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서 사람이 이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며 꺽꺽 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는 건 충격적이다. 처음에는 몸을 비트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온몸의 관절하나하나가 다 꺾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살려달라는 듯 눈물을 쏟아내는 눈과 마주치자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로빈은 몸을 돌렸고, 사란은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버렸다.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습니다.}


식당에서 유크테아가 난장판을 만들기 시작하자, 더 이상 보기 싫어서 빠져나와 향한 곳은 비어있는 방이었다. 저택의 규모는 크지만 그에 비해 사람이 적고, 별다른 행사를 진행하지 않기 때문에 연회장이나 많은 방들이 비어 있다. 작년에 저택에 왔을 때부터 로빈은 저택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가끔 청소할 때 빼고는 아무도 오지 않기 때문에 종종 이용했다.


자신의 방이나 서제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비어있는 방에 들어왔다. 사란이 아르젠의 집무실에 갔다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에서 누군가가 기절한 윌슨을 던지고 갔다. 식당에서 유크테아가 윌슨에게 데일리크를 먹였지만 현재 로빈은 해독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1시간을 넘겼다. 방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가구 하나도 없는 방에서 죽어가는 윌슨을 피할 곳은 없었다.


‘부인. 데일리크는 단 5시간 만에 사람을 죽여요. 1시간 이후로부터 몸이 찢기는 고통이 시작되는데, 소리도 못 내며 온몸이 굳어 고통 속에 죽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부인께서는 아르젠을 망치로 깨부수다 못해 저승으로 보낼 뻔 한 걸 인지하고 계십니까?’


‘부인,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부인이 했던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저 사람을 기절시켰을 뿐인데 왜 그렇게 과민반응하시는 지 모르겠군요.’


‘아르젠도 이렇게 닿자마자 쓰러졌죠?’


식당에서 유크테아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자꾸 돌아오는 길에 아르젠이 보여줬던 상처받았다는 듯한 얼굴이 생각난다. 불도 켜지지 않은 방, 창밖의 회색 하늘에서 옅게 들어오는 빛은 윌슨이 발버둥치는 걸 보기에는 충분했다. 1년 반 넘게 자신과 함께했던 윌슨이 죽어가는 걸 보기가 힘든지 로빈은 눈을 감았다. 신음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려온다. 자신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웃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거나 정원에서 꽃을 꺾어와 방에 놓아주고 가던 사람이었다. 이 저택에서 정이 든 사람이다.


“방이나 서제에 갔을 줄 알았는데, 의외에요. 후작부인.”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이 열리고 유크테아와 유크테아의 기사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었는지 목까지 단추를 다 채운 회갈색 옷을 입고, 고동색 가죽장갑을 고쳐 꼈다. 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윌슨에게 해독제를 줘. 저러다 죽겠어.”

“사람에게 독을 쓰는 건 죽으라는 겁니다.”

“해독제를 내놔라!”


유크테아의 대답에 사란이 소리쳤다. 라비와 가일이 순식간에 사란의 목에 칼을 겨눴고, 윌슨의 몸은 움직임이 적어졌다. 대신 사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굳어지고 있다. 유크테아는 이전부터 보여 왔던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얼굴이다. 


“네가 여기 계급에 대해 모른다니까, 특별히 알려주지. 너는 내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면 안 되는 사람이고, 나는 이 저택의 누구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다. 내가 너나 윌슨을 죽여도 아르젠이 조금 화내긴 하겠지만,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거거든? 내 신분이 더 높아서.”


이렇게 말했지만, 클로디어즈 후작 가주인 아르젠과 작위도 받지 못한 공자 유크테아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적어도 유크테아가 작위를 받아야 성립되는 이야기, 그걸 눈앞의 8국 사람이 알 리가 없으니 과장해서 말한 것뿐이다.


“해독제? 당연히 가지고 있다. 근데 네 신분에 감히 내게 명령하는 게 말이 안 되네.”

“일단 윌슨부터 살려. 내가 8국의 환자에게 어떤 걸 먹인지는 알겠으니까!”

“부인, 꼭 1시간 내에 해독제를 먹여야한다고 알고 계시잖습니까. 지금 1시간 넘었어요.”


사실 2시간 내에만 먹이면 된다. 일부러 이건 식당에서 말하지 않았다. 사란이 뭔가 말하려는 것 같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데 말하거나 움직일 정도의 충성은 없다. 말 그대로 계약관계로 맺어진 사람이니까, 자신이 목숨이 더 중요한 거지.


