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새경에게 정말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냐 물었고,

새경은 지훈의 그 뻔뻔한 태도에 신물이 났다.


“난... 네가 전보다는 나를 좋아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지훈이 울먹였다. 그 모습에 새경은 순간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졌겠지.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으면!”


새경의 진심에 지훈은 놀란 것처럼 보였다. 괘씸하다. 거짓말 한 건 자기면서 왜 제일 상처받은 표정을 지을까. 새경은 자신을 끌어안은 지훈의 두 팔이 느슨해진 걸 느끼고 그를 밀어냈다. 지훈은 마치 버림받은 사람처럼, 툭 하며 새경의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지 그랬어.”


새경이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린 채 물었다.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지훈을 내려다보니 그는 새경과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으면 네가 어떻게 할지 너무 뻔하잖아.”


지훈이 성큼성큼 다가와 새경의 양쪽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 뜨거운 느낌에 새경은 놀라 움찔했다. 흥분한 지훈의 손은 마치 불덩이같았다.


“줏대도 없이, 송아진, 그 사람한테 갔겠지. 다시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말하다 보니 지훈도 울컥했나 보다. 새경은 속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줏대 없는 내가 좋아하는 송아진의 안중에는, 내 머리카락 한 올 들어가 있지 않는데. 그걸 너무 잘 알아서 새경도 지훈에게 마음이 쏠리던 참이었다.

그게 거짓말만 아니었어도.

차라리 솔직히 말했으면.

네 말마따나 우린 서로를 좋아할 기회와 시간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정말 그 거짓말 하나 때문이야?

새경의 양심이 물었다. 새경은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새경아.”


혼란한 와중에 지훈이 새경을 불렀다. 새경은 어지러운 머리를 움켜쥐었다.


“내가 너를 좋아한 게 벌써 몇 년째인지도 모르겠어.”


또 그 소리다. 가슴 절절한 외사랑 이야기. 새경은 참다못해 허공에 대고 탄식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날짜를 셌어. 내가 너를 언제부터 좋아했을까 고민하면서.”


지훈은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주변이 어두웠지만 왜 그 눈물 몇 방울만큼은 선명하게 보이는 건지 새경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쓸데없는 짓이더라. 나는 언제인지 모를 순간부터 너를 좋아했어.”


지훈이 새경의 가슴팍에 제 머리를 댔다.


“아니, 좋아하고 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 말에 새경은 무너져 내렸다. 지훈의 이 가슴 찢어질 듯한 사랑이 문제가 아니었다. 새경은 거의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구역질과 눈물을 억지로 참는 기분. 보통 사람들은 그걸 자기혐오와 자괴감, 죄책감이라 말할 테지만 새경은 감히 제 감정에 이름을 붙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나를 봐 줄 거야? 응? 술김에 나랑 잔 거로는 부족했어?”


자꾸 속 뒤집어지는 말만 내뱉는다. 새경은 눈을 위로 까뒤집고 지훈을 책망했다.


“그거 거짓말이었잖...”

“그럼 내가!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하는데!”


새경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이었다. 지훈은 울컥해 새경의 멱살을 쥐었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속여 놓고 멱살잡이라니. 지훈도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터였다.

천하의 민지훈은 분명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인데 이상하리만큼 새경 앞에만 섰다 하면 한없이 작고 추해진다. 지훈이 그 이유를 되새길 때마다 새경은 점점 더 커다래져 햇빛이며 달빛이며 지훈에게 닿아야 할 모든 것들을 삼켜 버린다.


민지훈은 천새경을 지독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새경은 민지훈을...


“...내가 다른 여자랑 자면, 그때는 봐 줄 거야?”


헛소리도 이런 헛소리가 없다. 새경은 불쾌함과 당혹감으로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이만큼 선명한 표정이면 지훈도 분명 알아들을 터였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그때는... 질투해 줄 거야?”


새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절대로 그럴 일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훈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새경의 멱살을 쥔 채 끌어당겨 그대로 입 맞춘 것도 전부 그래서였을 거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건조한 새경의 입술에 지훈의 입술이 닿았다. 지훈이 제 입술을 문대 촉촉하게 만드니 빨간 립스틱이 둘 사이를 머물다가 입가에 흔적으로 남아버렸다. 홧김에 하는 입술박치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지훈은 기어코 새경의 턱을 잡고 벌렸다. 갈라진 틈새로 뜨겁고 묵직한 것이 마치 해일처럼 밀려들어 온다.

