랑 살고 있는데, 서로 취직 문제 때문에 아무래도 이사 가야 할 것 같거든. 어떻게 될지 모르니 천천히 알아보고 있어.”

확실히 일반적인 이사 시즌은 아니기에 물어오는 아카아시의 표정에 의아함이 배어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이사 이유를 밝힐 수는 없기에 적당히 진실을 섞어 이유를 말해주자 납득했는지 그의 얼굴에서 의아함이 사라졌다.

“룸쉐어 하고 계셨군요.”
“응. 다이치, 음, 그러니까 사와무라. 우리 주장이었던.”
“아아, 사와무라 씨.”

다이치를 기억하기 위해 잠시 기억을 더듬던 아카아시가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옛 추억을 불러왔는지 그의 무표정한 얼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왠지 그립네요. 합숙 때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응.
“그리고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네요. 이렇게 오늘 여기서 스가와라 씨와 만나다니.”
“하하, 그러게. 합숙 때도 이야기를 많이 한 편은 아닌데, 진짜 상상도 못 했지.”

그래서 그런지 오랜만에 만나니까 괜히 더 반갑고 그래. 마지막 남은 콜라를 흔들어 마시며 말하자 아카아시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가 잔잔한 미소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스가와라 씨와 만나니 좋아요.”

그 미소와 말이 사회성 인사가 아닌 진심으로 들려서 꿀꿀했던 기분이 조금 날아갔다.

“하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래서 이제 집에 가는 거야?”

어느새 포장지만 남고 비어버린 트레이를 보며 묻자, 그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제 가야죠. 라며 포장지와 먹은 자리를 티슈로 정리했다. 예전에 합숙에서도 자연스럽게 주변 정리를 하고 뒷정리를 하는 모습을 보며 깔끔한 성격이구나. 하며 감탄했었는데, 여전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스가와라 씨도 집에 가시나요?”
“...아...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선뜻 대답을 못 하자 상대방의 의아한 눈동자가 돌아왔다.

“아, 그게...어...나 책! 살 책 있어서 서점 가려고!”

걸어서 15분인 집을 놔두고 넷카페나 24시간 패밀리 레스토랑에 간다고 하는 건 역시 많이 이상하니 그냥 집에 간다고 둘러대면 되는데. 왜 저런 대답이 튀어나왔는지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아 조금 당황한 채로 시선을 피하자,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아카아시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럼 저도 함께 가도 될까요? 저도 사야 할 책이 있다는 걸 깜빡했는데, 스가와라 씨 덕분에 생각났네요.”
“그, 그래? 그럼 같이 갈까?”

이대로 헤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다른 상대방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트레이를 정리하고 밖을 나오자 예쁜 노을이 건물 사이로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 빌딩 사이로 보이는 분홍 하늘에서 움직이고 있는 구름을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잠시 전화를 하겠다며 양해를 구했던 아카아시가 조용히 옆으로 다가왔다.

“예쁘네요.”
“태풍 때문에 한동안 계속 비였으니까,”

오랜만이지. 왠지 목이 메어 마지막 말은 입안에서 맴돌았다. 혼자가 아니라 그런가. 울컥하는 느낌에 억지로 입술 끝을 끌어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갈까, 아카아시 군.”

고개를 돌린 것이 조금 부자연스러웠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 아카아시가 뒤를 따라와 옆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인파에 묻혀 걷다 보니 자주 가는 서점이 눈 앞에 보였다. 역 바로 옆에도 큰 서점이 있지만 적당한 규모의 오래된 이 서점이 더 마음에 들어, 도쿄로 상경한 뒤 계속 다니던 곳이었다.

“스가와라 씨도 이 서점으로 오시는군요?”
“어? 아카아시 군도 여기 알아?”
“네. 저도 책 살 때는 여기로 와요.”
“그렇구나. 아카아시 군 집에선 좀 멀지 않나?”
“그렇긴 한데, 이 곳이 조금 더 마음이 간다고 해야 하나?”

조금 이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요. 덧붙이며 작게 웃는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귀엽게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억지로 꾸미고 있던 미소가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것을 느끼는 그 과정이 신기했다.

“응. 나도 그래.”

결국은 잘 모르는 남자인데, 왜 이 존재에게 위로받고 있는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이 많이 고팠나 싶었다.

“들어갈까.”

핑계로 댄 장소였지만 막상 들어가니 은은히 돌고 있는 서점 특유의 분위기와 책 냄새가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옆에 멈춰선 아카아시를 흘깃 보자, 서점을 둘러보는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스가와라 씨는 어느 코너 가세요?”
“난 저기 소설 쪽.”
“아, 저도요. 이번에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와서.”
“제목이 뭔데?”
“「한여름날과 짝사랑」이라는 책인데.”
“어? 나도!”
“스가와라 씨도 그 작가 좋아하세요?”
“완전 좋아해!”

