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간만에 구독하는 블로그나 확인하자는 생각에 네이버 로그인을 했는데, 메인에 뜬 정신의학신문 기사를 읽고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길게 포스팅한다. 바로 자아존중감(self-esteem)에 대해서다.

자존감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난 자존감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성장한 청소년기에는 자존감이라는 개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대중매체에 의해 이렇게까지 주목받지도 않았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자존감이란 위와 같은 정의를 가지고 있는데,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 포스팅에서는 내가 그냥 내 마음대로 재정의하려고 한다.


1.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라고 믿는 마음

사인(私人)으로서 우리 대부분은 무관계하다. 그 상대가 내게 있어 조금 더 특별하다면, 가령 가족이나 친구 내지 연인, 혹은 같은 조직의 구성원이라면, 어떤 의미를 더 부여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부모에게 나는 그들의 노력에 대한 결실이므로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친구나 연인에게 나는 같은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는 특별한 인간이므로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속한 조직에서 내가 수행하는 일은 대개 공동체를 위하는 것이므로, 이익을 공유하는 다른 구성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나열한 상태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모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부모에게 자식인 내가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면 나는 사랑받지 않을 수 있다. 친구나 연인과 같은 경험 내지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나는 사랑받지 않을 수 있다. 조직에서 내가 하는 일이 무쓸모하거나 다른 구성원들에게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나는 사랑받지 않을 수 있다. 모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들은 내가 어떤 조건을 충족하는지 충족하지 않는지에 따라 나를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조건은 잔인하리만치 실질적이고 외부적이다. 즉,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생각이나 내 실존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사실 무엇보다 잔인한 세상의 진실은, 설령 내가 모든 조건을 충족하더라도 다양한 요인에 의해 나는 사랑받지 않을 수 있고, 그 모든 가능성을 뚫고 사랑받더라도 그 사랑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외부적인 힘이 내 자아와 무슨 관계가 있겠나. 그래서 저 정의는 이렇게 바뀌어야 마땅하다.

1.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라고 믿는 마음

여기서 ‘사랑’이라는 개념도 아주 모호한데,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사랑이 타인과 나누는 사랑과 다른 것임은 분명하잖나. 그래서 용어를 변경한다.

1.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사랑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라고 믿는 마음

결국 자존감은 철저히 자기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개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 스스로를 객관화할 능력이 있는, 지성을 갖춘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상태가 X같다고 생각되면 도저히 자존감이 생기려고 해야 생길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X같은 타인을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다만 여기서 X같다는 건 철저히 주관적인 판단이다. 대외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고 남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에도 자존감이 낮다면, 즉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다면,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주관적인 기준이 내 안에 있고,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자존감을 좌우할 정도로 강력하기에, 자아정체성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지향하는 인간상이나 트라우마 등등.

그러면 자존감의 두 번째 정의를 다시 세울 수 있다.

2. 자신이 (주관적 기준에 부합하는)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

이제 자존감의 전체 정의를 다시 세워 보자.

자존감은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자신의 주관적 기준에 부합하는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바꾼 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을 꼽으면 ‘자신의 주관적 기준’이다. 어떤 기준이 그 자신이나 사회에 바람직한지를 떠나, 그것은 개인의 자아정체성과 연결된 내밀한 기준이기에 반드시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는 않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 기준이 아주 비상식적이거나 비현실적이어서 자신 혹은 타인을 파괴한다면 문제가 될 뿐이다. 타인을 파괴하는 경우는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기에 차치하고, 한번 전자를 살펴볼까.

예컨대 어떤 사람이 ‘왜 나는 염소가 아닐까’ 하면서 머리에 뿔을 꽂고 풀을 뜯으면, 내게 그건 생각할 일말의 가치도 없는 등신 같은 자해행위다. 하지만 그 자해가 그 개인에게 무의미하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나. 내 가치 체계하에서 그건 등신 뻘짓이고 누구도 이 생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유의미하고 궁극적인 자기표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가 자유롭게 자아를 실현할 권리를 침해하지 않을 것이고, 그 역시 내가 그것을 등신 같은 자해행위라고 판단하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추구해야 마땅한 사회적 덕성은 배려와 정직함이다. 또한 어떤 개인이 비상식적인 가치관에 기반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는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 모든 구성원들이 그러한 행위를 용인한다면 사회적 조직이 다시 개인적 차원의 덕성을 발전시키는 루프가 약화될 것이므로, 모두 그를 말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면 존나 쳐맞는다는 걸 기억해 두자. 각자도생하기에도 벅찬 세상이다.)


