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입술이 참 부지런하지

"너를 위해 노래해 줄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

누구나 누군가 필요한 건데

My Beloved valentine

 





 

 하얗게 입김이 뿜어져 올랐다. 올해 여름이 몇 번의 태풍을 제외하면 이상할 정도로 싱겁게 지나서일까. 가을을 쫓아내듯 득달같이 달려온 겨울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매섭게 다가왔다.


 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뺨이 시렸다. 창문을 열어 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하얗게 뿜어 올라가는 입김의 자국에 가슴이 아렸다. 덧없이 부서지는 것과 같은 수증기. 그리고 그 수증기보다도 못한 이 처량한 신세를, 어디에 한탄해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 속이 갑갑해서 터질 것 같았다. 속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그녀는 허공을 향해 검을 내리 쳤다.


 “하앗—!”


 뜨거운 입김이 차가운 공기에 부딪쳐 부서져 내리고, 내지른 소리는 아쉽게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정신을 모아 기합을 내질렀다. 적막한 실내를 그녀의 뜨겁게 달아오른 목소리가 가득 채운다. 다시 한 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허공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공기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매섭게 울렸다.

연습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체의 덩어리마저 베어 낼 것 같은 중압감으로 검을 내질렀던 소녀는 보이지 않는 적과 마주한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자세를 유지했다. 곧게 뻗은 검신의 끝이 날카롭다. 죽도라고는 상상되지 않을 만큼 날카롭게 갈린 눈빛이 찌릿찌릿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마치, 광택이 나는 죽도의 끝에 진짜 날이라도 서 있는 것처럼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검을 내려놓았다. 목각을 깎아 만든 매끄럽고 긴 검의 첨단이 천천히 땅으로 향했다. 그에 맞추어 긴장된 공기도 서서히 숨통을 틔웠다. 그녀는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도장 한쪽에 비스듬히 서 있는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못마땅하게 곁눈질 했다.


 “디어뮈드, 오늘은 상대를 해 주지 않을 생각이라면 돌아가라. 연습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그녀의 자르는 듯 한 발언에, 비스듬하게 서 있던 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심코 뒤를 돌아보게 만들 정도의 미형인 청년은, 눈 밑에 독특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돋보이게 만든다고 할까. 그녀의 날카로운 말에 상처 입은 청년은 한숨을 푸욱 쉬더니, 근처에 걸려있던 연습용 검을 아무렇게나 꺼내들었다.


손목을 풀어 보는 듯 몇 번 공중에 휘두르는 폼이, 그녀의 연습상대가 되어 줄 요량인 것 같았다. 그 흐르듯 한 모든 행동을 바라보던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필시 그가 그녀의 요구에 맞추어 움직이는 태도에 다시금 기분이 상한 것이리라.


자신의 요구대로 그가 죽도를 꺼내 들고 자세를 잡았음에도, 그녀는 대련자세를 취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번에는, 그가 의아해 할 차례였다. 도대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그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왜 그래, 아르토리아.”

 “대충 할 생각이라면 필요 없다, 디어뮈드. 내가 걱정하게 만든 것 같군.”


 딱딱한 목소리.


 달래려던 것이 오히려 화를 돋웠다. 그는 그녀의 말에 난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기야,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른 아침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타나 땀이 비가 오듯 할 때 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던 그녀였다. 무슨 이유냐고 물어보아도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제 일에만 골몰했다. 후배들은 그녀의 서슬에 말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렇게 해가 다 넘어 갈 때 까지 하루 종일 검만 휘둘렀으니. 친구로서 걱정되지 않았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는 그녀가 무언가 설명 해 주길 기대하고 검 끝으로 애먼 바닥을 쑤시며 조용히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조용히 검을 내려놓았다. 그가 이 시간까지 텅 비어버린 연습실에 남아 있던 이유는 자신 때문 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돌아가는 것으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이것저것, 시시콜콜하게 설명 하는 일은 껄끄럽다.


 그다지 심각한 이유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녀가 누군가를 붙잡고 징징대는 성격 또한 아니었다. 조금 더 마음이 풀릴 때 까지 몸을 움직이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 마음 착한 친구가,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때 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이만 돌아가자, 디어뮈드.”

 “아니야, 난 이제 가 봐야 되거든. 약속이 있어서.”


 조금은, 그녀가 강한 척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난처하게 웃은 그는 정중하게 그녀와의 하교를 거절했다. 약속이 있구나. 제 멍한 표정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그는 잠깐 시간을 때웠을 뿐이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그녀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예의바르고, 청렴하고, 강직한 그의 친구. 하지만 그의 사생활까지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는 예의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야말로, 너무 무리하지 말도록 해. 힘들면, 내가 있다는 것 잊지 말고.”


 그녀는 그저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보였다. 지금도, 충분히, 위로받고 있다. 대체 이 이상 뭘 어떻게 위로받아야 만하는 걸까. 정말로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면 기분이 나아질까. 하지만, 그에게 털어놓을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와 어색하게 인사하고,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상냥하게 미소 지어 보인 그는 먼저 도장을 나섰다. 약속이 있다는 건, 거짓말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그의 배려였던 어찌되었든 간에, 그녀는 그와 헤어져 도복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섰다.


 그녀가 3년동안 사용한 익숙한 검도부의 탈의실은 여전히 비좁았다. 그래도 여성 부원이 거의 없기 때문에, 6개뿐인 캐비닛도 제법 넉넉하게 사용 할 수 있었다. 삐그덕거리는 자신의 캐비닛 앞에 선 그녀는 잠시 한숨을 쉬고, 가방에서 스포츠 타월을 꺼내 익숙하게 땀을 닦았다.


 아침에 빨아온 수건에서는 보송보송한 냄새가 났다. 햇볕에 잘 말린, 따뜻한 냄새가.


 그녀는 익숙한 수건의 가장자리에 얼굴을 묻고, 익숙하지만 지겨운 아버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수건을 꺼내러 1층에 내려갔을 때 마주한 아버지의 목소리. 차갑고, 냉랭한. 언제나처럼 최소한의 목적으로 자신을 부르던 아버지.


 등이 딱딱하게 수축하고, 기분 나쁜 예감을 받았을 때 바로 피해버렸어야 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며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입이 마르고 갈증이 났다. 새벽같이 걸음을 옮기는 자신의 발끝에 달라붙은 아버지의 목소리는, 애석하게도 하루 종일 지워지지 않았다.

 

‘네 녀석이 펜드레건의 피를 이은 아이라니!’


  대학교 3학년, 이력서와 커리어엔 도움이 되지 않은 검도부.


 자신의 뒤통수에 따라붙은 비꼬는 소리에 몸을 피했어야 했다. 그 자리에서 멍하게 멈추어 선 것은, 그녀가 금메달을 딴 게 고작 일주일 전의 일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 아마추어동아리 연합회가 주최한 대회에서 트로피를 따왔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그녀에게 검도는 거의 삶의 일부와 같아서, 취미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도장에서 호흡을 고르고, 하루의 마무리를 함께한다. 그럼에도 절대 아버지의 눈 밖에 날 만큼 검을 휘둘렀던 적은 없다고 맹세 할 수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나가던 도장도,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눈물을 머금고 끊어버리지 않았던가.


 대학에 올라온 그녀는 더 이를 악물어야 했다. 제가 진학한 학과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아버지였다. 그놈의 칼 나부랭이 때문이지. 아버지의 힐난에, 그녀는 학점에도 관리를 소홀이 할 수 없었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너라. 내가 납득 할 만큼.’


 이를 악물고, 하이스쿨을 다니던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면서 점점 더, 검에 매달리게 되었다. 처음에 검을 들었던 이유는 결코 자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검도는, 그녀의 마음을 수양하는 행위임과 동시에 스트레스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지긋지긋하게 숨 막히는 집으로부터, 지겨운 아버지로부터.


 수건에서 얼굴을 떼어낸 그녀는 까만 도복을 벗어, 반듯하게 접었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각을 맞추어 접은 도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새까만 도복은 오래 입어서인지 목둘레가 닳아 있었다. 자신의 손때가 까맣게 뭍은 옷. 이 옷을 입고, 몇 개의 메달을 따왔었더라.


 고개를 붕붕, 저은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것들을 스포츠 백안에 얌전히 갈무리 해 넣었다. 눈가가 시큰해 진 것 같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땀에 흠뻑 젖은 두툼한 천은 빳빳하고, 또 찝찝했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가방에 밀어 넣었다.


 ‘이 쓸모없는 녀석.’


 오늘 아침, 수건과 도복을 챙기며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한 두 번 들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오늘 따라 가슴에 깊이 박힌 목소리가 떠나가지 않았다. 너는 펜드레건의 후계자다. 한 번도 원해 본 적 없었던, 그 자리가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후계자라는 녀석이, 라는 말로 시작되는 관심이라는 이름의 질책은 그녀의 마음에 시퍼런 멍 자국만 남겨놓고 있었다.


 매일 자신을 보며 혀를 차는 아버지, 자신이 태어나는 바람에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눈에 독을 품고 바라보는 이복누이와, 자신을 낳았다고 하나 벌레처럼 바라보는 어머니.


 그 틈바구니에서, 숨을 쉬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다.


 아랫입술을 사려 물었다. 바짝 마른 입술이 까끌 거렸다. 어쩌다 실수라도 하는 날,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참아내기 힘든 모욕을 겪어야만 했었던 어린 시절과 지금은 조금도 나아진 게 없었다.


 그녀는 이 집에 들어온 이후부터, 어째서인지 이유도 모르며 그저 노력했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희망만을 가슴에 품고 언젠가는 돌아 봐 주시리라 믿으며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펜드레건’가의 후계자로서는 당연한 일.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노력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의 실수를 힐책 할 뿐.


 열네 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안간힘을 다했다. 그저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 나이의 어린아이라고는 상상 할 수도 없을 만큼 철저하고 반듯하게 생활했다. 친구들과 놀러가고 싶고, 군것질이나 오락에 손을 대고 싶어도 꾹 참았다. 안간힘을 다해서, 그저 인정받기 위해.


 그러나 노력에는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에 멈춰서버렸다. 아무리 애쓰고 발버둥 쳐 봐야 소용없었다. 돌아올 대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노력의 대가가 돌아오길 바라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빌어먹을 현실에, 잘근잘근 씹은 입술 사이로 비릿한 냄새가 툭, 터져 올랐다. 입술이 찢어졌다. 하지만 그런 자잘한 일에 신경 써 준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피가 날 때 으레 하듯이 손등으로 쓱, 문질러 닦았다. 그녀가 ‘실수’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은 ‘실패’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럴 때에는 언제나 혹독한 대가가 따랐다.


 “검도 따윈 그만 두거라. 이제부터 공부에 전념하도록 해.”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손등에 말라붙은, 한줄기 핏자국이 서러웠다. 그녀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꾹꾹 누르며, 캐비닛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삼년 동안, 그래도 정이 많이 들었던 곳이다. 1학 년 때에는 두 사람이 같이 사용했고, 동아리 대표 팀으로 선출 된 2학년에는 혼자서 하나의 캐비닛을 사용 할 수 있었다. 3학년에는, 전국 대학 동아리 회전에서 주장으로 팀을 이끌 만큼 충실하게 지켜왔던 그녀만의 자리였다.


