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말 태워달라고?

Thomas × Minho

w. 네시사십사분


점심 후 지루한 과학 시간에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샤프를 돌리며 턱을 괴고 있던 민호는 소리의 발생지인 창밖을 힐끔 바라봤다. 여학생들은 농구, 남학생들은 기마 자세를 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체육대회 때 있을 농구 경기와 기마전에 대비해서 연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단에 앉아 기마전을 구경하던 남자애들은 일대일 대치 상황에 연습경기인 것도 잊고 한껏 흥분해 있었다. 이래서 시끄러웠나 보다. 목적 없는 응원 속에 기 싸움을 하다말고 한쪽 팀이 무언가를 준비했다. 덩치가 큰 가운데 애가 위에 있던 애를 아예 목말 태우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키가 커 보이는데 아예 목말을 타버리니 위로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반칙이다 아니다 반응이 나뉘는 구경꾼들을 뒤로하고, 목말 태우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뭐 때문이었더라? 의식의 흐름에 생각을 맡기고 있다가 생긴 의문이라 이유모를 집착이 생겼다. 왜 그런 다짐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데. 샤프를 달칵달칵 눌러 심을 빼내며 과거 기억을 열심히 헤집었다. 언제부터 목말을 안 태웠었더라. 회상 속 얼굴이 어릴 때로 돌아갔다. 4등신도 안되어 보이는 감자 같은 애. 어릴 때부터 신체 발달이 빨라서 위험하긴 했어도 동생들이나 가벼운 친구들을 업고, 태우고 다녔었다. 초등학생 때도 장난친답시고 많이 그랬는데, 언제부터인지 제 기억 속에 목말은 없어졌다. 톡.


“아씨….”


심의 끝이 교과서에 부딪쳐 부러졌다. 여분의 심이 있긴 했지만 어쩐지 샤프심은 쓰다보면 빠르게 사라져서 아깝기 마련이다. 필통에서 하얀 통을 꺼내어 엄지에 심을 쏟아냈다. 그 중 하나, 가장 길게 나온 녀석을 꺼내다가 교과서에 떨어트렸다. 얇은 심은 짧은 손톱으론 도무지 집히지 않아 하얀 교과서를 몇 번 문지르고 나서야 똑바로 잡을 수 있었다. 샤프의 입구로 조심스레 심을 집어넣은 후에 뭉툭한 지우개로 교과서와 손끝에 문질러진 검은 흔적들을 지웠다. 그러고 보니까 금방 무슨 생각하고 있었지?


“다음 시간까지 21번부터 25번은 발표 준비해오라는 거 잊지 않았지? 안 해오면 점수 깎는다.”

“민호, 발표 준비는 했어?”


제 할 말을 마치고 교실을 나가는 과학 선생님의 뒷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회 때문에 까먹고 있어서 준비 하나도 안했는데, 속으로 욕을 하며 똥 씹은 표정을 지은 민호에게 빡센 선생님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옆자리의 토마스였다.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토마스는 책상에 걸어둔 가방 앞에 쪼그려 앉더니 책상에 두 팔을 겹쳐 올렸다. 그 위로 자연스레 턱을 대고는 눈을 반짝이며 물어보는 토마스가 가증스러웠다.


“아이씨, 이번엔 뭐.”

“나나나나 민호 떡볶이!”

“집에 떡 없….”

“우리 집에 있어!”

“아니 뭔, 벼르고 있었냐.”

“응! 안 먹은 지 좀 됐잖아.”

“그래…이따 너희 집 들렀다 우리 집 가자.”


부모님이나 민호나 육상을 일순위로 두고 있긴 했지만 먼 훗날을 위해 아예 공부를 져버리진 않았다. 그래서 적당한 목표를 잡아두고 공부를 했었건만. 그 중에서도 과학은 정말 목표만 채우기 위해 최소한의 공부만 하고 있던 과목이었다. 그래서 간단한 대답 같은 건 할 만 했지만 이렇게 혼자 발표를 시켜버리면 육상 때문에 자료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무엇보다 내보일 때도 어버버하기 일쑤였다. 안 그래도 점수에 까다로운 선생님이라 민호가 애를 먹었더랬다. 그래서 토마스에게 매번 도움을 받고 있던 거였다. 어릴 때부터 숫자와 기호들에 탁월했던 토마스의 두뇌는 나이가 바뀌고 성장 할수록 빛을 발했다. 민호가 국제 육상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어온 만큼 토마스 또한 수학 과학 분야의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런 토마스가 소꿉친구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지만, 토마스는 민호가 도움을 청할 때마다 조건을 걸어서 민호는 썩…어쨌든 조건들이 어려운 것도 아니니 해주곤 있긴 했다.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과학을 잘하면서 나 한명 도와주기가 뭐가 그렇게 아까운지 매번 조건을 내거는 토마스는 가끔 밉상이었고, 내가 육상을 준비 중인 걸 알면서도 봐주지 않는 유일한 선생님이 과학인 것은 더 별로였다. ‘가끔 밉상’에서 벗어난 떡볶이는 봐줄만해서 기꺼이 오케이 사인을 내린 민호는 눈에 띄게 좋아하는 토마스를 보고 웃었다. 어릴 때부터 이웃집이어서 수시로 들락날락한 토마스가 우리 부모님 요리며, 내가 만든 떡볶이며 잘 먹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았다.