나는 흔히 자존감을 이야기할 때 함께 나오는 ‘Yes you can!’이나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같은 말을 싫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저런 무책임한 경구에 경기를 일으켰던 걸 보면 떡잎부터 존나 삐딱했구나 싶지만, 성격이 부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싫어하는 거다. 후자 부류의 말을 왜 싫어하는지는 충분히 상술했으니, 이제 전자 부류의 말을 왜 싫어하는지 쓰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재 내 능력에 의해 정해진다. RPG 게임에서 스텟이 낮으면 높은 티어 장비를 착용할 수 없거나 특정 장소에 들어갈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당장 나보고 대통령 자리에 앉으라거나 외과 수술을 집도하라고 말하면 당연히 못한다고 대답할 거다. 거창한 예를 들었지만, 당장 내 생활과 관련된 예를 들더라도 내가 할 수 없다는 게 명확하다면 못한다고 할 거다. 이건 내 자존감이 높고 낮음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문제는 내 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는 것인데, 그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게 경험이다. 아무런 가이드라인도 없고 UI도 없는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필드에 보이는 몬스터를 무턱대고 때릴 수 있을까? 남들이 한 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던전에 들어갈 수 있을까? 다치거나 죽었을 때 어떤 패널티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러냐. 당연히 경험이 더 많은 사람 이야기를 듣거나 가만히 지켜보겠지.

물론 그 사람이 내게 하는 말이 진실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보장하지 못한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은 거짓말일 수도 있고, 거짓말은 아니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사실이긴 하지만 아주 단편적인 사실이라서 다른 사람의 말을 더 들어봐야 할 수도 있고, 사실이지만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건 내 판단이다. 나는 이 사람의 말에 어느 정도의 무게를 부여할 것인가? 하지만 이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경험이 요구된다.

결국 경험이 쌓이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쉽게 판단하지 못한다. 그래서 뭘 모를 때는 처절하게 넘어지거나 잔인하게 뜯어먹히는 등 온갖 생고생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의 통찰력이나 직관이 아주 뛰어나다면 초기의 시행착오가 현저히 줄어들겠지만, 그 능력조차 깨달을 계기가 없으면 구석에 처박혀 썩어갈 뿐이다.

그렇게 한 분야에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고 나면 조금씩 내 판단에 자신감이 붙는다. 내 능력으로는 저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고, 비슷한 두어명만 더 있으면 저 던전에도 들어갈 수 있고, 저 몬스터는 세 마리쯤 모여도 가볍게 처치할 수 있고, 저 몬스터는 피해서 가야 하고, 옆에서 지껄이는 이 새끼는 순 허풍만 치는 거짓말쟁이고, 기타 등등. 게임으로 예를 들었지만 인생도 마찬가지다. 원래 게임은 인생의 조악한 복사본 아닌가.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인생은 철저히 실전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한한 삶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지뿐이다. 아무리 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것은 끊임없이 튀어나오고, 조심스레 내린 예측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빗나가며, 다른 분야에서는 걸음마도 떼지 못한 어린아이나 다름없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많은 이들이 확실성이 보장된 RPG 게임에 몰두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조악한 게임에서 쌓는 경험에서조차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내 욕망이다. 스팀에서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인, 아주 못 만든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시간 낭비다’ ‘지루하다’ 부터 시작해, 조금 발전하면 ‘이게 개선되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개발진은 무슨 생각에서 이렇게 만들었을까’ 등 온갖 생각이 다 들 것이다. 이 생각의 근원은 딱 하나다. 알든 모르든, 우리에게는 그 게임에서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이 분명히 존재했고, 불만족스러운 이유는 그 욕망이 충분히 만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으로 확장해도 같은 이야기다. 인간에게는 삶에서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 내지 지향점이 내재하며, 이것은 경험을 통해 파악된다. 요람에 누워 있을 때는 모빌에 손이 닿는 게 유일한 욕망이지만, 걷기 시작하면 조금씩 다른 욕구를 깨닫는 이치와 같다. 이것은 점차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로 발전한다. 그리고 처음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지향점을 깨닫고 나면, 이후 인간은 스스로 경험을 선택한다. 삶은 이때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향점이 바로 자존감의 ‘주관적 기준’이다. 즉, 자존감은 ‘내가 삶에서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를 실현할 능력이 내게 있다고 믿는’ 마음이며, 경험을 통해 깨닫고 단련된다.

자존감은 자신이 삶에서 실현하려는 가치를 실현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마음이다.


길게 썼지만 한 문장으로 말하면, 뭘 모를 땐 자존감이 아예 없거나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 아직 부족하다는 게 내 솔직한 대답이다. 내가 삶에서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는 자립인데, 내가 정한 기준을 충족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여행 제외 탈조선 경험이 아직 없어서 ‘타국에 어떻게든 악착같이 적응한 뒤 혼자 잘 벌어먹고 살면서 나만의 성을 구축할 능력’이 내게 있는지 모르겠다. 경험이 쌓여야 가늠이 될 텐데 아직까진 판단이 안 서서 보류.

그래서 자립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는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진다. 반대로 대학 모 후배는 성적이 나쁘게 나올 때 힘들어하고, 미대에 다니는 모 친구는 교수평가가 안 좋으면 힘들어하던데 그건 그들의 자존감 기준이 각각 공부와 그림에 있어서가 아닐까. 난 까짓 성적 좀 나쁘게 나오거나 그림이 좆같이 그려져도 우울하거나 힘들진 않거든. 이렇게 사람마다 다른 게 자존감이다. 그래서 인생에는 훈수를 둘 수가 없고 평가도 별 의미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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