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걸친, 칼리엔 공작 작위계승식이 전부 끝냈다. 말만 들어서는 빨리 끝날 것 같지만, 실상은 9명의 남매들 모두 예법, 승마, 검술, 대전, 업무 능력 등 상당히 많은 과목의 점수를 합산하여 가장 높은 사람이 작위를 계승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미 결혼한 3명의 여자들을 제외하고, 남은 6명이 시험에 참가했다. 몸을 쓰는 일에 있어서는 유크테아의 아래의 젊은 동생들이 유리했고, 업무의 처리나 상황 대처 능력은 다년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유크테아의 형이 잘하는 것이었다.


국혼에 얼굴은 보여야하기 때문에 가주인 로만 칼리엔 공작은 황도의 저택에 있었고, 원래 황도에 있던 장남과 사남은 계승식을 위해 공작 가로 왔다.


명분상의 이유로 참석한 유크테아는 열심히 할 생각도 없었고, 가장 최하점을 받아도 큰 문제가 없었다. 가주의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자신의 형제들 중 누가 가주가 되어도, 혹시나 쓸모없다며 칼리엔의 이름을 박탈한다면 친구인 아르젠에게 가면 되는 일이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죽을 듯이 계승 시험에 임하는 자신의 형제들은 그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대전에서 진심으로 유크테아와 검을 겨눴다. 여기서 요점은 검을 겨룬 게 아니라, 겨눈 것이다. 그 덕에 팔을 다쳐 남은 두 달 동안은 회복에 집중할 수 있었다.


칼리엔의 가주는 삼남, 라흐마로 결정되었다. 장남이 아쉽게 2위를 기록하며 가주가 되지 못했지만 깨끗이 결과에 승복했고, 라흐마를 도와 같이 칼리엔 공작 가를 꾸려갈 것이다. 훈훈한 결말이었고, 유크테아가 다친 것 외에의 부상자나 사상자도 없는 평화로운 계승식이었다. 이전에는 대전에서 서로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라흐마, 너는 나를 어떻게 할 거냐?”

“이제는 당주님이라 불러야 할 걸, 형. 아, 형은 아직도 공자니까 공작님인가?”

“그런 거 알게 뭐야.”


공작의 직책을 받지 않았어서, 유크테아만이 아직도 공자라고 불렸다.


“형은 아예 클로디어즈에 박혀 죽을 거야?”

“그러려고.”

“그런 볼 것도 없는 시골 아무도 안가고 싶어 해. 몇 해 전부터 거기서 유통되기 시작한 보석이나 향수에는 관심이 있지만. 다른 건 몰라도 그 영지가 예전부터 세공은 잘했잖아.”

“그 말은 거기 있는 별장은 아직도 내 거라는 거지?”


라흐마가 금화 들어있는 주머니를 유크테아 쪽으로 던졌다.


“내 말은 거기서 직접 여기 적힌 물건들 좀 구해오라는 거야. 인기가 많아서 공작이라도 구하기가 힘들어, 클로디어즈 후작과 친구니까 구할 수 있지?”


정말 훈훈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일에 있어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는 아르젠으로부터 라흐마가 부탁한 물건들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르젠이 안된다면 안 되는 거다.


“어머니들이 원하셔. 물론 형네 어머니도.”


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유크테아였다.


유크테아는, 클로디어즈 영지가 너무 외진 곳에 있다고 항상 투덜거린다. 칼리엔 영지에서 가는 데에만 한 달 넘게 걸리기 때문에서라도 유크테아는 공작 가에 웬만해서는 가지 않는다. 그 외진 클로디어즈에서 황도까지는 마차로 10일 정도, 황도에서 칼리엔 영지까지도 비슷하게 걸리는데, 왜 클로디어즈에서 칼리엔까지가 한 달 넘게 걸리는 지는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그렇다고 황도를 지나서 간다면, 황도의 칼리엔 저택에 들려야하기 때문에 더 비효율적이다.


거의 100일 가까이 보지 못했던 클로디어즈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최근에야 사람이 좀 늘었다고는 하지만, 집도 한 채 없이 어둡게 펼쳐진 밭만 계속되자 뭐라도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클로디어즈 저택이 있는 항구 쪽은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집도 많았고, 사람도 있었고, 불도 켜져 있었다.


“아르젠 녀석, 후작부인이 잘 챙겨줬을까.”