잘 알려진 작가는 아니라 주위에서도 이 작가를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작가이기에 가끔 쉬는 시간에 읽고는 했으니 다이치와 아사히는 이 작가의 이름을 나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작품의 분위기가 하나같이 너무나 어둡고 작가의 문체가 맞지 않아 읽기 힘들다며 빌려 갔던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돌려주기 일쑤였다.

“이 작가 좋아한다는 분, 처음 만난 것 같아요.”
“사실 나도 그래.”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소설 코너에서 신작을 각자 한 권씩 집어 들고 다른 신간을 구경했다. 취직에만 매달려서 한동안 서점을 못 와본 사이에 재밌어 보이는 책이 많이 나와 있었다. 취직되면 봐야지. 아쉬운 마음으로 계산을 마치고 나오니 그새 해가 진 밖은 어둑어둑했다.

이제 어디 가지. 계산을 하고 있는 아카아시를 기다리며 멍하니 밤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을 보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아카아시가 조용히 물어왔다.

“스가와라 씨, 이제 뭐 하세요?”
“나? 어...”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이 밤중에?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조금 뜬금없기도 했고 의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아카아시가 이상한 짓을 할 사람도 아니고, 오늘 그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기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응. 좋아. 뭔데?”

묻는 내 말에 아카아시는 아무런 대답 없이 싱긋 웃으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쫄래쫄래 따라가자 그는 역 근처 마트로 나를 이끌었다.

“스가와라 씨, 맥주 좋아하세요?”
“응.”
“그럼 해외 브랜드 맥주도 드세요?”
“뭐 가끔?”
“맨날 마시던 것만 마시니까 가끔 다른 것도 마셔보고 싶은데 잘 몰라서요. 어느 브랜드가 맛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나도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난 저거랑 저거 좋아해...”
“저거랑은 무슨 안주가 잘 어울려요?”
“그냥 평범하게 에다마메(枝豆)랑 감자칩도 맛있고, 난 카라아게(唐揚げ)도 꽤 좋아해.”
“흐음...그렇군요.”

내 대답을 들은 아카아시는 장바구니에 내가 말한 맥주를 한가득 담고 나에게도 들어달라며 한 캔을 들려준 뒤, 부지런히 식품 코너와 과자 코너에 가서 여러 가지 안주를 골라 담았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가 계산을 하고 산 것을 봉투에 넣는 것을 도와준 뒤 밖을 나오는 그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빨랐다. 열심히 그를 따라가기에 바빴기에 이 상황에 대해 물어볼 타이밍도 놓쳐 애매하게 그를 바라보자 그가 씨익 웃었다.

“스가와라 씨. 생각보다 짐이 많아져서 그런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집까지 가져가는 거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슬쩍 팔을 올려 드는 아카아시의 양 손은 짐이 한가득이었다.

“물론이지! 얼른 줘. 무겁겠다.”
“그럼 이거 부탁드릴게요.”

내가 거절할 거라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는지 예상했다는 얼굴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엣?”

봉투 크기가 커서 무거울 줄 알았는데 너무 가벼웠다. 안을 보니 과자와 안줏거리였다. 당황해서 아카아시를 보니 그는 이미 저 앞에서 걷고 있었다.

“아카아시 군!”
“네에.”

그런 그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자 웃음기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야! 이게 뭐야! 더 줘!”
“그거 들어주시는 걸로 충분한데요.”
“안 충분해!”
“그럼 이것도 부탁드려요.”

내가 열을 낼 것도 예상했는지 아카아시가 순순히 또 다른 봉투 하나를 건넸다. 잡아채듯 받아 든 그 봉투는 처음 봉투보다는 무거웠지만, 아카아시가 들고 있는 짐에 비하면 턱없이 가벼웠다. 자신이 들고 있는 봉투에는 달랑 맥주캔 두 캔이 들어있을 뿐이었지만 그가 들고 있는 봉투는 맥주캔의 무게 때문에 찢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거워 보였다.

“어이, 아카아시 군!”
“얼른 가죠.”

더는 줄 것이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앞서가는 그에게 도저히 이길 느낌이 들지 않아 불만스러운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은 채 그를 따라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지은 지 오래된 것 같긴 하지만 깔끔하게 관리된 3층 건물이었다. 그의 방은 계단을 올라가 3층의 긴 복도 끝에 자리한 방이었다.

익숙하게 열쇠로 문을 열고 아카아시가 문을 열어 들어오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물건만 놓고 갈 생각이었는데 들어오라는 그의 몸짓에 홀리듯 그 문으로 들어갔다.

“어...저기...”
“들어가 주실래요, 스가와라 씨? 현관이 좁아서...”
“아, 응!”