 아버지의 한 마디로, 간단하게 무너질 만한 자신의 위치.


 그녀는 눈물이 쏟아 질 것 같은 뻑뻑한 안구를 비비적거리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기 위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간단한 실수였다. 정말로 간단해서, 자신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자그마한 실수. 고작 그 정도의 일에, 아버지께서 이런 결단을 내릴 거라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일이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는 사실에 화날 뿐이라며, 그녀는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정말로,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답답한 마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저, 순간의 감성적인 상념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내일이면 자신은 또 다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루를 보낼 것이다. 아버지의 앞에서 가계의 일에 대한 설명이라는 이름의 질타와, 막중한 책임에 대한 격려라는 이름의 부담감을 잔뜩 떠안고서.


 쿵, 하고 거친 소리가 작은 방을 울렸다. 캐비닛 박스들이 끼그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자신이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렸음을 깨닫고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철판으로 만들어진 캐비닛의 한쪽이 찌그러져 있었다. 물건을 훼손 해 봐야, 답답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차가운 캐비닛에 등을 기댔다.


 적어도, 단 한 번이라도—


 등에 닿는 이 차가운 감각이 낯설었다. 자신은 ‘살아가고’있는 것이 맞을까. 언젠가 천천히 말라버리기 위해, 그저 하루하루 살아 갈 뿐인 것은 아닌가. 그녀는 주먹을 꾹 쥐었다면. 그렇다면 이 지긋지긋한 삶을 이만 끝내고 싶었다.


 혹은, 지우개로 싹 밀어버린다거나.

 

*      *      *

 

 그녀가 스포츠 백을 다 챙겨 들은 것은 한참 후였다. 땀에 젖은 몸도, 눈물자국이 말라붙은 얼굴도 찝찝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샤워를 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밖은 이제 완연히 겨울에 접어들어 차가운 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덜 마른 머리카락으로 밖에 나섰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딱 좋았다.


 그렇다면, 그냥 집에 가서 샤워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그녀는 왼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시끄럽게 울리는 낡은 탈의실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납덩어리를 매단 것 마냥 무거운 발이 도저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텅 비어있는 부실의 모습이 그녀의 발걸음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애써 3년간의 추억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멨다.


 오늘 따라 동아리 후배나 선배들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한 없이 기쁘면서도, 울적했다. 그래, 어차피 그들의 얼굴을 보면 걸음을 떼기 더 힘들 뿐이다. 그녀는 곱게 퇴부서를 접어 도장 한쪽에 마련된 회의용 테이블에 잘 올려놓은 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넓은 공간이었나.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부실의 풍경이, 색다른 감상으로 성큼 다가왔다. 몇 없는 부원이지만 그나마도 없어서일까. 더 휑해 보이는 부실의 크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바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혹여 무릎이 다칠까 연습하다 사고가 나진 않을까 학교에 건의하고 건의해서 깔았다는 낡아 떨어진 반들반들 한 나무 바닥. 벽 멱을 따라 주르륵 걸려 있는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의 죽도들. 하나하나 추억이 서려 있지 않은 물건이 없기에, 그녀의 가슴이 다시 한 번 저릿해온다.


 “…고 싶지 않아.”


 너무나 미약해서, 실 날 같은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거짓말처럼 텅 빈 연습실 안에 화려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황금색, 붉은색, 하얀색, 그리고 더 이상 눈조차 뜨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해진 불빛이 시야를 점멸하는 순간—


 “?!”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어떻게 되어 버렸던가, 아니면 자신의 머리가 이상해 진 게 틀림없다고. 그녀는 연습실 한 가운데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나를 불러 낸 건가.”


 풍부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 * * 


 갑작스러운 일에 놀랐기 때문일까. 그녀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지만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부드럽고 말랑해 보이는 붉은 입술을 열어, 그가 꺼낸 목소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릴 정도의 미성.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를 가려 줄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가 풍부한 울림으로 다시 한 번 그녀의 고막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이런, 완전히 애송이로군. 어떻게 나를 불러 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겠지.”


  그는 성큼, 그녀에게 한 걸음을 떼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의 그린 듯한 짙은 눈썹이 불쾌한 듯 날을 세웠다. 그녀는 그의 짜증내는 표정 하나까지도 아름답다는 사실에 놀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어떻게 여기에…?”


 문은 분명히 자신이 등지고 서 있다. 연습실은 여자와 남자, 각각의 락커로 향하는 문이 두 개 있지만 상당히 낡은 문들은 열고 닫힐 때마다 듣기 싫은 비명을 토했었다. 게다가 오늘 부실에 남아서 연습하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허공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연습실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녀가 계속 지켜보고 있던 연습실의.


 “뭘 그렇게 모르겠다는 듯이 물어보느냐. 보이는 대로, 신이지 않느냐. 네 녀석이 불러낸.”


 그는 짜증스럽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완벽한 동작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남자는 정말, 꼴사납게 두근대는 자신이 우스울 정도로 너무나 완벽하게 생겼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말을 되풀이 했다.


 “…신?”

 “그래. 네 녀석이 불러 낸, 이차원의 신이라는 얘기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고, 가늠하듯 그녀를 훑어보았다. 굉장히 노골적이고, 기분 나쁜 시선이었으나 마주한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타오르는 황금색의 머리카락은, 가마에 넣어 금방 녹여 낸 황금처럼 순수하고 화려하게 빛이 났다. 자신도 금발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황금색으로 빛나는 머리를 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그 금발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반쯤 덮고 있는 눈동자가 순수한 붉은색이라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사람의 눈이, 저런 색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를 하나하나 벗겨내듯이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은, 확실히 렌즈나 인공적인 조작을 가미하지 않은 자연적인 선명한 빨강.


“뭐, 소환 주문은 확실 한 것 같고. 인장은…, 천천히 새겨도 괜찮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을 훑어보던 눈이 만족스럽게 휘었다. 무엇이 그의 마음에 흡족한 걸까. 알 수 없었지만 그다지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한껏 구겨진 것과는 상관없이, 그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주인은 늙은 노친네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드는군.”


 전부 다 알았다는 듯, 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끄러운 그의 움직임을 따라 목에 걸린 수많은 가느다란 줄들이 한꺼번에 찰랑거렸다. 가죽과 철사, 그리고 황금인 것이 분명한 수많은 장식들. 평범한 백열등 아래서도 무수히 반짝거리는 빛을 뿜어내는 생생한 존재감. 그의 외모 또한 범상치 않지만 옷차림, 아니, 차라리 의상이라고 부르는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에 그녀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녀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이 모든 것들이 그가 땅에서 솟아났다는 사실을 절실히 피력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찬찬히, 정신이 들길 바라면서 그를 관찰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가 헛됨을 증명하듯, 그를 보면 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도저히 현대인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차림새. 그의 허리에 가볍게 두른, 뚜렷한 선을 따라 걸쳐지다시피 한 붉은 천은 소중한 부위를 간신히 가리고 매끄럽게 떨어져 내렸다. 마치 그리스의 어느 조각에 천을 둘러놓은 것 같은 기분. 그녀는 화끈화끈 달아오른 뺨을 가리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소용없었다. 그에게는, 대체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입고 있는 옷이라는 게 저 모양이니. 그는 옷으로 가린 부위보다 드러난 피부가 훨씬 많았다. 그녀의 시야에 완벽하게 각을 이루고 있는 여덟 개의 복근과 뚜렷한 복근이 아무런 방해 없이 깨끗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부드러운 피부 위로 깨끗한 피부를 따라 이리저리 그려져 있는 기하학적인 붉은 문신은 마치 그 자체에서 빛을 뿜고 있는 것 같았다. 바깥은 찬바람이 불고 있는 11월인데, 저런 차림으로 춥지도 않은걸까. 그녀가 작게 의문을 표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기에 생각을 접었다.


 그의 팔과 목을 빼곡히 덮고 있는 화려한 장신구들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그녀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았다. 팔찌 하나, 얇은 줄로 만들어진 목걸이 하나마저 그녀가 지금까지 보아온 장신구의 어떤 것과도 생김새가 달랐다. 철저하게 그녀의 상식을 벗어나는 남자. 그렇다면 정말로—?


 “내 차원이 아니니, 이뤄 줄 수 있는 소원은 한정적이지만…. 뭐, 의외로 간단하군.”

 “소원?”


 자신의 멍한 되물음에 지금까지 쭈욱 찌푸리고 있던 그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한다. 웃는 걸까?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더 없이 아름답다. 짙고 뚜렷한 눈매는 풍성한 속눈썹에 가린 붉은 눈동자 때문에 훨씬 깊어 보이고, 깎은 듯 한 콧날과 날카로운 턱 선은 전체적으로 선이 얇은 그 남자를 훨씬 단단하고 남성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 나는 소환자의 소원을 이뤄주는 신이니 말이다. 자아, 가자.”


 그는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붙들려 했지만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조금 더 빨랐다. 그의 손에서 빠르게 몸을 비껴낸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올려 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아니, 잠깐만, 그렇다면 당신이 제 소원을 들어 준다는 것은 둘째 치고, 소환자의 소원이 무엇인지 먼저 물어보는 것이 순리 아닙니까?”


 그녀가 빠르게 말을 쏟아내자, 마치 애완용 고양이가 발톱을 세우는 걸 지켜보는 사자처럼 나른한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

 “하아?”


 즉답.


 그녀는 얼이 빠진 소리를 내고서는 스스로 입을 막았다. 이런 품위 없는 행동은 아버지께서 질색하시는 일이 아니던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마음을 다잡고 그의 오만한 눈동자와 다시 눈을 맞추었다.


"대체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알고 있단 말이다. 나는 굳이 입으로 말해야 할 정도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불려 나온 것이 아니다. 게다가 신이, 인간의 소원 따위 모른다고 해서야 체면이 서지 않지.”


 나는 그 정도로 한가로이 발걸음을 할 사람이 아니다.


 턱을 치켜들고, 한껏 뻐기듯 말하는 그는 자신을 내려보며 붉은 눈동자를 느리게 깜박였다. 작은 행동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그는 ‘오만’과 ‘거만’이라는 두 글자를 몸에 칭칭 동여 맨 것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재수 없음이 몸에 베어있을 수 있는 건지.


 그럼에도 그의 타고난 거만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입고 있는 특이하고 이상한 옷들처럼, 그에게 완벽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자아, 가자.”

 “어…어째서? 잠깐, 기다—”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녀의 손목은 단숨에 사내의 커다란 손아귀에 붙들려버리고, 그녀가 그에게 뭐라고뭐라고 외치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는, 적막한 연습실에서 서서히 멀어져갔다.

 

*      *      *


“아.”


 그녀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그가 멈춰 섰다. 이미 대부분의 학생들이 돌아가고 난 건물은 텅 비어있었다. 아직 여섯시를 겨우 넘긴 시간이었지만, 땅거미가 짙게 깔려있었다.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한기에, 구두를 꿰어신은 발이 시렸다.


 스타킹에, 양말에, 구두까지 신고도 이렇게 발이 시린데. 그녀는 여태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신’이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춥다.


 자신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에,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그는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보았다. 키차이가 제법 난다. 구두를 신고 있는데도 맨발인 그와 이렇게 시야가 벌어지다니. 키를 비교해보면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저기, ‘신’은 추위를 타지 않는 겁니까?”