“그건 그렇고 아까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아까 언제?”

“멍하니 있다가 샤프심 부러졌었잖아, 민호 그 전부터 멍하니 있던데.”

“아, 그거 기억 안 나는데.”

“그래? 무슨 생각 했는지 궁금하다. 그치.”


토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 공부하지도 않은 페이지를 펼쳐놓고 있던 과학책을 휙휙 넘겼다. 슬쩍 민호를 바라보다가 도로 책으로 눈을 내린 토마스는 발표 준비를 해야 하는 페이지 모서리를 작게 접으며 대충 훑어봤다. 제법 진지해 보여서 멋있다고 생각이 들던 찰나에 토마스가 덧붙여왔다.


“집에 어묵은 있어?”


깔끔히 무시했다. 그냥 똘추지 뭐. 샤프로 밑줄을 그어가는 와중에도 있어? 있냐고오. 하면서 끈질기게 물어보는 토마스에 도로 턱을 괴곤 언제까지 이러나 속으로 시간을 쟀다. 똑딱똑딱. 다음시간 선생님이 올 때까지 이 지랄을 한 걸 보면 토마스도 보통 똘추는 아니었다.


그냥 대답 해줄 걸 그랬나 하고 생각이 든 건 수업 끝자락에 '민호의 완벽한 떡볶이에 어묵이 없으면 안 되잖아ㅠㅠ'라고 적힌 쪽지를 내 책상에 던지다가 걸렸을 때였다. 종이 치고도 선생님이 토마스를 혼내느라 시간이 늘어지는 바람에 반애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옆 반 수업이 끝난 담임 선생님이 바로 교실에 오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는 걸 봤다며 복도 자리의 아이들이 수근 거렸을 땐 배가되었다. 이대로라면 바로 있는 종례 시간이 늦어져 청소시간은 물론이고 매점에 갈 시간이 없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애들한테 다구리를 당할 토마스가 눈에 훤해 도와줘야하나 고민됐다. 안 그래도 주변 애들이 나한테 눈치를 주고 있긴 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 코치님이 부르셔서 가야하는데 끝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후, 그래. 토마스는 자리로 돌아가고 다음부턴 그러지 마.”

“네, 죄송합니다.”

“너네도 이제 종례 준비해.”


체육 특기생인 덕분에 선생님들한테 먹히는 수법이었다. 여러 번 써먹다 보니 이젠 반애들도 눈치로 도움을 청할 때가 많아졌다. 세 번째 줄에 앉은 알비는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일어나더니 자리로 돌아가는 토마스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잘하는 짓이다 멍청한 새끼야. 걸리지나 말든가 왜 하필 다 끝날 때 걸리고 난리야.”

“아, 아! 알비 아파!”

“너만 수업시간에 놀 줄 아냐? 어? 너만 민호 떡볶이 쳐 먹을 줄 아냐고.”

“쌤 왔어 쌤! 쌤 왔다고!”

“넌 이따 뒤졌어.”


알비의 탄탄한 팔뚝에 헤드록이 걸린 토마스는 목을 감싼 팔을 뜯어내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아파했다. 엄살 부리기는. 근처에선 맞아, 너만 놀 줄 아냐! 하며 야유를 보내는 애들도 있었고, 반애들 대부분은 그 모습이 웃겨 깔깔 거리며 웃고 있었다. 뒤로 넘어갈 듯 의자를 까닥거리며 팔짱을 끼고 있던 나도 그걸 보곤 피식피식 웃었다.


“역시 먹히는 구라는 민호지.”

“구라 아니야. 진짜 불렀어.”

“뭐? 왜?”

“관심 끄고 자리에 앉기나 해.”