짐도 내려놓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현관에 서 있으려니 뒤따라 들어온 아카아시가 문을 닫았다. 그의 말대로 좁은 현관에 짐을 잔뜩 든 남자 둘이 서 있는 것은 무리였기에, 얼른 신발을 벗고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그의 짐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한여름에 무거운 짐을 들고 와서 그런지 아카아시의 얼굴이 땀 범벅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더 들겠다니까. 괜히 미안해져서 나도 모르게 신발을 벗고 있는 그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에 손을 뻗어 닦자, 그가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미안.”

부활동 할 때도 가끔 후배들 땀을 닦거나 해줬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는데, 그의 반응에 너무 친한 척을 했나 싶어 사과했다. 하긴, 아무리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라고 해도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고, 몇 년 만에 처음 만나는 건데 실례겠지.

“...아뇨. 감사합니다.”

나의 사과에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집 안으로 들어오는 아카아시의 표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좋았던 분위기가 단박에 망가진 느낌이었다. 내려놓은 짐을 들고 부엌으로 가서 아무 말 없이 하나둘씩 짐을 꺼내는 아카아시를 보며 자신의 괜한 행동으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조용히 짐 정리를 시작한 아카아시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닥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짐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는 일도 마쳤으니 이 이상 있을 이유가 없어 다시 신발을 신으려 현관으로 향했다.

“스가와라 씨, 어디 가세요?”

그러나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에 운동화에 발을 적당히 구겨 넣고 있던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고개를 들자, 왜 가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아카아시가 보였다. 그 얼굴이 조금은 다급해 보이기까지 해서, 의문보다는 방금 있던 일이 크게 기분 나쁘지 않았나보다 하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아니, 이제 가야지...민폐 끼칠 수도 없고.”
“어디로 가시려고요?”
“어...”

그냥 집에 간다고 하면 되는데, 왜 그 말이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던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스가와라 씨만 괜찮으시다면 주무시고 가세요.”
“어...?”
“죄송해요. 말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아서 모른 척했지만, 지금 집에 들어가기 힘든 거 아니세요?”

그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잘 숨기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알았어?”
“스가와라 씨, 거짓말 잘 못 하시죠?”

거짓말을 못 하다니. 다이치 앞에서 내 마음을 숨기며 6년을 살았고, 지금까지 들키지 않았다. 그러니 포커페이스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는데, 오늘은 그게 참 안되는 날이었나보다. 괜히 관계없는 사람까지 신경 쓰게 만들어버려서 그게 더 미안했다.

“신경 쓰게 해서 미안...”
“저야말로 주제넘게 참견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넷카페나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 계시는 것보다는 저희 집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아냐 아냐. 고마워. 사실 어디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부드럽게 웃으며 건네져 오는 그의 말에 좋지 않았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반쯤 신은 신발을 다시 벗고 집안으로 올라오자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좁지만 편하게 앉아 계세요.”
“미안. 실례할게.”

현관에서 방으로 이어진 부엌 겸 복도를 지나 닫힌 문을 열자 그의 방이 보였다. 작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모습에서 방 주인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온전한 그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가 왠지 망설여져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서 있자, 뒤에서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가와라 씨?”

뒤를 돌자 그가 어느새 준비를 마쳤는지 트레이에 간단한 안줏거리를 들고 의아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그를 마냥 서 있게 할 수 없어서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가자 그가 따라 들어왔다. 방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가 어색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그가 웃었다.

“아무 데나 앉으셔도 되는데.”
“으응...”

그 말에 엉거주춤하게 탁자 옆에 자리를 잡자 그가 들고 있던 트레이를 탁자에 내려놨다. 잠시만요. 양해를 구한 그가 다시 부엌으로 나가자 그제야 구석구석 그의 방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방 한구석에 자리한 침대 반대편으로 책과 CD로 가득한 낮은 책장이 있고, 그 위로 작은 TV가 놓여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코르크 보드에는 스케줄과 사진 몇 장이 꽂혀있었는데, 사진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가볍게 웃었다. 보쿠토는 여전한가 보네.

"기다리셨죠?"
"아니야. 오히려 내가 도와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손님께 일 시킬 순 없죠."

아까 사 온 맥주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카라아게가 먼저 가져온 안주들과 함께 탁자 위에 펼쳐지자, 작지만 실속있는 술상이 완성됐다.

"나 같으면 데우지도 않고 그냥 먹었을 텐데."
"카라아게는 따끈해야 더 맛있으니까요."

그가 맞은편에 앉으며 내민 맥주캔은 내가 아까 맛있다고 했던 브랜드였다. 물방울이 맺혀있는 맥주캔을 보기만 해도 시원해졌다.

"건배—!"

딸깍. 기분 좋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캔을 들며 외치자 그의 맥주캔이 가볍게 부딪쳐왔다.