“기복적으로 그렇다.”


칼같이 떨어진 즉답. 그녀는 어떻게 이 남자를 구슬릴까 고민했다. 설마 저 차림새로 21세기의 거리 를 활보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게다가 한겨울에, 고작 빨간 천 하나에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그녀는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다. 우선,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를 벗어나기 전에 그의 옷을 갈아입혀야 했다. 일단은 자신이 ‘신’이라고 했으니, 옷을 갈아입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신’이 아니라 ‘길가메시’라는 이름이 있다. 원한다면 ‘길’이라고 불러도 좋다.”


 푸른 눈동자가 몇 번 깜박였다. 그에게 ‘이름’이 있을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애칭’이라는 것을 사용 해 본 적은 그녀의 기억 속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직함’을 소개받았다면, 당연히 그것으로 부르는 게 예의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애칭을 불러도 좋다고 허락한 경우는 없었다.


 그녀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사업적인 관계의 사람들은 많이 만나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버지를 따라 연배도 한참 많은 사람들의 뒤를 쫓아다녀야만 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은….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냐. 자, 불러 보거라. 아니면 발음이 어려운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


 딱딱 끊어지는 발음은 어딘가의 소설책이나 만화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는 아니었다. 오히려 프랑스어나 독일어보다도 훨씬 귀에 쏙 들어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녀는 몇 번, 그의 이름을 입술 안쪽으로 굴려보았다.


 길가메시. 길…가메시.


“소리 내어 발음 해 보거라. 이름 부르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는 거냐.”


 제법 오래 기다린 것인지 그가 발을 굴렀다. 맨발에 닿는 콘크리트에서 찰싹하는 소리가 울렸다. 살과 돌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 그런데도 그는 하나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분명히 시릴 것 같은데.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런데, 춥지 않으십니까?”


 그가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곤란한 질문에, 제법 빠져 나갈 줄 아는구나. 칭찬 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적당히 화제가 전환 되었다면 그거야말로 바라던 일이었다.


 코트의 주머니를 뒤적여,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제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호기심 많은 고양이 같다. 붉은 눈동자를 새침하게 치켜 뜬 폼이, 딱 고양이였다.


“그게 무엇이냐.”


 그녀는 풋, 하고 웃었다. 결국 자신이 작은 기계를 만지작거리는 것에 흥미를 참지 못하고 물어온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면서도 그녀는 적당히 핸드폰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한 남성용 의복을 보여주었다.


“휴대전화라는 겁니다. 그런데, 옷을 이쪽 복장에 맞추어 갈아입을 수는 없는 겁니까?”

“휴대전화?”


 요즘 아이들은 휴대전화라는 말보다 핸드폰이라고 하는 것 같지만. 그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빨간 눈동자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서 자그마한 기계를 받아든 남자는 ‘신’이라는 호칭이 무색 할 정도로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호오…, 특이하군. 이 작은 물건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연결 되어 있다니….”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는 마치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쓰임새를 알아내는 것처럼 말했다. 아니면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한 게 아닐까. 어찌되었든 그는 자신을 ‘신’이라고 했으니까.


“옷을 갈아입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하지만 앞뒤, 전체적인 모양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휴대폰을 다시 자신에게 주었다. 조작법은 모르는 건가? 그녀는 인터넷 페이지를 몇 개 검색해, 가장 평범해 보이는 옷을 골라 그에게 내밀었다.


 생김새를 꼼꼼히 확인해 보던 것은 쓸데없는 짓이 아니었나보다. 옷을 갈아입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며 호언장담한 대로, 그는 손짓 한 번에 옷을 바꾸었다. 까만 와이셔츠에, 커다란 주머니가 달린 짙은 회색의 점퍼. 그리고 화려한 그에게 잘 어울리는 물이 빠진 청바지에 들어간 왁싱은 자신이 보여준 사진과 미묘하게 달랐지만 제법 괜찮았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며 씨익 미소 짓는 그는 칭찬을 바라는 것 같았다. 아까는 고양이 같더니 지금은 커다란 금색 강아지 같다. 그녀는 빙긋 미소 지었다.


“잘하셨어요. 정말로 완벽하군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우고 있던 그의 표정이, 그녀가 말을 맺음과 동시에 찌푸려졌다. 왜 그러지? 그녀가 의아하게 올려보는 사이에 남자는 한걸음 더 성큼 다가왔다. 어라. 그러고 보니 발은 맨발이다. 구두나 운동화, 적당한 것을 찾아 신겨야겠다고 멍하게 생각했다.


“이봐, 소환자.”


 딱딱한 그의 목소리에 자연히 몸이 굳었다. 무엇이 그의 심기에 거슬렸을까. 그녀가 눈치를 살피는 사이, 그는 자신의 턱을 휘어 잡았다. 내리깔았던 시선이 마주쳤다.


“뭘 그리 겁먹고 있는 거냐.”


 얕은 한숨. 그는 자신의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보았다. 노기는 어느 사이에 사라져있었다. 자연히, 굳었던 등도 슬금슬금 제 위치를 찾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펴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위로 올려보고, 아래로 내려보고, 왼쪽으로 보고, 오른쪽으로 본다. 대체 뭐가 저렇게 궁금한 건지 슬슬 짜증이 올라올 무렵, 그가 손을 떼었다.


“발음구조상의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자, 이제 불러 보거라.”


 뭐를?


 그녀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자, 남자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이름. 내 이름말이다. 그녀를 재촉하는 그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기뻐보였다.


“길…가메쉬?”


 그의 눈꼬리도 둥글게 휘었다. 반달처럼 접힌 눈 사이에 비치는 쌍꺼풀이 신기했다. 지금 눈치 챈 사실이지만, 그는 전체적으로 동양적인 선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 봐라. 아주 쉬운 일이지 않느냐.”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자아, 상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볼에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이, 한참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 * *


 그는, 확실히, 정말로 잘 어울린다.


 쌀쌀한 날씨 때문에 입에서 하얀 연기가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세 번째의 한숨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긴 숨결을 따라, 허공에 줄이 갔다. 금방 흩어져 사라져버리지만 한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재미. 평소대로 혼자 하교하는 길이었다면 슬몃 미소 지으며 장난이라도 쳤을 텐데. 그녀는 제 옆에서 걷고 있는 남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놀라운 속도로 인터넷 페이지를 탐독한 그는 ‘완벽하게 이 세계에 적응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네 번째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타오르는 것 같은 금발은 가릴 수 없는 걸까. 그의 화려한 금발과, 요사스러울 정도로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는 분명히 눈에 띄었다.


 거기에 엄청나게 당당한 태도.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유명한 연예인이라도 나타난 줄 아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길거리의 사람들 중 대부분이 그를 돌아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자연히 눈이 끌리는 남자다. 그녀는 힘없이 미소 지으며 그의 등을 눈으로 쫓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자신보다도 한발자국 앞서 걷는 그는 정신없이 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가라앉은 어둠에 네온사인이 켜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거리는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물론 그녀에게는 어제도 보았고, 그 전에도 보았던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 옆에 있는 이 남자를 제외한다면.


 그러나 남자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진 세상일 것이다. 오래간만이라고 했다. 바깥 공기를 쐬는 것은 정말로 오래간만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붉은 눈동자는 어쩐지 쓸쓸해 보이기도 했지만, 저렇게나 화려한 남자와 ‘쓸쓸하다’는 단어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있는 곳만큼 재미있는 건 없구나.”


 어느새 자신과 보폭을 맞춰 걷고 있는 남자는 회색 점퍼를 목 끝까지 잠그고 커다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였다. 추위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행동에 놀랄 지경이었다. 자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놀랐다는 걸 알아챘는지 그가 씨익 웃어보였다.


“주변 사람들과 비슷해 보이는 걸 원한 건 네가 아니더냐.”


 그건, 자신을 위한 배려였을까?


 저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하지만 저 남자가, 자신 같은 걸 배려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소환자라고 부르지만, 마음에 안 들면 없애버릴 것 같은 오만한 태도인데. 그녀는 말끄러미 그를 올려보았다. 회색 점퍼에 반쯤 얼굴을 가린 그도 저를 물끄러미 내려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슬슬 가르쳐 주어도 괜찮을 텐데.”


점퍼에 코를 박고,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던 남자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 끝에 걸린 쇼윈도에서 새까만 정장과 새하얀 드레스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쇼윈도를 따라갔다가,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무엇을? 제 물음에 그가 피식 웃었다.


“네 이름은, 내가 돌아갈 때 까지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냐?”


그리 아끼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녹아내릴 것 같이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손바닥이 머리를 문질렀다.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손만 뻗어 익숙하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무척이나 스스럼없는 행동. 그녀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가 멈추어 섰다. 여전히 한쪽 손은 제 머리위에 있었다. 무겁다. 그리고, 따뜻했다.


그는 제 표정을 보며 키득거리더니 다시 한번 장난스럽게 머리카락을 헝클어 뜨렸다.


“이거, 이거. 소환자가 어리니 별걸 다 가르쳐야 하는구나. 네가 이름을 말하고, 내가 네 몸에 인장을 새겨야 ‘소환’이 완전해진다. 네 자그마한 소원은, 그때야 비로소 이뤄지는 거지.”


아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절차가 필요한지는 모르고 있었다. 애초에 그를 불러낼 수 있었던 이유도 짐작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에게, 자신이 소환한 게 확실하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흘러들어오는 마력이 이렇게나 확실한데, 착각 할 수 있을 리가 있겠냐며.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인장’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원을 이루고, 인장이 새겨진다. 그렇다면 그 후에 그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인장’이란 것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저기, 길가메쉬.”


 자그마한 부름이었다. 제 목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기엔 너무 미약하고, 조그마해서 스스로도 놀라웠다. 이렇게 시끄러운 거리에서, 차들의 소음 속에서 그가 제 말을 들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게다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이렇게나 낯간지러운 일일 줄이야.


 그녀는 그의 행동에 한번 더 놀랐다.


 한발자국 앞서 있던 그가 완전히 멈춰 섰다. 제 쪽으로 몸을 반쯤 기울이고, ‘응?’하고 물어온다. 완전히 제게 귀 기울이는 모양새가 한참 낯설었다. 자신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던 걸까. 주변에서 단짝이라고 말하는 디어뮈드와도 이렇지는 않았다. 사실을 고하자면, 디어뮈드는 여기저기 인기가 많은 타입이라 같이 있어도 늘 주위 친구들과 섞여 잡담을 하곤 했었다. 자신이 불러 세울 때에는 큰 목소리로, 그나마도 옷깃이나 팔꿈치를 잡아당기지 않으면 놓치기 일쑤였다.


“불렀지 않느냐.”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재촉했다. 붉은 눈동자에는 그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잘게 고동쳤다. 물어보려 했던 말들은 하얗게 지워져버렸다. 매끄러운,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따뜻하게 반짝거렸다. 어쩐지, 조금 더운 느낌이 들었다.


“내 이름은…, 아르토리아입니다. 아르토리아, 펜드레건.”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이 대체 뭐가 그렇게 잘한 일인 걸까. 그는 ‘잘했다.’며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젠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말을 시키는 건지, 아니면 말을 시키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는 건지 분간 할 수 없었다.