“만약 부인이 시간 안에 못 먹였다면 아르젠이 저렇게 죽었겠죠?”

“.... 나는 시간 내에 먹였어. 아르젠은 살아있고.”

“”


로빈은 더 이상 해독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버렸다는 걸 알고 지레 포기해버린 거다.


“부인이 로체의 딸만 아니었어도 내 손으로 데일리크 꽃을 먹여줬을 텐데 말입니다.”


튤립은 유크테아의 고갯짓을 보고 윌슨에게 해독제를 먹였다. 곧 경련이 잦아들고 이내 온 몸에 힘이 빠져 축 쳐졌다. 로빈과 사란은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고.


“안 죽었습니다. 이 자식은 내가 아직 안 때려서 못 보내주겠네요. 아, 사란? 너한테 쓸 걸 그랬다. 그럼 더 효과가 있었을 텐데.”

“.... 무슨 효과.”

“부인이 벌려놓은 짓의 심각성을 깨닫고 닥ㅊ... 조용히 하는 거요.”


유크테아는 얌전해진 윌슨을 보니 괜히 발로 차주고 싶어서 찼다. 사란도 때리고 싶었지만, 체격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때려도 자신이 더 아플 거였다. 그렇다고 죽이면 아르젠이 자신에게 화를 낼 것 같았다.


“데일리크는 1국에서 흔합니다. 비싸긴 하지만 많이들 쓰는 거고, 살면서 데일리크에 안당하면 인복 있는 삶이란 평가도 받기도 하죠. 박복한 아르젠도 누군가한테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부인이 처음인거죠. 부인이.”


유크테아는 표정을 없앴던 얼굴에서 입 끝을 당겨 이를 드러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부인의 짧은 생각과 판단으로, 아르젠과의 관계는 망했다고 보면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혼하라고, 아니 이혼시키고 싶지만 아르젠이 아무 반응도 없던 걸 보면 그건 아닌 건가 싶다. 게다가 정략결혼인데 이혼한다면 로 가문의 이점을 전부다 잃는 거고, 로체가 조프리를 죽여 그 누구도 함부로 클로디어즈를 건들지 않게 된 상황도 아까웠다. 원래도 클로디어즈는 모두의 관심 밖에 있었지만 사람일은 또 모르는 거였다. 글란딘이 20세가 되어 작위를 받아도, 가주가 되는 것은 또 먼 일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소문을 퍼뜨리던 사람이 조프리 하나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고, 조프리가 가장 열심히 하긴 했지만. 황실 사람들이 의문의 습격을 몇 받은 적도 있다. 전에 황후가 위험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황궁에 간 사람이 아르젠이지 않는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데일리크 같은 걸 쓰는 걸 보면, 부인이 아르젠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부인 손으로 직접 8국의 환자를 만들고 계셔서 저도 무섭네요.”


이 상황에서도 무슨 생각을 알 수 없는 로빈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눈썹을 조금 찡그리거나 눈을 크게 뜨는 정도밖에 보지 못했다. 그나마 눈에서는 순간적으로 뭔가가 나타나긴 한다.


“아르젠이 착하긴 하지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한테까지 착하게 굴지는 않거든요.”


로한과 같은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내용물은 너무 달랐다.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어 8국에 백수의 삶을 살다가 호적에서 파일 뻔해서 아르젠과 현실 도피 결혼, 그렇다고 지금 아는 것도, 하는 것도 없다. 예의도 어디에 처박아두고 왔는지 황후 앞에서도 반말을 썼다고 유명하다.


그렇다고 사교계에서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영주민들의 민심을 잡은 것도 아니고, 성격도 좋은 것도 아니고, 없는 아르젠의 성욕을 해소해주지도 않았을 거고. 로체의 딸이라는 것밖에 없다. 로 가문이라도 로체의 재산은 로체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아무리 평화주의자에 유순해도 그것까지는 아니지.”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다 아직도 창가에 서 있는 로빈을 다시 쳐다봤다. 괴로워하는 윌슨에게 옷을 덮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자신과 얘기할 때 윌슨이 얌전해지고 나서 보인 눈동자의 미세한 흔들림. 유크테아는 눈치 챘다. 로빈은 사람이 죽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죽인 적도 없을 거다. 했어도 옆에 있는 사란이란 사람이 대신 했을 터다. 이 시대에, 쓸모도 없는 온실 속에 화초다.