앞자리의 프라이와 얘기를 하던 도중 선생님 덕분에 죽다 살아난 토마스가 끼어들었다. 생각해보니까 아까 코치님한테 연락받은 내용을 얘기 안 했던 것 같네. 그래봤자 대회 관련으로 급히 전달해줄 내용이 있다며 수업 마치면 곧장 교무실로 내려오라는 문자였다. 토마스와는 상관없는. 종례만 쌩까고 나오라는 걸 보니까 급하긴 급한데 길지만은 않은 대화인 것 같아서 지금도 딱히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다. 그리고 토마스만 서서 있으니 선생님이 나한테 눈치를 주는 바람에 앉으라고 시킨 거고. 그랬더니 토마스 녀석은 순순히 자리에 앉으면서도 냉정한 내 태도에 울상인 표정을 지었다.


“민호는 교무실 내려가도 돼.”

“네.”


내가 선생님의 허락 하에 종례를 빠지자 그것마저도 부러운지, 혹은 이유를 알고 싶은지 반애들은 눈으로 내 뒤를 쫒았고, 토마스는 대놓고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나를 쳐다봤다.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왜이래. 복도로 나와 뒷문을 닫았을 때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교무실에는 같이 대회를 나가는 다른 애들이 먼저 와있었다. 체육 선생님과 코치님을 앞에 두고 들은 얘기는 대회 일정이 앞당겨졌다는 소식이었다. 이어선 변경된 일정에 맞춰 코치님이 새로 짜온 훈련 일정을 들었고, 변경사항을 전달받은 애들은 교실로 돌아갔다. 그 후에 과학 발표를 말씀드리자 코치님은 나에게 내일까지의 기한을 주었다. 오늘내일 안에 어렵고 까다로운 과학 발표를 준비해야하며, 당장 이틀 후인 주말부턴 훈련 방식을 더 빡세게 하게 되는 상황이 갑작스레 닥쳤다. 다음 과학시간 다음 주 월요일일 텐데. 실질적으로 4일 동안 준비할 수 있던 게 이틀로 줄여져 기분이 안 좋아졌다. 청소하고 바로 운동장으로 내려오라는 코치님에 그제야 인상을 풀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아니면 그저 자기가 화가 나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체육 선생님이 주최 측은 항상 제멋대로라며 어깨를 주물러주셨다. 힘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듣고 교무실을 나왔을 땐, 종례가 끝났는지 복도가 시끌시끌했다. 아까보다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스트레스가 몰려온 덕에 온몸에 열이 올라 땀샘이 터지기라도 한 듯 등과 이마가 축축했다. 발등만 쳐다본 채로 터벅터벅 계단을 오르다 마주친 담임 선생님에 힘없어 보인다는 소리를 듣길 한 번, 복도를 지나던 뉴트한테 심각한 얼굴로 무슨 일 있냐는 질문을 듣길 한 번. 너무 티내고 다녔나 싶어 뉴트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옆으로 밀어내며 아니라고 웃었다. 솔직히 다른 애들이라면 장난이라도 쳤을 것 같은데 뉴트가 너무 심각해보여서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도 아닌데. 하지만 뉴트 눈에는 아니었는지 내 손에 억지로 청포도 맛 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떠났다.

뉴트가 준 사탕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교실을 앞문 너머로 쳐다보다가 이 멀리서도 토마스의 입술이 댓 발 나와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얼씨구, 청소 존나 대충하네.


“민호!”

“아, 쫌!”


교실로 들어온 나를 보고 토마스는 탈모가 온 빗자루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 빗자루가 애써 모아둔 쓰레기 뭉치 위로 떨어지자 같이 청소하던 갤리는 환장하겠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더니 곧 민호에게 가던 토마스의 어깨를 밀쳤다.


“씨발, 토마스. 네가 개새끼냐? 민호만 보면 뛰쳐나가게?”

“민호한테 물어볼 거 있어서 그래!”

“뭐, 또 어묵 있냐고 물어보게? 어?”


토마스에게 화가 난 갤리는 목이 빨개져서 아까 알비와 비슷해보였다. 맨날 쳐 싸우지 쟤넨. 민호만 보면 주체를 못하는 토마스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좌우명을 가진 갤리는 극과 극이었다. 그런 갤리에게 있어 토마스는 수시로 걸림돌이 되었다. 어째선지 조별 과제도, 청소도 같이하는 일이 많은 둘 앞에 민호만 나타났다하면 토마스가 하던 건 모두 내려놓고 민호에게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충돌하는 일이 잦은 둘이어서 그런지 초반엔 수군대던 반애들은 이젠 신경도 안 썼고, 민호만이 나서서 그 사이를 진정시켰다. 우선 열을 내며 왁왁대는 둘 사이로 끼어든 민호는 토마스의 머리를 후려쳤다.