두 사람은 입을 맞추면서도 눈을 똑바로 뜬 채 서로를 응시했다. 잔뜩 구겨진 서로의 미간이 이상하리만큼 거북하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 하는 듯한 그 눈빛에 새경은 기어코 지훈의 혀를 받아냈다. 그 아집에 지훈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이를 세워 새경의 입술을 깨물었다. 살이 뚫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새경은 지훈을 거세게 밀어냈다. 나가떨어진 지훈은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입가를 닦아냈다. 피 섞인 침이 손등에 묻어나온다. 새경 역시 입안 가득 비릿한 쇠맛을 느꼈다.


“나더러 마음 접으라는 소리 하지 마.”


지훈이 가쁜 숨을 고르며 다가와 새경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 새경에게 보이는 거라곤 지훈의 두 눈동자에 비친 제 눈동자뿐이다.

앞이 캄캄했다.


“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자격? 화가 났지만 마땅히 받아칠 말도 없어서 새경은 피 맛이 도는 입술만 몇 번 할짝대곤 지금 당장 입가에 맴돌던 말을 내뱉었다.


“...넌 좋은 친구야.”

“하.”


지훈이 눈을 위로 까뒤집고 새경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 그럼에도 입가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말도 잘 통해. 저번에 놀이공원 갔을 때... 재미있었어.”


새경은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린 채 횡설수설했다. 그도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이 어지러운 정신만 붙잡기에도 버거웠다.


“그래서. 너를 계속 친구로 두고 싶은 건데.”


겨우 시선을 올려 지훈을 바라봤다. 지훈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자꾸 이러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피해야 할까. 새경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오지도 않은 전화를 받으며 달아나 버릴까. 이게 피한다고 피해지는 거긴 할까. 늘 그랬듯,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지훈이었다.


“그거 알아?”

“뭐?”

“우리, 둘 다 정말 이기적인 성격이야.”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지훈은 아까보다 더 두 눈을 번뜩이며 웃었다.


“너는 친구인 나를 포기 못한다고?”


지훈이 새경의 자켓 앞섶을 움켜쥐었다.


“나도 똑같아.”

“...”

“너를 포기할 수가 없어.”


기껏 한다는 말이 결국엔 도돌이표다. 새경은 그제야 머릿속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깨달음을 얻었다.


“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볼 거야.”


왜 몰랐을까. 아니지. 남들 다 아는데 이제야 눈치챈 내가 바보 멍청이에 돌머리인 거겠지.


“네 그 개차반 성격에 새로운 여자 만날 수 있기나 하겠어?”


지훈도 만만찮은 쇠고집에, 가장 큰 본능으로 미련을 두고, 소유욕을 똘똘 뭉쳐 머릿속 빈 공간을 가득 채운 인물이라는 걸.


“그마저도 나니까 버티는 거지.”


그 의기양양한 미소에 새경은 이를 갈고 으르렁댔다.


“이 미친새끼가...”

“됐고. 또 봐.”


지훈은 새경의 가슴팍을 밀치며 옷깃을 놓아주곤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났다. 뭐라 더 화를 낼 틈도 없었다. 밀쳐진 가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저리고 아파서 새경은 숨을 크게 들이마셔야 했다.

새경은 지훈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벽에 등을 댄 채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간 새경은 바닥에 주저앉아 답답한 한숨을 토해냈다.


“천새경 이 미친새끼야...”


지훈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새경은 그저, 인정하기 싫은 지독한 자기혐오에 찌들어 있을 뿐이었다.

지훈에게 설레왔던 모든 순간들이 사실은 지훈이 자신을 바라봤던 것처럼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그의 몸을 탐해서 생긴 결과물이라는 걸.

새경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다.


**


이현. 그는 지금 혼란스럽다.

결코 그를 포함하지 않을 것 같은 운명의 실이 열심히 그의 팔다리를 묶고 있다는 직감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현, 그는 평범함의 대명사다.

34세. 여자. 생일은 8월 25일.

