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네이밍 & 리메이크 / 너무 오래 전 글이라 유치할 수 있어요. 그저 재미로 봐주세요.]

+ 분량주의








성운은 잔뜩 심술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명계에 남은 지 어느덧 열흘이 되어가고 있었고, 치유 술사가 아닌 염왕의 보좌관으로써 명계에 남았던 저였기에 염왕의 명을 언제든 받을 수 있도록 그의 집무실 한 쪽에 매일 같이 서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염왕은 열흘 동안 한 번도 제게 ‘보좌관’으로써의 직무를 시킨 적이 없었다. 덕분에 성운은 하루 중 절반을 염왕의 동그란 머리통을 멀뚱히 보고 있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오늘 또한 그러고 있는 중이었기에 슬슬 인내력이 바닥을 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도 괜찮다.”



뭐야, 벌써? 오늘 봐야 할 서류를 다 보았는지 하나 씩 정리해가는 염왕의 창백한 손들이 있었다. 그런 의건의 손을 바라보다 인상을 잔뜩 쓰며 입을 꾹 닫은 성운 때문에, 제 말에 대답이 없는 그를 향해 의건의 고개가 들려졌다. 그로 인해 들어난 것은 기괴한 탈이 아닌 아름다운 의건의 얼굴이었다.



“나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했어요.”

“상처를 돌봐주었지 않느냐.”

“그거 밖에 안 했잖아요.”

“그거면 됐다.”



예전에는 제 고집을 부려야만 볼 수 있었던 의건의 그 얼굴이 이제는 딱히 부탁하지 않아도 제 앞에서 항상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는 것은 보는 것이고, 상처를 보는 것도 보는 것인데, 정작 제가 해야 할 일을 시키지 않는 의건 때문에 성운은 인상을 마저 쓰며 물었다.



“도대체 내가 어쩌길 바라요?”

“무얼 말이냐.”

“나는 염왕의 보좌관으로 여기 있는 거예요. 치유 술사가 아니라.”

“안다.”

“알면서 왜 그러냐고요.”



이미 화가 잔뜩 난 성운의 말에 의건이 슬쩍 웃는 것이 보였다. 성운은 제 지위를 모르는 마냥 구는 그에게 화가 나있었고 그런 성운을 보며 의건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네가 여기에 남아 있는 이유를 이 몸에게 되새겨 주고 싶은 것이더냐.”

“…뭐라고요?”

“지상과 명계의 동맹의 증거이자 염왕의 보좌관으로 남는 것. 단지 그 것 뿐이다, 라고 이 몸에게 그리도 각인 시키고 싶으냐 이 말이다. 네가 그리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고, 이 몸도 이 몸 나름대로 너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아- 인정을 해줘서 사자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게 만들어 줬어요?”



저를 잔뜩 비꼬고 있는 성운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의건도 사실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재환이 보좌관이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일들로 그를 부려먹었고 까딱하면 될 수 없는 일을 ‘되게 만들어라.’ 식의 명을 내린 적도 많았었다. 그 덕에 명계에서 재환의 존재는 ‘염왕의 개’라고 불릴 정도로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정작 성운이 의건의 보좌관이 되고 나서는 의건이 그를 부려 먹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애지중지하는지라 사자들의 입에서 이런 말 저런 말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자들이 뒷말을 들으면서도 의건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지 않더냐. 이 몸은 너를 아끼고 있다. 그래서 부리지 않는 것이고, 앞으로도 부릴 생각이 없다.”

“…제 멋대로 인거 여전하네요.”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 않느냐.”



처음 성운을 명계로 데려올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단지 처음에는 제 마음도 모르고 단순한 투기에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진심을 다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 행동에 대놓고 싫다, 는 반응을 보이는 성운을 보며 의건은 그저 웃고 있었다.


제 정인의 흔적을 그대로 나타났던 그날의 성운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에게 ‘사랑한다.’ 표현하는 의건의 심장을 매일 같이 죽여 나가는 성운이 있었다. 물론 그런 그에게 지치지 않고 제 마음을 표현하는 의건도 있었다.


일방적으로 한 이에게 향한 누군가의 감정과 그런 상대의 감정을 죽여 나가는 한 이의 불편한 분위기 속에, 누군가가 제가 찾아왔다는 표시로 똑똑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려왔다. 그에 좀 더 그에게 따져 물으려던 성운이 금세 제 머리에 올려 쓰고 있던 탈을 끌어 내리는 의건을 노려보았다. 그런 성운의 날이 선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의건은 제 아름다운 얼굴을 기괴한 탈로 완전히 감춰내며 손짓했다. 밖의 이를 들여보내라는 의미였다. 그에 성운이 제 입술을 꾹 하니 깨물고는 문 밖의 이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내가 뭐 문지기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정말 열흘 동안 염왕의 집무실에 와서 한 것이라고는 염왕의 얼굴에 난 상처를 돌보는 것과 집무실을 오가는 이들을 관리하는 것 뿐 이었다. 그에 대놓고 짜증을 내는 성운의 목소리에 쓰고 있는 탈 뒤로 의건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이 나와요? 삐죽이는 성운의 발간 입술이 불만을 잔뜩 표현하고 있었지만 곧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반가운 이의 등장에 성운의 표정이 금세 밝게 변했다.



“민현님!”

“어, 어 그래.”



의건의 집무실에 제 두 발을 다 딛기도 전에 제게 안겨든 성운 때문에 그 작은 몸을 제 품에 제대로 안지 못한 채로 민현이 당황했다. 정작 제 선택으로 명계에 남았던 성운이었는데 막상 저를 보고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제게 안겨드니, 슬금슬금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뭐가 이리 반가운 것인가 싶어 의아함에 의건을 보았다. 어째서인지 운이의 반가움의 표현이 평소보다 과한 것 같구나, 라는 표정과 함께. 물론 그런 민현의 표정에 쉬이 대꾸를 해줄 의건이 아니었다. 대신 그 역시 제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여 의아함을 표현하며 오히려 물었다.



“재환이 아니고 어째서 네가 왔느냐.”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평소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민현이 직접 명계에 올라오지 않았었기에, 제 부탁을 들어주기로 약속했던 재환을 대신해 제 앞에 서 있는 그가 의건 또한 당황스러웠다. 그런 의건의 질문에 민현은 제게 안겨온 성운을 슬쩍 밀어냈다. 그런 민현의 행동에 반가움이 가득 묻어났던 성운의 얼굴이 금세 실망스런 표정으로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성운은 이제 염왕의 보좌관이었다. 민현 저는 지상의 우두머리였고, 이렇게 개인적인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 좋지 않았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그래, 재환이야 그렇다 치고. 어쩐 일로 올라왔느냐.”

“네가 원하는 것을 전해 주러 왔다.”



민현은 제 품에서 동그랗게 말린 종이 뭉치를 꺼내며 의건에게 다가갔다. 덕분에 의건의 기울어져 있던 고개가 반대쪽으로 다시 기울어졌다. 제가 원하는 것이라니? 제가 민현에게 따로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한 적도 없을 뿐더러, 있다하였어도 민현이 제게 그것을 구해다 줄 정도로 서로의 사이가 좋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건의 의문을 고개를 기울이는 동작 하나로 모조리 읽은 민현이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사실 봉인 석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많은 양의 피를 쏟아낸 재환이 사흘 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의건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매일 밤마다 움직이던 그를 대신해 민현이 움직여야 했다. 딱히 재환이 그래 달라 부탁하지는 않았지만, 눈도 뜨지 못한 채 저를 위해 피를 흘린 그의 일을 대신 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민현은 답지 않게 제가 직접 밤마다 염의 정인의 행적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 결과로 모아진 것을 의건의 손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가 찾는 이의 마지막 행적이다.”