 그는 호기심이 많았다. 자동차, 쇼 윈도우에 비친 반짝거리는 물건들, 화장품과 옷의 광고, 게다가 길바닥에 붙은 껌 딱지까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가 세 번째로 광고판을 가리키며 물어봤을 때, 그녀는 발을 멈추었다. 작은 나무간판은 익숙했다. 자신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며, 그녀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카페라고 하는 겁니다. 음료수와 간단한 음식 같을 걸 파는 곳인데, 저긴 맛이 꽤 괜찮아서 저도 자주 가곤 합니다.”

“그래?”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저 남자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든 걸까. 아담한 카페의 간판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뒤통수를 올려보며, 이번에는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지 기다렸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사람들이 만든 쓸데없고 아둔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이라며 신경질을 부렸다. 지금까지 만난 것들 중에서 그에게 쓸모 있었던 물건들은 오토바이와, 술과, 섹시한 속옷뿐이었다.


 매끄러운 코트를 따라, 자꾸 흘러내리는 가방이 오늘 따라 더 무겁게 느껴졌다. 하긴. 검도복이며, 자신이 사용하던 수건에서부터 운동화까지 전부 챙겨 들고 나왔으니.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 번째로 스포츠 백을 추켜올렸을 때,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따뜻한 손에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의아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는 신경질적으로 웃더니 제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갔다.


“왜, 또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 게냐.”


 그 짜증스러운 태도 또한, 오만한 남자의 붉은 눈동자와 맞물려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지 못하고 멍청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결국, 앞서 걷던 남자가 멈추어 뒤를 돌아본다. 왜 저를 따라오지 않냐며 고개를 갸웃한 남자는, 그녀가 멍청하게 서 있자 인상을 찌푸린다.


 아니…. 그녀는 고개를 모로 젓고, 어둠에 물든 남자의 화려한 금발에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부드럽고 반짝거리는, 마치 깨어나면 잊혀 질 꿈과 같은 섬세한 아름다움. 그녀는 한 번 더 마음을 다잡고, 그를 따라 걸음을 떼었다.


* * *


인생은 단 한 번뿐.


 그리하여 생은 그 아름다움을 찬연히 빛낸다. 단 한 번도 겹쳐지지 않고, 단 한 번도 같아지지 않는다. 60억 명이라면 그 60억 명 분의 아름다움이 있고 또한 60억 명 만큼의 구제 할 수 없는 쓰레기가 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의 차원을 지배 할 수 있었다.


 하나의 세계를 끌어안고 그 절망도, 그 고통도 쾌락과 즐거움만큼이나 평등하게 받아들인다. 때문에, 그가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자로 잰 듯 정확하고 양팔 저울처럼 공평했다. 절대로 기울지 않을, 완전한 하나의 선線.


 물론, 그것은 ‘그’라는 존재가 부여하는 완벽한 자기중심의 논리였다.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쳐버린다. 그런 것을 행하는 선(線)이 공평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그럼에도 결코 기울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발을 맞추어 걷는 자그마한 여자의 정수리를 내려보았다. 모든 것이 마음대로인 그에게, 사실상 ‘타인’의 존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제가 행동하는 것에 제지를 걸 수 있고 불만을 토로할 사람. 그런 존재가 지금,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


 물론 그가 오래전부터 인식하고 있는 타인들도 있었다. 그와 같은 존재들. 하나의 차원을 지니고, 다스리고, 통치하며 살아가는 자들. 그러나 그들도 지극히 개인적이라 그와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구태의연한 관심은 부담스러울 뿐이다.


 그러니, '타인'이 구축한 세계에서 그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지극히 적었다.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세계만으로도 너무나 완벽했기에, 눈을 돌려 타인의 작품을 감상 할 만 한 아량이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려 놓은 세계라고 하는 도화지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감과도 같은 짧은 인간의 생이 빛내는 순간의 아름다움에 빠져 눈을 떼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불러낸 데에 그치지 않고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던 것을 들쑤셨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포도주의 달콤함처럼 바짝 말라버린 목구멍에 신선하고 견줄 수 없는 달콤함으로 혀를 축이고, 목을 축이고, 그의 갈증을 부추긴다.


 그 한 모금만으로는 만족 할 수 없으니까.


 자그마한 소환자를 내려보는 그의 입가에는 감추지 않은 교활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뒤틀린 웃음은, 그녀에게 요구하는 바가 결코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알려주고 있었지만, 뒤돌아 있는 그녀는 눈치 챌 수 없었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즐거웠다.


 물론 소환 자체를 그렇게 오래 된 일이 아니었다. 몇십 년 전에도 자신을 소환해낸 멍청이는 있었다. 뭐,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칼에 죽여버리고 돌아서긴 했지만. 그러니 현재 그의 행동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현계에 그치지 않고, 자그마한 소녀의 소원을 친히 들어주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그를 아는 이들이라면 필시 자신의 정신 상태와 소환자의 안녕을 걱정할 게 뻔했다.


그가 이곳에서 현신(現身)을 유지하는 것에 필요한 마력은 사실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틀림없이, 이 작은 아이는 감당 할 수 없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제대로 마력패스를 활성화 시킨다면, 자신의 소환자가 한계까지 마력을 소진하고 쓰러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당연히 자신이 요구해야 하는 권리. 그러나 그것을 지불 할 수 없는 미숙한 소환자.


 보통은 계약이고 뭐고 간에 성립 할 수 없는 관계였다. 물론 순수한 그의 이기심이 아니었다면.


 자신과 발을 맞추어 걷는 자그마한 몸은 평균 이상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깨끗하고 뽀얀 피부, 커다란 녹옥의 눈동자, 부드러운 백금발. 그가 있는 세계의 사람들 대부분이 까만 머리에 까만 눈동자인 것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히 진귀한 물건이었다. 전체적으로 색소가 적은 여자는, 겨울에 녹아들 것처럼 투명해보였다.


 실제로도 아까보다 훨씬 투명해진 것 같긴 하지만.


 가벼운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진행시킨 관계는 빠르게 삐그덕 거리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소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하지 않은 소환 탓에 마력패스가 덜거덕거렸다. 쓸데없이 흘러나가는 마력양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으리라. 제 마력을 나눠 주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그는 곰곰이, 제약과 관련된 사항을 떠올렸다.


 그가 들어주는 소원은 정확하게 양측성을 띄운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양쪽에서 오고 가는 것이 똑같아야 자신 쪽에서도 내어 줄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 뭐, 그녀가 원하는 것은 바라는 것조차 하찮은 소원이기는 했지만.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흥미를 이렇게까지 동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치하로 그는 조금쯤 움직여 보기로 했다.


 오랜 목마름 끝에 마시는 물이, 가장 달콤한 법이니까.


 그녀에게 들리지 않도록,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상냥한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아. 인상을 찡그리는 폼이 자신의 미소가 거짓임을 감지한 듯하다. 딱 알맞게, 그녀는 감이 좋았다.


 처음부터 '신'이라는 존재를 경계하는 녀석들은 적지 않다. 갑자기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유혹적인 속삭임을 내미는 이차원의 존재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들이 받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선뜻 그 손을 내민다.


 그런데, 이 여자는—


 녹색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을 손쉽게 알아차린다. 그는 피식 웃고, 입술의 끝에 힘을 주어 매혹적인 곡선을 그려보였다. 더 없이 상냥하게 그리고 더 없이 황홀하게.


 너에게, 최고의 쾌락을 선사하마.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그녀의 얇은 눈꺼풀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살짝 찡그리면서도 밀어내지 않는 것이 귀여웠다. 제 행동에 토 달지 않기로 작정 한 것일까. 그는 싱긋 웃고,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이제 무어라 하지 않는구나. 아니면 고민이 있는 거냐.”


 그녀는 귀여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표현하는 게 서툰 여자다. 생각하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입으로 내뱉는 것을 주저한다. 이러니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지.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슬슬 쓸었다. 그녀의 억눌린 어린 시절은 손쉽게 읽혔다. 두세 번 반복해 볼 필요도 없이 상처투성이인 마음은 단단하게 봉해져 있었다.


“이번엔 또 무엇이 고민인거냐. 너는 신이라는 존재를 우습게 여기는 구나.”

“그렇진 않습니다만….”


 그녀는 말머리를 흐렸다. 하지만 저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은 뻔했다. 제 아비가 뭐라고 타박을 놓을까 걱정되는 것이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자그마한 그의 ‘소환자’는 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아닌 [부탁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그 모습이 퍽 우스웠다.


 영리한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남을 이용해 먹을 줄을 몰랐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렇게 우직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이러니 조금도 나아지질 않지. 그는 혀를 쯧쯧 차며 그녀를 잡아끌었다.


“에스코트는 집 앞까지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녀는 자신의 말에 의아한 표정이다. 그는 빙긋 웃었다. 데이트의 마지막은 키스라고 했던가? 급하게 구겨 넣었던 이 시대의 지식에서 끄집어낸 ‘상식’에 그는 미소 지었다.


애석하게도 자신의 소환자는 이 시대의 상식이 턱없이 부족한 여인이었지.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얇은 손목을 그려 쥐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 제법 귀여웠다. 앙탈을 부려봐야 네가 거기서 거기지.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 당겼다.


“작별 인사다. 내일 다시 오지.”


자신이 키스한 뺨을 가볍게 문지르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빙긋 웃었다. 발갛게 홍조가 인 뺨에 살짝 내리깐 눈동자가 그녀를 훨씬 순수 해 보이게 만들었다. 조금 더 장난을 쳐볼까. 그는 조그만 그녀의 뺨을 지분거리며 고민했다.


 이 이상은 소환자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흐음.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억?!”


생각은 거기서 뚝 끊겼다. 복부에서 전해진 강렬한 통증에, 꼴사나운 기침이 터졌다. 결국 마력의 한계까지 간당거리던 그는 작은 투덜거림만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 * *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말은 이런 때에 쓰는 걸까.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자신의 말을 들은 귀 밝은 ‘신’님께서 또 뭐라고 항의하고 있었지만 그런 건 하등 상관 하지 않았다. 이젠 어느 정도 이 ‘할일 오지게 없는 신’에게 적응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책을 잔뜩 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우와, 이젠 대놓고 무시하지. 이봐, 아르토리아. 적어도 얼굴만이라도 보고 얘기하면 어디가 덧나나?”

“시끄럽습니다. 도와주실 게 아니라면 얼른 사라져버리세요.”


 그가 피식 웃었다. 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대부분 아무렇지 않게 흘려버리곤 했다. 어디선가 불쑥불쑥 나타나서, 제 할 말만 잔뜩 늘어놓고서는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또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이 관계에, 그가 ‘신’이라는 사실조차 까먹을 지경이었다.


“싫다. 내 배를 발로 찬 값은 아~주 비싸단 말이다.”

“설마…,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그녀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제야 그의 모습이 좀 보였다. 가슴 가득 안고 있는 책은 다섯 권 뿐이었지만 제일 얇은 책의 두께가 5cm는 족히 넘었다. 높게 쌓여있는 책 뒤로 보이는 남자는 꽁해 있는 표정으로,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저를 흘겨보고 있었다.


 풋, 하고 웃음이 났다.