항구에서 마중하러 갔을 때, 묘하게 자신과 말을 피했다. 로빈이 있어서 그러려니 대충 넘어갔다. 그 뒤에 저택에 찾아갔을 때도, 뭔가를 자신에게 감추는 듯한 모습을 봤다. 로빈과의 사이에 문제가 있거나, 혼자 땅을 파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로빈을 찾아간 것이었다. 자신이 옆에서 관리해주는 게 최상이었지만, 그게 어려우니 가까운 후작부인에게 부탁했다.


클로디어즈 저택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천둥번개가 치는 날씨 때문인지 유크테아의 심장이 요동친다. 최소한의 경비만이 있는 저택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건을 들고 나오는 카를. 군데군데 보이는 사용인들까지.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신의 심장이 간질거리는지를 모르겠다.


“별다른 일은 없었지?”

“있었습니다. 세 달 전부터 사용인들 모두 후작님과 포옹하는 시간이 생겼고.”

“음? 내가 떠나고 얼마 안 지나서부터?”

“추위를 잘 타는 로빈님을 위해 정원에 유리온실을 짓고 있습니다.”

“그건 좋네.”


갑자기 왜 사용인들이 아르젠을 껴안는다는 말인가. 사용인들이 지나치게 아르젠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어이 그 욕망을 드러낸 걸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세 달 동안 아르젠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다.


“......그 자식, 또 생각하길 포기한 건가.”


카를은 하던 말을 이어서 했다.


“국혼의 연회에서 후작님이 쓰러지셨고요. 도련님들과 사이는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도련님들도 포옹의 시간에 참여하실 정도고요.”


멀쩡히 다 나았다더니, 그렇게 사람 많은데서 쓰러지다니. 정말 8국의 환자라는 이름은 잘 붙인 것 같다. 아이들과 관계가 좋아진 건 칭찬해주고 싶은데, 그놈의 포옹의 시간은 대체 뭘까.


“그 뒤로부터 로빈님과 사이가 안 좋아지셨습니다. 포옹하는 시간의 표정도 나쁘시고요.”

“... 포옹의 시간이야 너희들이 질척거려서 표정 관리가 안 된 거겠지. 8국에 있을 때는 애한테 물고문 같은 걸 시켰다며? 나는 아르젠이 아직도, 이렇게 맞먹으려드는 너희를 죽이지 않은 게 신기하단 말이야.”

“물고문 이라니...! 아닙니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쓰러지기 전까지는 후작님은 그런 표정 안 지으셨습니다.”


아르젠은 저택의 사용인들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긴 했다. 어려운 시간을 함께 버텨서인가 전우애라는 것이 생겼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전에 잘랐던 사용인들을 다시 저택에 고용하는 일도 없을 거다. 


“참는 거에 한계가 온 걸지도 모르지. 지금도 포옹이라는 거 계속되고 있나?”

“일단은... 그렇습니다. 표정이 안 좋으시니 예전보다 횟수는 줄었습니다.”

“안한다는 건 선택지에 없냐?”


지금 클로디어즈 저택의 사람들은 30명 정도 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사람들 중에서 아르젠과 포옹을 거절할 녀석들도 없으니 하루에 30번을 사용인과 포옹하는 건가. 이자벨라가 죽은 뒤부터 타인과 접촉하는 걸 기피하는 아르젠치고는 상당히 많다. 간단한 인사의 접촉 외에는 전부 안됐다. 자신이 어깨에 손만 대도 화를 내고 기겁을 했다, 자신도 1년 가까이 노력해 겨우 허락받은 접촉인데 그런 아르젠이 포옹? 말이 안 된다.


“원래는 하루에 얼마나 했는데?”

“적어도 60번입니다.”

“내가 아르젠이었으면 진작 너희 전부 다 목을 쳤을 거야. 항상느끼지만 너무 건방져.”

“....후작님은 안 그러십니다.”

“좋은 주인 아래에 있는 걸 감사해라.”

“또 그 말씀이시군요. 저희는 항상 감사하고 있답니다.”


유크테아의 기준에 아르젠은 너무 관대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손에 피 한 번 묻히지 않은 게 걱정될 정도로.


집무실에 있는 창을 비가 거세게 두드리지만, 아르젠은 거슬리지 않는 듯 차를 마시고 있다. 유크테아는 저택의 사용인들이 그런 짓을 하는데도 몇 달을 가만히 있었다던 아르젠을 응시했다. 지난날의 행적도 그렇지만, 지금 앞에 있는 친구의 모습은 마치 5년 전과 비슷했다. 이 두더지가 땅을 파서 들어갔다 온 건지, 파기만 한 건지.


