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AU에 가까워서 비슷한 내용은 이미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눈을 보며 Love Letter OST를 들으니 쓰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었네요. 




Winter Story 

w.데자와 



종강. 다니엘은 일단 자취방에 들어와 누웠다. 날림으로 지은 대학가 원룸 건물의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얼마전 구입한 온수매트가 경쾌한 전자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매트가 데워질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읏추읏추, 마치 구령처럼 추위를 앓으며 극세사 이불 안으로 파고드는 얼굴에는 이미 졸음이 잔뜩 묻어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곤한 낮잠을 깨운 건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크 소리였다. 초인종이 없는 낡은 원룸의 철문이 쾅쾅 울리는 소리. 다니엘은 눈을 번쩍 떴다. 남서향의 창으로 붉고 긴 노을이 들어오고 있었다. 대체 몇 시간을 잔 거야. 안테나가 삐져나온 뒷머리를 긁으며 옷차림을 확인하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저... 강다니엘씨 집이죠?"

"네, 맞는데... 누구세요?"

"혹시... 박지훈이라고... 기억하세요?"


몹시도 흔한 이름. 다니엘이 다니고 있는 과 내에도 세 학번 위로 박지훈이 있다. 그러나 다니엘이 이름을 듣자마자 떠올린 사람은 과 선배가 아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찬바람이 쌩하니 몰아칠 만큼 추운 복도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차분한 컬러의 코트 차림의 그녀는 꽤나 추웠는지 옅은 화장 아래 파리한 입술이 그대로 내비쳤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거... 지훈이가 다니엘씨한테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녀가 내미는 종이봉투는 가벼웠지만 부피가 좀 있었다. 윗부분을 덮은 비닐 포장을 들어내자 눈에 익은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거..."

"네, 지훈이가 말도 없이 갖고 가버려서 미안하다고도 전해달래요."


목도리였다. 1년 전 다니엘의 여자친구였던 지현이가 직접 떠준. 며칠 두르지도 못하고 잃어버려서 결국 헤어질 때까지 들들 볶여야 했던 바로 그 목도리.


"미안해하고 있으니까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세요." 

"아, 아니에요. 전혀 안 그래요. 사실 이거 준 것도 까먹고 있었고..."


그 말에 중년 여성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다니엘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 또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을 알아차리고 또다시 손을 내저었다.


"아, 준 건 아는데...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어서 괜찮아요."

"죄송해요. 빨리 돌려줘야 한다는 건 애도 알고 있었지만..."

"......"

"그게, 지훈이가 버티는 힘이었어요." 


고작 목도리 하나를 돌려주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무거운 분위기였다. 네? 하고 반문하는 다니엘에게 여성은 옅은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지훈이, 우리 아들이... 다니엘씨 얘기를 많이 했어요. 아시겠지만... 걔는 어릴 때부터 아파서 야외 활동 같은 걸 못했거든요. 그래서... 많이 부러웠었나봐요."

"아......"

"지훈이 내일 수술 들어가는데... 어린 게 뭘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변 정리를 하더라구요. 정리라고 해봤자 몇 개 없지만. 다니엘씨한테 돌려드린 게 그 중 하나구요."

"...수술이요?"

"네. 확률은 낮지만... 일단 해보기로 했어요. 이젠 정말 방법이 없어서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바쁘신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중년 여성 - 지훈의 어머니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구두 소리를 들으며 다니엘은 1년의 시간을 건너 돌아온 목도리를 손 안에 힘주어 잡았다.





수능이 끝난 고3 교실은 오후가 되자마자 적막해진다. 원칙대로라면 수업시간은 다 채우는 게 맞지만 수능이 끝났다고 입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논술 준비다 면접 학원이다, 또는 실기 준비다, 갖가지 학원과 과외들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학교 역시 이러한 현실을 인정했다. 사실상 오전 시간대만 잘 버티면 하교인 것을, 다니엘은 동아리 후배들이 안무 짜는 걸 도와달라고 해서 점심시간부터 강당에 끌려갔다가 제가 더 불이 붙은 까닭에 원래라면 5교시가 시작하고도 훨씬 넘은 시간에 교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 책상 앞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맞닥뜨렸다.


"어? 아직 안 가고 뭐했어?"

"아... 양호실에서 자다가 일어났는데 이 시간이어서..."

"근데 거기 내 책상인데."

"어어, 미안. 잠시 착각했어."