중학생 때부터 수학을 좋아해 수학을 전공했고 그 어렵다던 임용고시를 단 두 번 만에 붙어 고등학교 수학 교사가 되었다. 참고로 그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과학 교사, 아버지는 중학교 사회 교사이시며, 세 살 터울 언니도 강남 유명 입시 학원의 영어 교사이다. 살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본 직업이 교사이기에 교사가 되고 싶었고 마침 적성도 잘 맞아서 그는 자신이 교사인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가 교육을 좋아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미숙한 존재를 세밀히 관찰하고 성장시키는 것만큼 보람찬 일은 없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그는 별별 아이들을 다 만나봤다. 흔히 말하는 일진 양아치. 부모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전교 1등. 애매하게 중위권이라 노력은 엄청나게 하는데 막상 성적은 그저 그런 학생. 이 외에도 듣도 보도 못한 유형의 학생들을 만났고, 전부 바람직한 성인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그래서인지 그는 생일과 스승의 날 때마다 전교 통틀어 가장 큰 케이크와 빼곡한 롤링페이퍼를 선물 받는, 그런 존경 받아 마땅한 교사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이현, 그는 지금 행복하다. 더할 나위 없이 평안하고 평화로운 인생이다. 방 2개, 거실 하나짜리 집.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청록색 반려 물고기 베타 한 마리. 부모님은 그의 삶을 존중하고, 언니는 가끔가다 맛있는 걸 사 들고 조카와 함께 그의 집에 놀러 온다. 알코올이나 니코틴 중독도 없고 하다못해 애인이나 섹파 하나 없는 그에게 가장 큰 일탈이라곤 기분 내킬 때마다 집 앞 포장마차에서 분식을 포장해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며 소주 한잔하는 게 고작이다.


복잡한 연애사에 낄 일도,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새우 등 터질 일도,

분명 그의 인생 계획에는 없었다.


포장마차 한쪽 구석에 앉아 술 마시며 울고 있는 금발 머리의 여성을 발견하기 전까진.


“음?”


현은 늘 그렇듯,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기 전 단골 포장마차에서 순대나 포장해 갈 생각이었다. 포장마차 사장님이 현을 하도 좋아하셔서 갈 때마다 우리 선생님 오셨다며 순대에 튀김 몇 개를 더 얹어 주시기 때문이다. 포장해 간 순대를 집에 와서 살짝 볶아 먹으면 그것만큼 맛있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포장마차 천막을 걷고 들어간 순간, 혼자서 깡소주를 마시는 금발머리 여자를 보고 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저렇게 화려한 외모가 흔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마침내 현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상대방도 현을 알아본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저번에 그 선생님이다!”


저번에 그 선생님이라 하면... 현은 머릿속에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다. 아. 아! 그때 그 파출소.


“아... 새라 언니 친구. 맞죠?”


여자는 헤실대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인사하고 갈까 했는데 그의 주변에 늘어진 빈 소주병이 무려 3개나 있었기에 잠깐 망설이던 현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 앉았다.


“뭐예요? 같이 마셔 줄 거예요?”


여자가 웃었다. 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사장님께 여기 소주잔 하나랑 순대 1인분을 더 달라고 했다.


“혼자 마시면 더 빨리 취하잖아요.”


이름도 모르는 여자한테 내가 뭐 하는 거지. 현은 벌써부터 머리가 조금 지끈댔다.


“저. 근데...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그때 제대로 못 들은 것 같아서.”


망설이던 현이 물었다. 마침 소주잔과 순대가 나와서 현은 그에게 제 잔을 내밀었다. 여자는 능숙하게 현의 소주잔을 채워주었다.


“민지훈이요. 선생님은요?”

“이현이라고 해요.”

“외자? 이름 예쁘네요.”


지훈이 잔을 내밀었다. 현은 그의 잔에 제 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저야말로. 흔하면서 흔하지 않은 민지훈이라는 이름이 예쁘다고 말 해 주려다가 삼켜버렸다.


“일단 짠해요.”

“네. 짠.”


지훈은 단번에 소주잔을 비웠다. 몸에 걸친 것들만 해도 수천 만원이 넘어 보이는 여자가 왜 혼자 청승맞게 비싼 와인바도 아니고 포장마차에 이러고 앉아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현은 우선 가만히 있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선 나무젓가락으로 퉁퉁 불은 우동을 이리저리 휘젓는 지훈의 표정이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선생님이시면... 어느 과목이세요? 영어? 국어? 얼굴만 봐서는 역사도 어울리는데.”

“수학이요. 의외죠?”


현의 대답에 지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뇨? 잘 어울려요. 맡은 반도 있으세요?”

“네. 1학년 4반 담임이에요.”

“신기하다... 제 주변에서 이렇게 모범적인 사람 처음 봐요.”


지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현은 문득, 그 눈동자를 바라봤다. 렌즈를 꼈는지 살짝 회색빛이 도는 눈동자. 화장에 반짝이 가루라도 뿌렸나? 왜 이렇게 반짝이는 거야? 현은 아까 꺾어 마셨던 소주를 마저 털어넣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네.”