“물어보려는 거 말해줄 테니까 청소 제대로 좀 해라!”

“그래, 멍청….”

“너도 적당히 무시해 새끼야! 지겹지도 않냐?”


강렬한 타격감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 토마스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기가 한풀 꺾인 토마스를 본 갤리는 통쾌한 마음에 웃으며 비아냥거리려 했지만 민호에게 머리를 맞아 더 이상 떠들 수가 없었다.

청소 전후로 1분단 책상을 밀고 줄 맞추는 게 민호 담당이어서 청소 할 때 동안은 할 일이 없었다. 하는 일은 없지만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게 훤히 열린 창문의 창가에 걸터앉아 한숨을 시작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코치님이 대회 관련으로 할 얘기 있다고 종례 쌩까고 내려오라고 했어. 프라이, 나 우유 좀. 땡큐.”

“대회? 왜? 무슨 일 있대?”

“일주일 당겨서 한대.”

“갑자기? 이유는 없고?”

“몰라. 야, 똑바로 쓸어 담아.”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프라이에게 내 자리에 있던 우유를 건네받았다. 제때 먹지 않아 빵빵해진 우유를 열고는 크게 한 모금 마셨다. 미적지근하긴 했지만 상한 것 같진 않아 마저 마시려는데, 그때마다 끈질기게 캐물어보는 토마스 때문에 마실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화나서 불나 뒤지겠는데 거기에 토마스가 기름통을 집어 던진 꼴이다. 그래서 쓰레받기에 쓰레기를 밀어 넣는데도 눈은 나한테 꼭 붙어 있는 토마스한테 모질게 굴었다. 난데없는 승질이긴 했지만 토마스는 뭐라 못할 것이다. 실제로 쓰레기들이 쓰레받기 주변으로 다 날아갔으니.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청소에 갤리는 토마스 하는 짓 좀 보라며 민호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로 빗자루를 친구한테 넘기곤 지갑을 들고 사라지는 갤리에 토마스나 민호나 할 말은 없었다. 괜히 속이 타는 기분에 한꺼번에 우유를 들이마시니 토마스도 내 눈치를 보며 묵묵히 청소했다. 제 할 일이 끝나고 나서도 책상 정리하는 내 몫까지 같이하는 토마스 덕분에 제시간에 청소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럼 이따 조회대 계단에 앉아있어.”

“알았어.”


갤리 말대로 토마스는 개새끼였다. 머리 위에 개의 귀가 달려서 축 쳐져 있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계속 신경 쓰이게 하는 게 아주 개새끼였다.

아직도 내가 예민한 줄 아는 건지 대놓고 쳐다보지도 못하고 훔쳐보기만 하는 토마스가 거슬렸지만 나도 내 할 일을 해야 했다. 하복 셔츠를 벗어 더플백에 쑤셔 넣고는 반팔 티셔츠에 교복 바지를 입은 채로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토마스한테 뭐라 말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 뒤를 지나치는 순간은 짧아서 아무 말도 못했다. 알아서 좋아지겠지. 뒷문으로 교실을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과학책을 챙겼는지, 필통은 들어있는지 가방 안을 확인하다가 순식간에 1층으로 내려왔다.


“훈련 가?”

“어. 넌 또 매점 다녀왔냐?”

“그럼 훈련 끝나고 이거 마셔라.”

“이걸 날 왜 줘?”

“저녁 피자 나오는데 두 개 마시면 배불러서 많이 못 먹어.”

“어쩐지 훈련 끝나고 밥 먹으러 가면 피자는 하나도 없더라. 네가 범인이냐, 시발?”

“야! 나만 그랬겠냐! 토마스 그 새끼는 더해!”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왔을 때 매점 쪽에서 나오는 갤리와 마주쳤다. 파워에이드 두 개를 옆구리에 끼고 지갑에 잔돈을 넣고 있던 갤리는 밖을 향하는 나를 자연스레 따라왔다. 그러면서 핀잔주는 말에는 대꾸도 안 하더니 대뜸 파워에이드 하나를 건넸다. 차가운 음료가 찰랑이며 팔뚝에 닿자 움찔 놀랐다. 얼떨결에 음료수를 받아들긴 했지만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인상이 써졌다. 그러고 돌아오는 답에는 낭비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니, 그럴 거면 처음부터 하나를 사든가 하지. 처음 생각은 그랬으나 이어서 ‘피자’라는 단어 하나에 여태까지 자신이 먹은 부실한 급식이 떠올랐다. 어쩐지 피자 먹기 존나 힘들더라. 괜히 욱하는 마음에 발로 갤리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그러고 보니까 너 어디 가는데 여기까지 왔냐?”