소리 없이 제자리로 바르게 돌아가는 고개, 그리고 바르게 된 자세로 인해 제게 제대로 들어나는 기괴한 탈과 그 탈 너머의 의건의 시선. 그 시선은 분명 ‘이것을 어째서 네가 가져 왔느냐.’라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민현은 그 물음의 답을 대신해 다른 답을 뱉어냈다.



“아이가 죽자마자 마을에서 쫓겨났다고 하더구나. 그 뒤를 더 찾아보려 했으나 그 마을 뒤로 인간들과 마주한 기록이 없다.”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거야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지상의 모든 이가 죽으면 반드시 한 번은 염왕의 앞에서 죄를 고하게 된다. 하지만 의건은 제 앞에 제 형제로 보이는 이를 앉혀두고 죄를 고하라 명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이야기이고 아직 지상에서 어딘가에 숨어 멀쩡히 살고 있다는 말이었다.


사실 민현이 가져온 정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건은 제 손 앞에 자리했던 돌돌 말려진 것을 펼치며 말했다. 



“그래, 고맙다.”



그리고 그런 의건의 말에 민현이 슬쩍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태어나서부터 명계의 꼭대기에 있던 터라 뻣뻣한 고개를 가진 의건이 뱉어낼 만한 말이 아니었다. 염왕이 저런 말을 쉬이 할 성격이었던가, 싶은 마음에 이번에는 민현의 고개가 조용히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런 민현의 반응도 모른 채 펼쳐든 종이 안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는 의건이 있었다.


제 아버지가 사랑한 여인의 아들. 그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마을의 이름과 그 당시의 상황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무시당했으며 눈치를 보고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제 아버지만을 기다리다 숨이 끊긴 여인의 삶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서서히 과거의 파편 하나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명계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던 저와, 그런 제 앞에 정갈한 자세로 앉아 있던 한 여인.



“이 몸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었다.”



제가 알아온 내용들을 읽으며 뱉어낸 의건이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지 민현은 금세 알아차렸다. 지상의 모든 이가 죽으면 염왕과 한 번은 마주해야 했다. 의건은 분명히 제 아버지의 정인을 만났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눈앞의 염왕이 누구의 후손인지 알았을 것이며, 그런 그녀가 누구인지 의건 또한 알고 있었을 거였다.



“이 몸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 몸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더군. 그 때는 왜 그랬을 까, 싶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저와 제 아들이 줄곧 기다렸던 것처럼, 의건과 의건의 어머니 또한 그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제 사랑만큼 또 다른 이의 사랑도 소중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에 저를 차갑게 내려다보는 의건이 무서웠으면서도, 그 자리에 앉아 있지 않는 염의 모습을 다행이라 여겼을 것이다.



“분명히 자신이 먼저 죽을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제 죽음을 알게 된 것이 아버지가 아니고 이 몸이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살아 있는 것은 장담하니 찾으러 가야겠지.”

“지상으로 내려 올 것이더냐.”

“그래야겠지.”



민현은 의건이 저렇게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에 그는 제 소맷자락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꺼내어 의건에게 내밀었다. 의건은 제게 내밀어진 그것을 보고 금세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까맣고 작은 구. 본래의 크기보다 한참이나 작아졌지만 그 위험한 존재감은 여전히 보여주고 있는, 칠흑 같은 그 것. 봉인 석.



“기억하고 있겠지. 지상으로 내려오기 전에 네 영력을 묶어두고 내려와라. 이 몸 역시 영력을 묶은 상태이기에 명계에 올라온 것이다. 우선은 너와 이 몸이 시범적으로 봉인 석을 사용할 생각이다.”



말을 이어가며 민현은 제 왼 쪽 귀를 보여주기 위하여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로 인해 동그란 검은 구가 민현의 왼 쪽 귓불에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저 탁한 빛을 보이고 있는 민현의 손 안의 봉인 석과 다르게 그의 귓불에 박혀 있는 봉인 석은 찬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영력이 묶일 네 몸에 봉인 석이 박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해제’의 권한은 너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명계의 이가 아닌 자. 즉, 보좌관인 성운이 될 것이다.”

“그렇군. 너의 ‘해제’는 재환이 하는 건가?”

“그래.”



성운은 민현과 의건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둘이 만나 나눈 첫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지 통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주제로 인해 염왕이 지상으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이유로 인해 전에 거론 되었던 영력을 봉인 하는 것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봉인 될 염왕의 영력을 ‘해제’하는 이가 바로 자신이 된다는 사실에, 성운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제’ 해야 할 자가 봉인 된 자와 멀리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럼, 봉인 석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마.”

“그래.”



민현은 제 앞에 있는 의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마 재환만큼이나 성운이 위험할지도 몰랐고, 둘 사이의 신뢰감이 없다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신뢰감, 그 단어에 망설임 없이 제 손을 그은 재환이 떠올라 민현은 제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봉인 석은 ‘해제’의 권한을 가진 이의 피로 인식을 먼저 시킨다. 그 인식이 끝나면 봉인 석을 봉인의 대상인 자의 몸에 박으면 된다. 고로 ‘해제’의 권한을 가진 이의 피가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렇군. 피의 양은 어느 정도지?”

“봉인 석이… 만족 할 때까지.”



민현의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의건의 고개가 돌연 멈춰졌다. 수 백 년 간 먹이를 먹지 못한 봉인 석이 얼마나 허기져 있을지 잘 알고 있는 의건이었기에, 제가 들을 말이 무슨 말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게다가 민현의 왼 쪽 귀에 박혀져 있는 봉인 석을 봐서 이미 재환이 ‘해제’의 권한을 가진 이로써 봉인 석에게 피로 인식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또한 제가 재환에게 부탁했던 일들을 민현이 직접 가져온 지금의 상황을 봤을 때, 지금 펼쳐진 상황이 무엇인지 빠르게 알아차린 의건이 민현에게 물었다.



“재환은… 지금 어떻지?”

“못 깨어 난지 사흘째다.”



쓰고 있던 탈 아래로 의건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다 민현과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연신 눈을 도르륵 굴리고 있는 성운을 바라본 의건이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재환이 그 정도라면 성운 또한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어주기 위해서는 지상으로 내려가야 했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저 역시 민현처럼 영력을 묶어두고 내려 가야했다. 그리고 제 영력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성운의 피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 몸과 너는 시범적이니 꼭 해봐야한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은 너도 알 테지. 문제점과 장단점을 알아야 다른 신들에게도 적용이 가능해.”

“…안다.”



제가 만든 사안이 제 숨통을 죄여오는 느낌에 의건이 겨우 대답을 했다. 또 자신에 의해서 성운이 다쳐야만 한다. 그 사실에 머리가 아파 옴을 느꼈다. 하지만 제게 여전히 내밀어진 봉인 석을 겨우 받아 들며 의건이 성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리 오거라.”