“담임이시면... 애들 상담도 해 주고 그러시겠네요?”


굳이 담임이 아니더라도 선생님인 이상 자주 해 주는 게 상담이니까.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럼 저도 상담해 주실 수 있으세요?”


지훈이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현을 올려다봤다. 저렇게 화려하고 고민거리 하나 없어 보이는데. 상담할 게 뭐가 있다는 건지. 그것도 거의 처음 보는 사람한테... 현은 거절하려다가 깜빡이는 지훈의 속눈썹에 홀라당 넘어갔다. 그는 못 이기는 척, 빈 소주잔을 내밀었다.


“...상담비는 소주로 받을게요.”


그 말에 지훈은 키득대며 현의 소주잔을 채워주었다. 서로의 잔을 가득 채워주고 나서야 두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좋아요. 짠!”

“짠.”


지훈은 또 잔을 단숨에 비웠다. 천천히 마셔도 되는데. 현은 속 쓰리지 말라고 순대를 집어 지훈의 앞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무슨 일인데요?”


지훈은 현이 건넨 순대를 바라보다가 냉큼 집어먹곤 웅얼거리며 말했다.


“선생니임... 그게요...”


퇴근해서까지 선생님 소리 듣기 싫은데. 심지어 이런 여자한테는 더더욱. 현은 은근슬쩍 지훈에게 부탁했다.


“선생님 말고... 이현으로 불러주세요.”

“그럼... 현씨? 현 언니?”


붙임성도 좋다. 간만에 듣는 언니 소리에 현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틀어막아야 했다.


“현 언니 괜찮네요.”

“현 언니. 그럼... 있잖아요...”


지훈은 소주잔 끝을 매만지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짝사랑 중인데... 고백할 때마다 차여요.”


짝사랑 이야기에 현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동시에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에서야 말 섞어 본 사람이잖아. 현은 애써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잘 듣고 있으나, 이야기 자체에는 별 관심 없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심지어 며칠 전엔 거짓말한 것까지 들켜서... 제대로 차였어요.”


저런 여자가 거짓말까지 하며 들이대는데 차였다고? 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잘난 사람이길래...


“용서 받기 힘들 것 같은데... 하 거기서 왜 센 척을 해서...”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그렇다. 평소에는 연애 할 생각이 없다가도, 약간의 징조나 기회가 보이면 김칫국 마시면서 기대하게 된다는 게. 현은 예상치 못하게 지훈을 만났고, 지훈은 예뻤으며, 약간의 낯선 설렘이 이어졌기에 내심 플러팅이라도 쳐 볼까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막상 짝사랑 이야기가 이어지자 현은 알 수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그 사람, 많이 좋아해요?”


지훈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말만 꺼내도 즐거운지, 지훈은 순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네. 걔가... 좀 잘생겼거든요? 아니, 사실 많이... 인기도 많고... 성격은 좀 싸가지 없고... 꼰대 같긴 하지만...”


꼰대같다고? 순간 현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새라를 닮아, 제법 얼굴이 섬세하고, 여자 좋아하는 여자라면 한 번쯤은 시선이 갈 법한 그런 사람이.


“...가부장 부치새끼?”


현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말하는 즉시 입을 틀어막았고 다행히도 지훈은 주변이 시끄러워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잘 못 들었어요.”

“아... 아녜요. 혼잣말이었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된 일이었다. 하긴. 다 큰 친구 동생 하나 찾으려고 동네방네 다 뛰어다닌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현은 소주를 한 잔 더 비웠다. 이번엔 꺾어마시지 않고 한 번에 전부 다.


“지훈씨.”

“네?”

“...내가 좋은 생각이 났는데...”

“뭔데요?”


현이 지훈에게 귓속말했다. 지훈에게서 풍기는 희미한 술 냄새와 달큰한 샴푸 냄새 때문에 현은 가슴 저 깊은 곳까지 두근거렸다.


“어때요?”


가까이에서 지훈을 마주봤다. 지훈은 조금 놀랐지만 정말 그리 해 줄 수 있겠냐는 표정으로 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방법대로 해 볼래요?”


지훈은 잠깐 고민하는 가 싶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현도 간만에 느껴보는 도파민에 머릿속에서 폭죽이 일었다.


젊은 친구들 사랑싸움이야 흔하고 널렸지.

지나치게 평탄했던 인생에 콘텐츠가 생겨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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