“그냥 너 데려다 주려고 온 건데?”

“…뭐?”

“아, 종쳤다. 아무튼 고생해, 민호.”


현관 바로 앞이긴 했지만 조회대 계단의 절반까지 내려온 마당에 태연하게 말했다. 스피커에서 종소리가 울리자 갤리는 어이가 나간 민호를 두고 도로 계단을 올랐다. 토마스한테 병이라도 옮았나. 둥근 뒤통수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오던 벤과 마주쳤다. 안녕, 민호. 벤과 함께 체육창고로 향하면서 갤리의 소행은 어영부영 넘겼다.


“어…민호, 아까 갤리랑 무슨 얘기했어?”

“별 얘기 안했는데, 오늘 피자 나온다더라.”

“그래? 갤리가 토마스 얘기는 안 했어?”

“토마스? 갤리가 너한테 뭔 얘기 했어?”


체육창고 특유의 서늘함과 퀴퀴한 냄새 속에서 옷을 벗었다. 무슨 대화주제를 꺼내야 할지 고민이라도 한 건지 머뭇거리던 벤은 천천히 단추를 풀었다. 뒤죽박죽인 가방 안에서 육상 유니폼을 찾아 꺼내는 동안에 벤이 고른 대화 주제는 ‘갤리’였다. 거꾸로 뒤집힌 반팔티를 다시 뒤집어 가방에 쳐 박고, 민소매 상의를 입었다. 갤리가 토마스 얘기하고 다니나? 어릴 때부터 주변 친구들에게 많이 까이고 다니던 토마스여서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갤리정도면 뒤에서 까고 다녀도 정말 할 말은 없지만, 토마스가 걱정되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라는 이유보다도 그 똘추가 뒤에서 까이는 이유에 자신이 가장 크게 연관이 있기 때문이어서였다.


“아, 아니. 나쁜 얘기는 아니고. 그냥 웃긴 얘기 했었거든.”

“무슨 얘기 했는데?”

“토마스 그 새끼가 고슴도치고 박민호는 고슴도치 어미 같지 않냐? 하던데.”

“뭐?”

“네 눈에만 토마스 예뻐서 우쭈쭈한다고. 내가 보기에도 그렇긴 한데 갤리는 네가 유독 토마스만 봐주는 것 같다고 불만 많아 보이더라. 하하, 근데 너네는 그러고 노는 게 진짜 웃기….”


벤은 셔츠를 벗고 유니폼을 머리에 꿰어 넣느라 민호의 얼굴을 뒤늦게 봤다. 일찍 봤더라면 사족을 붙이지 않았을 텐데. 결국 벤은 바지를 벗다말고 민호에게 엉덩이를 내주게 되었다.


“고슴도치는 개뿔, 뭘 또 인정하고 지랄이야!”

“아, 민호 그냥 한 말이야! 별 뜻 없이!”

“어, 어? 지금 발 붙잡았냐?”


내가 뒤에서 발로 엉덩이를 찍어 누르듯이 차버리는 바람에 벤은 넘어질락 말락 휘청거렸지만 벽을 짚고 버텼다. 왠지 부글거리는 속에 바로 반대쪽 발도 날렸다. 그러나 벤이 몸을 획 돌려서 발을 붙잡아버려서 맞지는 않았다. 벤도 어쩌다 붙잡은 건지 놀란 얼굴로 슬그머니 손에 힘을 풀었다. 다른 애들이 들어와도 멈추지 않던 매타작은 코치님이 들어오시자 그쳤고, 벤은 그제야 제대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트랙 위를 내달리면서 땀을 흘리고 바람이 흐르는 땀줄기를 식혀주는 게 좋았다. 발에 힘을 주는 스타트엔 짜릿함을, 빠르게 휘젓는 팔다리엔 해방감을, 결승선을 넘는 순간엔 쾌감을 느꼈다. 10초정도의 짧은 순간동안 온갖 스트레스를 날려 보냈다. 마지막에 잠시 쉬는 시간에는 계단에 앉아 아무렇게나 어질러있는 가방들 사이에서 파워에이드를 찾아 마셨다. 그리고 주변의 애들과 온갖 얘기를 하다 고개를 돌려 저 멀리를 쳐다보면 맨 위 계단의 끝에 앉아 공부를 하는 토마스가 있었다. 땀 냄새와 훈훈한 열기가 감도는 애들 앞으로 코치님이 침을 튀겨가며 조언을 몇 마디 하고나면 훈련이 끝났고, 토마스는 책을 덮어 자기 가방을 정리했다. 나는 따로 탈의실도 없이 좁은 체육창고에서 모두가 옷을 갈아입는 게 싫었다. 그래서 항상 토마스 옆에 가서 아직 덜 마른 땀이나 말리며 집으로 가는 애들과 인사를 나눴다.