제 부름에 입술을 삐죽이며 다가오는 성운이 보였다. 그런 성운과 봉인 석을 번갈아 보며 의건은 기도 했다. 부디, 이 봉인 석이 허기에 미쳐있지 않기를.


민현은 의건이 성운을 부르는 것을 보며 무엇을 할 것인지 바로 눈치를 채고 그만 돌아가 보겠다는 말과 함께 의건의 집무실을 나섰다. 사실 민현은 신이기도 했지만 한 마리의 짐승이기도 했다. 그에 성운의 피 냄새에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것 같았다. 또한 성운이 제 손으로 상처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재환이 제 손을 그어내는 꼴을 보고 난 뒤라 또 한 번 그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게 민현이 조용히 사라지고, 의건의 부름에 그의 앞에 선 성운이 여전히 입술을 삐죽 거리며 저를 부른 이유를 물었다.



“왜요.”

“이 몸이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보좌관인 제게 명이라고 해도 될 말을 꼭 ‘부탁’이라는 말로 해야 할까 싶었지만, 탈의 틈 사이로 들어난 의건의 눈빛이 진지해 성운은 뒷말을 더 하지 않고 그의 옆에 다가가 섰다. 민현과 그가 나눈 이야기로 예상해 보건데, 봉인 석에 ‘해제’의 권한을 가질 자가 피로 인식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해 제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염왕이 저를 부르며 얼마나 복잡한 마음일지 상상해 봤다. 저를 대놓고 아껴주기 시작한 그이지만 영력을 봉인하지 않고서는 지상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하고 싶지 않겠지만, 해야만 했다. 그에 성운이 먼저 선수를 쳤다.



“할 거예요.”

“…그래.”



굳이 ‘무엇을’ 이라는 목적어가 없었지만, 의건이 망설이는 것을 먼저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하는 성운에게 그가 봉인 석을 천천히 내 밀었다.



“한 가지 약속을 하마.”



봉인 석을 바닥에 놓고 제 손바닥에 상처를 내려던 성운의 고개가 의건의 목소리에 그를 향해 들려졌다. 무릎을 굽혀 앉은 성운의 고개가 저를 올려다보느라 한껏 꺾어져 아파보였다. 그런 성운을 안타깝게 내려다보며 의건은 말했다.



“네가 피를 흘리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게다.”

“해제를 하려면 내 피가 필요 하다는 거 알아요. 지키지 못할 약속 안 해도 돼요.”

“아니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다.”



네 피가 닿지 않을 곳에 박아 넣을 테니까 말이다. 차마 입 밖으로 마저 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의건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 의건도 모르고 보좌관으로써 해야 할 일도 안 시키더니 ‘해제’의 권한도 못 쓰게 할 생각이냐고 공시랑 거리며 망설임 없이 제 손바닥을 그어 성운이 있었다. 그런 성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의건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집무실 가득 의건이 몰고 다니는 바람을 타고 성운의 피 냄새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징그러운 물건 같기는 하네요.”



울컥 쏟아진 제 피를 무서운 속도로 흡수하는 봉인 석을 보며 슬쩍 웃던 성운이 곧 제 입술을 깨물었다. 작은 크기에 비해 보기보다 피를 흡수하는 양과 속도가 너무 빨라 현기증이 일어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던 의건은 점점 흩어져 가던 피의 냄새가 다시 한 번 강해지자, 번뜩 눈을 떠 놀란 눈으로 성운을 바라보았다. 때 마침 다시 한 번 제 손바닥을 그어내던 성운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겪고 싶을 만큼 유쾌한 경험이 아닌 건 확실하네요.”



하얗게 질려가는 성운이 하얗게 웃었고 그런 성운이 또 한 번 쏟아내는 피를 흡수하며 빛을 내는 봉인 석이 있었다. 그 모습에 의건은 제 입술을 잘근 씹으며 다시 한 번 저 봉인 석에 성운의 피가 닿지 않을 곳에 저 것을 박아 넣으리라, 그리 다짐했다.







*







성운은 저를 반기는 반가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을 휘저었다. 그런 성운의 인사에 여전히 푸른 도포를 입고 있는 재환도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재환의 옆에 서 있는 하얀 도포의 민현은 팔짱을 끼고는 ‘왔느냐?’하는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옜다.”



연신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던 민현은 제 앞에 어느새 다가온 의건에게 무언가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첫 유희인 만큼 조심해야 할 게다. 네 놈도 알다시피 지상으로 오면서 영력은 반절로 묶였고, 유희의 몸으로 네 무구는 못 다룬다.”

“안다.”

“운아 너는 지훈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구나. 먼저 가보지 그러느냐?”

“정말요?”



민현이 내민 인형을 제 손에 쥔 의건이 한참이나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자, 성운도 그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했는지 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런 성운에게 민현이 지훈에 대해서 말하자, 성운은 금세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반가워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되묻고 있었다. 그런 성운의 되물음에 민현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제 손가락으로 지훈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가봐라. 딱히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가 가리킨 손가락의 의미를 알아차린 성운이 신이나 금세 그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따라와라.”



그렇게 별 힘을 들이지 않고 성운을 떼어내는 것에 성공시킨 민현이 의건에게 저를 따라오라며 손짓을 했다. 그런 그의 손짓에 의건은 제 손에 쥔 인형을 꼭 쥐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상과 명계의 신들이 지상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신’으로써 내려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신’의 모습을 하고서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은 주로 인간들에게 ‘헌신(실제 신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고 대신 인간인척 그들 속에 섞여 들어가는 ‘유희’의 모습을 자주 하고는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습을 가지게 할 육체가 필요했다. 그런 육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민현이 건넨 인형이었고 그것은 민현이 직접 손으로 만든 수제품이었다.



“어디에 박았느냐.”



제가 만든 인형의 탈을 써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의건의 의외로 길고 단단한 몸을 보며 민현이 물었다. 제 질문의 대답을 기다리며 민현이 건넨 인간들이 흔히 입는 옷을 받아든 의건은, 윗옷에 제 팔을 끼워 넣으며 오히려 되물었다. 어디에 박았을 것 같으냐. 제 보좌관이었던 재환만큼이나 돌려 말하는 것을 꽤나 좋아하는 의건이기에, 민현은 그의 말에 팍 하니 인상을 썼다. 하여간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절대 보이지 않는 곳에 박았다.”



그러니까 그게 어디냐, 이 말이다. 민현이 또 팍 하니 인상을 쓰며 아득 하니 이를 갈았다. 성운의 피로 인식된 봉인 석이 분명 의건의 몸 어딘가에 박혀있을 터였다. 하지만 의건의 벗은 몸 어디에도 봉인 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대체 어디에 박아 넣은 것인가 궁금해 물은 것인데, 제 물음에 똑바로 대답을 안 하는 의건의 넓은 등을 보며 민현은 그저 노려보다 얼마 못가 한숨을 뱉었다. 물어본 이 몸이 바보다.



“근데- 그 탈은 어째서 안 벗느냐.”

“여기를 벗어나면 벗을 것이니, 걱정마라.”



혹시나 인간의 모습을 하면 그 비싼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했던 제 기대마저 꾹꾹 밟아 없애는 의건의 말에 민현의 입술 끝이 비틀려졌다. 저 비싸고 재수 없는 놈 같으니.