“맞다. 이렇게 돌려 말하는 것도 이해 못하시죠. 이해하기 쉽게 말해드리겠습니다.”


천천히 정확한 발음으로 하나하나 입으로 꺼냈다.


“아르젠 앞에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부인이 아르젠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예전처럼, 지금보다 더 조용히 사는 겁니다. 지금 저택에서 당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아르젠이 제공하고 있죠. 들어보니 온실까지 짓고 있던데, 그래도 부인이라고 해주는 거예요. 자신한테 독을 쓴 사람이 아니라.”


성인이나 돼서 로체에게 쪼르르 달려가 말하진 않을 거다. 게다가 전부 사실만을 말한 것뿐이라 크게 걱정되지도 않고, 죽는다면 죽는 거겠지. 유크테아와 기사들은 윌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며칠 전부터 내리던 비는 오전 중에 그쳤다. 먹구름이 하나 둘 멀어지고, 파란 하늘이 사이사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무실에서 가볍게 입고 서류와 영지 곳곳에서 온 편지를 읽는 아르젠은 고민이 많았다. 영지가 부유해지는 만큼 인구도 늘어나고, 이것저것 신경써야하는 것이 늘어나고 있다.


아까 유크테아가 식당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유크테아의 상태를 보니 둘이 부딪친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둘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사란은 적어도 로빈과 결혼한 아르젠을 윗사람으로 대하긴 했지만, 유크테아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로빈이 유크테아의 말을 무시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유크테아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저택에 올 때면 그들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서로 활동범위에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요한 게 아니라면 크게 상관 안하는 유크테아가 괜히 사란과 부딪힐 일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란과 유크테아 중 아르젠이 더 신뢰하는 건, 당연히.


“카를이 유크테아 공자님께 심하게 혼나서 당분간 얼굴을 비추지 못 할 것 같습니다.”

“늘 있던 일인데도?”

“공작님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다더군요.”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했기에 카를이 그럴까.”


제임스는 카를과 오웬을 포함한 4명의 사용인이 유크테아에게 맞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용인들에게 악랄한 악담을 퍼붓는 일은 흔한 것이었으니, 이렇게 넘어가는 게 아르젠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방법이었다. 제임스는 괜히 솔직하게 말했다가 세상과 작별하고 싶지는 않았고, 이 일을 유크테아에게 맞기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로빈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어도, 겉으로 보기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원래 그 둘 사이에 대화가 많지도 않았고, 8국에 휴가를 가면서부터 같은 방을 쓰는 일이 많아 대화하는 일이 늘었을 뿐이다. 몇 달 전부터 시작한 아르젠과 하는 포옹의 시간에 일절 참여하지 않은 것뿐이다. 둘 사이는 애초부터 감정 없는 형식적인 부부일 뿐이었다.


*


유크테아가 몇 번 더 클로디어즈 저택의 사용인들을 들볶고 떠난 뒤,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마침 아르젠이 로빈과 사란을 위해 짓기 시작한 온실은 무탈하게 완공됐다. 후반에 안에 들어갈 식물을 고르는 걸 아르젠이 한 것 말고는 온실은 오로지 로빈의 것이었다. 나중에는 온실 내에 침대를 두고 거기서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아르젠과 로빈은, 유크테아와 함께한 식사를 마지막으로 얼굴을 못 본 지 2개월을 지나갔다. 식사시간을 다르게 한 것만으로, 놀랄 만큼 같은 저택에 살고 있음에도 만날 일이 없었다. 로빈이 자주 사용인들에게 아르젠이 아프지 않냐고 물어보는 것 외에는. 8국에 가기 전 모습과 비슷했다.


아르젠과의 포옹시간은 유크테아가 다녀간 뒤로 없어졌다. 한동안 저택내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던 탓인지, 그 뒤에 저택을 찾아온 고요함은 적막하기까지 했다. 이번 겨울은 포근했던 작년과는 달리 유독 추울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리 겨울을 날 준비를 시작했다.


그동안 밖에 나가는 일이 없던 아르젠은, 곧 시작될 겨울을 대비해 한 달 전부터 제임스와 같이 저택과 성 밖을 나가 영지 곳곳들 둘러 다녔다. 아르젠이 영주가 되고 18년 만에 실시한 영지 순회에 영주민들은 기뻐했다. 아르젠이 가는 곳마다 웃음과 생기가 끊이질 않았다.