“몸은 괜찮아?”

“응. 원래 아프지도 않았어.”

“그럼 왜 쓰러졌는데?”

“....공작 가의 행사는 잘 끝내고 왔어?”


말을 돌렸다.


“응. 라흐마가 가주가 됐어. 나는 늘 그렇듯 여기에 있는 별장에서 지낼 거고.”

“네 형이 될 줄 알았는데.”

“아, 이건 라흐마가 너한테 보내는 선물이다. 네가 태어난 년도에 만든 와인.”


멀쩡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을 기세에 조금 빠르게 술을 꺼냈다. 종을 울리자 오웬이 들어와 간단하게 술을 마실 준비를 해줬다. 오웬은 나가기 전에 자연스럽게 아르젠을 껴안고는 나갔다. 아까 카를에게 들었던 것과 달리 아르젠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웬 포옹?”

“내가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야. 네가 로빈에게 뭔 말을 했는지 몰라도 그 뒤부터 저택의 모든 사람들과 하루에 2번씩 포옹하게 됐거든? 그리고 내가 땅을 파긴 왜 파?”


유크테아는 가기 전에 자신이 로빈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되감아보던 중에,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항상 ‘부인’이나 ‘로빈씨’라고 부르던 게 ‘로빈’으로 바뀌었다. 


“.... 난 그냥 나대신 너 잘 봐달라고 그런 거였어. 땅 판다고 한 건 단순 비유였고. 부인이 내 말을 좀 다르게 이해했나본데? 근데 그게 왜 포옹하는 걸로 바뀐 거야?”

“주인 없는 클로디어즈 저택의 전체 회의 결과래.”

“이 자식들이.... 너, 거부감은?”

“생각보다는 없어. 편하지는 않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유크테아의 말이 변질되어 포옹이 되어 돌아갔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에 거부감이 줄었다는 건 축하해줄 내용이다. 아무래도 몇 년이나 지났으니까 그 사이에 괜찮아 진 걸 수도 있다. 그런데 말하는 아르젠의 표정은 우울했고 내쉬는 한숨도 무겁다. 어째서 이 순간에 천둥번개까지 치는 지.


“이거 맛있다. 마음에 들어.”


그 뒤로는 일부러 다른 얘기를 하며 술을 마셨다. 회색의 하늘이 검은 색으로 물들었다. 아르젠의 머리색과 다르게 칙칙하고도, 울렁거리는.


“날씨가 더 안 좋아졌네. 야, 나 오늘은 못 돌아가겠다.”

“데려온 기사들에게 방은 내주지.”

“내 방은?”

“언제는 내 허락을 맡았다고? 늘 썼던 방 써.”


술자리를 정리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당연한 거였지만, 로빈도 있다. 지난 1년 반 정도를 되돌아보면, 이 셋은 같이 식탁에 앉아본 적이 없다. 전해 듣기로는 그렇게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했는데, 인사도 하지 않는 이게 나쁜 분위기가 아니면, 이것보다 더 나쁜 상황이 있다는 걸까. 전에 걸어가면서 둘의 대화를 들은 사람으로서 말 하건데, 둘은 그렇게까지 나쁜 사이는 아니었다. 카를이 최근 둘 사이가 안 좋아졌다더니, 진짜였다.


로빈을 거의 무시하다시피 행동하는 아르젠에 반해 로빈은 종종 아르젠에게 시선을 던지는 것만이 있는 식사시간이었다. 유크테아가 종종 질문을 하면 두 사람에게서 단답이 들려오는 것뿐, 이런 분위기에는 익숙해질 대로 겪어온 유크테아는 체하지 않았다.


식사가 다 끝나고, 몇 사용인들에게 안기고 아르젠은 방으로 들어가자, 유크테아는 한쪽 눈썹을 올리고는 제임스를 찾았다. 얘기를 마치고, 유크테아는 아르젠의 방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아르젠이 태안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이상한 저택의 포옹의 상황은 알고 있지만 침실에 들어와서, 침대 위에서까지 포옹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혼란스러워할 때, 문이 열고 나온 태안이 유크테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복도로 모습을 감췄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욕실 쪽에서 시종들이 나왔고, 아르젠은 옷을 벗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너 황도에 같이 갔다 온 사람들하고 포옹할 때만 얼굴이 안 좋아진다고 하더라.”

“알아.”