 고작 그런 정도에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화가 나 있단 말인가? 정말로 이 남자는, ‘신’이 아니라 유치원 어린애 정도의 정신연령밖에 지니지 못 한 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먼저 잘못한건 그녀가 아니었다. 누가 멋대로 지분거리라고 했던가. 두 번째로 그가 자신에게 몸을 숙였을 때, 정말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발이 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잠깐 동안 꿈을 꾼 것은 아닐까.


 그녀는 그 날 밤,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이불을 덮고 한참을 고민했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헛소리를 들은 게 분명하다고. 하지만 다음날 아침, 그녀가 가방을 챙겨들고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도 없는 그는 그녀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고, 그 다음날부터는 교문에서 기다렸다. 그를 찾는 일은 매번 시끄러운 여학생들의 반응 덕분에 쉬웠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외관은 말짱해 보이니까.


 작게 웃음이 났다. 하드웨어가 완벽하면 뭐해, 소프트웨어가 거지같은데. 외관이 멀쩡해도 내용물이 꽝이면 결국은 꽝이다. 그가 입만 열면 도망갈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은 며칠동안 함께 한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학교에 도착하면 함께 강의실에 들어갔다. 어떻게 자신이 도착하는 시간은 귀신같이 아는 건지,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늘 자신이 도착하기 십분 전쯤에 나타난다고 했다. 신이니까 당연한건가. 그녀는 그를 살짝 올려보았다. 그는 몇 번 겪은 지루한 강의는 적당히 도망가기고 하고, 만만한 교수라고 생각되는 강의는 아예 자신의 옆자리에 책상을 붙여놓고 코를 골며 잠을 잤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니까. 그는 자신이 웃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지만 그는 이미 알아차렸다. 약이 올라 죽겠다는 듯, 그는 이빨을 득득 갈았다.


“또, 또. 도대체 너는 신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아, 도와주지 않으실 거라면 비켜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발끝으로 그를 밀어냈다. 잠시 멈춰 서 있던 그는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늘 그의 옷은 새까만 세미 정장이었다. 이번에 입고 있는 옷은 그나마 봐줄 만했다. 며칠 동안 밖을  쏘다니더니, 어디서 주워 입은 건지 모르겠는 뱀 가죽무늬의 괴랄한 바지를 입고 와 그녀를 경악케 한 게 사흘 전이었다. 그건 도저히 아니라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더니, 다음날에는 이 세계의 라이더 슈트가 마음에 든다며 새까만 슈트차림으로 나타났었다. 너한테 잘 보이려고 특별히 골랐다. 그 말에 차마 무어라 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웃으며 ‘잘 어울린다.’라고 말해 주었었다. 적어도, 끔찍한 뱀무늬 바지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옷은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의 패션 감각은 현대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핀트를 지니고 있는 건지, 아니면 연예인들만 지닌다는 독특한 패션 감각인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던 그녀는 궁여지책으로 도서관에 있던 아무 잡지나 펼쳐들고 그의 코앞에 내밀었다.


[저, 이렇게 입으시면 더 멋질 것 같아요.]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끼그덕 거리는 목소리는 고사하고, 자신이 고른 잡지가 무슨 옷을 광고하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유일하게 그녀가 볼 수 있던 표지에는 멋들어진 필기체로 제목이 씌여있고, 고딕풍의 안락의자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광고들이 다행히 남성 의류 잡지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실수로 여성지나, 소녀들이 보는 월간잡지 같은 걸 펼쳐들었다면 그가 입고 올 의상은 상상하기도 싫었으니까. 그녀는 표지에 앉아있는 모델의 옷차림을 훑었다. 각이 잡힌 회색의 슈트차림에, 무스로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긴 모양새였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패션이긴 하지만, 이정도만 되어준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터였다.


 그는 자신이 펼치고 있는 페이지를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유심히 보는 모양새가 제법 진지했다. 이번에도, 그녀의 ‘부탁’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줄까? 그녀는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난 일주일간 그는, 그녀가 아무리 사소한 것을 말해도 결코 놓치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 모습은, 꽤, 귀여웠다.


 팔 안쪽이 가벼워졌다. 두툼한 옷을 입고 있어서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책의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더 나갔었는지 팔이 찌릿찌릿했다. 자신의 품에 가득 안겨 있던 책을 가져간 그는 한손에 가볍게 끼우고는 다른 손을 내밀었다.


“손.”


빨간 눈동자가 곱게 휘어 있었다. 남자의 속눈썹이 어떻게 저렇게 길까, 의아해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마치 강아지를 부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게 못내 기분 나빴지만 3초 내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성질을 부린다는 건 지난 몇 번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맞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와의 키 차이 때문인지, 그는 손을 툭 떨어뜨리고 있어도 저는 조금 팔꿈치를 올려야했다. 혼자 걸어가는 것 보다, 두 사람이 보폭을 맞추어 걷는 것은 당연히 불편할 터였다.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일이 없으니, 더욱.


 그런데 어째서일까, 고작 일주일이었는데.


 익숙해진 그의 체온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의 손을 잡고 걷는다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누군가와 걸음을 맞추어 걷는다는 게 이 정도로 쉬운 일이었던가. 멈칫거리며, 누군가에게 말을 붙이지도 못하던 자신은 어디로 갔을까.


“아르토리아.”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그가 깍지를 낀 손을 제 앞에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미묘하게 굳은 표정. 그녀는 습관적으로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길가메쉬?”

“너는…, 아니다, 되었다.”


 작게 한숨을 쉰 그가 고개를 돌렸다. 성큼성큼 걷는 보폭이 넓었다. 하지만 깍지를 낀 손은 그대로라, 그녀는 바쁘게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와 자신의 키차이는 명백했다. 그가 한 걸음을 떼면,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세 걸음을 떼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신경 쓸 수 없었다. 단지, 그의 걸음을 맞추어 넘어지지 않도록 신경쓰는데에 급급했다.


 어, 책들은 캐비닛에 넣으시면 되는데! 그녀의 요구에, 뚝 멈춰선 그가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그에게도 학교의 지리는 익숙했다. 그녀가 늘 집, 학교, 도서관만을 오갔기 때문이다. 빠른 보폭으로 캐비닛을 향해 걷던 그가 툭 하고 뱉었다.


“오늘은 데이트다.”

“네?”


 그녀는 멍하게 되물었다. 데이트? 그 말의 뜻은 알고나 있는 걸까. 익숙하게 제 캐비닛에 책들을 쓸어 넣어버린 그가 씨익 웃고 있었다. 과제도 있고, 레포트도 있고, 또 자격증 시험이랑…. 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오만가지 일들에도 ‘신’이라는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한 마디만 꺼내도 역정을 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주일동안 가만히 있어 주었으니, 오늘만큼은 내 마음대로 해야 되겠다.”


 가자.


 그는 집에 돌아가자는 이야기처럼 간단하게 말했다. 깍지 낀 손은 그대로였다. 생각보다 억센 손아귀에,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 * *


손가락 사이가 얼얼했다. 하지만 억지로 끌려나왔다는 불쾌감은 들지 않았다. 단지 꽉 쥐어진 손가락 사이가 따끈따끈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몇 번 비틀거렸더니 그의 걸음은 제법 느긋해졌다. 보폭이 넓어도, 저렇게 느리게 걸으면서도 우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물론 빠르게 걷는 그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세미정장이 불편한지 답답한 셔츠 사이에 손가락을 쑤시는 그는 굉장히 자연스러워보였다. 일에 찌든 회사원 같기도 하고.


 그럼 분명히 낙하산일거야. 나이는 어린데 지위는 엄청 높은 사람.


 자신의 생각에 실없는 미소를 지은 그녀는 다시 걷는 데에 집중했다. 이렇게 해야 할 일을 다 떨쳐버리고 생각 없이 움직인 게 얼마만이더라.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에는 늘 빡빡하게 해야 할 일들을 적어놓은 종이를 손에 쥐고 다녔던 것 같다. 오늘은 여기까지, 복습 후에는 예습. 과제랑 논문은 여기까지, 언제까지, 얼마만큼. 빡빡한 삶과 함께 자신을 돌아보는 일도 잊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 이외에는 생각 할 시간도 부족했으니까.


“오늘은 여기를 들어가 볼 생각이다.”


 그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눈을 간신히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왔던 첫날, 그가 물어보았던 가게였다. 자신이 멈춰 섰던 카페, Valentine. 문 옆에는 조그마한 간판이 귀여운 모양의 종과 함께 달려 있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카페의 간판을 올려보았다. 이 카페를 오는 것은 처음은 아니었다. 정말로 자주 오기는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얘기가 달랐다. 그녀는 늘 바쁜 시간에 쫓겨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커피가 가득 든 종이컵을 들고 나섰었다.


 딸그랑.


 멍하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역시나, 잠시도 기다리지 못한 그가 호기롭게 문을 열어 젖혔다. 크기도 조그마한 종소리는 딱 좋을 만큼 맑은 소리로 딸랑거렸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것이 이 카페에 들어가는 일임을 알았다. 호기심 많은 그녀의 ‘신’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카페에 앉아 즐겁게 떠드는 ‘데이트’를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은 한 번도 겪어 본 일이 없는, 그런 달짝지근한 일상을.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찬바람이 들어 갈 텐데.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며 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안쪽에서도 문이 열린 것을 알아챘는지 ‘어서 오세요.’하는 맑은 목소리도 들렸다. 종업원의 목소리도, 자신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녀에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더욱 이상한 점은, 그가 문을 열고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볼 뿐 재촉하지 않는 것이었다. 성격이 급한 그는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금방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토리아,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냐?”


 한 마디.


 그는 딱 한마디만 했다. 그녀는 그를 올려 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냐’고? 그 말속에 녹아있는 배려가 가슴을 따끔따끔하게 찔렀다. 가족들에게서조차, 그런 배려는 받아 본 일이 없었다.


“싫으면 다른 곳으로 하지.”


 그는 순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제야, Valentine이라고 씌인 나무간판과 세트인 짙은 목재로 만들어진 계단을 볼 수 있었다. 카페 문턱이 높았구나. 익숙하게 드나들던 가게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기도 전에, 제 손은 남자의 커다란 손 안에 잡혔다.


“그럼 공원을 걸을까. 자, 가자.”


 자신이 대답하지 않아도 발을 옮길 거면서도 그는 ‘가자.’라고 말했다. 커다란 손 안에 폭 쌓인 손이 금방 따뜻해졌다. 고작 카페 앞에 도착한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차가운 공기에 홀로 남겨진 손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어도 빠르게 식었다. 다시 만난 그의 체온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아주 오래 전부터 익숙했던 것처럼. 그녀는 그가 잘 아는 것처럼 발걸음을 옮기는 대로 그저 따라갔다.

자신도 공원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는데 그는 제법 익숙하게 길을 찾았다. 어쩌면 그가 이 동네 지리를 더 잘 아는 것은 아닐까. 나뭇잎이 다 떨어진 공원에는 찬바람만 불어왔지만, 몸을 딱 붙이니 그럭저럭 걸을 만 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불어오는 공기가 제법 날카로웠다. 일 년을 꼬박 움직인 태양은 한 해가 끝나간다고 알려주듯이 늙고 지친 모습이었다. 하늘에 뿌려놓은 빛이 거칠었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 사이로 먼 하늘을 올려보았다. 바람이 뺨을 할퀴었다. 몸을 움츠리자,그가 조금 더 가깝게 붙었다. 그녀는 고개만 들어 올려 그를 쫓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익숙한 관계는 오랜만이었다. 그는 제 편의를 봐주었고, 제 말에 귀를 기울였고, 제 의견을 물었다. 춥다하지 않았지만 제 손을 잡아준다. 외롭다 하지 않았지만 저와 발걸음을 맞춰주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제 인생에 이런 사람은 없었다.