“제임스, 이번 겨울이 지나면 글란딘에게 작위를 주고 황도의 저택을 맡기려하는데 어때?”

“좀 이른 것 같지만 괜찮을 것 같습니다. 델슨이 옆에서 잘 도와줄 것이니까요”

“그럼 체르디엔과 글란딘 중에서 영지를 더 잘 이끌어갈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해?”

“두 분 다 뛰어나셔서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글란딘과 티아니는 파혼하지 않았다. 조프리가 죽고 잠깐 어색해졌으나,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둘은 19세가 되는 봄에 결혼을 약속했다. 더 이상 글란딘은 아이가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에 아르젠은 생각이 많았다. 자신은 언젠가는 받을 작위와 책임져야할 영지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었다. 막연히 20대 후반쯤에 일어나겠지 싶었던 일들이다. 전 후작부부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아무런 준비도 안 됐던 자신에게 덮쳐진 것들은 지금 되돌아봐도 숨 막히는 것들이었다. 아르젠의 부모님이 죽은 건 40, 42세의 나이, 할아버지는 전쟁에 일찍 죽었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 여후작으로써 활동하던 할머니는 독살 당했다. 아르젠도 곧 40이기에, 글란딘이 자신처럼 힘들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두고 싶었다.


이스티아 제국 때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난 420년간의 클로디어즈 족보를 보면 장수했다는 사람은 적다. 무슨 저주라도 받았는지 50세가 되기 전에 병이나 암살로 죽든, 마차에 치이거나, 말에 밟혀 죽든, 전쟁터에 끌려가서 죽든, 낚시하다가 물에 빠져 죽기까지 했다.


“너는 언제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아?”

“... 마치 제가 죽기라도 바란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군요, 후작님. 아직 저는 건강하답니다. 몸 하나는 튼튼하거든요.”

“하긴, 네가 아픈 걸 본 적이 없긴 해. 얼마 전에 66세가 되었던가?”

“네. 아직도 후작님이 아이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리 훌륭히 자라셔서 영지를 돌보고 계시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네 번째 클로디어즈 후작 시체도 잘 묻어줘.”


첫 번째는 전쟁에서 겨우 시체를 찾아 묻었고, 두 번째는 독으로 피부가 녹아내린, 세 번째는 사이좋게 부부가 나란히 병에 걸린 것이었다. 아르젠이 말하는 네 번째는 아마 자기 자신이다. 황도에서 데일리크로 쓰러진 이후로 종종 아르젠은 자신이 죽는 걸 가정한 듯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이들이 곧 성인이 되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는 후작님이 저를 묻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 못하는 말이 없네. 내가 보기에는 넌 백 살까지는 살 것 같은데.”


아르젠은 피식 웃어주고는 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클로디어즈 가문의 문장이 크게 박힌 마차는, 얼마 전에 제작한 것이었다. 밖에 나갈 일이 없다면 필요 없었겠지만, 남은 시간동안은 영지를 돌아다닐 예정이었기 때문에 주문을 넣었다. 아늑한 마차에 올라 아르젠은 방금 전 마을에서 적어온 것을 분류하여 정리하고 문제에 대한 답을 적은 종이에 도장을 찍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돌아다니며 이동 중에 서류를 처리해야 밤에 잘 수 있었기에 피곤했지만, 한 달 가까이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이제는 익숙해진 듯싶었다.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참을만하다고 생각한 찬바람은 더욱 더 차가워져 있었다. 저택에 들어가자 어느 날 갑자기 아랫니가 하나 빠져서 온 카를이 나와 겉옷과 모자를 받는다. 데일리크 이후 같이 황도에 갔던 사용인들과 거리를 두긴 했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장 껄끄러웠던 윌슨은 저번 달에 아예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방에 두고는 일을 그만뒀다. 그 외에도 두 명도 편지만 남긴 채 저택을 나갔다. 덕분에 새로운 사용인을 뽑아야하고, 기존에 있던 사람들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언제 그만둔다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택의 일부처럼 익숙했던 사람들이 떠나야 할 시간이다. 시간이 좀 더 지난다면 자신도 그래야한다는 사실에 괜히 우울해지고 있는 아르젠이다.


아르젠은 자신이 없어도 문제가 없도록 직접 영지에 손을 대기 시작한 이후로, 로빈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어차피 크게 잘못돼도 자신이 죽기밖에 더 하겠냐는 생각에 도달한 뒤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로 가문과의 무역도, 로빈이 다치거나 죽는다면 문제가 생기는 거였지 자신이 죽는다고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로빈이 여후작으로써 일을 할 일은 없을테니까.