“부인이랑은 일주일 째 말도 안하고.”

“원래도 대화가 많지 않았어.”

“그럼 전에 내 앞에서 한 건 대화도 아니었어?”


유크테아의 앞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가 있는, 땅 잘 파는 두더지가 있다. 아까 행동을 보면 포옹하는 게 원인은 아니다. 아이들과 사이도 좋아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로빈일 가능성이 높다. 두더지가 그저 몸이 아프다고 스스로 땅을 파지는 않는다.


“아르젠.”


아르젠은 머리 끝까지 물속에 담갔다. 머리카락이 물에 떠 너울거린다.


아르젠은 상황을 피하고 싶을 때 삽을 드는데, 최근의 아르젠에게는 그런 상황이 없었다. 영주로써 혼자 영지를 책임져야한다는 강박도, 로 가문과의 계약 이후로 상당히 나아졌다. 로빈에게 두더지라고 말한 건, 지금까지 아르젠이 가장 의지하고 있는 게 자신이었으니까, 자신이 없는 동안 혹시나 해서 말했던 거다. 둘 사이도 더 가까워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긴 했다. 근데 이게 뭐람.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그래? 나한테도 말 못 하겠어?”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어느덧 비가 잦아졌다. 아르젠이 스스로 입을 열기까지 기다렸다. 유크테아가 아르젠을 1,2년 본 게 아니었다. 자그마치 22년을 옆에 있었다. 뭐, 그 중에 한 13년은 떨어져있었지만. 그만큼 아르젠을 잘 알고 있다. 


“로빈이 무서워.”


성급히 아르젠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미소를 띠운 체 아르젠을 바라볼 뿐이다. 다는 아니더라도 얘기 해 줄 것 같은 분위기다. 아르젠은 욕조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갔다.


아르젠의 침실에는 소파가 없기 때문에, 둘은 침대에 앉았다. 


“황도에서 쓰러진 거, 아파서가 아니라 로빈이 데일리크를 쓴 거야.”

“하아?! 미친, 해독제는?!!”

“1시간 이전에 먹였어. 사용한 이유는 그런 자리가 싫다는 것 뿐.”


웬만하면 당황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근데 도저히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데일리크는 소량으로도 멀쩡한 사람을 단 5시간 만에 죽이는 독이다. 경직 이외에는 특별한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에 귀족사회의 암투에서 쓰인다. 귀족이라면 저택에 꼭 데일리크 해독제를 상비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죄수들을 고문할 때도 쓰이는 약이고, 1국에서는 유명하기 때문에, 1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독에 노출되면 바로 정신을 잃고, 1시간 후부터 서서히 온몸이 굳어지는 감각에 깨어나 4시간 정도를 비명도 못 지르며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는다. 2시간 내에만 해독제를 먹는다면 몸은 후유증 없이 멀쩡히 돌아오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에 비싸도 사용자가 많다. 예전에는 전쟁포로에게도 많이 쓰였던 거다. 참고로 원료인 데일리크 꽃은 지체 없이 바로 몸이 굳기 시작한다.


“데일리크를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썼다니까, 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무섭거든.”


아르젠은 어릴 때 데일리크 꽃을 먹었다가 바로 경직을 일으킨 적이 있고, 정원에서 뒹굴고 있는 걸 제임스가 발견해 해독제를 먹어서 목숨은 건졌다고 들었다. 아르젠은 그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30년이 지나 또 데일리크와 만났다? 당연히 땅을 파야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옆에서 부채질도 해주고 마실 것도 가져다줘도 모자라다. 땅을 파내서 데일리크 꽃을 뿌리뽑아야한다.


(꽃을 왜 먹어)


【 R 19 : 폭력 】


“아르젠, 미안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핑계로 들쑤셔서.”


아르젠은 아까부터 계속 표정을 지운 채로 비가 내리는 걸 보고 있을 뿐이다. 무섭다고 말할 때도, 목소리나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제임스에게 업무를 지시할 때만큼 단조로웠다.


노크 소리도 없이 열린 문 사이로 단한이 들어왔다. 단한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유크테아와 아르젠을 보고, 욕실에서 수건을 가지고 나와 아르젠의 머리를 말렸다. 


