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F14 칠흑의 반역자 드림

* FF14 칠흑의 반역자 메인 퀘스트 스포 포함


FINAL FANTASY XIV 14

Crystal Exarch



그녀에게도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없었겠는가.

자신의 곱절은 될 신 앞에 던져지면서도 두렵지 않았겠는가. 그녀를 인간이 아닌 단순한 도구를 대하듯 사용했을 때 환멸감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그녀는 영웅이 되고자 한 이후부터 줄곧 단두대 위에 세워진 듯했다. 그들 중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지만 앞에 펼쳐진 것은 붉은 융단이 아닌 날카로운 칼날 뿐이었다. 제 아래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손가락질 하며 악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병기야. 언젠가 그 사람이 모든 걸 망칠 거야. 자신이 지키고자 한 모든 가치는 그 사람들에게 짓밟혀 더러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녀가 그럼에도 아무런 말도 입에 담지 않았던 것은 제 말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면 그들이 제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도망치고 싶다한다면 도망치라 말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가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그녀를 다시 사지로 몰아야 한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할 것이다. 그러다, 그녀의 길이 이어지기 위해 기꺼이 토양이 되길 자처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자신을 위해 누군가의 괴로움을 방관하기에는 어리석을 정도로 상냥한 존재였고 사랑한 이들이 사랑하는 세상을 아끼고 말아 그녀의 입은 오래도록 아무런 말도 뱉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차라리 그들이 그녀를 너무도 이기적이어서, 그래서 그녀를 붙잡고 어째서 당신이어야만 하는 거냐고. 이 세상 따위 어찌 되든 좋으니 함께 도망가자고, 이 세상이 한 권의 소설이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평화는 채 한 페이지가 되지 못하는 것이라도 좋으니, 그 평화 속에서 우리가 곱씹을 수 있는 것이 후회만 남더라도 좋으니 그래도 영웅이 아닌 제 곁에 사람이 되어달라 그리 이기적으로 굴어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세상을 사랑해서, 그녀가 소중한 것 만큼이나 세상이 소중해서. 결국에는 세상에 그녀를 양보해줄 것임을 알았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전부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세상보다 그들이 더 소중해서, 그래서 외로웠다.

스스로가 무언가 결여 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 자신은 내가 가장 잘 안다는 만용과도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부모나 형제, 동료들보다 오래 견뎌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나 스스로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끔 보통 사람들 안에 숨 쉬고 있을 다양한 형태에 감정들을 내 안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그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그 확신은 다정함이 이기심을 만나 변색 되고 용기가 고난을 만나 사그라들고 뾰족한 돌이 오랜 시간 여러 파도를 맞고 마모되어 둥글게 변하는, 어디서나 볼 법한 그런 과정을 겪은 후 남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 하지 않아 흔적 조차 찾을 수 없다는 뜻에 가까웠다.

인간을 닮은 껍데기에 채워 넣은 건 선량함이라는 지푸라기인 듯한,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고 용납 받을 수도 없는 듯한. 나는 그런 것이었다.


내 기억의 시작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 위다. 아무도 관리 하지 않아 내 허리를 훌쩍 넘은 갈대들은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은 노을 져 새 한 두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고 비가 오려는 듯 주위에서 습한 냄새가 났다.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끝없이 이어진 들판은 후련함을 주기보다는 삭막함을 느끼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렸다. 서 있던 곳에 흙이 진흙이 되어 발을 더렵혔다. 애초에 입고 있었던 것이 이미 옷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누더기라 다행이라고, 어처구니없게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누가 시킨 것처럼 들판을 헤치고 나아갔다. 누군가가 내 몸에 줄을 묶고 끌어당기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내가 누군지, 어쩌다 이곳에 있게 됐는지 무엇 하나도 기억 나지 않는데 다리는 쉼 없이 움직였다. 

처음부터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머무른 기억보다 도망친 기억이 더 길었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는 수정공을 볼 때면 늘 마음속 깊이 깔린 불안감을 느꼈다. 희생을 이야기 하지 않지만 희생할 순간을 각오하고 있는 이들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는 불안감 또한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그 '수정공'이었다. 이미 유구한 시간을 영웅을 위해, 영웅의 길이 이어지기 위해 자기 자신도 자신의 생도 전부 바쳤기 때문에, 혹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가 똑같이 할 것을 직감 했기 때문에. 그를 볼 때면 그녀는 늘 손가락에 박힌 가시마냥 잔잔한 아픔을 느꼈다.

원초적인 불안감을 지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그것을 배운 적 없었다. 그녀는 죽지 않았지만 그러므로 죽음과 늘 함께 했다. 아끼는 이들을 잃게 만들 위협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과 함께하면 그 불안감을 잠재우는 법은 배울 수 있었다. 떠나지 않길 바라는 이에 곁에 가능한 오랜 시간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일이 끝난 후부터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려고 했다. 할 일을 가지고 성견의 방에 들이닥친 그녀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던 수정공은 이내 얼떨결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그 날을 기점으로 집무실 구석은 그녀의 자리가 되었다.



수정공은 신경 쓰였다.

