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였다. 초봄인 탓에 아직은 해가 짧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은 길지만 온기를 전해주기에는 옅었다. 라이는 책상 위까지 기어올라온 햇볕 위에 자신의 왼손을 올려 보았다. 흰 손아래로 햇빛이 투광되어 손바닥이 온통 붉었다. 영 차서 뻣뻣하게까지 느껴지던 손가락에 약간 핏기가 돌았다. 멍하니 있던 것은 잠시였다. 뻗었던 손을 거두어들이곤 라이는 다시 눈 앞의 서류로 시선을 향했다. 날씨가 좋아 창을 열어놓은 것이 영 작업 효율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라이는 껴입고 있던 옷을 다시 여몄다. 아침부터 붙잡고 있던 일들은 이제 거의 끝을 보고 있었다. 마무리가 이렇게 미적미적거리는 기분이어서야 신중을 기해야할 서류가 제대로 해결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몸의 상태가 평소보다 나쁜 날도 아니었다. 영 집중이 안되는 것이 거슬려 라이는 그 자리에서 일을 멈추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무겁지만 오래 앉아 있어도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히 디자인된 의자가 바닥에 끌려갔다. 또다시 불어온 바람에 서류가 하늘거리자 라이는 쓰고 있던 것이 아닌 새로 올려둔 잉크병으로 서류를 눌러 두었다.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후드 안으로 밀어 넣는다. 등이 간지럽지만 이편이 후드를 쓰기 편했다. 산책이라도 조금 할 생각으로 라이는 걸음을 옮겼다. 가죽으로 된 샌들이 길다란 신관복장 자락 사이로 보일락 말락 들어났다 사라지곤 했다.

 정원은 아테나의 사유지로, 완전히 아테나의 취향으로 꾸며져 있었다. 규칙성있게 대칭적으로 만든 미궁은 길을 잃을정도로 복잡한 것은 아니었으나 우거진 나무와 꽃덤불로 깊이 들어갈 수록 발걸음 옮기는데 신중을 가하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의 미궁 한가운데까지 걸어들어온 후였다.  장미 모양으로 배치된 장미덤불은 특수한 마법이라도 걸린 것인지 사시사철 그 영롱한 빛을 잃지 않고 진한 향을 피우고 있었다. 하늘은 이제 해를 작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해를 반대로한 저편의 하늘은 닉스의 여신이 장막을 치기 시작한듯 조금씩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라이는 아직 빛에 취해 노을을 반사하는 장미 하나를 두 손으로 감쌌다.  감히 여신의 꽃을 꺾어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두손으로 감싸도 꽃잎이 손바닥을 벗어날 만큼 커다란 장미였다. 향에 취한듯 라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웬일로 이 시간에 여기 있습니까?"

 등뒤로 들려온 목소리에 라이는 흔치 않게 놀랐다. 화들짝 떨리는 어깨에 큰 손이 와 닿자 딱딱하게 굳은 손이 꼭 쥐었던 장미에서 천천히 힘을 빼었다. 장미 꽃 잎 몇개가 그녀의 손에 붙어 떨어져 나왔다. 아테나는 차게 식은 라이를 뒤에서 감싸앉듯 몸을 숙여 그녀의 손 위를 겹쳐 잡았다. 차마 꺾지 못하고 감싸쥐고 있던 장미가 그녀의 손에 쉽게 꺾어져 라이의 손에 들려졌다. 어느새 긁혔는지 라이의 손가락이 가시에 긁혀 조금씩 혈흔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장갑을 낀 아테나의 손이 그 피를 닦아내듯 가볍게 라이의 손을 쥐었다. 흰 새틴으로 된 장갑에 혈흔이 번졌다.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놀란 모양이군요."

 라이의 뒷 목에 입김이 닿았다. 라이는 작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가 장미를 두 손으로 쥐어 기도하듯 품에 안아들었다. 아테나가 몸을 떼어내자 주위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뒤를 돌아 그녀를 보기 까진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아테나는 장갑을 벗어 자신의 옷 주머니에 넣었다. 새틴에 피가 흘렀으니 버리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라이는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발끝이 시려웠다. 아테나는 갑주를 갖춰입고 있었다. 세심하게 자수가 된 천갑옷안쪽에는 체인메일까지 껴입고 있는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찰그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산책하러 나온 것을 보니 몸이 나쁜 것 같지는 않고. 오늘은 일이 그리 많지 않았나 봅니다."

"아니요. 묘하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머리를 식힐 겸 밖으로 나왔습니다."

"별일입니다."

라이는 대답대신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 아테나에서 라이 쪽으로 불어왔다. 미약하게 갑옷에 칠하는 오일냄새가 났다. 라이의 머리속에서 아테나의 오늘 일정들이 스쳐지나갔다. 전쟁중이 아니니 전투에 나간 것이 아니다. 매해 봄에 치뤄지는 선서식에 친히 간 것이리라. 두세 시간 이상 볕 아래 있어야하는 행사인지라 라이는 애초에 참석이 고려되지 않았다. 참모본부는 언제나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느낌이 강했기에 빠진다고 별 흠이 되진 않았다. 라이는 새삼 핏줄이 들어난 제 얇은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검을 휘두르기는 커녕 쥐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제가 손을 가득 편다 해도 아테나의 손가락 한마디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손의 굵기도 거의 두 배가량 차이가 났다.  제 손만 쳐다보는 라이를 가만 보고 있던 아테나가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뇨. 입맛이 없어서."