어째서인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민현을 향해 돌아선 의건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기괴한 탈은 여전하기만 했다. 하지만 민현은 그 탈에 대해서 좀 더 걸고 넘어가지 않았다. 저 뿐만이 아니라 명계의 그 누구도 저 탈 밑의 의건의 얼굴을 못 봤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랬다. 그에 탈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화의 주제를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찾아서 어쩔 생각이더냐.”

“딱히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네 놈을 원망할지도 몰라.”



그래, 늦게 온 이 몸을 원망할지도 모르지. 민현의 말에 의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제 찾아야 할 이는 제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여전히 원망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지상 어딘가에서 제 아버지를 욕하고 원망하며, 또한 저주하고 있을지도 모를 제 형제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제 아버지의 유언을 전해줄 때가 되었다.



“염의 존재를 알게 되면 네 놈의 자리를 탐낼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

“왜. 내어주면 좋겠느냐?”

“그래주면 이 몸이야 좋지.”



꼴 뵈기 싫은 네 놈이 염왕의 자리에서 물어나 준다면야 이 몸이 나쁠 리가 없지. 진심과 장난이 반반 섞인 민현의 대답에 의건이 웃는 소리를 냈다. 재미있느냐, 이 몸은 진심인데. 민현이 껄렁껄렁 불만을 표시하며 의건에게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그런 제 행동에 그것이 무엇이냐 묻는 의건의 시선이 닿아왔다. 그에 민현은 입을 열었다. ‘돈이다.’ 분명히 첫 유희이기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내려왔을 터였다. 게다가 지상에서 인간들과 어울려 살지 않았던 성운까지 옆에 붙어있으니 지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유희를 나갈 그를 위해 민현이 준비한 소소한 선물이었다.



“지상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네 놈이나 운이나 낯선 것들 뿐 일 테니 조심해라.”



특히 모르는 이들이 다가와서 말 걸면 대꾸하지 말고 말이다. 지상 생활을 하며 조심해야 할 것들을 이것저것 짚어주며 제게 당부의 말을 하는 민현의 모습에 의건은 탈 아래로 조용히 웃었다. 평소에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기는 했어도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저를 신경써주는 그의 친절이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기분 좋게 웃으면서 해도 될 것을 꼭 시비를 걸어가며 하는 게 문제이기는 했지만, 사실 민현은 친절했다. 전혀 친절하지 않은 것처럼 굴지만, 사실은 너무나 친절했다. 분명 이런 점이 좋아 제 아버지도 그와 친구로 지냈을 테지 싶었다.



“민현님! 진짜예요?”

“무어가.”



의건에게 두둑하게 돈 주머니를 챙겨주고 이것저것 조심해야할 것들을 짚어주고 나서야 밖으로 나온 민현에게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성운이 달려와 물었다. 그에 민현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아- 하는 감탄사를 뱉어냈다. 그런 민현의 반응에 그의 뒤를 따라오던 의건의 시선이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훈도 저희랑 같이 가는 거 맞아요?”

“아… 그래, 말한다는 것이 잊어버릴 뻔 했구나.”



제 등에 제대로 박힌 의건의 시선이 어째서인지 따갑게 느껴져서는, 민현은 억지로 제 입술 끝을 올려 웃으며 ‘아참!’하는 감탄사를 뱉어냈다. 사실 말하지 않고 우선 저지르고 볼 참이었는데 지훈이 금세 성운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너희 둘 다 지상에 제대로 나오는 것이 처음이지 않느냐. 그래서 길잡이로 지훈을 붙여 주마. 같이 다녀와라.”

“정말로 그 이유뿐이더냐.”

“그래. 그거 말고 뭐 또 있겠느냐? 이 몸이 그리 못 미덥더냐?”



돈도 주지 않았느냐! 정말 저를 못 믿겠냐고, 제가 그렇게 못 믿을만한 존재냐고 의건에게 되묻고, 또 재환에게 되묻고, 심지어 성운에게도 되묻는 민현의 모습이 어째서인지 수상하기만 했다. 그에 의건은 제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자신들에게 지훈을 붙여서 보내려고 마음먹은 모양인데 싫다고 우겨봐야 괜히 성질만 부릴 터였다. 그에 의건이 알겠다는 말을 하고서야 민현이 뒤늦게나마 진심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암, 그래야지. 저를 정말 믿어주지 않는다면야 주었던 돈을 뺐으려고 마음까지 먹었던 민현은 그때서야 만족한 듯 지훈에게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의건이 물었던 것처럼 길잡이라는 이유만으로 지훈을 둘에게 붙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 하얗게 질린 지훈이 제게 민현이 다가서자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주작과 불의 술사인 의진과 계속 같이 하느라 줄곧 힘이 들었던 지훈이었기에 그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너도 오랜만에 나가는 것이니 즐겁게 놀고 오거라.”

“현아….”

“멀쩡해서 오면 화내지 않으마.”

“…알았다.”

“아이도 잘 지키고 말이다.”

“…어.”

“그래, 착하다.”



나무 밑에 힘없이 기대어 앉아 있던 제게 민현이 손을 내밀자 지훈은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다. 민현은 제 손을 잡은 지훈이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그러자 힘없이 딸려 올라오는 지훈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약해졌으면서도 여태 오기를 부렸던 그에게 또 한 소리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성운의 옆에 같이 있는 다는 조건하에 제 말을 듣기로 했기에 민현은 잔소리를 꾹꾹 눌러 삼킨 뒤 입을 열었다.



“건강해져서 바보 같은 현무로 돌아와야 한다.”

“그게 뭐야.”

“그런 모습을 아마도 청룡도 기다리고 있을 게다.”

“그럴까?

“아무렴. 가자.”



민현이 잡아끄는 손길에 지훈의 발이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제 동행에 신이 나 발갛게 물이든 성운의 얼굴이 저만치 보였고 그 옆에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도 특유의 기괴한 탈을 쓰고 있는 염왕도 보였다. 이 둘과 나서는 오랜만의 지상나들이가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주작과 의진에게서 떨어트리고 싶어 하는 민현의 마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제가 생각해도 지금의 제 몸은 위태로웠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구나.”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염왕님이 제 걱정도 다 해주시고,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이제는 제 상관이 아니라고 장난스러운 얼굴로 의건에게 말을 걸고 있는 재환의 모습을 보며 민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능글맞은 놈. 그런 재환의 모습에 의건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의건의 모습이 제가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기에, 민현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무엇이 널 그리도 바꾸어 놓았느냐.


조만간 이만 가보겠다며 백호 산을 벗어나는 의건과 성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현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분명히 이 몸이 알던 염왕은 저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의건님이 염님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이 말이다. 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게야? 연신 노려보는 제 시선에도 입을 다문 재환이 완전히 사라진 의건의 기운을 읽으면 웃고 있었다. 에라, 내가 네 놈이랑 말을 안 하고 말지. 입을 삐죽삐죽 거리며 재환을 ‘능글맞은 놈, 상관을 고양이 같이 보는 놈.’하며 욕을 하던 민현은, 곧 재환이 입을 다시 열어 뱉은 말에 금세 굳어버렸다.



“사랑.”

“…무어라 했느냐?”

“사랑이랍니다.”