유크테아는 생각할수록 화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자리가 싫다는 이유로 데일리크를 사용한 로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위험하지만 시간 내에 해독제만 먹으면 괜찮아지는 독이라 1국에서는 농담조로 ‘어제 당신이 보낸 거에 데일리크가 있었다. 기절해서 혼자 쓰러져 있었는데, 그때 시종이 해독제를 먹이지 않았으면 아주 큰 일 날 뻔 했다. 하하하’라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지만, 데일리크를 사용한다는 건 상대방을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싫어한다는 의미를 뜻한다. 귀족이 갑자기 쓰러진다면 일단 데일리크 해독제를 먹이라는 것도 귀족 가의 사용인이라면 알고 있는 거고. 보통의 귀족은 대부분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 하니까 나오는 대처방법이었다.


유크테아도 그런 식으로 데일리크를 먹었는데, 고통에 몸부림칠 때 겨우 종이에 데일리크라고 갈겨 쓴 걸 라비가 용케 알아보고 해독제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 지도 모른다. 가공한 거라 그 정도였지 데일리크 꽃은 더 심했을 거다.


같이 갔던 사용인들을 꺼려하는 태도를 보면, 로빈은 사용인들에게서 데일리크를 손에 넣은 거다. 그 외에도 뭔가 있겠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로는 추측이 어렵다.


“하, 시간을 못 맞췄으면 대체 어떡하려고...!”


아르젠이 침대 위로 눕자, 단한이 수건을 치우고 이불을 덮어줬다. 유크테아는 방 안을 계속 돌아다니다 걸음을 멈췄다.


“너 이혼해.”


어느새 아르젠은 단한에게 안긴 상태로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고 있는 듯이.


*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에는 로빈과 유크테아만 있었다. 아르젠에게 집무실에 가서 밥을 먹으라며 쫓아내, 둘 만의 자리를 만들었다.


“부인께서는 아르젠을 망치로 깨부수다 못해 저승으로 보낼 뻔 한 걸 인지하고 계십니까?”

“...저승?”

“부인께서 단지 기절시키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데일리크가 독인 건 알아요?”

“8국의 환자에게 들어 알았어.”


로빈은 아르젠을 환자라고 부르면서도 환자 취급도 안 해주는 사람이다. 말이나 못하면.


“데일리크를 누구한테 넘겨받았습니까?”

“윌슨.”

“아하, 윌슨이군요. 라비! 윌슨을 내 앞에 세워.”


유크테아의 기사가 윌슨을 끌고 왔다.


“부인. 데일리크는 단 5시간 만에 사람을 죽여요. 1시간 이후로부터 몸이 찢기는 고통이 시작되는데, 소리도 못 내며 온몸이 굳어 고통 속에 죽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 아니. 몰랐다.”

“그럼 아는 게 뭡니까?”

“사용하자마자 바로 정신을 잃고, 1시간 내에 해독제를 쓰는 것.”


유크테아는 정말로, 눈앞의 후작부인이라는 자가, 아는 것 없이 벌인 일이 매우 거슬렸다. 어젯밤에 라비에게 그 빗속을 뚫고 자신의 별장에서 가져오라고 시킨 데일리크를 품에서 꺼냈다. 손가락 한마디만한 작은 병.


“이건 데일리크입니다. 부인,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유크테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윌슨의 턱을 강제로 열어 데일리크를 부었다. 데일리크라는 걸 바로 앞에서 들었기 때문에 윌슨은 피하려했지만 입 안에 뭔가 닿는 느낌이 나자마자 쓰러졌다.


“아르젠도 이렇게 닿자마자 쓰러졌죠? 자, 식사는 아직 에피타이져가 나왔을 뿐이고. 앞으로 1시간 동안 저와 얘기를 합니다. 오늘은 제 별장의 요리사들을 데려왔어요. 어후, 다들 이 빗속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답니다. 말고기 생으로 드셔봤습니까?”

“먹고 싶지 않은걸.”


유크테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가려 했다. 유크테아는 로빈의 앞을 막아섰다. 곧 사란이 유크테아를 향해 걸어 왔다.


“멈춰. 부인의 기사는 그 이상 움직이지 마라. 나는 아르젠처럼 평화주의자가 아니야. 부인, 다시 자리에 앉으시죠.”


사란은 무시한 체 로빈과 유크테아 사이에 서서 로빈이 나갈 수 있게 길을 열었다. 유크테아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은 로빈의 나른한 눈빛이 짜증났다.


“부인께서 아르젠을 어떻게 만들 뻔 했는지는 눈으로 보고 가셔야하지 않습니까? 저는 부인이 했던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저 사람을 기절시켰을 뿐인데 왜 그렇게 과민반응하시는 지 모르겠군요. 왜 그렇게 아르젠이 화내는 지 안 궁금합니까? 걔 성격 상 그런 것까지는 말 안했을 텐데.”