“길가메쉬.”


응?


 붉은 눈동자가 곱게 휜다. 그는 눈으로 물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았다. 그 편이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필요한건 소리도 아니고, 온기도 아니었다.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고,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 ‘소원’이라는 것 말입니다. ‘인장’을 찍으면 이루어지는 겁니까?”


 그의 눈동자가 조금 미묘한 색체를 띄웠다. 눈동자로 흘러들어가는 주황색 불빛이, 그의 동공을 흔들어 놓았다. 아니면 정말로, 저 곧은 눈이 흔들리는 걸까.


 걸음을 멈추자 바람의 저항이 심해졌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에도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맞닿은 손바닥이 뜨거웠다.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는, 이 온기면 충분했다.


“미리 찍어 놓는다. 아니, 계속 찍혀 있는 다고 하는 편이 좋겠군. 네 눈에 보이는건 ‘소원이 이루어지고 난 후’다.”

“그럼 지금도 찍혀 있습니까?”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황금색 속눈썹이 가느다랗게 만든 눈동자에 빠진 것처럼 어지럽게 빛을 반사했다. 붉고, 노랗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노을의 색이 흘러넘칠 듯 넘실거렸다.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다. 그러니, 그가 ‘신’임을 부정 할 수는 없었다.


“아직. 보통 소환된 직후 찍어버리곤 하지만…, 어디에 찍어야 할 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바람이 흐르는 소리도, 그 바람에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도 그의 목소리만큼 자연스럽지는 못했다. 자연이 내는 그 어떤 소리보다도 달콤한 목소리에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러면 제가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조용한 두 사람의 사이를 가르는 것은 눈치 없는 겨울바람뿐이었다.


“그렇게도 싫으냐.”


 노을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태양을 등지고 서있었다. 어둠에 잠긴 그의 눈동자가 검붉게 빛났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먼저 질문한 쪽은 그녀였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아니, 몇 가닥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을 때렸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허공에 날리는 머리카락들을 완전히 정리 했을 때에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침묵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수다스럽지는 않아도 자신보다는 훨씬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조용한 그를 올려보았다. 무겁다. 그의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무거웠다. 충동은 갑작스러웠다. 그녀는 그에게서 손을 비틀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마주잡았던 손은 가볍게 풀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하지만 그의 눈이 가볍게 휘는 폼이 제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려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게서 느끼는 감정들이 두려우냐?”


 조용한 목소리는 의문형이 아니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제서야, 손끝이 시리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잡혀있지 않은 손끝이 무척이나 시렸다.


“미리 준비하는 자세는 높이 살만한 것이다만.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귀여운 소환자.”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바닥을 끌어당겼다. 차갑게 곱은 손가락이 그의 부드러운 손에 닿아 딱딱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체온에 닿은 손가락이 아팠다. 그는 가만히 끌어당겼을 뿐인데도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프다. 딱딱한 손가락들이 마주쳐 얼음조각들이 부딪치는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조용히 그가 하는 하는대로 보고만 있었다.


 남자는 신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머리위로 내려앉은 새까만 그림자도,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도 그의 분위기를 더한다. 어슴푸레하게 번져보이는 다 꺼진 노을과 주황색 가로등 불에 비치는 그의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그런 싸구려 불빛을 두르고 있으면서도 남자는 한없이 고고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붉은 눈동자가 말갛게 반짝였다. 그 눈동자는 물어보지 않았다. 단지 차가운 자신의 손끝을 붙잡은 그가 작은 제 손에 뺨을 비비고, 그 안쪽에 입술을 갖다 대는 것을 조용히 지켜 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다시 한 번 손을 빼낼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부드럽게 제 손끝을 잡고, 아프지 않게 뺨을 가져다대었다. 차갑게 식은 뺨과 따뜻한 그의 손 사이에 붙잡혀있는 자신의 손이 어색했다. 눈을 감고 제 손을 오래도록 뺨에 붙이고 있던 그가 살짝 눈을 떴다. 내리 깔고 있는 눈동자 사이로 어지러운 황금색 속눈썹이 노을처럼 번졌다.


 그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했다.


* * *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에만 착용했던 구두는 사무적일 정도로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앞코가 둥글고, 딱 알맞게 떨어지는 굽이 나름대로 편안한. 그녀는 다시 한 번 신발장 앞에 놓여 진 커다란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았다. 낯설다. 행사장에 가는 것도 아닌데 잔뜩 멋을 부린 모양새가 어색했다. 오래간만에 풀어 내린 머리카락도, 허벅지 중간에서 뚝 잘려버린 원피스도 모두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급히 시계를 확인했다. 갈아입을 수 있을 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데이트의 기본은 지각하지 않는 자세라고 했던가. 자신보다도 훨씬 인간적인 예의범절을 떠들어대는 ‘신’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기에 코트와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한손에 쏙 들어오는 자그마한 백은, 정말로, 오래간만에 외출하는 그녀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딱 일주일 전이었다.


 그가 다짜고짜 ‘데이트’를 하자면서 자신을 끌고 나갔던 것이. 결국 그날은 ‘데이트’와 비슷한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공원 입구에서 헤어졌다. 그는 ‘오늘은 여기까지만.’이라고 말하며 공원 앞까지만 바래다주고 사라졌다. 그 자리에 공원이 있는지도 몰랐던 그녀로써는 꽤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어떻게든 집에 찾아 갈 수 있었다. 공원은 집과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었던 걸까. 하지만 그는 다음날에도 또 학교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기다리고 있었다. 화나지 않은 걸까. 그럼에도 그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들이 두렵냐고?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 할 거라고?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그의 말이 콕콕 찔렀다. 학교에서 그와 함께 있는 동안에, 도서관에서 그가 책을 배게 삼아 낮잠을 즐기는 동안에는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말들이 밤이 되면 그녀를 괴롭혔다. 제정신 인 척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딱 일주일뿐이었다

.

“데이트, 해 봐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의 어색함은 그때 처음 알았다. 남자는 저를 보고 있었다. 계속, 계속 보고만 있었다. 얼굴이 화끈해 질 즘이 되어서야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 꼭 저런 얼굴로.


 철컹거리며 닫히는 대문의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구두 굽을 억지로 발꿈치에 끼워 넣고, 코트를 갈무리했다. 남자는 꼭 둘째 날처럼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데이트를 하자 했을 때의 그 바보스러울 정도로 활짝 핀 표정으로. 남자는 저를 향해 걸어왔다.


 어색하다.


 짙은 푸른색의 드레스는 하얀색 안감과 투톤으로, 몸의 곡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재질은 실크 특유의 서늘한 촉감을 가지고 있었다. 요정의 날개처럼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꼬리가 귀여워 마음에 들어하고 있던 옷이다.


 까만 코트를 걸치긴 했지만, 평소보다 얇게 입어서인지 한기가 들었다. 뭐가 좋은지, 그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싱글벙글한 표정을 감출 생각을 않았다. 정말로 좋은가. 심지어 어제는 자신의 데이트 신청이 끝나자마자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총알같이 사라졌다. 대체 저 남자는 뭐가 그렇게 바쁠까.


“손.”


그는 자신에게 요구하는 게 익숙했다. 아니, 누군가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게 습관처럼 당연한 일이기에 몸에 밴 건지도 몰랐다. 그래도 솔직히, 싫지 않았다. 그가 손을 잡아주는 게,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활짝 편 손가락 사이사이의 빈 공간들이 꼭 맞았다. 울퉁불퉁한, 남자의 손가락은 길고 가느다랬다. 그의 손은 자신의 손보다도 훨씬 예뻤다. 못이 박히고, 검을 쥐느라 거칠어진 자신의 손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깨끗한 손은 그녀의 손과는 달리 아름다웠다. 어느 미술관에 전시된 조각처럼 완벽한 손. 그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우고 거리를 걷는 일은 낯설지만 기분 좋은 일이었다.


“오늘은 꽤 솔직하구나.”


 남자는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그녀도 남자를 따라 미소 지었다. 차가운 공기에 기분이 좋았다. 폐 안쪽까지 서늘한 감각이 이렇게 상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정말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그저,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우선은, 여기로 해 볼까.”


* * *


 단조로운 까만색 코트를 벗자, 기대하지도 않았던 귀여운 옷이 트러났다. 푸른색과 하얀색, 투톤의 원피스는 실크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흘러내렸다. 둥그렇게 파인 목이 허전 해 보였다. 가슴에 달린 작은 리본을 향해 푹 파인 선이 가슴골이라도 보일 것처럼 앙증맞았지만, 글쎄. 그녀의 귀여운 몸매는 앙증맞다는 표현이 훨씬 어울렸다.

 까만 구두와 까만 스타킹. 얇은 다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녀에게 이런 가게는 처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서툰 자신의 소환자는 조금 난처한 눈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반짝거리는 쇼 윈도우도, 과한 장식과 넘어질 것처럼 높은 힐도 그녀의 눈에는 다 새롭겠지.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푹신한 보라색의 소파로 이끌었다.


“어차피 그 구두로는 돌아다니지도 못할 게 아니냐. 붙잡아주지 않으면 걷지도 못하면서, 그런 구두는 대체 어디서 난 거야.”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코트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꼼지락 거리는 폼이 익숙했다. 파티나 행사장에서 칵테일을 한잔 들고 벽에 병풍처럼 서 있느라 걸음을 옮길 필요도 없었겠지. 그는 한숨을 쉬고, 가게 안의 물건들을 주욱 훑었다.


 반짝거리며 빛을 반사하는 커다란 스팽클이 달린 신발들은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비즈, 꽃장식, 눈을 찌르는 것처럼 강렬한 원색이나 하이힐도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녀가 집에 돌아갈 때엔 혼자서 걸어야 했다. 걷기 어려운 신발을 신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짙은 남색의 단화를 꺼내들었다.


“신어봐라.”


 앞코가 둥근 신발은 발레슈즈를 닮아 있었다. 발뒤꿈치에는 하얀 방울이 달려 있었다. 귀엽다. 그녀의 푸른 드레스의 한들한들 늘어진 자락과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앞에 신발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주저했다. 잠시 자신을 올려보고, 신발을 내려 보더니 펌프스에서 조심스럽게 발을 빼내었다. 스타킹에 감싸인 발은 작았다. 제일 작은 치수 인 것 같았는데도, 신발은 헐렁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발이 안쓰러웠다. 근육이 제법 붙어있는 종아리는 탄탄했지만, 손이나 발은 살점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 이주 간 옆에서 관찰한 결과, 식사를 거르는 편은 아니었지만 살이 붙는 채질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주인에게 좀 더 작은 사이즈를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다행이 220이 남아있네요. 저희 집에서 제일 작은 사이즈입니다.”


 포장을 벗겨낸 남색의 구두는 반질반질 윤이 났다. 잘 닦은 가죽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자그마한 발을 밀어 넣었다. 신발은 알맞게 맞았고, 그는 불편하진 않은지 가게 안을 한 바퀴 돌아보게 했다. 그녀는 아까보다 훨씬 잘 걸었다.