“코치님! 안에 애들 다 빠졌어요?”

“거의 다 나갔어, 들어가 봐.”

“네, 안녕히 가세요! 야, 토마스 가자.”


옆구리에 파일철을 끼고 체육창고를 나와 계단을 오르는 코치님에게 냅다 큰소리로 물어봤다. 이것마저도 익숙한 일상이어서 코치님 또한 건성으로 맞받아치셨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전하면 토마스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손을 휘적거리곤 제 갈길 가시는 코치님을 뒤로하고 가방을 챙겨 계단을 내려갔다.


“토마스, 공 좀 들고 들어와.”


야구공 하나가 하수구에 놓여있었다.주인이 던진 공을 주우러 가는 강아지 같은 토마스를 두고 먼저 체육창고에 들어갔다. 안에는 땀 냄새가 가득해서 코를 가릴 수밖에 없었다. 어우씨, 며칠씩 안 씻고 다니나. 후딱 공을 주워 돌아온 토마스는 민호와 똑같이 코를 가렸다. 그 상태로 창고 안을 두리번거렸지만 공 넣을 마땅한 상자를 못 찾았는지 토마스는 여기저기 뒤지고 다녔다.


“왜, 자리 없어?”

“응, 그리고 이거 말고도 널려있는 것도 정리하려고 하는데 빈 상자가 없네.”

“저 위에 있는 건?”

“저거 바닥에 껌 붙어서 안 떨어지는 상자잖아.”


그러다 뜀틀에 무릎을 박은 토마스 때문에 가방에서 옷을 찾다 말았다. 얘는 왜 이리 덤벙거려. 토마스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니 보기 안 좋게 배구공이며 축구공이며 뒹굴고 있었다. 선반 위의 빽빽한 상자들 사이에 어디 넣을 곳이 없을까 둘러보던 중, 맨 위에 자리가 넉넉해 보이는 상자가 눈에 띄었지만 토마스는 관심도 없어보였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곳을 뒤적이는 토마스의 말에 까치발을 들어 상자를 밀어 올려봤지만 상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이씨…껌을 얼마나 붙여 놓은 거야.”

“근데 저거 말곤 넣을만한 데가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저거 꺼내야지, 뭐.”


토마스가 부딪쳤던 뜀틀 위를 툭툭 치며 눈치를 줬다. 토마스는 먼지가 피어오르는 뜀틀을 한 번 보고, 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싫은 표정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뭐가 문젠데? 어떤 해결책을 내놔도 꺼려하는 토마스에 짧고 굵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뜀틀 저거 안에 썩은 지 오래잖아. 밟고 올라가면 부서져서 내 다리에 나무 박힐 걸. 민호가 내 다리에 피 나는 거 구경하고 싶다고 하면 해줄게.”

“미친놈, 말을 해도….”

“아, 민호가 나 목말 태워주면 되겠다!”

“뭐, 씨발. 목말 태워달라고?”


나도 모르게 욕부터 튀어나왔다. 아니, 근데 왜 이리 거부감이 들지?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쳐들며 환하게 웃는 토마스의 어딘가가 찝찝했다. 토마스는 험악하게 튀어나온 욕에 놀랄 법도 한데 그저 두 눈을 깜빡이며 나를 멀뚱히 바라봤다.


“왜 욕을 하고 그래. 싫으면 마는 거지….”

“아니, 싫은 건 아닌데.”

“그래? 그럼 태워줘. 빨리 정리하고 숙제하러 가야지.”


이내 눈을 내리 깔고는 다른 상자에 기웃대며 말하는 꼴이 꽤 우울해보였다. 꼭 내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꼬리를 축 내리는 토마스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아까 하던 생각이 이거였어. 왜 내가 목말에 예민한 거지?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으면서 머릿속에선 중요한 듯 자리 잡고, 계속해서 신경 쓰이게 하는 게 언짢았다. …약간 토마스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신발 벗어?”