염이 한 여인을 사랑했던 마음을, 성운을 제 마음에 품으면서부터 의건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돌려 말하며 피하기만 하던 재환이 민현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드디어 뱉어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도 제가 원하던 답을 얻어 냈음에도 민현은 즐겁지 않은 모양인지 굳은 몸을 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사랑이 여기에도 있다….”



청룡도, 염도. 그리고 의진과 성운도. 죄다 사랑에 제 몸을 깎아내려가는 모습만 보여줬다. 그런데 방금까지 제 앞에 있던 의건 또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상대는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하나 밖에 없었다.



“운이더냐.”

“예.”



미쳤구나.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엇갈린 각자의 마음이 또 어떤 일들을 몰고 올지 걱정이 앞서는 것은 민현, 제가 너무 늙어서 일 것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







백호 산에서 나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는지 서서히 해가 저물어져 가고 있었다. 말도 없이 오랜 시간동안 걷기만 한 탓에 성운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몸이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본래 짐승이었던 지훈은 성운의 앓는 소리에 걱정 어린 얼굴로 괜찮으냐고 연신 물었고, 그런 지훈의 말에 성운은 애써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어려서부터 현무 산에 박혀 혼자 살았던 성운이었기에 먼 거리를 걸어서 움직일 일이 없다보니 처음 접하는 장거리 도보에 몸이 힘든 모양이었다.



“…뭐예요.”

“고집 부려봐야 짐만 된다. 업혀라.”



끙끙 거리는 소리를 내며 겨우겨우 걷던 성운은 제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바람에 들어난 의건의 등에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지훈도 의건이 보인 의외의 행동에 눈만 깜빡깜빡 거릴 뿐이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것이 명계의 맨 꼭대기에 앉아 있다는 그 염왕이 맞나 싶었다. 제 산에 와서는 성운을 그렇게 잡아먹을 것처럼 굴더니, 어째서인지 지금은 한 없이 유하게 굴었다.



“아니면 휘청거리며 자기 몸 간수도 안 되는 현무에게 업히던지.”

“아씨….”



나는 왜 걸고 넘어져? 물론 몸이 안 좋기야 했지만 아직 성운보다야 멀쩡히 잘 걷고 있는 저를 걸고 넘어가는 의건 때문에 지훈은 한동안 멍- 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제가 잘 못 느낀 것이 아니라면 의건은 분명히 제 핑계를 대고 있었다.



“안 힘들면 마저 걸어라. 한 시진(현실의 두 시간)만 걸으면 마을이 나올 테니.”



싫으면 말던지. 저를 향해 들어난 등에 업힐 생각을 안 하는 성운의 행동에 의건이 미련 없이 일어나는 척을 했다. 그러자 성운이 입술을 삐죽였다. 여기서 업히지 않으면 자신은 비명을 지르는 다리를 질질 끌고 한 시진이나 더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분명 자신을 낚기 위해 하는 거짓의 몸짓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 앞에서 ‘물어라. 여기 맛있는 것이 있지 않느냐. 물어.’하고 유혹하는 염왕의 미끼를 걷어차기엔 몸 이곳저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럼 이제 한 시진만 더 걸으면….”

“아, 업혔어요. 업혔어!”



무릎을 반쯤 일으킨 의건이 마저 걷자는 말을 꺼내려 하자 성운이 그의 등에 냉큼 올라탔다. 저보다 한 뼘이나 작지만 속도를 받은 체중이 갑자기 느껴지자 의건이 살짝 기우뚱 거렸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성운의 체중에 금세 허리를 곱게 피고는 굽혔던 무릎을 일으켰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제 등에 업힐까 해서 모험을 했는데, 제 거짓말에 결국 지고 만 성운이 ‘에라, 이 나쁜 상관.’하며 저를 욕하는 소리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결국은 업힐 거면서 고집을 부린 성운의 모습에 의건은 딱 ‘성운답다.’라고 생각했다. 제 말을 잘 들어먹을 상대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성운을 업기 위해 숙여졌던 허리가 펴지고, 그러면서 들어난 의건의 얼굴이 웃고 있는 걸 보며 지훈은 명계에서 느껴졌던 그 느낌을 또 한 번 느꼈다. 탈 아래에 숨겨져 있던 어리고 아름다운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도 잊을 만큼, 그 얼굴에 걸리는 다양한 표정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 다양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것이 성운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지훈은 ‘위험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성운의 정인인 의진만큼이나 제 앞에 있는 염왕의 존재 또한 위험하다고 소리를 내는 제 신경에 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대체 어디로 가는 건데요.”

“삼신 골.”

“마음 이름이 삼신 골이에요?”

“그래.”




지성님이 생각나는 마을이름이네요, 라고 말하며 성운이 발을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제 등에 업혀서 발을 대롱대롱 흔드는 성운이 귀여워 의건이 웃으며 대답했다. 닿아있는 성운의 체온이 따스했고 그런 성운과 같이 걷는 이 길이 즐거웠다.



“이름대로 삼신을 따르는 마을이지.”

“정말요? 그런데 거기는 왜 가는 데요?”

“찾는 이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라서 말이다.”

“찾는 이가 누구인데요.”

“아버지의 또 다른 아들.”



성운은 생각지도 못한 의건의 대답에 ‘에?’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반면 지훈은 그가 왜 잊고 있던 자를 이제야 찾으려하는지 머리를 굴려 생각했다. 분명 의건이 말하는 염의 또 다른 아들이라는 것은 ‘그녀의 아들’이었다. 그녀가 죽은 지 십 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 와서 그를 왜 찾는 것일까. 성운을 업은 채 걷고 있는 의건을 천천히 따라가며 지훈은 머리를 굴렸다.



“찾아서 뭐하려고요?”

“아버지의 유언을 전해드려야지.”

“유언이 뭔데요?”

“글쎄다.”



아씨, 알려주려면 다 알려줄 것이지. 또 불만을 표시하며 쫑알거리는 성운의 목소리에 의건은 그저 웃으며 앞을 향해 걸어갔다.


내 아버지가 네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전하기 위해 왔다고 말하러 가는 길이라 말하면, 너는 무어라 말할까. 그리고 그렇게 말하러 가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너 때문이라고 말하면, 또 어떻게 나올까. 분명 제 등에 안긴 아이는 저의 심장을 죽이려 들것이었다. 그렇게 성운이 또 제 심장을 밟고 할퀴어 죽이면, 자신은 성운의 존재 하나 만으로도 다시 살아 숨 쉴 것이었다.


그렇게 성운을 업고 걷기 시작한지 반 시진쯤 지났을 때, 의건은 제 등에 업힌 성운이 무겁다며 괜히 앓는 소리를 냈고 그러면 내려달라고 짜증을 내는 성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내려도 되느냐?”

“아씨…. 내려요. 내려!”

“정말로?”



진짜 내려줄 것처럼 무릎을 굽히는 의건의 등을 퍽퍽 때리며 성운이 소리를 질렀다. 아씨, 이런 못 되어 먹은 상관 보소? 성운은 저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의건의 등을 사정없이 때렸고 그런 성운의 행동에 되레 소리 내어 웃기 시작한 의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지훈은 제 신경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은 분명, 위험했다.