그러니까... 제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가 신경 쓰였다. 몇 주전부터 제 집무실에 자리를 잡더니 이른 아침에 와서 늦은 저녁에 돌아가곤 했다. 휴식기이니 굳이 일찍 일어날 필요 없을 텐데 새벽같이 일어나 성견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고 정오가 조금 지날 즈음에는 꾸벅이며 졸기 시작했다. 수정공은 그녀가 다른 의미로 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면서도 그녀와 일상을, 평화로운 밤하늘 펼쳐진 이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가슴이 저릿한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만족감과 별개로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온종일 제 뒤통수만 바라보는 이가 있다면 그 상대가 아무리 자신이 연모하는 이가 아니더라도 신경 쓰이지 않겠는가. 몇 번 물어볼 기회를 노리다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오늘이야말로 물어야겠다 생각한 수정공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 무슨 일 있나?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라던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수정공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야슈톨라가 감시 당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더군. 농담이었지만....

감시 맞아.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턱, 두꺼운 책이 덮이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올곧게 수정공을 향했다. 수정공은 시선이 마주친 동시에 심장이 저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면 늘 그랬다. 한참을 입술을 달싹이다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아직도 걱정되는구나. 그리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먼저였다.

감시겸... 그래, 관찰. 난 네가 어떻게 살아 왔을지 모르겠거든.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를 그 날에 자신을 판돈으로 걸고, 생을 걸고 빛으로 가득 찬 하늘을 바라보는 건 어떤 기분이었어? 끔찍하진 않았니. 나는 너의 일부는 이해하지만 다른 일부는 이해 못하겠어. 

그녀는 책 귀퉁이를 만지작거렸다.

있잖아, 수정공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잡아먹혔어. 어떨 때는 명예였고 어떨 때는 대의였지. 나는 그것이 다 끔찍해. 그런데 제일 끔찍했던 것은 그들을 잡아 먹은 것 중에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단 거였어. 나는 언젠가 내가 또 누군가를 잡아 먹게 될까 두려워. 내가 너의 일부를 이해하고 다른 일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너도 똑같아?

그녀의 목소리는 단조롭게 흘러나왔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가벼운 안부 인사라 착각할 만큼 가볍게... 영웅이란, 그래 원래 이런 것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앞만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병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다. 살아 숨 쉬는, 감정을 느끼는 그런 인간이다. 문득, 수정공은 아니 그라하 티아는 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의 외로움과 그녀의 외로움은 같지 않다. 같아질 수 없다. 하지만 편린 만큼은... 아주 작은 조각 만큼은 같을 거라고... 생각되어서. 그런, 착각이 들어서.

모든 게 안타까웠다. 어째서 제 슬픔을 이야기할 때도 차마 얼굴을 일그러트리지 못하고 가벼운 투로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지 알고 있음에도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그녀가 그녀의 슬픔을 담아둔 둑을 무너트리는 순간 타인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슬펐던 이는 사실 제 안에 수심이 얼마나 깊은지 채 헤아릴 수도 없어진다. 그래서 그것을 꺼내놓을 수 없는 것이다. 꺼내면 제가 사랑한 이들의 삶을 수몰시켜 버릴까 두려운 것이다. 

수정공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닿지는 못하고 그 옆에 머무를 뿐이었다. 수정공은 말했다.

... 사람이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들 하지. 그러니 내가 그대를 전부 이해한다는 만용은 부리지 않아. 내가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이는 무게가 그대가 느끼는 것에 몇 곱절은 작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해. 그대가 잡아 먹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은 잡아 먹힌 것이 아니라 잃은 것 뿐이야. 그대의 탓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이 말조차 네게 기만이 될까 두렵지만... 그대가 잡아 먹었다 말하고 그 시간을 견디며 얼마나 홀로 외로웠을 지 나는 감히 가늠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대만 괜찮다면 나에게 기대도 좋아. 내가 영웅인 그대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수정공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내가 운명에 거역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녀 앞에 운명마냥 놓인 고독함을 거역하고 싶었다. 세계를 구해내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 길임을 알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늘 그랬다. 자신이 듣는 모든 말을 몇 번이고 곱씹은 뒤 말을 꺼냈다. 그것은 감정을 걸러 내는 과정이었을까. 수정공은 그 걸러낸 감정 마저도 소중해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그녀는 혼자 앓겠다 말했다. 

그녀는 수정공을 바라보다 말했다.

그럼 널 포기하지 마.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세상을 사랑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전부 상관 없는데... 네가 너로서 있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줬으면 해.

그건 간청이었다. 그게 참 간절해 보여서... 수정공은 그러면 안된다는 것도, 나쁜 습관인 것도 알고 있지만 그녀의 그 간절함이 반가웠다. 고마웠고...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형질로 그녀의 마음에 담겼을지도 모른다 착각하고 싶어졌다.

이 착각은, 마음 한쪽에 두고 꺼내지 않아야 가장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수정공은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아. 걱정하지 마. 

기대하지 마, 이것은 내가 가질 것이 아니다. 그리 스스로 되뇌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슬픔을 가진 이가 웃었다. 그 웃음은 장난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한 것 같기도 해서... 온전히 그녀만이 보일 수 있는 웃음이었다. 

... 그리 웃으니, 수정공은 끝내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녀가 담고 있는 그 안에 빠져 죽어도 좋으니 그녀의 슬픔에 수몰 되고 싶다고. 그래서 그녀의 온전한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그렇게 된다면 너는 긴 여행길에 나를 잊지 않고 영영 기억해주겠지.

이 모든 것이 욕심임을 안다. 수정공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온화한 바람이 부는 별이 흐드러지게 핀 밤하늘, 그 아래서 그라하 티아는 제 마음을 삼켰다. 

2.5D 2D 다수 잡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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