“이걸로 하시겠어요?”

“그러지. 계산은 카드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카드를 내밀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디서 난 돈이세요? 하고 올려보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우스웠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볼에 발그레하게 핀 홍조가 귀여웠다. 코트를 입어라, 춥다. 그녀는 제 말에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고, 그는 받아든 구두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Valentine. 옆구리에 끼고 있는 손이 잠깐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팔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두 번 물러서지 않았다. 표정에 얼핏, 비장한 각오가 서린 것도 같았다. 그래, 결심을 단단히 해 놓거라. 그는 그녀의 팔을 잡은 채로 카페 안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자그마한 종소리는 변함없이 경쾌했다. 일주일이 지났건만, 그녀는 그 날의 시간을 뚝 잘라 가위로 오려 지금의 시점에 갖다 붙인 것처럼 굳은 표정이었다. 한숨을 쉬고, 자신의 팔에 얹힌 그녀의 손등을 쓸었다. 거칠다. 여자의 손이라는 것을 떠나서 그녀의 손은 고생한 손이었다. 오래도록 연필을 붙잡고, 칼을 붙잡고 노력한 손이었다.


“뭘 마실래?”

“어, 저는 그냥 밀크티로….”


 그는 메뉴판을 올려보았다. 종업원이 말갛게 웃으며 ‘늘 드시던 거네요. 오늘은 애인분과 함께 오셨어요?’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자주 들린다고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나보다. 그녀는 또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소리에 웃음이 났다.


“아직은 아닌 거겠지? 나는 라떼.”


 이번에도 그가 꺼내는 골드 카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미심쩍었으나, 토를 달지는 않았다. 의심하는 눈초리가 귀여워 웃음이 났다. 고작 2주였는데, 정말로 자신을 즐겁게 해 주는 소환자의 존재가 아까웠다. 이대로 헤어지기는 서운하다만.


 자리를 고르라 했더니, 그녀는 장식용 커튼이 예쁘게 묶여 있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핑크색 꽃무늬 커버가 씌인 소파는 여자들의 취향일까. 그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반대편에 앉은 그녀는 살짝 소파를 쓸어 보고 있었다. 여자는 여자라, 이런 게 마음에 드는 걸까. 말만 하면 수백 개라도 가져다 줄 수 있는 ‘신’이 눈앞에 있는 데에도, 2주간 그녀는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았다.


 아기자기하게 놓여있는 화분들과 작은 소품들은 손바닥 반틈도 안되었다. 물론 그녀의 손바닥이라면 꽉 차겠지만. 그의 눈에 밟으면 으스러질 것 같은 물건들은 도무지 무슨 쓰임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다르게 그녀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한쪽에 놓인 작은 메뉴판 앞에서 나른한 향을 피워 올리는 향초도, 그 향초에 쌓인 달걀모양의 덮개도 신기한 듯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식탁보의 레이스를 눈으로만 훑고 있을 때, 두 잔의 따뜻한 음료가 나왔다. 두꺼운 머그잔에 든 밀크티와 라떼가 두 사람 앞에 놓여졌다. 끝에 하트모양의 고리가 달린 은수저와, 고양이 무늬가 찍힌 나무수저도 나란히 놓였다. 그녀는 나무 수저의 고양이 무늬를 만지작거리다 설탕을 넣고 밀크티를 휘저었다.


 눈꼬리를 휘고, 그는 그녀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도대체 이 카페에 단골이라면서 왜 앉아서 마셔 본 적은 없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녀에겐 그럴 주변머리도,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다는 걸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


 아버지라는 존재를 조금만 더 일찍 포기했어도 이 정도까지 정에 굶주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차며 밀크티를 호호 불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아래를 향해 있기 때문에, 내려 깐 속눈썹 사이로 비치는 녹색 눈동자가 맑았다. 가느다란 손목에 머그잔이 무거워 보였다.


 2주 만에 처음 보는 풀어 내린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목덜미를 감싸고 툭 튀어나온 쇄골을 지나 가슴께에서 뚝 끊겼다. 살랑살랑 흩어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손에 닿으면 사라질 것처럼 투명해서 섣불리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그는 대신 그녀의 손을 끌어 당겼다. 탁자 위에 길게 놓인 그녀의 손을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잡고, 다른 손으로 천천히 그림을 그렸다.


 둥그런 곡선이 두 개, 뾰족한 끝이 하나.


“이 세계의 사랑을 표시하는 인장이라고 했나.”

“하트…모양, 말씀입니까?”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글동글한 눈동자에 의문이 가득 들어 있는 게 귀여워서,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이대로 자신이 사라져버린다면, 이 조그만 소환자는 어떻게 될까. 물론 그녀는 그녀답게, 묵묵히 살아남겠지만. 그는 자그마한 손을 꾹 쥐었다. 그녀가 원하는 소원, 그것을 오늘 들어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가 소원을 들어주고 난 후에는, 이 세계에 더 이상 존재 할 수 없겠지만.


* * *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섬세하게 움직였다. 알아보기 어려운 찌그러진 하트 모양에 웃음이 났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렇게, 이렇게 그리는 겁니다. 그녀는 그의 손바닥을 탁자 위에 눌러놓고 넓은 손바닥 위에 그림을 그렸다. 둥글게 시작해서 뾰족한 끝으로, 그리고 반대쪽도 똑같이.


 그는 둥근 두 개의 반원을 그리고, 아래 뾰족한 곳을 따로 그렸다. 누가 하트를 그런 식으로 그려요. 그녀가 웃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그린다고? 다시 물어보는 폼이 세 살박이 어린아이 같아서 귀여웠다.


“이렇게, 둥글게 시작해서 끝으로….”


 커다란 손바닥을 도화지 삼아, 손가락을 따라 내렸다. 부드럽다. 따라 그리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이 거칠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운 손이었다. 신은 다른 걸까. 아니면 자신이 또래 여자애들에 비해 손을 너무 험하게 사용한 걸까. 하긴, 그녀는 최소한의 화장조차 할 줄 몰랐다. 로션이나 스킨을 바르는 것 정도는 하고 있었지만 보기만 해도 반짝반짝거리는 화장품들은, 글쎄.


“아시겠습니까?”

“그래, 이렇게, 이렇게—라는거지.”


 그는 자신의 손바닥에 깔끔하게 두 획을 그려보였다. 이런 것도 습득이 빠르다며 칭찬 해 주어야 하는 걸까? 고민은 금방 해결되었다. 그의 붉은 눈은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잘했어요.”


 눈을 감고, 자신의 손길을 느끼는 남자는 기분 좋아보였다. 손이 짧아 몸을 반쯤 일으켜야 했지만 깜짝 놀랄만큼 부드러운 남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건 의외로 기분 좋았다. 그는 이런 기분으로, 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걸까.


 그의 헤어스타일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을 떼어낸 그녀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남자의 머리는 반쯤 뒤집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하나 가르쳐 주도록 할까.”


 에에, 저 머리카락, 정돈 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그는 자신의 상태를 볼 수 없어서 모르는 걸까?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올려보았다가 도로 시선을 내렸다. 닿는 것만으로 부드러운 기분이 드는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 위에서 거침없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나의 세계에서 초승달 모양은 나를 상징하는 표시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반월을 그렸다. 그리고 그 반월을 감싸듯 조금 더 큰 반월을 그린다. 반월의 가운데에는 짧은 선이 하나 끼여들어 있었다. 정확한 모양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두 개의 반원이 서로를 감싸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반원에 하나의 획을 추가한 게 두 번째 획이다. 풍요나, 아름다움이나, 뭐 그런 뜻도 있지만 가장 흔한 뜻은 ‘사랑’이라는 거지.”


 그녀는 아리송한 기분으로 작은 손바닥을 내려 보고 있었다. 조르르, 윤기 나는 손톱이 박혀 있는 그의 손가락이 이해됐냐는 듯 그녀의 손바닥을 톡톡 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게 컸다. 아마 자신의 엄지발톱이 그의 새끼손톱만한 건 아닐까. 그건 좀 과장이 심할까. 하지만 정말 그와의 차이는 이런 사소한 것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대답이 없자,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좁은 손바닥이 꽉 차도록, 뚫린 부위가 조금 밖에 남지 않은 커다란 원을 그렸다. 손가락과 손가락의 사이, 손목과 엄지손가락을 지나. 커다란 원은 그가 그렸던 두 개의 그림을 감싸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렸던 것들이 전부 하나의 ‘인장’이였던 걸까?


“이건 여기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던데.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다르게 해석하면 ‘받았다’고도 할 수 있지.”


 입매가 살짝 치켜 올라가있다. 기분이 좋아보였다. 왜? 그가 지금 자신에게 알려주고 있는 문장은 중요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기억해야만 하는 걸까. 자신과 눈이 마주친 그가 피식 웃어보였다.


“심각하게 생각 할 필요는 없다. 그게 너에게 찍힌 인장이라는 얘기다. 내 문장.”

“…찍혀있다고요?”


 그녀가 반문했고, 그가 긍정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소원이 이루어지고 나면 ‘보인다.’고 했는데, 설마 이상한 곳에 찍어 놓은 것은 아니겠지. 아니, 이상한 곳에 찍어 놓은 것도 문제지만 사람들이 다 보이는 부위에 찍어 놓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아버지께서 문신이나 하고 다니는 줄 알면 그 다음은 수습 불가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대체, 어디에 새기신 겁니까?”

“왜. 궁금 하느냐?”


 교활한 웃음이 얄미웠다. 제가 속이 탄다는 것을 알고 능글맞게 대답하는 폼에 등짝이라도 한 대 찰지게 내려치고 싶었다. 실제로 수업시간에 늘어지게 코를 골며 자는 그의 등판을 시원하게 내려친 일도 두어 번 있었다. 그게 고작 2주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니, 아직도 꿈같아서 믿기지가 않았다. 시간이, 이렇게 금방 가는 것이던가.


“잘 생각해 보거라. 내가 너에게 인장을 새길 때 네 반응이 신통치 않았었다만.”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의 툴툴거리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그를 제일 화나게 했었던 사건을 꼽자면, 물론 하나밖에 기억 안 나기는 했지만, 뺨에 키스했다고 발로 찼을 때 밖에 없었다. 그는 이것 외의 일들은, 이상하게도 화내지 않았다.


 자신이 제법 등짝을 아프게 후려쳐도, 종종거리다 그를 놓치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려도, 도서관에 자고 있던 그를 혼자 두고 나와도. 신나게 투덜거리며 그녀를 쪼아대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는 했었다. 정말로 기분 상해했던 것은 그 일 뿐이었다.


“서…설마,”


 그녀는 얼굴에서 핏기가 하얗게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거렸다. 뺨에 새겨진다면 빼도박도 못한다! 그녀는 하얗게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주먹을 쥐고 인내심을 다해 차분하게 물었다.


“그 인장이라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이는 겁니까?”

“당연하지.”


 그의 칼 같은 대답에,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 *


 신이 직접 찍은 인장인데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게 좋지 않으냐. 그는 지금 열 번째로 똑같은 소리를 중얼거렸고, 그녀는 열한 번째로 단호하게 잘랐다. 전혀, 절대, 정말로 좋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거절이 기분 나쁜지 손도 잡지 않고 한걸음 멀찍이 떨어져서 투덜거렸다.