*







성운을 업은 의건은 점점 가까워지는 불빛들을 보며 삼신 골에 거의 다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제 등에 업힌 채 쫑알거리며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던 성운은 처음 겪는 장거리 도보에 지쳤는지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제 어깨에서 연신 흔들던 다리 대신 잠이 든 성운의 머리통이 대롱대롱 움직이는 걸 느끼며, 의건은 삼신 골로 좀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성운을 최대한 빨리 편한 곳에 눕히고 싶어서였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무얼.”



백호 산과 꽤 먼 곳까지 오자 지훈의 낯빛이 점점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게다가 바람을 부리며 움직이는 의건의 빠른 속도에도 뒤지지 않은 채 잘 따라오는 지훈의 모습이 제법 안정적이었다. 그런 지훈은 의건의 뒤를 뒤따르며 입을 열었고 그런 지훈의 목소리에 의건은 말을 이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 거려 표시했다.



“왜 갑자기 연의 아이를 찾는 거지?”



연. 의건의 아버지 염의 정인 이름이었다. 그런 그녀의 아들을 왜 찾느냐고 물어오는 지훈의 질문에 의건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불빛들을 보며 제 발에 부린 바람에 좀 더 힘을 실었다. 바람을 머금은 그의 발이 강하게 땅을 딛자, 한 걸음에 저 먼 곳까지 몸이 날아갔다. 그런 의건을 다시 따라 잡은 지훈이 입을 열었다. 평온한 둘의 얼굴과 반대로 그 둘의 발은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이제 와서 왜. 넌 그걸 들어줄 생각이 없었잖아.”



있었다면 힘이 안정되었을 때 제 산에 내려와서 그 난리를 칠 것이 아니라 삼신 골로 바로 향했어야 했다. 하지만 의건은 힘이 안정되자마자 제 산을 난장판을 만들어 놨다. 그랬던 그가 무슨 연유로 갑자기 이러는지 알고 싶었다. 분명히 의건이 이렇게 맘을 먹게 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 없었지. 이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아이. 지훈은 의건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얼마가지 않아 계속 지훈을 앞지르던 의건의 몸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아차린 지훈도 속도를 내기위해 운용하고 있던 영력의 양을 줄이기 시작했다. 주작과 의진에게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음에도, 갑자기 부린 영력에 온 몸이 뻐근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지훈은 제 목을 이리저리 비틀어대며 멈춰선 의건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운이를 만나고 나서 도대체 너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야.”



지훈과 의건이 나란히 서 있는 절벽 밑으로 커다란 고목이 보였다. 그 고목에는 적색, 황색, 청색으로 이루어진 끈들이 엉켜있었고, 그 나무 바로 앞에는 돌들로 쌓여진 크고 작은 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풍경들을 보며 저 고목이 이 고을에서 어떤 존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고목을 중심으로 민가들이 보였는데, 늦은 저녁인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민가의 반 이상이 불이 꺼져 있었다. 또한 길가에는 인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이들만 마주하던 의건은 제 발밑으로 느껴지는 살아 숨 쉬는 자들의 생기에 슬쩍 웃어보였다.



“사랑이라고 하더구나.”

“…뭐?”

“이 몸의 아버지가 하셨다는 것이 말이다. 그것이 아무래도 이 몸에게도 찾아 온 것 같다.”



의건이 덤덤하게 뱉어낸 말에 놀란 얼굴로 지훈이 저도 모르게 성운을 바라보았다. 그런 지훈의 행동에 의건이 또 조용히 웃었다. 그 모습에서 서로가 묻고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의미를 알아차린 듯, 조만간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정인이 있다.”

“안다.”

“뺏을 수 없어. 제 수명도 깎아 낼 만큼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안다. 뺏을 생각도, 이 몸을 사랑해달라고 강요도 하지 않을 거다. 다만, 아이를 향한 마음은 숨기지 않을 참이다. 이 몸이 뺏으려 해도 분명 도망갈 것이고, 이 몸이 강요 한다 해도 또 도망갈 것이다. 또한 질투에 눈이 멀어 그를 죽이려든다면, 아이가 따라 죽을 거라는 것도 알지. 그러니 그저 마음만 보일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널 그리 만든 거야.”

“아이가. 이 몸의 심장을 쥐고 있는 아이 때문이겠지. 죽였다가, 살렸다가. 제 한 마디에 이 몸이 죽었다가 살았다가 하는 지도 모르고 도망만 가려는 아이 때문에. 하지만 그런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좋은 이 몸이니까 말이다.”



가까이 있지도 않음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던 연과 염을 봐왔다. 서로 다른 지위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나는 수명에도, 서로를 미련 없이 사랑하고 서로가 만날 날만을 기다리던 그 둘을 보면서 사랑이란 것이 저리도 힘든 것일까 생각했었다. 그런 제 아비를 똑 닮아 제 맘이 닿지도 않는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좋다는 의건 때문에 지훈은 저도 모르게 그의 등에 업힌 성운을 원망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라는 아이의 존재의 영향은 어디까지 일까. 그런 지훈의 시선을 읽은 의건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걱정마라.”

“무얼.”

“네 우두머리나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아이를 다치게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의건의 어리고 아름다운 그 얼굴에 담긴 그 미소가 진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다시는 성운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것을 표현하는 그의 의지에 지훈은 더 이상 그 화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 절벽 밑을 바라보았다.



“지상에서 십 년이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야. 찾기 힘들지도 몰라.”

“해볼 때까지는 해봐야겠지.”

“…도와줄게.”



지훈이 뱉어낸 의외의 말에 의건이 잔뜩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 의건의 반응에 지훈도 슬쩍 웃어보였다.


대롱대롱 제 어깨에서 흘러내리려는 성운의 머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의건의 모습에서, 또 혹여나 제 등에 업힌 성운에게 더운 여름밤의 공기가 닿을 까 시원한 바람을 연신 부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성운을 위하는 그의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얼핏 깨달았다.


탈 밑으로 들어난 솔직한 얼굴에서 성운을 놀릴 땐 즐거움이, 저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말을 할 때는 안타까움이, 또 다시는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말에서는 고집이 보였다. 그렇게 제게 보여주고 있는 의건의 모습들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기에, 지훈은 차마 그를 이제까지처럼 차갑게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런 지훈의 호의에 의건은 조용히 물었다.



“어째서….”

“널 상처 입힐 네 아이를 대신해서 내가 돕는 거라고 생각하던지. 해석은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제가 할 말을 마치자마 그럼 이만 밑으로 내려가자고 고개를 까딱이는 지훈의 행동에 의건이 결국은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런 의건의 웃음소리에 지훈도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분명 이렇게 의건이 성운에게 모든 것을 맞추기까지 많은 고민과 아픔이 있었을 거였다. 명계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그가 반신인 성운을 위해 감수한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싶었다. 또한 성운이 쉬이 의건을 바라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성운이 그를 끊임없이 상처 입힐 것이기에. 그리고 그런 그를 앞으로 계속 바라봐야할 자신일지도 모르기에.



“고맙구나.”

“별 걸.”



