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안당의 후미진 곳에 놓인 사진 속 여자는 그 앞에 놓인 하얀 국화와 닮았다. 어머니, 소리 내 부른 적이 몇 번이나 있으려나는 몰라도 어미의 음성은 쉴새 없이 머릿속을 메아리쳤다. 'X, X.' 다정히도 부르는 이름은 썩 따뜻해서, 누구건 행복하기만 한 사람으로 오인하기 쉬웠다. 차게 식은 몸이 더 이상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하게 될 순간에도 어미의 몸은 지아비의 발치에 나동그라졌었다. 아비는 그날로 영영 모습을 감췄고 아름답던 어미는 어린 내가 삼베 차림의 상주가 되도록 영영 눈 뜨지 않았다. 내게 어미가 그리도 큰 존재였던가, 자문한다.


"X, X, X!"


한참을 고개 숙인 제 어깨를 뒤흔드는 동기 애의 손에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시야가 또렷해졌다. 쉽게 웃는 입이 그만큼 쉽게 대답하지는 않는다. 개강 직전, 신입생 오티며 엠티에 관한 회의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뜬금없이 회화과 학생회실로 날아왔던 교수 학습 조정 권고문과 수화 능통의 도우미를 찾던 팩스의 맨 뒷장에는 장애 학생의 재학 증명서가 첨부되어있었다. [201501063 Y] 제 등 뒤에 들러붙어 서류가 넘어가는 것을 훑어보던 부회장의 '뭐야, 좀 생겼는데?'하는 중얼거림 한마디에 순식간에 몰려든 임원들이 문서 틈에서 재학 증명서를 앗아가 한참을 떠들며 돌려보았다. 이후 도우미 구인 공고문을 함께 읽어내리던 부회장의 입이 또다시 방정을 떨었다.


"야! 우리 과에 수화할 줄 아는 사람 있어? 없으면 X 써내게."

"이게 미쳤나."

"왜, 저것도 장학금 나오는데. 알바 뺑이보단 괜찮잖아?"

"……."

"할 줄 아는 사람! 없지?"


얼마 후 다시 제 손아귀로 돌아온 재학증명서는 모서리가 구겨져 있다. 좌측 상단에 붙은 사진을 잠시 응시하다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귀찮게 됐네, 근데 이런 선배가 있었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만 생각했다.


-



"다음 시간 전까지 조별로 소묘 주제 골라서 조교한테 메일 보내, 이상."


웅성거리던 강의실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져 시장바닥을 방불케 한다.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기말 과제를 운운하는 교수의 낯에는 무엇이 깔려있어도 아주 단단히 깔린 것이 분명한 듯, 교수는 학생들의 한탄이나 야유에도 동요 없이 무표정한 채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자리가 흩어져있던 조원들이 약속이나 한 양 X의 자리로 몰려들었다. '선배, 우린 뭐로 할 거예요?' '선배, 그 선배는 아이디어 있대요?' '그 선배가 별생각이 있긴 할까?' X는 소란스러운 조원들의 수다를 일일이 대응하는 대신 어깨동무로 귀를 모아 또렷이 들리도록 크게 얘기한다.


"톡으로 정하자. 연락할게!"


매끄럽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로 특유의 웃음을 서비스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선배'를 쫓기 위함이다.


청아(聽啞)는 문서에 붙어있던 사진보다 실물이 더 봐줄 만했다. 속눈썹이 길고 쌍꺼풀진 눈매며, 도톰하고 붉은 입술의 호선은 어지간한 계집애들보다도 유려했다. 희멀건 얼굴을 하고 무기력한 것이 기억 속 누구를 닮은 것도 같았다. 인조광이 아닌 자연광으로 환한 강의실 한가운데, 이젤 앞에 앉은 사내가 있다.


"형."


시퍼런 캔버스 앞에 앉은 Y의 뒤에 서서 양어깨를 짚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흐트러트렸다. 이젤 곁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그림을 대강 보았다가 네게로 시선을 두었다. 채광이 잘 되는 탓에 더 연해진 눈동자는 자황이나 울금에 가깝다. 색을 자세히 들여다본 탓에 가까워졌던 몸을 뒤로 물리며 아무렇지 않게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 정리해준다.


"소묘 과제 나왔어요. 뭐 그리고 싶은 거 있어요? 전 인물화가 하고 싶은데. 초상화나 기록화… 누드화도 괜찮고."






잘 짖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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