로빈이 불쾌하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유크테아가 식사 전에 식당에 오라고 부른 몇몇의 사용인들이 들어왔는데 바닥에 누워있는 윌슨을 발견하곤 유크테아를 쳐다봤다. 유크테아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그 사람들을 보며 입 꼬리를 올려 웃어줬다.


“구경난 거 맞으니까 잘 보고 있어. 참, 황도에 있을 때 부인이 가장 빠르게 기절시키는 약을 찾은 건 모두 알고 있나?”


몇은 고개를 가로로, 남은 사람들은 위아래로 저었다. 아까 윌슨에게 쓰고 빈 병이 된 걸 보여줬다.


“그래서 여기 쓰러져 있는 사람이 데일리크를 가져다 줬는데. 1시간 내에 해독제를 먹이라는 말만 붙였다네? 현재 저택의 모든 사용인 중에서 아르젠이 5살 때부터 지금까지 일하는 사람은 제임스뿐이지? 그래서 너희는 모르고 있어, 그 녀석이 어릴 때 데일리크 꽃을 먹고 죽다 살아난 뒤로 혐오에 가깝게 싫어하는 거.”


정확히 말하자면 죽도록 아팠다가 살아난 거지만, 이렇게 말해도 같은 뜻이다.


“그런 사람에게 후작부인이 몰래 데일리크를 사용했다.”

“맙소사, 설마 황도에서 갑자기 쓰러지신 게 데일리크 때문인 겁니까?!”

“이번엔 눈치가 있어서 좋군, 카를. 웬일이냐?”


식탁 위에 있던 스프가 치워지고 치즈와 비스킷, 햄이 나왔다.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접시 째 벽으로 던지자 큰 소리가 나며 유리조각과 음식들이 공중에 흩날린다. 사란과 로빈은 유크테아의 행동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유크테아에게 괜히 한량이라는 단어가 붙는 건 아니다. 음식을 나르던 별장의 사람은 익숙하다는 듯 접시를 치우고 다른 요리를 꺼내왔다.


“그게 결정적이야. 지금 아르젠이 너희를 불편해하고 부인을 피하는 게.”

“1시간 전에 해독제를 먹여서 아무 일도 없었다.”

“부인, 이것만은 제발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부인이 로체의 딸만 아니었어도 제가 이렇게 좋은 말로 얘기하고 있지 않았을 거라는 걸.”


평소처럼 웃으면서 식기를 손에 들고 생고기를 찍어 입에 넣었다. 아르젠처럼 격식이 묻어나오는 동작으로, 자신이 귀족임을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아무 일도 없어야죠, 부인. 있었으면 아르젠은 죽어서 이자벨라 옆으로 갔을 텐데... 중요한 건 데일리크를 아르젠에게 썼다는 겁니다. 이해 못하겠다는 그 멍한 얼굴 좀 어떻게 해봐요. 그러니까 아르젠이 부인을 무서워하는 거지. 어딘가 나사하나 빠진 것 같이 행동하니까! 부인은 감정이라는 게, 공감 능력이라는 게 없습니까?!”

“이봐!”


유크테아가 로빈을 향해 빈정거리자 사란이 유크테아의 멱살을 잡았다. 사란이 유크테아보다 키가 훨씬 크기 때문에 사란의 손에 매달린 상태가 되었다.


“뚫린 입이라고 못하는 말이 없군.”

“.... 너야말로. 내가 아르젠을 생각해서 자비를 베풀 때 알아서 기어.”

“주인님. 가시죠.”


사란이 거칠게 유크테아를 밀친 뒤, 로빈을 데리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식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긴장했다.


“이야, 저러다 아주 때리겠다. 그치?”

“사란은 8국인이라 계급에 대한 이해가...”

“여기 온지 1년이나 넘었는데도 모르는 건, 아주 자기 세상에서 살겠다는 거지.”


고용한 사람에게 근무시간동안만 예의를 갖추는 것, 다시 말해 돈을 주는 사람에게 복종한다. 죽으란다고 죽거나 하진 않지만.


“튤릭, 저 쫓아가서 윌슨을 부인 앞에다 던져놓도록. 못 도망가게 막아놔.”


유크테아는 옷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기사들이 윌슨을 끌고 나간 뒤, 아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 사람들을 지목했다.


“나머지는 나가.”