“어? 아니.”


어느새 토마스는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공을 모두 모아 뜀틀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고는 내 뒤에 와있었다. 뜀틀에 손가락을 얹고 신발을 반쯤 벗은 토마스에게 얼떨결에 됐다고 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신발에 발을 욱여넣은 토마스는 가느다란 양손가락을 내 어깨에 얹고는 아래로 눌렀다.


“앉아.”


손이 누르는 대로 토마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앞으로 두 다리를 넘기느라 힘이 들어간 손가락들이 어깨와 목이 이어지는 부분에 붙어있었다. 옷 위로 올려져있었더라면 덜 찐득거렸을 텐데 피부에 바로 맞닿으니 그 감촉도 이상했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 느껴지는 기분도 이상했다. 오랜만에 태워봐서 그런 거구나 싶었다.


“끄응, 머리 잡으면 죽는다.”

“알았어. 잘 버티고 있어, 민호.”


어릴 때부터 남아도는 게 힘이라서 목말 태우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다. 어깨에 걸쳐진 허벅지를 양손으로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균형을 잡으려던 토마스는 한 손으론 내 머리통을, 남은 손으론 선반을 붙잡고 있었다. 안 그래도 땀에 젖어서 머리가 축축한 데 그걸 그냥 만져버리니 내가 더 기분이 나빠 일찍이 경고해뒀다. 곧장 머리에서 손을 뗀 토마스는 껌 때문에 붙은 상자를 잡고 당겼다. 어후. 세게 당기는 것만으론 안 뜯겼는지 그새 붉은 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털어냈다. 회색 먼지 덩어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게 더러웠다.


“손은 옆으로 털어라!”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만히 있어, 민호.”


고개를 완전히 들기에는 무리가 있어 손등으로 턱을 쓸어내리는 토마스의 얼굴이 똑바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토마스가 당황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긴, 방금 고개를 드느라 약간 휘청거리긴 했다. 아래 매트가 깔려있긴 해도 이렇게 좁은 곳에서 목말이 무너지면 나보다 토마스가 크게 다칠 게 뻔해서 말없이 그냥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에도 상자를 당기던 토마스는 당기는 것만으론 안 되는지 선반을 붙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아.”


그러던 녀석이 별안간 짧은 탄성을 뱉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잘 하던 일 그만두고 멈춰서는 게 이상해서 눈동자만 굴려 위를 올려다봤다. 토마스는 상자를 양손으로 잡은 채 손등 위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팔 틈새로 보이는 얼굴은 빨개져 있었고, 입술도 세게 깨물고 있는 게 어딘가 아파보이기까지 했다.


“야, 토마스! 어디 아파?”

“아, 아니. 아냐, 민호…움직이지 말고 있어. 움직이면 위험하니까.”


내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토마스의 상체가 흔들거렸다. 안정적이게끔 허벅지를 다시 쥐며 애써 물어봤더니 토마스는 얼굴을 보지도 않고 다시 상자를 흔들었다. 근처에 자 같은 거 없나. 차라리 아래를 긁어서 빼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혼잣말로 중얼 거렸더니 또다시 움직임이 멈추는 게 느껴졌다. 이젠 아예 선반에 오른쪽 팔을 올려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올려다봤더니 상자를 잡고 있던 왼손이 크게 움찔거렸고, 입이 작게 열렸다가 앙 다물어졌다. 쟤가 왜 저래?


“흣….”


토마스의 입에서 탄성이 아닌 신음이 흘러나온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깨 위에 있는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면서 목을 조이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본능은 뒷목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별 생각 없던 뒷목에 온신경이 몰리면서 그것의 존재감을 알게 되었다. 이 미친 새끼가…! 왜 갑자기 부풀고 지랄이야!

그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그때와 똑같았다. 강당의 높은 창틀에 배드민턴 라켓이 올라갔었나, 또 물품을 잃어버렸다며 선생님한테 혼나기 싫어서 토마스를 목말 태워 위로 올렸었다. 그리고 이 또라이가 내…내, 뒷목에 딱딱해진 그걸 꾹 눌렀나, 비볐나, 어쨌든 사정을 했었다. 당연히 나는 놀라서 토마스를 집어던졌고, 토마스는 바닥을 구르다가 이동식 농구 골대의 모서리에 머리를 찧어 피가 났었다. 그 상태로 쓰러져있는 토마스를 향해 욕을 하던 중, 강당 바닥을 적시는 빨간 피와 정신이 몽롱해 보이는 얼굴에 화들짝 놀라서 선생님을 불러왔었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실려가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회복한 토마스와 대화를 할 수 있던 때에는 그 일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똑같은 일이 두 번째로 일어나면서 몸은 더욱 빳빳하게 굳었다. 하지만 당황스럽다고 토마스를 던져버리면 예전처럼 병원에 실려 갈 수 있으니 이번엔 살짝 내려놓고 주먹을 날리자. 주마등이 스쳐지나가듯 과거를 돌아보고 오니까 토마스는 더욱이 아래를 내 뒷목에 가까이 붙여 딱딱해진 것을 숨기지 않고 문지르고 있었다. 이 개새끼,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몸을 천천히 아래로 숙였다. 거의 쪼그려 앉다시피 했을 때에는 토마스의 발바닥도 매트 위에 닿아서 충분히 안정적이었다.