박지훈. 교복에 새겨진 이름 석 자가 단정했다. 단정한 만큼 소리내 부르기에 어딘가 어색한 이름. 그러고 보니 1년 동안 같은 반이면서 대화도 몇 마디 나눠본 적이 없었다. 어울리는 무리가 다르기도 했고 무엇보다 박지훈은 교실에 머무는 시간이 현저히 적었다. 그와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몸이 아파서 학교를 안 나오는 날도 많았고 나온 날도 양호실에 가있기 일쑤였는데 간당간당하게 최소 출석일수를 채워 고3까지 어찌어찌 유급 없이 온 거라 했다.


반면 다니엘은 따지자면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타입이었다. 댄스 동아리 소속에, 쉬는시간이 되면 나가서 뛰놀기 바빴고 심지어 고3이 되고 나서도 1학기까지는 점심 먹고 남는 짜투리 시간에 공부 대신 운동장으로 튀어나가 공을 찼다. 이러니 박지훈과 접점은커녕 마주칠 일도 없는 게 당연했다.


"집에 안 가?"

"아. 갈 거야."

"나와. 문 잠그게." 

"어어." 


박지훈이 책상 위에 있던 노트를 가방에 황급히 집어넣었다. 스프링이 달린 노트는, 일반 노트 사이즈에 비해 조금 컸으나 스케치북보다는 작았다. 이미 문가에 서있는 다니엘을 스치며 박지훈이 복도로 튀어나왔다. 다니엘은 손을 뻗어 교실 벽면의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불이 모두 꺼지자 복도가 한층 어두워졌다. 3학년 교실 층의 마지막 불빛이었나 보다. 창밖을 보자 하늘이 온통 잿빛이었다. 비든 눈이든 곧 쏟아질 것 같았다.


"안 가고 뭐해?"

"넌?"

"난 열쇠 보관함 가는데?"

"아..."


박지훈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그냥 "잘 가" 인사 한마디를 하고 돌아섰다. 다니엘은 똑같이 인사를 돌려주고 중앙 계단을 향해 달렸다. 빨리 반납하고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지현이 학원 가기 전에 만나러 가야했다.


다니엘이 던지듯 열쇠를 반납하고 층계를 달려 내려왔을 때, 출입문 앞에 멍하니 서있는 지훈의 동그란 뒤통수가 보였다.


"뭐야, 왜 아직 안 갔..."

"눈 와."

"어. 많이 오네."


그 몇 분만에 하늘이 터졌는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비와 달리 눈은 그냥 맞고 다니는 편인데, 다니엘은 이상하게 지훈이 신경 쓰였다. 몸이 약하다고 했으니 눈이나 비도 함부로 맞으면 안 되지 않을까.


"우산 없어?"

"...응."

"내꺼 쓸래?"

"그럼 넌?"

"난 안 써도 돼."

"그런 게 어딨어. 우산 주인이 써야지."

"어차피 난 우산이 있어도 안 쓸 거고, 넌 써야 하니까 니가 쓰는 게 낫지."

"그럼..."


같이 쓰자. 지훈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3단 우산이라 다 큰 남자애들 둘이 쓰기엔 좁을 게 분명했지만 그 순간 다니엘은 거절을 하지 못했다. 왜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는 어렵고. 그냥 알겠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가방에 든 우산을 꺼내려 백팩을 앞으로 돌리는데, 퍼렇게 질린 지훈의 입술이 다니엘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패딩 차림의 저에 비해 옷차림이 얇았다. 순한 브라운 컬러의 떡볶이 코트는 꼭 저다운 색상에 저다운 디자인이었지만 요즘처럼 추운 날씨엔 실용성이 떨어졌다. 다니엘은 잠시 망설이다가 제 목에 둘러져 있던 목도리를 풀어 지훈에게 둘러주었다. 아래를 보고 있던 고개가 화들짝 위로 들리며 둥근 눈이 다니엘을 올려보았다.


"안 춥냐. 그렇게 입고. 이거라도 둘러라."

"그럼 넌..."

"난 안 추워. 롱패딩 따뜻하다."

"그래도..."

"아, 안 춥다니까. 괜히 고집 부리다가 아파서 골골거리지 말고."