“로빈은?”

“아? 아, 아! 마, 마님께서는 온실에 계십니다...!”


로빈이 어디 있는지 물은 것은 상당히 드문 말이었기에 카를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이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당황한 사람들을 지나쳐 저택을 나가 온실로 향했다. 눈은 발자국이 남을 정도로 쌓여있지만, 따뜻한 온실 근처에는 눈이 녹아내린 흔적만 가득했다. 어두운 정원들과 다르게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곳이라 조금은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외문을 통과하고, 내문을 열기 전에 어깨와 머리에 있는 눈은 녹아 없어졌다. 가볍게 문을 열자 여러 식물들이 아르젠을 반겼다. 처음 온 거라 길을 좀 헤맸지만 곧 로빈을 찾았다. 입에 담배를 물고, 예전과는 다르게 초조하고 불안한 듯한 옆얼굴이 보인다.


“로빈.”


원래 로빈이 이렇게 얼굴에 표정이 나타나던 사람이었던가.


“아르젠....?”


로빈에게서 처음 듣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당신, 8국에서부터는 8국의 환자라고 부르더니 이제 와서 새삼 이름으로 불리는 건 기분이 이상했다. 아르젠은 로빈의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자신이 걸어가자 피다 만 담배를 급하게 눌러 껐다.


“예상보다 더 빨리 괜찮아져서 말입니다. 대화 가능합니까?”

“.... 괜찮아. 마실 거라도....”

“뭐 마시자고 온 건 아니에요.”


자신의 앞에서도 늘 보이던 시큰둥한 표정이 아닌, 자신을 어려워한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 앞에서든 말끝을 잘 흐리지 않았는데, 누가 오든 저 정도로 많이 남은 담배를 끈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저렇게 급하게 행동하는 적도 없었다. 아르젠이 기억하는 로빈은, 느긋하게 소파에 반쯤 누워서 담배를 피면서 대화하는 사람이었다.


“미안합니다. 저는 큰 착각을 했습니다. 멋대로 혼자서 친해졌다고 생각했어요. 주제파악도 못하고 로빈과 내가 친구라도 된 것 마냥. 저나 로빈은 서로를 믿을 필요도, 의지할 필요도 없는 사이....”

“... 그 동안 걱정되거나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나?”


아르젠은 잠시 멍해졌다. 아까 카를이 자신의 말을 들었을 때 이런 기분이었나 싶다.


“나는 그랬어.”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죽기 전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로빈은 아직 젊고, 건강에 큰 이상이 없어 보였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만큼 의외인 말이었다.


“하루 종일 생각나고, 아프진 않나 걱정되고, 말을 섞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얼굴이 보고 싶고 그랬어.”

“어디 아픈 건 당신이 아닙니까? 왜 이래요, 갑자기.”

“나도 내가 왜 이런지는 모르겠다.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너한테도 물어본 거야. 너도 나처럼 그랬냐고. 그런 적 있어?”

“없습니다.”


아르젠은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태도에 로빈의 눈썹은 약간 일그러졌다. 자신의 대답에 서운하다는 반응, 했던 말과 표정, 행동을 조합해 보자면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가능성은 적었다. 로빈의 가족들에게서 들었던, 사교활동을 싫어해 가족과 사란 외에는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그날 했던 짓은...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생각이 없었어. 너도 그런 자리를 싫어하니까... 아냐, 이건 변명이지.... 미안해.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거 엄청 후회하고 있어.”


못 본 두 달 동안 로빈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모른다. 그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 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어디에 머리를 부딪쳐 이상해졌다든지.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는데... 황도에 갔다 온 뒤로 네가 나를 피하고 무시하는 게 보이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슬퍼서... 이번에 이렇게 오랫동안 얼굴도 못보고 있으니까 차라리 그때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 멀리서 얼굴이라도 보는 게 나아. 어디서 또 아파서 쓰러지지는 않았을까 걱정되고, 무리한 일정에 코피를 흘렸다는 걸 듣고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술을 마셨을 가능성도 있다는 걸 깨달은 아르젠은 차분히 저택 내에 있는 술을 머릿속에 나열했다.