“공자님, 무슨 생각입니까? 무섭습니다.”

“내가 예전부터 너희에게 궁금한 건데, 나는 무섭고 아르젠은 안 무서워?”

“후작님은 안 무섭습닙!”


유크테아는 카를의 뺨을 내리쳤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유크테아가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목을 친다는 둥, 나중에 가만 안 두겠다는 농담은 많이 해왔지만 실제로 손을 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봐.”

“후작님은...!!”


파찰음이 울렸다. 고개가 돌아가고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세게 때렸다.


“아르젠의 밑에 있는 것에 감사하며 모셔라. 이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텐데... 아니면 진짜 못을 박아줘야 알아들을까?”


카를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유크테아인지 의심까지 들었다.


“건방지긴.”



【 R 19 : 폭력 】


“포옹? 난 그런 거 말한 적 없어. 그 여자한테 아르젠 좀 잘 지켜보라는 얘기였지. 근데 그 말을 이상하게 이해해서 전한 사람이나, 그딴 식으로 알아 처먹은 네 녀석들을 보면 더 어이가 없다. 머리는 장식이야?”


유크테아는 손을 멈추지 않았고 말하는 중간 중간마다 살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 할 일도 못하고 있는 주제에, 기회다 싶어 감히 아르젠에게 더러운 욕망을 드러내?! 네 주인은 아르젠 샤르크 클로디어즈 후작이다. 황후의 동생이자, 이 나라에서 9번째로 높은 고귀한 핏줄. 어린 나이에 영주가 되어 망해가는 클로디어즈 영토를 혼자서 고생하며 부흥시킨!”


이내 카를이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지자 옆에 있던 시종을 쳐다봤다. 아르젠이 영주가 된 뒤로는 클로디어즈 저택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기에 몸이 떨렸다. 유크테아가 다시 손을 든다.


“18년이란 시간을 영지에 쏟아 부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다 포기하면서, 나중에는 자신의 아내까지 보냈어. 영지와 나라를 위해, 오직 이자벨라만을 사랑하던 사람이, 야만인이라고 평가받는 8국의 사람과 결혼까지 하더라? 하, 걔는 내가 생각해도 희생정신을 좀 줄여야 해. 더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아르젠이! 너희가 아니라!”


시종의 몸이 유크테아가 때릴 때마다 본능적으로 웅크려진다. 코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온다. 유크테아가 끼고 있는 검정 가죽 장갑에 붉은 빛이 번들거린다.


“빨리 제대로 서. 지금 아프라고 때리는 거니까. 데일리크는 이것과 비교도 안 되는 고통이야. 어린 애가 그 고통을 어떻게 버텨?! 너희한테도 다 먹여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내 돈이 너무 아까워. 내가 볼 때마다 항상 말하잖아. 너희들 너무 기어오른다고.”


얼굴이 핏빛으로 물들어서야, 옆에 있는 시종으로 손이 옮겨갔다. 또다시 규칙적으로 살벌한 소리가 들린다.


“다들 30년 넘게 귀족 가에 몸담고 있었으면 어? 알아서 생각할 줄도 알아야지. 너희가 모시는 주인에 대해서 아는 게 뭐야? 나이는 어디로 처먹었어?”

“죄...죄송합니다....까악!”

“입 닥쳐. 너희 주인은 아르젠이야. 그 이름뿐인 부인이 아니라. 아까 내 멱살 잡은 여자가 아르젠을 모시지 않는 것처럼. 있지, 아르젠은 너희를 참 좋아하고 아끼는데 네놈들은 그에 응하지를 못하네. 제임스 할아버지의 반이라도 해봐, 좀.”


뺨을 때리는 손을 멈추고 머리채를 잡고 몇 번 흔들자 유크테아의 손에 긴 머리카락이 엉켜 나왔다. 기분 나쁜 듯 장갑을 벗어 머리카락의 주인에게 던지고는 식당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너희 잘한 거 하나도 없어. 오죽하면 내가 남의 집까지 와서 이러고 있냐? 너희도 나 5년 가까이 봐서 알잖아.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적 없는 거. 후, 여기서 있던 일 말하면, 저택 내의 일은 비밀로 해야 하는 사용인으로써의 기본적인 것 하나도 못 지킨 벌로, 내가 직접 인생의 종지부를 찍어 줄 거다. 알아들었어? 라비, 여기 치워.”


유크테아는 장갑을 벗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고서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유크테아!”

“아르젠! 밥은 잘 먹었어?”