"...고마워."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 지훈의 귀끝이 피처럼 붉었다. 바람이 차서 그런 걸까. 다니엘은 귀끝까지 파묻어버릴 듯한 기세로 목도리를 친친 동여매 주었다. 원래는 대충 한 번 감아서 늘어뜨리던 목도리를, 끝이 얼마 남지 않을 만큼 둘둘둘. 털 목도리에 둘러싸여 눈만 내놓고 사라진 얼굴이 양순하게 웃었다. 살짝 치켜올라간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다니엘은 괜히 멋쩍어서 투덜투덜 우산을 찾았다. 아 어딨지. 여기 넣어놨는데. 바닥에 처박혔나... 


"다니엘 넌 대학 어디 가고 싶어?"

"나? 난 H대. 너는?"

"난... 뭐, 아무데나." 

"그게 뭐야. 그래도 가고 싶은 데는 있을 거 아냐." 

"음... 나도 H대."

"오, 같이 합격하면 좋겠다."

"그러게..."


교문을 향하는 길이 눈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삼단 우산을 지훈 쪽으로 더 기울였다. 이미 반쯤 드러나 있던 왼쪽 어깨에는 눈이 시나브로 쌓이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지훈이 우산 손잡이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으나 다니엘은 손잡이를 단단히 고쳐잡으며 지훈의 손을 밀어냈다. 스친 손등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잠시 놀란 다니엘이 지훈의 반대쪽 어깨를 잡아 안쪽으로 이끌었다.


"야, 니가 우산 들면 내 고개 꺾인다. 그냥 가만히 있어."

"뭐, 몇 센티 차이 난다고."

"10센티? 맞나? 그 정도 나는 것 같은데?"

"아냐. 10센티는 무슨. 7센티."

"흠..."

"뭐야. 못 믿는 거야? 나 173이야."

"그래그래. 믿어줄게. 근데 7센티 차이여도 우산은 내가 드는 게 낫겠다."

"너 눈 다 맞잖아." 

"알면 안쪽으로 좀 땡겨오고."


그제서야 비로소 안쪽으로 당겨져 오는 지훈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프다고 들었는데 타고난 골격은 좋은 건지 어깨가 제법 넓은 편이었다. 다니엘은 지훈의 몸을 포개듯 제 가슴 앞으로 끌어 당기며 오른쪽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 생각보다 뼈대 좋다. 되게 작은 줄 알았는데."

"...그럼 뭐해. 10센티나 차이 나는데."

"뭐래. 그거 가지고 삐졌어?"

"삐지긴..."

"아냐아냐, 내가 농담한 거야. 그리고 골격이 좋으면 스무살 넘어서도 큰댔어. 희망을 가져."

"정말?"

"어, 우리 사촌 형 군대 가서 키 커왔어. 3센티나."

"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잘 먹고 스트레칭 자주 해주고. 옷도 따뜻하게 입고 다니고."


마지막 건 뭐야. 지훈이 빨갛게 언 손으로 입쪽을 가리며 웃었다. 떨어지던 눈꽃이 입김에 밀려 바깥 쪽으로 나부꼈다. 팔랑대는 긴 속눈썹. 목도리에 파묻힌 상태에서도 또렷하게 떨어지는 콧대. 가슴께를 간지르는 뾰족한 어깨의 촉감. 무언가 현실 같지 않은 느낌에, 다니엘이 헛기침을 하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색 우산의 천장이 보였다.


"나는 길 건너서 버스 타야 되는데. 넌?"

"난 여기. 바로 앞에서."

"그래. 그럼 내일 보자."


다니엘은 망설임 없이 우산을 내밀었다. 지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목도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니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아냐. 이거 그냥 니가 하고 가. 나는 하나도 안 추워. 


목도리를 푸는 사람과 막는 사람의 실랑이가 이어지고 결국은 다니엘이 이겼다. 고작 그걸로 숨이 급해진 지훈이 다니엘의 손을 막다가 역으로 손 전체를 잡히고 말았다. 뭐야, 손도 쪼그맣네. 다니엘은 제 손아귀에 다 들어오는 작은 주먹을 아래로 내려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지훈의 볼이 확 붉어졌다. 실랑이를 벌이느라 풀어진 목도리를 다시 단단하게 여며주고. 우산까지 억지로 쥐어주며 다니엘이 말했다.


"사실 나는 목도리 같은 거 잘 하고 다니는 편도 아니니까. 나 신경쓰지 말고 따뜻하게 하고 가."

"...고마워, 정말."

"뭐 이런 걸 갖고. 정 고마우면 다음에 밥이나 한 끼 사든가."