“나는 널 싫어하지 않아.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데일리크 따위 절대 쓰지 않았을 거야. 너한테서 그런 말을 말하게 만들고, 너를 보지도 못한다는 걸 알았으면 나는...!”

“제 말을 끊고 하고 싶었던 말이 그런 겁니까?”


두서없이 말을 내뱉던 로빈이 말을 멈추고는 놀란 눈으로 아르젠을 쳐다봤다. 불안해 보이는 로빈과 대조적으로 아르젠은 평소 업무를 보는 듯한 태도와 다름이 없었다. 아무 동요도 내비치지 않는 무표정.


“이미 일은 벌어졌습니다.”

“아르젠, 나는....”

“그저 혼란스러운 것뿐입니다, 가족과 사용인으로써의 관계 외의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을 테니까. 그 거리감을 모르고 있는 것뿐이에요. 제게는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걸로 밖에는 안보입니다. 아니면 8국의 환자에 대한 동정이나.”

“아니야!”


대체 눈앞에서 울 것 같은 은빛 눈을 가지고 있는 건 누구일까. 아르젠이 알던 사람은 어디로 가고, 모르는 사람이 있는 걸까. 로빈은 무엇인가 말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입술이 열리기 전에 아르젠이 먼저 선수를 잡았다.


“이해(利害)관계에 따라 결혼했지만, 서로를 이해(理解)할 필요가 없는 관계. 그게 제가 정리한 당신과 나의 상황입니다. 이걸 말하려고 왔습니다.”

“......”

“당신을 굳이 무서워 할 이유도 없어졌고요.”


아르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실 안은 더웠기 때문에 땀이 조금 났다.


“밖에 나가서 찬 공기 좀 맞고, 냉정하게 정리 해봐요. 뭐가 당신을 그렇게 만든 건지.”

“아르젠...”


아르젠은 그대로 온실에서 나와 침실로 향했다. 눈은 아직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이 다 내린 뒤에는 보다 더 따뜻해질 것이다.


그 사이에 로빈에게 무슨 일이 있었든, 자신에게 그 감정을 품었고, 그걸 입 밖으로 냈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같은 감정을 요구하지만 않다면 괜찮다. 지금 아르젠의 눈에 로빈은 지금까지 없었던 걸로 분류되는 사람이 나타나서 헷갈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1년 반 동안 관심 밖이었던 사람이,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자는 것도, 약 때문에 주체 못할 성욕에 울고 있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태안과 단한과 방에 넣은 사람, 자신의 맨몸을 보는 것 마저 반응 없던 사람이 갑자기 변했다는 게 이상했다. 정말 어디에 머리를 박아서 기억에 혼선이 왔거나, 뭔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있다고 하는 게 설득력이 있었다.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안 될 만한 뭔가가.


*


“눈 내리네.”


유크테아는 창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결정은 손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주황 빛 램프가 간간히 비치는 익숙한 길거리가 눈으로 뒤덮이고 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클로디어즈 저택의 넓은 정원도, 잎이 없어진 나무도 자고 일어나면 달라져 있을 거다. 내민 손에 감각이 없어질 때, 유크테아는 창을 닫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라비가 미리 가져다 놓은 뜨거운 돌 때문에 춥지 않았다.


유크테아는 저번 달부터 기분이 좋았다. 아르젠이 영지 순회라는 것을 시작하고 종종 저택을 비우는 일이 생겼기 때문에, 자신이 저택의 사용인들을 교육하는 것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힘 조절을 잘못하는 바람에 계획에 없던 카를의 이를 하나 뽑아버렸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로빈의 뭔가가 무너지는 표정은 상상이상으로 즐거웠다. 그 뒤로 변한 태도는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졌다. 8국인, 로 가문, 무뚝뚝한 사람이라도 결국 똑같은 인간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거다.


올해에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될 것 같은 만족감이다.


사란은 로빈이 누구 때문에 달라졌는지 너무 잘 알고 있지만,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로빈을 옆을 지키는 것뿐이라는 게 화가 났다. 로빈은 지금까지 로 가문 아래서 안락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귀찮은 것은 하지 않았고, 복잡한 것은 싫어했다.


사건의 시작은 유크테아가 난동을 부리고, 윌슨을 데려간 것이었다. 다분히 악질적이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로빈도 가만히 있었다. 아르젠에게 독을 쓴 건 로빈의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해도, 그 행동 자체를 아르젠과 유크테아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거다. 그 난동으로 일단락되는 줄 알고 있었다. 윌슨도 멀쩡히 저택으로 돌아왔고, 유크테아는 그 뒤로도 몇 번 저택에 왔으나 로빈과 사란을 찾아오지 않았다. 아르젠이 영지 순회를 시작하고 저택에 안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을 때였다.