“넌 식당에서 뭘 한 거야? 뭔데 사란이 나한테 까지 와서 말려달라고 그래?”


아르젠이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유크테아와 만났다. 좀 전에 사란이 유크테아가 식당에서 난동을 부린다고 집무실에 찾아왔을 때, 거짓말인가 싶었다. 사란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까지 유크테아가 저택에서 난동을 부린 적도 없었다.


“내 꼴 엉망인 것도 봐줘.”


단정히 올렸던 머리가 흐트러진 모습, 옷의 목 부분이 심하게 꾸겨져있고, 먹던 고기가 옷에 떨어졌는지 피로 얼룩이 져 있었다. 항상 양손에 가지런히 끼고 있던 장갑의 한쪽은 보이지 않는다.


“넌 또 왜 그런 꼴이야?”

“나는 그 사란이란 여자한테 멱살 잡혀서 내동댕이쳐졌다고.”

“....사란이 좀 폭력적이긴 하지.”

“설마 너한테도 그래?”

“직접 당하지는 않았어. 협박 비슷한 건 받았지만.”


본격적인 난동은 사란이 나가고 부터다.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접시를 치운 거였고, 그 외에는 맞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그걸 난동이라고 표현했다면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인거지. 이제 보니 사란의 아르젠을 대하는 태도도 나쁘다. 아르젠을 안전을 위해서라도, 저택 사용인들의 생각머리부터 바꿀 필요성이 있다고 느끼는 유크테아다.


“맞다! 미안해. 나 접시 하나 깨먹었어. 아직 계승식 때 다친 팔이 아파서 그만.”

“.... 지금도 많이 아프냐?”

“평소에 심하지는 않는데 비가 와서 그런가봐. 접시는 나중에 보상할게.”

“아냐, 괜찮아. 제임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고 와.”


제임스는 식당으로 들어갔고, 유크테아는 할 말이 있다며 아르젠을 데리고 집무실로 올라갔다. 마침 유크테아는 적절한 얘깃거리가 남아있었다. 오기 전에 라흐마가 사오라고 부탁한 것들을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혹시 이거 부탁 좀 할 수 있을까?”

“장신구랑 향수?”

“이야, 인기가 너무 높아서 공작 가에서 구할 수가 없다고 나를 시키지 뭐야. 나도 너한테 이런 부탁하는 거 진짜 염치없는 건데, 우리 엄마가 갖고 싶다고 해가지고.”


작년부터 로 가문과 거래를 하면서, 장신구나 공예품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들여오는 향수도 세공이 잘 된 병에 담겨져 그걸 원하는 귀부인들이 급증해, 만드는 속도가 팔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물량이 항상 부족한 상태였다. 만드는 제품의 일부는 또 8국으로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이거 전부 다 만드는데 시간도 오래 걸려서 바로는 안 나와. 공방에 한 번 말은 해볼게. 기대하지 말고.”

“앗, 고마워! 가격은 몇 배라도 내고 살 게!”

“기대하지 말라니깐. 나 이제 일 할 거니까 알아서 집에 가. 배웅은 안한다.”

“언제는 친절하게 배웅 해줬다고 그래. 난 오늘도 여기서 자고 갈 거야.”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제임스가 보였다. 아까 아르젠이 시킨 일에 대한 보고를 할 거다. 유크테아가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제임스 할아범. 거기 있던 녀석들이 뭐래?”

“.... 별 일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 녀석들을 감싸주고 싶은 건 아니지? 아, 너는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겠구나.”


친절하게 식당에서 해줬던 말을 다시 한 번 말해줬다. 제임스의 수염이 떨린다. 이 반응으로 봐서 아르젠에게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 30년 전에 제임스는 직접 아르젠을 본 사람이니까. 모든 일에서 한발 자국 떨어져,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분명 저택의 녀석들을 방치했을 게 뻔하다.


“아르젠이 착해서 혼자 속상하게 그러고 있으니까, 나라도 나서야 되겠더라고. 이거에 대해 할아범은 어떻게 생각해? 내가 과한 건가?”

“....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답이야. 난 정말 다른 녀석들이 네 반절만큼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어.”


유크테아는 웃으며 제임스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1시간은 충분히 넘었으니 윌슨은 로빈의 앞에 놓여 있을 것이었다. 이제 남은 건 로빈이 어디 있는 지 찾는 것뿐이었다. 그건 간단하게 튤릭을 찾으면 되는 거다.

돈 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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