"캬아!"

꿀꺽꿀꺽 쌉싸름한 액체를 들이켜자 온몸을 지배하고 있던 무더운 여름이 일순간 사라졌다. 역시 시원한 맥주는 최고였다.

"여기 건 처음 마셔보는데 맛있네요."
"그렇지? 맘에 든다니 다행이다! 오! 카라아게 맛있어!!"
"다행이네요."

맥주도 맛있고 안주도 맛있고. 이 분위기가 너무 편하고 좋아서 기분이 업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아카아시 군, 아까 나 생각해서 일부러 따라온 거였지?"
"스가와라 씨가 말해주신 것도 아닌데, 다짜고짜 저희 집 오실래요? 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설펐죠? 머쓱게 웃는 그 모습에서 예전에 합숙 때 봤던 고2의 아카아시가 보이는 듯해 왠지 모를 그리움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이렇게 편하게 있는걸."

아카아시가 없었다면 안 그래도 비참했던 날에 혼자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넷카페에서 밤을 새웠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진심으로 끔찍했다.

"스가와라 씨가 오실 줄 알았으면 청소 좀 해놓는 건데."
"엑, 이게 청소한 게 아니야? 엄청 깔끔해서 역시 아카아시 군답다고 생각했는데."
"스가와라 씨 안의 제 이미지가 어떤데요?"
"단정하고 정리 잘하고 똑 부러지고. 아, 그리고 섬세한 이미지. 합숙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뭔가 어른스러워서 당연히 3학년인 줄 알았는걸."

그 보쿠토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부터가 보통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합숙에서 조용히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모습이 차가워 보였던 첫인상과는 달라서 놀랐었다.

"스가와라 씨에게 저는 그런 이미지였군요. 뭔가 과분한 느낌인데요?"
"전혀. 오히려 내가 너무 과소평가했나 싶은데."
"왜요?"
"아무리 아는 얼굴이라도 같은 학교에 다닌 것도 아니고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잖아. 그냥 모른 척하고 보낼 수도 있는데."

상냥해. 끝에 작게 중얼거리듯 덧붙인 말에 반대편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했나 생각하기도 전에 화악 달아올랐다.

"에...?"
“...잠시만, 보지 말아주세요.”
“설마...아카아시 군, 부끄러워하는 거야?”

대답 대신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손으로 가리려 했지만, 겨우 그 정도로 한껏 빨개진 얼굴을 가리는 것은 무리였다.

“...스가와라 씨는 의외로 낯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그래? 딱히 없는 말 한 것도 아니고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씨익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시자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부볐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의 손은 내려갔지만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아카아시 군은 의외로 부끄럼쟁이~”
“놀리지 말아 주세요.”
“하하하!”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려 손부채를 열심히 움직이다가 결국엔 포기하고 맥주를 들이켜는 모습이 참 귀여워 보였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면 아카아시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몇 년 만에 재회해 겨우 친숙해지려고 하는 상대를 놀리는 것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싶었다.

“그럼 아카아시 군이 가지고 있던 내 이미지는 어땠는데?”
“...안 알려드릴 겁니다.”
"엑, 그런 게 어딨어? 치사해~!"

나의 항의에도 입을 꾹 다물고 안주를 오물거리는 그의 태도에 부러 입을 삐죽이다 그를 따라 안주를 집었다. 빈 캔이 늘어날수록 잡다한 이야기가 오갔고 조용히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이렇게 마음 놓고 마셔본 것도 오랜만인 느낌이었다. 아니, 처음이려나. 가끔 술을 함께 마시는 것이 다이치였고, 다른 술친구들이 모두가 다이치와의 공통된 지인이기에, 술김에 말실수라도 할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성인이 된 뒤 처음으로 맥주캔을 딴 것도, 맘 맞는 술친구를 찾는 것도 언제나 다이치와 함께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함께 마시면서 즐거웠어도 어딘가 조금 힘들었던 이유가 이거였다는 사실을 4년째에 알다니, 참 바보 같았다. 오늘 참 여러 가지로 아카아시 군에게 고마운 게 많네.

"스가와라 씨, 술 강하세요?"
"후후후...술 마시면 끝까지 살아남아서 말끔하게 뒷정리까지 하는 사람이 바로 이! 스가와라 코우시님이라고!"
"저도 꽤 강한 편이라 언제나 뒤처리 담당이었는데 기대되네요."
"호오, 저도 기대가 되는군요, 아카아시 군."

자신의 말에 조용히 웃으며 한 손으로 새 캔의 풀 탭을 당기는 그의 모습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술친구 중에는 대작할 상대가 없어 처음 만나는 고수와의 대결에 의욕이 불타올랐다.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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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입니다. 이번 화도 잘 부탁드려요.
*피드백, 오타제보는 언제나 환영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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