유크테아는 아르젠이 들어오지 않는 날들에 저택에 왔다. 멋대로 온실에 쳐들어 와서 미친 짓을 하고 갔다. 처음에는 윌슨, 그 다음은 저택의 사용인 두 명.


‘전에 보니까 죽는다는 걸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특별히 신경 써 줄려고.’


라는 걸 이유로 로빈의 눈앞에서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다. 로빈과 사란도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었다. 도망치려도 해봤고, 눈을 감으려고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온실에서, 출입문을 통해 나가는 것도 불가능 했다. 사란 자신의 목에는 항상 칼이 들어와 있었다. 윌슨에게 칼을 휘두를 때 한 번 나섰다가 다리에 칼이 꽂힌 상태로 주저앉았다. 유크테아는 로빈이 도망치거나 보지 않으려고 한다면 저 칼은 다리가 아닌 심장을 향하게 될 거라는 말을 붙인 뒤로, 사란이 죽는 걸 원하지 않는 로빈은 어쩔 수 없었다.


내장이 온실 바닥을 굴러다니는 걸 봤을 때 로빈은 토악질을 참지 못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이고 역겨운 것이었다, 유크테아가 한 짓은. 표정이 일그러지던 로빈이나 사란과는 달리 유크테아는 표정이 없다가도, 가끔 즐겁다는 듯이 웃기도 했다. 그 웃음에 소름이 끼쳤다.


비릿한 피 냄새가 온실 안을 채울 쯤에, 유크테아는 시체와 핏자국을 치우고는 사라졌다. 비슷한 일이 가까운 시일에 2번이나 더 이루어졌고, 로빈은 어딘가 좀 이상해졌다.


사란은 로체나 로이든에게 이 일을 말하고 싶었으나, 1국에서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죽이는 건 1국에 있어서는 일상이라고 들었고, 괴롭히기 위해 하는 걸로 보였지만 전부 다 이유를 붙인 죽음이었다. -1국에서 산다면 누군가가 죽고, 어쩌면 네가 죽이는 것도 익숙해져야 할지도 몰라- 결혼을 위해 8국을 떠나기 전에 로이든이 사란에게 했었던 말이다. 로빈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다. 결정적으로 로빈에게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로빈은 이걸 아무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또 본인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로빈이 사람들에게 아르젠이 아프지 않냐고 묻던 것은 그러려니 했지만, 유크테아가 3번에 걸쳐 온실에 찾아 온 뒤로 아르젠이 보고 싶다거나,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사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20년 동안 곁에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르젠이 자신을 싫어하면, 앞으로 못 보면 어떡하냐고 울 때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다.


처음에는 왜 그러냐며 피곤해서 그런 것이니 쉬면 괜찮아 질 거다, 정신 차리라고 말도 몇 번 했지만 소용없었다. 처음 보는 로빈의 태도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는 건 사란이었다.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로한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사란은 이전에 로한이 로빈의 생일을 맞아서 6국에서 보낸 전서구를 찾았다. 한 번도 쓴 적도 없고, 쓸 생각도 없었다. 자신의 방에서 이미 몇 개월이나 가만히 있던 새가 제대로 로한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있던 일을 다 쓰기에는 입을 열지 말라고 명령했던 로빈이 마음에 걸렸다. 유크테아가 한 일은 잘라내고, 로빈이 얼마 전부터 아르젠에 대한 태도가 변한 것에 대해서 썼다. 이런 식으로 로빈 몰래 글을 쓰는 일은 없었지만, 지금은 뜬금없이 생일선물이라며 전서구를 보내 온 로한에게 감사했을 정도다.


서신을 접어 새의 다리에 묶었다. 많이 쌀쌀해지긴 했지만, 맑은 날씨이기에 자신의 글을 로한에게 전해주고, 이 머리 아픈 상황을 깔끔하게 정의해 주길 바랬다. 이 저택에서 터놓고 얘기 할 상대는 없었고,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도 꺼림칙했다.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윌슨을 비롯한 사용인은 유크테아가 죽였다. 괜히 또 희생자를 늘리고 싶지도 않았다.


