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텔레패스라고 해도, 진과 찰스의 능력은 결에서 차이가 있었다. 

둘은 서로의 차이점을 흥미롭게 여겼다. 그러니까, 제 능력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해요. 어떻게 얼마나 세세하게 움직이는지, 가끔은 어떤 원리와 본능으로 움직이는 것까지 파악할 수 있어요. 진은 엄지와 검지로 동그란 안경 모양을 만들며 말했다. 그래서 가끔은 그 사람들의 생각이 문장으로 보여요. 어떤 건지 알고는 있지만, 저는 한없이 밀접한 관찰자에 가까울 뿐이죠. 진 그레이의 그 ‘밀접한’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떠올리면, 그리고 그 관찰자는 종종 대상을 움직일 수 있는 인형사의 역할도 수월하게 겸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찰스는 그녀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저도 모르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진은 찰스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의 능력은 진에 비하면 훨씬 좁고 훨씬 깊었다. 진이 말하는 감정의 문장은 찰스에게는 전부 피부였다. 목소리는 안 듣겠다고 해서 안 들리는 게 아니듯. 네가 인형을 움직인다고 하면, 나는 그 인형 탈 안에 들어가서 움직이는 거지. 둘의 대화를 듣던 스콧이 어렵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쨌든 다른 사람을 움직인다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차이는 두 텔레패스에겐 명확했고, 그 점이 찰스보다도 훨씬 어리고 그보다도 불안정한 진이 종종 그를 걱정하게 했지만 찰스는 별다른 내색 없이 웃기만 했다.



언슬랩스틱 블루스



“진,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니.”


찰스는 아랫입술을 살짝 핥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좋은 관찰력을 서늘하게 써먹을 줄 알았다. 오래되어 낡은 샹들리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흔들린다. 떨어지는 먼지를 손끝으로 비비며, 찰스는 인기척이 드문 오래 전 자신의 저택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있었던 싸움을 찰스의 몸이 먼저 기억했다. 얇게 떨리는 팔꿈치를 쥔 찰스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이 훈련이 끝나면 진을 칭찬해야 하겠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포칼립스에게 얻어터지다가 어금니가 나갈 뻔한 바로 그곳에 다시 그를 세워 버리다니. 이건 정말로 너무하다. 다시 말하면 레이븐이 그녀를 잘 가르쳤다는 뜻이겠지만. 

찰스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기억에 고인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마치 살아있는 것만 같다. 그는 이곳을 아주 오랫동안… 생각의 창고로 지정해왔다. 그조차도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들이 불쑥 악몽처럼 나타날지도 모른다. 찰스는 불현듯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서랍을 닫듯 버려둔 기억들이란 주로 어떤 시간에, 정확히는 어떤 사람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찰스.”

“그래… 방금 네 생각을 하고 있었어.”


찰스가 그대로 선 채 눈을 깜빡인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읽지 않아도 알았다. 긴 속눈썹이 덮은 회녹색의 시선은 얼룩덜룩하게 등에 묻어난다. 찰스는 짧게 숨을 참는다. 아무렇게나 뭉쳐 두었지만 결국 버리지 못해 담아둔 것은 고스란히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에릭.”


눈을 깜빡였다 뜨면, 어느 새 그는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찰스는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에릭은 유령처럼 가만히 선 채 찰스를 바라보 았다. 내리 떨어지는 시선. 찰스는 목이 타듯 갈증이 일었다. 이건 정말로 재미없어, 진. 그는 머릿속으로 진에게 문장을 써 넣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진. 그는 소리의 파동을 만들어 흘려보냈다. 닿는 신호는 없다. 그 사이, 에릭 렌셔는 찰스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찰스는 그제야 자신이 서서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그 순간 그의 다리가 툭 꺾인다. 찰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시선은 낮아졌고, 에릭은 드리워진 기다란 그림자처럼 까맣고 아무 말이 없었다. 