 그 외에도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가 몇 마디 더 이어졌으나 라이는 영 집중하지 못했다. 두 손으로 쥔 장미는 강박적으로 문지른 탓에 가시가 다 떨어져 나갔다. 어느새 밤하늘에 남은 것은 어스름 뿐이었다. 추웠다. 라이의 어깨가 미약하게 떨리는 것을 본 아테나는 제 망토를 벗어 라이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얌전히 그녀가 망토를 씌워주도록 선 라이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내리 깐 시선을 따라 감긴 듯 내려다 보는 눈에 길게 눈썹으로 그림자가 졌다. 수척하니 파리한 얼굴에 드리워지는 머리카락 까지 귀 뒤로 넘겨준 아테나는 라이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순순히 발걸음을 옮기는 듯 했던 라이는 두어 발짝 걷다가 그대로 멈추었다.

"왜.."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추운 것인지, 감정이 격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테나는 라이의 손목을 잡은 그대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잡힌 손은 그 와중에도 장미를 들고 있었다. 목소리를 따라 살짝 떨리는 손의 진동을 타고 꽃이 눈물방울처럼 꽃잎을 몇장 더 흘려냈다. 붉은 꽃잎은 풀이 성성히 자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중 하나가 아테나의 신발 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테나도, 라이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는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도 불만이십니까."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그럼?"

손목을 잡은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어둠에 뭍혀 잡힌 손목은 멍이 들어도 태가 나지 않았다. 라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 것은, 마치 잘못을 한 어린아이의 마지막 반항과도 같은 침묵이었다. 감정에 취하는 것은 언제나 라이뿐일 진데, 분노의 몫은 언제나 아테나의 몫이었다. 거칠게 팔을 끌어 라이를 거의 품에 끌어들인 아테나는 라이의 턱을 잡아 올렸다. 꿋꿋하게 시선을 돌리는 푸른 눈 가득 울음이 배어 있었다. 억지로 올려다 보게 한 탓에 어깨에 걸쳐져있던 아테나의 망토가 땅으로 미끌어져 떨어졌다.

"그럼?"

 이리저리 흔들리던 라이의 동공은 그녀가 눈을 감아버리고 나서야 그 침착함을 되찾았다. 추운 것인지 옅게 달달 떨리는 손을 올려 아테나의 손등을 겹쳐 잡은 라이는 미약하게 손에 힘을 꼭 쥐었다. 그것은 일종의 작은 반항이었다. 아테나가 라이를 만질 때 라이는 아테나에게 스스로 닿는 일이 없도록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있기 마련이었다. 라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나오기까지는 조금 더 용기가 나왔다.

"이만 들어가 보게 해주세요."

"매번 이런 식으로 피하곤 하죠."

 좋아요. 아테나의 말에 라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다음 수순은 정해져 있었다. 내쳐지거나, 얌전히 내려놓아진다고 해도 매몰차게 돌아서는 아테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는것. 그러나 아테나는 라이를 놔주지 않았다. 마주보는 매서운 회색 눈이 사라지지 않자 라이의 사고가 정지했다. 아테나는 라이의 손목을 놓았다. 턱을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리곤, 갑작스레, 정말 갑자기 라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목으로 위스키를 넘기는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살짝 벌어진 입에 숨쉴틈없이 진하게 입맞춰 온다. 볼 안쪽 훑어내자 고개를 흔들어 어떻게든 빠져나올려고 애를 쓰는 라이의 뒷 목을 감싼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칼을 쑤시듯 밀려 들어왔다.  어느새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아테나는 라이에게 몸을 겹치듯 한 걸음더 옮기며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눈 감는 법조차 잊은 것 같았다. 입을 뗄 때까지, 마주 본 시선은 한쪽으로 쏟아지는 폭포와도 같았다. 급기야, 라이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처음과는 다르게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낸 아테나는 라이를 놓아주었다. 숨을 몰아쉬며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친 라이의 다리가 후들거리가 결국 무너져 내렸다. 그러쥔 손에는 우습게도 장미 꽃잎이 잡혀 있었다. 

"아주, 아주 버리시지 그러셨습니까. 기대 조차도 허락하지 않으시지 그러셨습니까."

원망 섞여 터져나오는 목소리는 물기가 묻어 잔뜩 흐려져 있었다. 콜록, 과호흡이 온 양 숨을 들이쉬던 라이가 손에 들린 장미 꽃 잎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감히 제 손으론 꺾지도 못할 그 꽃은 손 안에서 짓 눌리자 그녀의 코끝에 제 향기를 가득 남겼다. 푸르게 멍이 든 손에 새빨갛게 장미 물이 들었다. 라이는 그 조차 알아 채지 못한것 같았다. 올려다 보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하여 아테나의 발끝만을 찾는 라이의 시야가 어둠에, 눈물에 온통 가려져 암흑으로 물들었다.

"기대한 것도 그대고, 버리지 말아달라 간청한 것도 그대입니다. 라이."

무릎꿇은 인간에게, 그녀의 신은 단 한순간도 상냥한 법이 없었다.




설정과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망사랑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 댓글 피드백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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