{빌어먹을 유크테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몇 주 전에 식당에서 난동부릴 때, 확실히 느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사고방식이 정상은 아닌 사람이라고. 1년 넘게 1국에서 지냈고, 얼마 전에 황도에도 갔다 왔었지만, 유크테아처럼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며 죽이는 귀족,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누가 대놓고 그래) 상당히 높은 귀족에 포함되는 아르젠 역시 로이든에게 들었던 설명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대하는 말투를 썼지만 무시하거나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저택의 식구들에게도 상당히 친절한 편이며,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미친 새끼...}


마음 같아서는 거래고 뭐고 로빈을 데리고 8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로빈이 호적에서 파이고, 자신이 일자리를 잃더라도 8국에 돌아간다면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다. 유크테아가 난동을 부리기 전의 삶은 나름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어떤 위험도 없이 평화롭고 조용했다.


{왜 주인님은 떠나지 않는 거야...}


로빈만 원한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 한마디만 해준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다. 아르젠과의 사이가 조금 나빠지고, 유크테아가 그 난장판을 벌였는데도, 로빈은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1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이렇게 억지스럽게 유크테아가 몰아붙인 상황에서도.


짧았던 가을이 거의 끝나간다. 날이 더 추워진다면 그 전서구는 클로디어즈에 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을 할 때,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일주일 만에 보는 새였다. 거리가 상당했을 텐데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의 다리에 묶인 서신을 풀고 물과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고생했다. 쉬어.}


아직 밖은 해가 뜨지 않아 어슴푸레했었다. 사란이 빼곡하게 적혀있는 서신을 읽고도 몇 번을 더 읽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는, 해가 떠버렸다. 먼 길에 지진 전서구는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 잠 들은 지 오래였다.


{이게 말이 돼?}


-네가 갑자기 나한테 글을 쓸 줄은 몰랐어. 로빈이라면 모를까. 네 이름 있는 거 보고 심각한 사건이라도 터진 줄 알았잖아.-


그렇다, 나름 심각한 사건이 터졌다. 저택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용인들을 유크테아가 눈앞에서 죽였고 로빈이 이상해졌다. 나름 1국에서의 보호자인 아르젠과는 만날 수도 없다. 만났다가 유크테아가 또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어떤 계기로 그 로빈이 후작을 좋아하게 된 거야? 전혀 그럼 낌새는 없었는데. 있던 일을 전부 다 쓰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나랑 내 배우자들은 그렇게 생각해.-


사란이 몇 번이고 다시 읽은 대목이다. 4명이나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있었던 일을 생략해서 로빈의 정신이 이상해질 만한 부분을 몰라서 그런 거다. 그렇다고 그걸 로빈의 동의 없이 말할 수도 없다.


-추신, 후작이 로빈에게 치근대거나 질 나쁜 짓을 했다면 말해. 내 앞에 있는 서류 다 재치고 갈 테니.-


로한이 자신의 앞에 있었다면, 사란은 망설임 없이 멱살을 잡고 흔들며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물었을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이상했다. 황도에서 급격히 로빈을 피하기 시작한 아르젠, 아니 이건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다. 결과적으로 아르젠에게 문제는 없었으나 로빈이 독을 쓴 것 때문에 피하는 거니까, 일종의 생존본능인거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유크테아다.


아르젠과 친한 건 알고 있다. 있는 시간 동안 유일하게 찾아오는 ‘친구’였으니까. 윌슨이 로빈의 부탁을 받고 독단적으로 데일리크를 구해다 준 것, 카를이나 다른 사용인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손 놓고 있다가 아르젠이 쓰러진 것에 화를 냈다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과하게 반응한 거라고 생각할 수는 있었다. 윌슨에게 데일리크를 먹여 괴로워하며 죽기 직전의 모습을 자신들에게 보여준 것부터,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까.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머릿속이 어떻게 생겨 처먹었기에 그딴 짓을 할 수 있으며, 유크테아가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는 다는 걸 아르젠은 알고 있을 지 궁금하다. 유크테아가 이런 사람인 걸 알고 있으면서 가까이 하고 있다면 사란은 처음으로 아르젠이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 게 분명하다.


서신을 보낼 때만 해도, 로한이 -로빈이 상태가 나쁜 것 같으니 데리러 가겠다.-거나 적어도 보러 온다고 할 줄 알았다. 로빈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이나, 로빈이 찾는 아르젠 또는 제 3자가 와서 해결해 주지 않는 이상 어떻게 해결해야할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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