또한 요즘 들어 부쩍 고마움을 말로 표현하기 시작한 그였기에. 그에 그 모습에 지훈이 슬쩍 또 웃으며 절벽을 향해 먼저 몸을 던졌다. 그런 지훈을 기분 좋게 바라보던 의건도 혹여나 성운의 몸이 떨어질까 고쳐 업은 뒤 절벽을 향해 뛰어내렸다. 무서운 속도로 땅을 향해 떨어지는 제 몸을 바람을 이용해 늦춘 의건의 발이 조만간 삼신 골의 길목 한 모퉁이 바닥에 가볍게 닿았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몸을 뉘이기 위해선 방을 얻어야했기에 지훈이 먼저 주막을 찾기 위해 움직였고, 그런 지훈의 뒤를 의건이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삼신의 점지가 많기로 유명해 새로운 아이들의 탄생이 가장 활발하던 삼신 골이었음에도, 어째서인지 밤을 틈타 나타난 사자들이 고을 곳곳의 지붕 위를 건너다니는 걸 보며 의건이 말했다.



“삼신 골이라는 이름치고 죽음의 향기가 너무 짙은 것 같구나.”

“그럴 수밖에. 삼신 골이라는 이름이 허울이 된지 오래니까.”

“허울이라니?”

“삼십 년이 넘도록 이곳에는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어.”



아이를 점지받기 위해 타 고을에서 삼신 골로 찾아오는 일이 있을 정도로 삼신의 손이 가장 많이 타던 곳이었는데, 삼십 년이나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는 지훈의 말에 의건이 어째서냐고 물었다.


오랜 시간을 걷고 나서야 나타난 주막에 지훈이 슬쩍 주막 안의 분위기를 훑어보았다. 자정이 될 때까지는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통인데 불은커녕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은 분위기와 한기에 지훈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 고을에서 제대로 된 주막을 찾기는 힘이 들 모양이었다.



“이 고을이 삼신 골이라는 이름을 얻은 데에는 삼신을 모시는 여아가 있었기 때문이야. 아까 우리가 보았던 그 고목이 삼신을 모시는 곳이고. 예전에는 그 곳에서 사는 여아가 이 고을의 부부들에게 아이를 점지 해줬지. 그리고 그런 여아에게 삼신이 직접 내려오고는 했고.”

“하지만 이 몸은 삼신이 삼신 골에 내려가는 걸 못 봤는데?”



의건의 기억 속의 지성은 성운을 만나러가거나 혹은 아이들을 점지해주기 위함을 제외하고서는 지상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에 의건이 지훈에게 의문을 재기했다. 그런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며 또 다른 주막을 찾기 위해 지훈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불이 들어와 있는 주막이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의건의 말처럼 이 고을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기보다 죽의 향기가 너무 짙었다.



“지성의 어머니 때 일이야. 지성도 삼신을 이어 받은 지 삼십 년 정도 밖에 안 된 것은 알고 있잖아.”

“…그랬지.”

“지성이 제 어머니를 이어서 이 마을의 여아에게 내려왔어야 했어. 그렇게 지성이 내려와 여아를 도와주고, 그 여아를 통해 아이를 점지해 줄 수 있어야 했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어…! 드디어 불이 들어와 있는 주막을 발견한 지훈이 그 쪽을 향해 빠르게 걷자 의건도 그 뒤를 따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깊게 잠이 든 성운의 머리가 의건의 어깨에서 대롱대롱 그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라니.”

“지성의 힘이 안정이 돼서 내려오기도 전에 여아가 죽어버렸거든.”



불이 켜져 있었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지훈은 ‘계세요?’하고 주모를 불렀다. 그런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주막 안쪽에서 대답이 없어 지훈은 또 한 번 ‘아무도 안 계세요?’하고 좀 더 소리를 키워 불렀다. 그러자 그때서야 안쪽에서 누군가가 대답을 하며 느릿느릿하게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 인기척을 느끼고 나서야 지훈이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그 여아가 연이였지.”

“묵고 갈 거요?”



의건이 지훈의 말에 당황하기도 전에 늙은 노파가 하나가 허리가 편치 않은지 제 허리를 손으로 두들기며 물어왔다. 보통 주막은 남자 손님들을 끌기 위해 미모가 훌륭한 젊은 처자가 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에 반해, 지훈과 의건을 맞이한 것은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노파였다. 그녀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증명하듯 주막의 지붕위에 파란 얼굴을 하고는 검은 도포를 휘날리며 사자가 명부를 넘기고 있었다. 분명 그는 그녀의 남은 수명을 확인하고 있으리라. 조만간 펼쳤던 명부를 접은 사자는 지훈을 알아보았는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몸이 이래서 이 시간에 식사는 못 만들 것 같은데.”

“괜찮아요.”

“미안하이. 이 마을에는 젊은이들이 없어서 말이지. 다 나 같은 늙은이들 밖에 없어. 어떻게 이 고을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조심하시게나.”



노파가 경고하듯 하는 말에 알겠다는 말과 함께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곧 방의 문이 닫혔다. 의건은 바닥에 깔아진 이불에 성운을 조심히 누이고서 계속 그를 위해 부리던 바람을 몰아냈다. 좁은 공간에 바람을 부리는 것은 위험했고 부리고 있는 바람에 호롱불이 꺼질 것처럼 휘청 이는 것이 보였기에, 제가 부리던 바람을 완전히 몰아 낸 뒤 금세 더운 공기에 쫑알거리는 성운의 잠꼬대에 방 어딘가에 굴러다니던 부채를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잇자 방의 구석에 자리를 잡으며 지훈도 입을 다시 열었다.



“알아보기로는 그녀가 고을에서 천대 받았다고 알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여아는 신을 모시는 처지였고 그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어. 그런데 그런 그녀가 삼신의 세대교체 동안 아이를 점지 못해 준거야. 거기다 덜컥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가져버렸지. 그 일로 인해 여아를 신녀 취급하던 그들은 한 순간에 귀신의 아이를 가진 천한 여자취급을 했어.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때는 한 없이 친절하던 그들이, 한 순간에 돌아섰던 거야. 필요가 없어진 거지.”



의건이 연신 부치는 부채의 바람에 더위에 인상을 쓰던 성운의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바뀐 잠자리가 불편했던 것인지 잠시 뒤척이는 가 싶더니 금세 편한 자세를 찾은 듯 몸을 한껏 웅크린 채 고른 숨을 뱉는 성운이 보였다. 그런 성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의건이 잠시 말을 멈춘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저주 받았군.”

“이 고을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그 탓에 여아가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 여아가 신을 모셨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고, 그저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렸지. 결국 그녀가 죽어버렸을 땐 그의 아들을 쫓아냈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뒤로도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으니 그들은 아마 여아의 저주라고 여전히 여기고 있을지도 몰라. 저주가 아닌 인과응보라는 것도 모르고.”



그들이 아팠던 그녀를 조금만 도와줬더라면 그녀는 지성을 다시 만나 아이들을 점지해줬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그녀의 아들을 쫓아내지만 않았더라면 그 아들이 제 어미의 일을 이어서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제 선택으로 그녀를 죽게 놔뒀고 그녀의 아들마저 쫓아냈다.



“분명 아직도 여아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게다가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은 지 삼십 년이 넘어서 이 고을은 고령화가 된지 오래야. 여아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몸 조심해야해.”

“그렇겠군.”

“건.”



지훈의 조용한 부름에 성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의건의 얼굴이 그를 향해 돌아갔다. 그런 의건의 얼굴은 창백하고 어려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의건의 얼굴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던 지훈은 성운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운이도 그래.”