 카페의 밖은 추웠다. 혼자 잘만 걸어 다니던 게 2주 전이었는데. 그 사이 온도가 뚝뚝 떨어진 것도 아닌데 옆구리가 시렸다. 몸에 열이 반으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그는 저를 흘끗 돌아보더니, 흥, 하고 콧바람을 끼고선 걸음을 빨리한다. 유치해서 못 놀아주겠다고 말하면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투덜거릴 텐데, 지금 그가 인장을 옮겨주지 않을까봐 섣불리 화를 돋울 수도 없었다.


 그녀는 쪼르르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얼굴은 안 된다. 아버지에게 들킬 부위는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팔에 팔짱을 끼웠다.


“정말로 옮겨 주시지 않으실 겁니까? 뺨은….”

“뺨이 아니면 어디라도 상관없는 거냐?”


 어라.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낯설었다. 붉은 눈동자가 평소의 반짝반짝함과는 다르게 낮게 떠 있었다. 그의 이렇게 진지한 목소리는 오래간만이라, 그녀는 ‘발바닥이요!’하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 외에는 별로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몸에 ‘남긴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게다가, 내가 소원을 들어주는 경우는 지극히 적다. 문장이 평생 몸에 남는 것도 지극히 적은 경우란 말이다.”

“소원을 이뤄준 사람들은 다 남는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까 그렇지. 투덜거림에 섞인 그의 대답이 귀여웠다. 자신은 그가 소원을 들어준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건가. 발걸음이 멈췄다. 조금 가쁘게 쉬던 숨이 편안해졌다. 그의 보폭을 따라가려면, 그녀로서는 아무래도 발걸음이 힘겨워 질 수 밖에 없었다.


“평생, 이 아니라 내 마음이 바뀌면 지워질 수도 있다. 물론 네 소원이 그거라면 인장을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다.”

“…….”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가깝다. 고개를 한껏 들어 시선을 맞추지 않아도 될 만큼 그가 허리를 숙여주었는데도 불편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그녀는 시선을 비꼈다. 하지만 정말로, 그에게 빌어야 할 소원 따위는 없었다. 생각나는 것도, 생각 해 본 것도 전부 자신의 힘으로 이루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이었다.


“아까 가르쳐 준 내 문장을 기억하고 있느냐.”


 대답대신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는 자신이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더니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려보아라. 특유의 고압적인 말투도 이제는 귀에 익어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손바닥 위에 작은 반원을 그렸다.


“초승달은 나를 의미한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차가워서일까. 따뜻한 손바닥을 도화지 삼아 간단한 일을 하고 있는데. 기분이 이상한 것은 그가 답지 않게 가라앉아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추워서일까.


“이게 한 획이다. ‘사랑’외에도 풍요로움이나 그런 걸 의미한다고 했지.”


 제 손가락이 몇 번이나 삐뚤빼뚤한 궤적을 그렸는데도 그는 차분하게 바라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찬바람에 발갛게 쓸려있었다. 11월은 춥다. 그는 다음 획을 그리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재촉하지 않았다.


“너는 네 생각보다 훨씬 예쁘게 생겼다. 그러니 사람들과 대답 할 말이 없으면 멀뚱히 있지 말고 미소라도 지어줘라. 눈이 마주치면 웃어줘도 된다.”


 물론 시정잡배같은 놈들이나 사내새끼들한테는 안 된다. 그의 답지 않는 잔소리는 물가에 애를 내놓은 아버지 같아서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그는 잔소리가 많았다. 이거해라, 이거 하지 말아라.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여기도 들어가고 저기도 들어가고. 전부 호기심이 많은 그의 순수한 요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녀를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뭐, 연애 같은 것도 좀 해보도록 해라. 남들에게 닿는 걸 주저해봤자 껍데기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제법 아는 척 하는 그의 말투에 웃음이 났다. 신은 다 이런 걸까, 아니면 그만 이런 걸까. 그는 자신의 얼어붙은 손끝을 감싸 쥐려는 듯 손을 움찔거리더니, 다시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녀를 위해 하늘을 향해 쫙 펴고 있는 손은, 여전히 그대로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네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냥 좀 포기하고 살아도 괜찮다. 네 인생이니, 조금 더 네 멋대로 즐기는 것도 필요하다는 거다.”


 쓴웃음이 번졌다. 정말로,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녀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의 커다란 손은 자신의 손과는 달리 공간이 부족하지 않았다. 세 번째의 획. 마지막으로 커다란, 한쪽이 뚫린 원을 그리는 그녀의 손끝은 이전만큼 떨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떨리지 않음에도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신이 아니라, 손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그가. 그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딘지 쓰고, 한참 복잡해 보이는 미소가.


“이것으로 소원은 이루어졌다. 다시 한 번 알려주마.”


 그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부서지고 있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현실감이라고는, 맞닿은 손끝에서부터 전해오는 온기뿐이었다. 반짝거리는 금색의 가루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아직 공원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그가 자신의 손바닥을 끌어가는 것을 보며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도 좋다 하지 않았느냐.”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그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오늘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목소리였다. 어쩐지 배신감이 들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했으면서, 그 후에 돌아간다고 했으면서. 인장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그는 저 반짝이는 금가루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나의 인장은, 곧 신의 사랑을 받았다는 말이다.”


 손바닥 안쪽에서 전해진 열기가 뜨거웠다. 그가 입을 맞춘 자국이 타는 것 같았다. 안녕, 아르토리아. 나의 귀여운 소환자. 그의 눈꼬리가 곱게 휘었다. 입술도 웃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빠르게 바람에 흩어지는 그의 형체를 지탱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한마디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바람은 그의 흔적 자체를 지워버렸다.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새하얗게 식은 손등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가 쥐고 있던 손. 그가 입맞추었던 손바닥 안쪽이 아직도 뜨거웠다. 그의 열기가 남아있다. 적어도 그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그녀는 천천히 손을 뒤집었다.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표식 정도는 남아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Epilogue



 신의 사랑은 쓸데없는 것이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오늘만 세 번째 샤워하는 것이었는데도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아예 욕조에 물을 받았다. 따끈따끈한 김에 기분 좋았던 것도 순간이었다. 디어뮈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떠오르자마자 미간이 확 구겨졌다.


‘잘생긴 애인은 어디 간 거야, 아르토리아?’


 물음은 가벼웠으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묵직해졌다. 순전히 저를 생각한 인사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조퇴라는 것을 해 보았다.


 그가 없어지고 꼭 한 달째였다.


 속이 갑갑하고 몸이 무거워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았지만, 스트레스성이라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다. 그가 자신과 함께했던 것은 고작 2주뿐이었다. 달짝지근한 이야기를 들었던 일도, 기억에 남을 만큼 행복했던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피곤한 걸까.


 눈 사이가 아팠다. 물이 차갑게 식었다.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은, 단지 차가운 피부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수증기가 가득한 공기도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거나 빨리, 몸에 걸치고 싶었다.


 차가운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가 떠난 뒤에는, 더욱.


 샤워커튼을 젖히고 나온 그녀는 갈아입을 옷이 밖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욕실을 벗어나는 동안 몸이 차갑게 식는 걸 원치 않았다. 그녀는 행거에 걸려 있던 타월을 끌어당겼다. 하얀 타월은 약간 축축했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 했다. 바깥에 뽀송뽀송한 수건도 준비해 두었으니 몸이 따뜻해 질 때까지 조금만 참으면 되었다.


시선이 멈췄다.


 분명히, 차갑게 식은 몸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수건을 두르려고 몸을 움직이던 참이었다. 툭—하는 소리가 발치에서 울렸다. 그제야 자신이 수건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이 아까웠다.


 그녀는 천천히 거울에 다가섰다. 헛웃음이 났다. 이러니, 찾을 수 없던 것도 당연하지. 그는 분명히 마음대로 찍었다고 했다. 인장을 옮겨 찍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차가운 손을 들어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문질렀다. 물방울이 맺힌 거울이 조금 더 깨끗해졌다. 몸을 돌렸다. 하얗고 매끄러운 등이 거울에 비쳤다.


 정신없이 하나도 없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발이 움직였다. 걸음을 옮기고, 비틀거린다. 욕실의 습기 찬 바닥에 미끄러질 뻔했지만 잠시 휘청거린 그녀는 다시 발을 움직였다. 샤워하기 전에 문 앞에 준비해 두었던 커다란 수건을 집어 들었다. 물기를 닦을 필요도 없었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공기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방안에는 책상과 침대, 작은 화장대와 전신 거울 하나뿐이어서 휑할 정도였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가쁜 숨을 골랐다. 샤워를 오래 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다른 묘한 흥분이,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거울에 시선을 고정 한 채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거기에, 확실히 있었다. 곧은 척추가 움푹 들어간,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에. 남들의 눈에 띄지 않을 그 자리에, 신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가.


“하, 정말로….”


 눈앞이 핑 돌았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기운이 왈칵 솟구쳤다. 그게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간질거리더니 결국 얼굴을 타고 눈에 고였다. 뜨끈뜨끈해진 눈이 고장 난 것처럼 아렸다. 뺨이 축축했다. 아무것도 없는 발등에 차가운 물이 툭 떨어졌다. 처음에는 머리카락에서 닦아내지 못한 물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와 헤어진 그날, 집에 돌아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울을 확인한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었다.


 몸을 씻었기 때문이 아닌, 확연히 다른 이유로 얼굴이 축축했다. 이건 반칙이야. 당신은 반칙이라고. 입술 사이로, 욱— 우욱— 욱—하고, 흐느낌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이 흘러나왔다. 어깨가 덜덜 떨렸다. 자신의 등이, 무거웠다. 그녀는 스르륵 주저앉았다. 발등으로 떨어진 눈물이 차가웠다.


 이 등에 지고 있는, 그의 사랑을 받은 흔적이 너무나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End

















안녕하세요, 레즐리입니다!

우선 이 글을 공개하도록 용기를 주신 쏠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쏠아 사랑해>33<


3년이나 지난 원고를 공개하려니 많이 쑥쓰럽네요.

그래도 잊지 않고 절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물론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금검을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공개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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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책들도 공개하고 싶은데 전부 수위본이라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네요

+2. 지금 보니까 왤케  고치고 싶은 데가 많죠 글 처음 쓰기 시작할 때여서 그런가봐요 데굴데굴데굴

+3. 왕님은 멋지고 아르토리아는 예브다 그것이 진리다 이런 맘으로 썻다네여

+4. 이 책은 제 책에서 어쩌다 한번 나오는 열린 결말입니다 이후에 길과 아르토리아가 다시 만나는지  어떤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5. 령주는 역시 길가메쉬의 령주를 가져다 사용했습니다. 마스터 아르토리아의 령주는 하트가 그려져서 남사스러웠다고 3년 전의 제가 말하네요. 지금은요? 아 귀여우니까 써줄 수 있어<이런 느낌입니다







레즐리Lesely Christmas=체리크렉Cherry Crack 마약처럼 중독시킬 수 있는 글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Miss, 크리스마스라고 불리고 싶었던 라스트네임은 잊혀진 지 오래. with all my XO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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