진. 이건 아니야. 그만 두자. 그는 자존심을 버려 가며 진에게 애원했고, 그의 애제자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에릭은 찰스를 향해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진. 찰스는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다리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그를 때릴 수는 없잖아. 찰스는 그의 차가운 손끝이 자신의 목에 닿는 순간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분명히 차가운데 닿는 곳마다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진. 찰스는 눈물이 고인 얼굴로 제 목을 조르는 에릭을 올려보았다. 이건 아니야, 진. 그는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훈련을 끝내자… 진.”


에릭 렌셔의 얼굴은 진 그레이로 변하지 않는다. 통제 밖의 것. 따지고 보면 언제나 에릭 렌셔는 그래왔고 놀라울 것도 없었다. 찰스는 목을 감는 기다랗고 창백한 손가락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숨이 막혔다. 괴로움 아래에 깔린 옅은 희열과, 그만큼의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이젠 정말로 숨을 쉴 수 없어, 찰스는 애타게 그 손등을 긁었다. 진, 진… 찰스는 숨구멍이 사라지는 순간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에릭!!!!!’

“교수님!”


그 순간 찰스가 눈을 뜬다. 그와 비슷하게 울린 파열음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높고 째지는 듯한 소리는 저 혼자만 들은 게 아니었는지, 막 시야에 자리 잡은 레이븐도 귀를 틀어막고 있다.


“이게 무슨…” 

“교수님, 괜찮으세요?”


그의 어깨를 쥐고 있는 건 진이었다. 찰스가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제야 똑바로 정신이 들었다. 그는 훈련 중이 아니었다. 그는… 오랜 불면의 밤 끝에 막 잠이 든 참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교수님의 꿈이 너무 강력하고 불안정해서… 저도 깼어요.” 

“진뿐만이 아니야, 찰스.”


레이븐이 땀에 젖은 찰스의 이마를 쓸었다.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말투와는 달리, 레이븐은 찰스를 걱정스럽게 내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열린 방문 틈 사이로 빼꼼하게 눈과 코를 내민 여럿이 보였다. 그제야 핑 돌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는다. 찰스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일제히 산산조각 나버린 창문의 유리조각들을 가리켰다.


“이거 내가 그런 건 아니겠지.” 


진이 손을 저으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건 저예요.”


“텔레패스가 둘이 있으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네.” 

“저, 교수님. 괜찮으세요?”


행크가 어정쩡한 얼굴로 빗자루와 청소도구를 들고 안으로 들어선다. 찰스는 그제야 몸을 느리게 일으켜 헤드에 등을 댔다. 찰스. 레이븐과 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보았다. 행크가 눈짓으로 방 밖을 가리켰다. 아이들이 걱정해요. 그만큼 요란하게 꿈을 꾸었단 말인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찰스는 살짝 이마를 짚으며 남몰래 다시 한숨을 뱉어낸 다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미안해. 내가 요즘… 좀 몸이 안 좋은 것 같네.” 


레이븐은 찰스의 말에 뭐라고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몸조심해.”

“응.”

“그것 말고도.”


그리고는 가볍게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린다. 찰스는 그녀의 말이 내포한 것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을 일으킨 레이븐이 여전히 걱정스러워 보이는 그녀를 달래며 방 밖으로 나섰다. 행크는 잠깐 찰스를 보았지만, 역시 그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찰스는 가만히 숨을 고르며 박살이 나 버린 자신의 모든 창문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의 기억, 정확히는 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그의 모든 것이 살고 있다.


“교수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들어온 아이가 얼른 찰스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온다. 찰스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게 했구나. 미안해. 아이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찰스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찰스가 미소 지었다. 괜찮단다. 아이는 잠깐 그대로 찰스를 살피는가 싶더니, 그의 품에 반쯤 안긴 채로 물었다.


“교수님, 그런데 ‘에릭’이 누구예요?”


그 외침을 모두가 들은 걸까. 찰스는 가만히 아이를 내려보았다. 아이들은 미스틱을 알고, 레이븐을 모른다. 그리고 아이들은 매그니토를 알지만, 에릭은 알지 못한다. 오래되어 낡았지만 버리지 못한 것들. 그 이름들. 그 미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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