“토마스, 미친 새끼야!….”

“후으…민호, 내가 움직이면 위험하다고 했잖아.”

“진짜 돌았냐? 이빨 나가기 전에 손 떼!”

“민호 피부도 하…, 땀 때문에 끈적거려.”

“야, 하지 말랬다!”


문제는 발이 닿자마자 토마스가 내 머리를 잡고 앞으로 밀어내는 바람에 대놓고 뒷목을 내주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토마스는 내 뒤통수를 꾹꾹 누르며 뒷목에는 딱딱한 것을 비벼댔다. 그리고 이 새끼는 내 말을 전혀 듣지도 않고 있고. 토마스의 정신 나간 면상을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쪼그려 앉은 상태로 어깨 앞에 토마스의 두 다리가 버티고 있어 팔을 움직이기 불편했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건 토마스가 나만큼 힘이 세지 않다는 거였다. 어딜 잡고 치워내야 할지 고민하던 새에 더러운 매트 위로 무릎이 닿았다. 엉겁결에 토마스 편한 대로 자세를 내주게 됐다. 그래서 마음이 더 급해졌다. 미친놈…. 아랫입술을 꽉 깨물곤 토마스의 종아리를 붙잡아 뜯어냈다. 내 힘에 밀려 비척거리던 토마스의 다리 사이가 벌어졌다. 그 사이로 상체를 빼내어 토마스 녀석을 넘어뜨릴 생각으로 뒤돌아봤다. 이 새끼 왜 눈에 초점이 없어. 등 뒤로 매트를 짚어 올려다봤을 때 자기 다리 사이로 내 엉덩이를 끼고 서있는 토마스와 눈이 마주쳤다. 난 저 새끼 저럴 때마다 불안하더라. 언제 바지 버클을 풀었는지 열린 지퍼 틈새로 검은색 드로즈가 보였는데, 그 위로 두툼한 것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미친….”

“하아….”


민호의 살벌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에도 굴하지 않은 토마스가 검지와 엄지로 기둥을 쓸어 올리면서 얇은 속옷 너머로 하얗고 진득한 게 밀려나왔다. 툭. 아까 발버둥 치듯이 움직였던지라 유니폼이 위로 까져 배가 훤히 드러났는데, 하필 그 위로 정액이 떨어졌다.


“으아악! 시발, 진짜!”

“아악! 내 다리!”


몇 초간의 정적 속에서 배에 묻은 정액만 내려다보며 상황파악을 하다가 기겁을 하고 비명을 내지른 건 내 쪽이 먼저였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토마스의 정강이를 발로 세차게 까냈다. 이어서 비명을 지른 토마스는 까인 다리를 잡아들어 깽깽이걸음으로 창고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줄다리기용 밧줄에 발이 걸려 매트 위로 넘어졌다.


“별 씨발. 엄살부리지마! 누가 보면 네가 딸감 된 줄 알겠다! 어떻게 틈만 나면 아무 거에나 발정을 해!”

“아니, 민호오…진짜 너무 아픈데, 그리고….”

“너어, 너, 우리 집 오지 말고 네 집에서 발표 준비 해. 물어 볼 거 있으면 문자로 하고.”

“민호!”


내 맞은편에 주저앉아 다리를 부여잡고 있던 토마스가 손을 살짝 들어보였을 때 빨간 피 같은 게 얼핏 보이기도 했지만, 머리가 찢어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콧김을 내뿜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니폼에 정액이 묻는 게 싫어 옷을 걷어 올리고는 아무 종이를 찾아 닦아냈다. 유니폼 위에 지퍼가 열린 가방을 걸쳐 매고는 밖을 나왔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과 몸에 붙는 유니폼 차림새가 쪽팔렸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HP_해리른 MR_민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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