"응. 꼭 살게. 고마워." 


마침 신호등이 바뀌었다. 다니엘은 정류장 앞에 선 지훈에게 손을 흔들며 횡단보도를 향해 뛰어갔다. 그새 소복히 쌓인 눈이 운동화 아래에서 설탕처럼 부서졌다. 길을 건넌 후 돌아본 정류장에는 지훈이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온통 하얀 세상 속에 하늘색 우산을 들고, 분홍색 목도리를 두른 채. 눈발이 거세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훈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다니엘 역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도착한 버스를 향해 달렸다. 버스에 타서 자리를 찾아 앉았을 때 지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벌써 타고 갔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다니엘은 금세 지훈을 잊고 이어폰을 꼈다. 선곡을 하느라 꺼낸 폰에는 지현으로부터 수십 통의 메시지가 날아와 있었다.



그날 이후 지훈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기에 모두가 그러려니 했다. 비단 지훈뿐만 아니라 몸이 멀쩡한 아이들도 실기가 급하다며 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출결이 흐지부지 되는 사이 방학을 맞이했다. 다니엘은 H대 면접을 보았고 합격을 했으며 지현과 헤어졌다. 이별 사유는 복합적이었다. 일단 대학 합불이 갈렸고 전부터 자잘하게 쌓인 갈등이 터졌으며 다니엘에게는 더이상 지현의 짜증을 견뎌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툼의 이유 중에는 다니엘이 잃어버렸다는 목도리도 있었다.


눈이 미친듯이 내렸던 그 다음날, 다니엘의 책상 위에는 삼단 우산이 곱게 접힌 채 놓여있었다. 그러나 목도리와 지훈이 행방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방학이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식 날에도 지훈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둘의 접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니엘에겐 지훈의 번호가 없었으며 지훈은 반톡에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물론 지훈과 상대적으로 친한 편이었던 무리에게 연락처를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헤어진 여자친구에게서 받은 목도리. 그거 하나 받겠다고 친하지도 않았던 반 친구에게 전화를 하자니 어색했고, 또 바빴다. 입학식 전부터 시작된 오티와 환영회, 술자리들이 1학기 내내 줄을 이었고 더군다나 다니엘처럼 훈훈한 핵인싸를 선후배 동기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다니엘의 머릿속에서 박지훈은 잊혀졌다. 오늘 뜻밖의 방문객을 맞이할 때까지.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며 봉투 속을 헤집었다. 목도리 외에도 다른 게 만져졌다. 납작하고 얇은 종이의 뭉치. 돌돌 말린 금속의 감각. 다니엘은 1년 전 보았던 어떤 물건을 떠올렸다.


"...이건..."


크래프트 표지의 드로잉북은 한 사람으로 가득했다. 다니엘은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익숙한 얼굴에 익숙한 덩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페이지가 다니엘, 자신이었으니까.


책상에 앉아 졸고 있는 모습. 어딘가로 달려가는 모습. 춤을 추는 모습. 체육시간, 공을 차고 있는 모습. 복도에서 벌을 서고 있는 모습까지.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냥 서투르지만은 않은 솜씨로 그려진 고등학생 다니엘이 한 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여느 체육시간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몰다가 골이 터졌다. 똑같이 땀투성이인 친구들과 부둥켜 안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문득 시선이 느껴져 돌아본 방향에 박지훈이 있었다.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무언가를 급히 품에 숨기던. 땀냄새는커녕 섬유유연제의 향이 그대로 나는 체육복을 입고 스탠드에 앉아 있던 박지훈.


다니엘은 멍하니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아.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렀다. 유일하게 다니엘 외의 사람이 그려진 페이지였다. 쏟아지는 눈속에서 함께 우산을 쓰고 걷는 두 사람. 눈가를 접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제 옆으로 눈만 빼꼼 내민 채 목도리에 파묻혀 있는 이는, 자세히 그려지지 않았어도 박지훈. 그날의 박지훈이었다.


들고 있던 책을 툭 떨어뜨린 다니엘이 황급히 신발을 신었다. 맨발에 슬리퍼를 꿰차고 현관문을 열자 칼바람이 몰아쳤다. 아우터도 없이 달려나간 복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원룸 계단을 정신없이 돌아 내려가며 아까의 방문객을 찾는 다니엘에게서 하얀 입김이 흘렀다. 



트위터 @tejava_mil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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