“무어가.”

“운이도 그들이 원하는 힘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확인 당해야 했어. 그 와중에 운이의 아비가 죽었지. 그것이 운이에게 상처였어. 필요 없다 여겨지니 칼날을 들이미는 그들을 보며, 그런 그들의 손에 죽은 제 아비를 보며, 그런 제 아비의 모습에 미쳐버린 제 어미마저도 보아야 했지. 그런 아이의 상처를 다시 끄집어냈던 것이 너야.”



지훈은 성운에게 자신의 가치를 보이라며 의진의 심장에 칼을 꽂았던 의건을 기억한다. 그 모습에 과거의 잔상을 떠올린 성운이 의진에게 무리하게 재생 술을 부렸던 이유가 단순히 사랑하는 이였기 때문만이 아닌, 또 한 번 눈앞에서 제 소중한 이를 잃어가면서까지 제 능력을 감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과 그 아들의 사연을 듣게 된다면 운이도 분명 제 과거를 떠올릴 거야.”

“…그렇겠지.”

“그러니 여아의 아들에게 꼭 찾아가 염의 유언을 전해 줘. 그것을 보면 운이도 분명 기뻐할 거야.”



저처럼 상처받았을 그에게 찾아온 이가 하는 제 어머니가 원하던 말들을 듣는다면 성운은 분명히 제 일처럼 기뻐할 것이었다. 반신이라는 이유로 받아야했던 성운의 서러움을 알기에 의건은 지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진중한 둘의 대화도 모르고, 의건의 부채질 밑에 깊은 잠에 든 성운의 얼굴이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








‘오랜만에 젊은이들이 왔더군.’



곰방대를 물고 있는 최영 장군의 말에도 수려한 외모의 사내는 점을 치기 위해 상 위로 흩뿌린 쌀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이가 들어설 수 있겠냐는 나이 지긋한 부부의 질문에 그는 ‘글쎄올시다. 복채가 좀 모자란 가 보오. 신이 대답을 안 해줘.’라며 오른 손을 부부에게 내밀었다.




‘대답을 안 해주기는 누가 안 해줬다고 그러느냐. 네 놈이 안 듣는 거지’



곰방대에서 뻐금뻐금 연기를 내면서 제 말을 몽땅 씹고 자신이 앞에 있는 부부의 돈주머니를 홀랑 털 모양인 사내를 보며 최영 장군은 혀를 찼다. 이런 놈을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놔둬도 되는 가 싶었다. 갈수록 무당의 수가 줄어들어 지상으로 내려올 일이 드물었기에, 사내가 자신을 따라 지상으로 마실 이나 가자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 나선 것이 문제였다.



‘최영 장군이 아이를 점지해주고 있다고 소문나면 중천에서 칠성(별자리신)이 비웃겠다.’



자신이 비웃는 것도 몽땅 씹고 그저 제 앞에 부부가 내미는 두둑한 돈주머니에 만족한 듯, 다시 점치는 것처럼 쌀을 한주먹 쥐더니 상 위로 흩뿌리는 사내가 보였다. 쯧, 하는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최영 장군이 힐끔 상 위를 쳐다보았다. 점괘가 딱 봐도 아이는커녕, 조만간에 객사할 운명이로고만 풀이할 것도 없는 점괘를 보며 음-음- 하는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는 사내의 모습에 최영 장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라, 이 사기꾼 놈아.



‘현무가 왔다.’



다 나온 점괘를 보고도 풀이를 하는 것처럼 쫑알거리던 사내의 입이 돌연 멈췄다. 그의 그런 모습에 앞에 앉아 있던 부부는 이제야 점괘가 나온 모양이라도 여긴 듯 ‘나왔습니까? 신이 뭐라 하십니까?’하고 물어왔다.



‘옆에 기묘한 아이 둘을 데리고 왔더구나.’



상을 향해 숙여져있던 그의 고개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들어난 수려한 그의 외모에 부부는 침을 조용히 삼켰다. 십 년 전 죽어버린 삼신을 모시던 여아가 죽은 뒤 조용히 삼신 골로 흘러들어온 이 사내의 점괘는 꽤나 잘 맞았다. 여아의 빈자리를 완전히 메울 수는 없었지만, 가끔 봐주는 점괘는 잘 맞아 떨어졌다. 거기다 여기저기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환심을 샀다는 그의 인형극은 삼신 골의 수많은 노파들의 마음까지 훔쳐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인영들의 움직임에 눈을 뗄 수 없었고, 실화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신들의 이야기 또한 흥미를 돋아냈다.



“신이 말하기를.”



부부는 한 참을 망설이던 사내가 입을 열자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뒷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디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런 그들의 기대감이 어린 눈을 보며 최영 장군은 또 한 번 혀를 쯧, 하고 차고는 곰방대를 물었다.



‘이미 신이 버린 곳인 것도 모르고.’

“곧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아이고, 정말이요?”



고작 말 뿐인데도 곧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말 하나에 신이 난 부부의 모습을 보며 사내는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그럼, 좋은 일이 있고야 말고. 물론, 너희 말고 내게 말이다.



‘에라, 이 사기꾼아.’



꾸벅꾸벅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나가는 부부에게 화려한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던 사내는 그 부부가 문을 나서자마자 표정을 굳히고는 최영 장군을 바라보았다. 그런 사내의 시선에 곰방대를 뒤집어 재를 털어내던 최영 장군이 ‘뭐 어쩌라고.’라는 얼굴을 보였다.



“마저 이야기 해야지.”

‘무얼.’

“현무가 요상한 아이들을 데려 왔다 하지 않았느냐.”

‘왜, 갑자기 흥미가 돋아나느냐? 그렇게 내 말을 씹어 삼키더니만.’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어디긴, 타지의 사람들이 오면 어디에 머물 것 같으냐.’



삼신의 사랑을 잃은 마을은 고령화가 되었고 그로 인해 고을엔 늙은 노인들만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타인을 맞이할 수 있는 주막을 운영할 수 있는 체력이 되는 이들이 몇 안 되었기에 사내는 최영 장군이 어디를 말하는 지 바로 알아차렸다.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사내였기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보며 최영 장군이 놀란 얼굴을 하고는 ‘어디를 가려는 게냐.’라고 물었다. 그런 최영 장군의 말에 사내는 오른 손을 내밀며 말했다.



“새로운 이들도 왔는데 구경이라도 가야지 않겠느냐.”



그런데 왜 내 곰방대는 뺏으려고 하느냐. 제 앞에 내밀어진 사내의 오른쪽 손바닥을 보며 최영 장군이 제 손에 들린 곰방대를 줄지 말지 고민하는데 좀 더 자신에게 가까이 내밀어지는 손바닥에 쯧,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원하는 것을 넘겨주었다. 에라, 이 어른 공경도 모르는 놈 같으니. 마실 가자라는 핑계로 자신을 지상으로 끌고 나왔으면서 제 곰방대까지 뺏어가는 행동에 최영 장군이 입맛만 다셨다. 이러나저러나, 자신의 우두머리였다.


최영 장군에게 빼앗은 곰방대에 불을 붙인 사내는 그것을 입에 물며 부부가 나섰던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손님을 맞이하러 가야지.”

비루한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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